초·중·고등학교 내내 축구만 하다가 부상이나 상급 학교 진학 실패로 원치 않게 축구화를 벗어야 하는 이들이 참 많다. K리그 입성이라는 좁은 문을 뚫기도 힘들뿐더러, K리그에서의 주전 경쟁 또한 상상을 초월한다. 많은 이들이 축구선수의 꿈을 꾸다가 중도에 포기하고 좌절한다. 나에게도 이따금씩 “학창시절 내내 축구만 하다가 부상을 당해 이제 꿈을 접어야 한다”면서 “도대체 앞으로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고민을 토로하는 이메일이 온다. 하지만 꿈이 물거품이 됐다고 해 좌절할 이유는 없다. 여기 인간승리의 주인공 이야기를 통해 좌절하고 있는 이들이 훌훌 털고 일어나 새로운 꿈을 향해 달려 나가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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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재는 통진종고에서 잘 나가는 축구선수였다.

전국을 제패한 통진종고의 주장

이중재는 강화도 길상초등학교 분교 3학년 때 축구를 시작했다. 공부와는 담을 쌓았던 그는 쉬는 시간마다 운동장으로 달려가 공을 찼고 이 모습을 지켜본 체육선생님은 “공부보다는 축구에 재능이 있으니 한 번 본격적으로 시작해 보라”면서 본교로 가길 제안했다. 그렇게 이중재는 길상초등학교 본교로 전학해 축구선수의 인생을 시작했다. 공부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참 좋았다. 물론 어머니의 반대가 극심했다.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어머니는 이중재에게 이런 말을 했다. “중재야, 엄마는 못 배운 게 한이다. 뭘 해도 자신감이 없어. 축구는 취미로 즐기고 공부를 하는 게 어떠니.” 하지만 이중재의 눈에 보이는 건 오로지 축구공뿐이었다.

초등학교에서 두각을 나타낸 그는 김포 통진중학교에 진학해 명성을 날린 뒤 통진종고에 입학했다. 대회에 나설 때마다 그와 경쟁하던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서울공고 안정환이었다. 그는 안정환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의 실력을 갖추고 있었다. 그가 이끌던 통진종고는 무적이었다. 이때까지 변변한 대회에서 우승 한 번 기록하지 못했던 통진종고는 전국중고축구선수권대회와 남녀중고연맹전에서 우승을 차지하면서 전국 최강으로 등극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부상을 당해 발목뼈가 13조각으로 으스러지는 중상을 입었던 그는 이를 악물고 재활에 매달려 이듬해 화려하게 돌아왔다. 팀을 전국대회 우승으로 이끌었고 고등학교 3학년 때는 주장 완장을 차고 그라운드를 누볐다. 물론 공부는 뒷전이었다. 시험 시작 5분 만에 찍고 나오는 걸 자랑삼아 이야기하며 전교 꼴찌를 놓고 다투던 학생이었다.

그는 전국고교선수권 결승전 대역전 우승을 이끌며 경기도지사로부터 최우수선수상을 받는 등 실력을 인정받아 1994년 축구특기생 자격으로 홍익대학교에 입학했다. 지금이야 체육특기생들이 관련 학과에 입학하는 게 보통이지만 당시에는 학과를 선택할 수가 있었다. 이중재는 전공수업을 듣는 조건으로 건축학과에 입학했다. 축구밖에 모르던, 그의 말대로라면 ‘꼴통’이 졸지에 공부 깨나 해야 갈 수 있다던 홍익대학교 건축학과 학생이 된 것이었다. 이중재는 당시를 회상하며 이런 말을 했다. “공부를 안 해도 아무 문제가 없었어요. 우리의 세계에서는 오로지 축구를 잘하는 게 가장 인정받는 일이었으니까요.”

‘PARADISE’를 몰라 미팅을 못한 대학생

하지만 대학 생활에 빠져 있던 1학년 때 충격적인 일이 벌어졌다. 고등학교 때 다쳤던 발목을 다시 다친 것이다. 핀을 13개나 박았던 그 부위를 또 다치게 돼 더 이상 축구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이때까지 10년 넘게 축구 하나만 보고 살아온 이중재에게는 사형선고나 다름 없는 일이었다. 막막했다. 축구선수의 꿈을 접게 된 그는 방황하기 시작했다. 더 이상 그는 축구선수도 아니었고 그렇다고 평범한 대학생도 아니었다. 남들은 다 유창한 영어 실력을 자랑하는데 이중재는 알파벳도 제대로 몰랐다. 그는 당시를 회상하면서 “죽고 싶었다”고 했다. 할 수 있는 건 축구밖에 없던 그에게는 축구를 그만둔 1994년 8월부터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다.

고등학교에 다닐 때 처음으로 자기 이름을 영어로 써 봤을 정도로 공부와는 담을 쌓고 살았던 그는 축구를 그만둔 뒤 현실의 벽에 부딪혔다. 대학교에 들어와서 처음으로 ‘굿모닝(Good morning)’을 영어로 썼을 정도였다. 친구들이 밥을 먹은 뒤 “더치페이 하자”고 했는데 이게 무슨 뜻인지 몰라 가만히 눈치를 보다가 각자 지갑에서 돈을 꺼내는 모습을 보고 따라한 적도 있었다. 여대생들과 미팅을 하기 위해 신촌으로 갔을 때는 영어로 된 간판을 찾지 못해 약속 장소를 수십 번 돌다가 결국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간 적도 있었다. 친구들이 “파라다이스 커피숍으로 오라”고 했는데 영어로 써 있는 ‘PARADISE’ 간판을 읽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대문자와 소문자도 구별하지 못하는 그가 ‘PARADISE’를 읽을 수 없는 건 당연했다.

대학교 1학년을 마친 그는 곧바로 군대에 갔다. 어차피 학교에 남아 있어봤자 시간 낭비라는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군대에서 제대한 뒤 다시 복학했지만 도무지 수업을 따라갈 수가 없었다. 학원에서 중학교 과정을 들어야 했다. 건축학은 적성에 맞지도 않았다. 그러다가 운전면허나 딸 생각으로 면허시험장에 갔다가 인생이 달라졌다. 시험장에서 일하던 여성에게 첫 눈에 반한 것이었다. 이중재는 이 여성에게 구애를 했고 군 제대 후 하는 일 없이 놀던 그에게 이 여성은 “공인중개사 시험을 보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이중재는 이 여성의 마음을 사로잡기 위해 이때부터 물 불 가리지 않고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에 들어갔다. 이중재의 마음에 감동한 그녀는 결국 마음을 열었고 공인중개사 시험을 도왔다. 이중재는 이렇게 말했다. “여자친구에게 먹고 살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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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재 변호사가 춘천소년원에서 특별강연회를 개최한 모습.

법무사 시험에 수석으로 합격하다

공인중개사 시험 준비를 위해 학원에 등록했지만 기초가 약해 이해할 수가 없었다. 결국 이중재는 학원을 그만두고 독학으로 공부를 시작했다. 아버지가 담배 심부름을 시키시면 ‘대리인’을 떠올렸고 담배를 살 때는 ‘매매행위’를 연상했다. 실생활과 연관해 이론을 적용시키면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독학 4개월 만에 1999년 공인중개사 시험에 합격한 그는 시험과목 중 민법이 무척 재미있게 느껴져 곧바로 법무사 시험을 준비했다. 다니던 대학교를 자퇴하고 2000년 방송통신대 법학과에 입학하면서 곧바로 신림동 고시원으로 향했다. 여자친구가 두꺼운 민법책 한자 아래에 일일이 독음을 달아주면서 도왔고 옥편 찾는 법도 알려줬다. 너무 어려운 한자라 이해하지 못할 때면 PC방에 가 한글로 타자를 치고 이걸 한자로 변환해 자기가 짐작한 한자가 맞는지 확인하기도 했다.

한자가 눈에 들어오자 공부에 가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때까지 책상에 앉아본 적이 없는 그에게 하루에 12~13시간씩 책상에 앉아 있는 일은 지옥이나 마찬가지였다. 6개월 동안 밥 먹고 책상에 앉아 있는 게 너무 힘들어 아버지를 찾아가 신세한탄을 했다. 그러자 초등학교밖에 나오지 못해 농사를 짓는 그의 아버지는 현답을 내려줬다. “아침 5시에 일어났을 때와 아침 8시에 일어났을 때 밭 가는 양을 비교해 보면 별 차이가 없다. 중요한 건 얼마나 오랜 시간 매달려 있느냐가 아니라 얼마나 효율적으로 일을 하느냐는 것이다.” 이중재는 무릎을 쳤다. 그리고 자신에게 가장 효율적인 공부 시간은 7~8시간이라고 판단하고 이 시간 동안 집중해서 공부를 했다. 스트레스를 받으면 컴퓨터 게임도 하고 밖에 나가 공도 찼다.

그는 결국 2002년 불가능할 것만 같던 법무사 시험에 합격했다. 그것도 수석합격이었다. 알파벳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던 그가 법무사 시험에 수석합격하는 믿기지 않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법무사 시험을 준비하면서 병행했던 사법고시를 반드시 통과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사법시험 1차에서 불합격했던 그는 법무사 수석합격생이 사법고시에 떨어졌다는 소리를 듣는 게 싫어서 더 악착같이 매달렸다. 그는 또 “법은 답이 없어서 좋다”며 “그래서 상대와 치열한 토론도 가능하다. 저마다 나름의 논리로 타당성을 증명하는 게 무척 재미있다”고 법에 큰 흥미를 느꼈다. 하지만 주위의 반응은 싸늘했다. “개나 소나 사법시험 준비한다”고 비아냥거렸다.

영화 같은 사법시험 합격

이중재에게는 영어가 가장 취약했다. 대학교 입학 때까지 알파벳도 제대로 몰랐던 그가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매달려도 사법시험에 필요한 영어 실력을 갖추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이미 2001년부터 2003년까지 사법시험에서 40점도 안 되는 영어 점수로 과락을 면치 못했던 그는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좋은 대학 나온 친구들도 70~80점 맞는데 알파벳도 모르던 내가 40점 맞으면 잘한 거다.’ 그러면서도 독기를 품었다. 2004년부터 영어시험이 토플로 대체되자 이중재는 아예 토플 교재 한 권을 통째로 외워버렸다. 눈을 감으면 머리 속에 토플 교재 첫 장에서부터 마지막 장까지 술술 떠오를 정도로 달달 외웠다. 이중재는 “이건 천재가 아니라 집중력과 노력의 차이”라면서 겸손해 했다.

가볍게 영어시험을 통과한 그는 결국 2004년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3전 4기만에 이뤄낸 거짓말 같은 합격이었다. 단순한 영어 단어를 몰라 미팅 장소를 코앞에 두고도 집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던 이가 사법고시를 통과하는 영화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었다. 부모님과 그의 여자친구는 눈물을 흘렸다. 그의 아버지는 아들이 합격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전화기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을 쏟았다. 동네에는 커다란 플랜카드가 걸렸다. 아버지는 ‘이중재 사법시험 합격, 경축’이라는 글귀가 아니라 ‘이강조의 아들, 이중재 사법시험 합격’이라고 크게 써넣었다. 최초의 축구선수 출신 법조인은 이렇게 탄생했다. 그 누구보다도 영화 같은 이야기다.

이중재는 축구를 그만둘 때 다시는 내가 좋아하는 것을 놓치지 않겠다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켜냈다. 축구선수의 꿈을 접고 자살까지 생각하던 이중재는 피나는 노력으로 결국 영영 이룰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아니 상상하는 것조차 민망했던 꿈을 이뤘다. 그는 사법고시 최종합격자 발표가 나던 날 곧바로 여자친구에게 전화를 해 이런 말을 했다. “나 이제 너 책임질 수 있게 됐어.” 고시 준비를 하는 동안 매일 고시원에 찾아와 반찬을 챙겨주고 묵묵히 기다려준 여자친구와 8년 열애 끝에 드디어 결혼에 골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는 곧바로 여자친구 집에 가 청혼했다. “성공하면 마음이 바뀔지 몰라서 일찍 청혼했다”는 그는 이듬해 봄 결혼식을 올리고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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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재 변호사는 좌절하고 있는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큰 메시지를 던졌다.

그가 세상을 향해 던지는 메시지

그는 현재 법무법인 정률 파트너 변호사로 일하고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아예 축구와 작별한 건 아니다. 그는 초등학교 시절부터 10년 넘게 인생의 전부라 생각했던 축구와 여전히 각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이중재 변호사는 2010년 6월 터키 안탈리아에서 열린 세계변호사축구대회, 일명 변호사월드컵에 서울지방변호사회 소속으로 한국을 대표해 그라운드에 섰다. 조별예선에서 프랑스를 3-0으로 제압하며 16강에 진출한 서울지방변호사회는 16강에서 브라질을 맞아 승부차기까지 혈투를 펼쳤다. 긴장된 승부차기 첫 번째 키커는 이중재 변호사였다. 그는 침착하게 브라질 골문 오른쪽을 가르며 팀의 승부차기 4-2 승리에 일조하며 팀을 8강에 진출시켰다. 이중재 변호사는 2006년부터 2년마다 열리는 변호사월드컵에 꾸준히 출전하고 있다. 2010년 열린 전국변호사축구대회에서는 6골을 기록하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고 득점왕에 올랐고 지난해에는 한·일변호사축구대회에서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이중재 변호사는 비록 축구선수의 꿈은 접었지만 이따금씩 말끔한 양복을 차려 입고 대한축구협회에 들어선다. 대한축구협회 고문 변호사 및 사회공헌위원회 위원을 맡고 있고 최근에는 대한축구협회 비리근절 특별외원회 위원까지 역임하고 있기 때문이다. 10년 전 알파벳 대문자와 소문자도 구분하지 못하던 이가 이제는 당당한 변호사가 됐다. 비록 축구선수의 꿈은 포기했지만 이제는 변호사의 신분으로 한국 축구를 위해 또 다시 멋진 일을 하고 있다. 이중재 변호사는 미래를 위해 고민하고 있는 이들에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이건 중도에 축구를 포기해 방황하고 있는 이들뿐 아니라 이 세상 모든 이들에게 교훈이 될 것이다. “자신에 대한 자신감이 없는 게 가장 무서운 겁니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하세요. 나중에 ‘왜 그때 그걸 안 했을까’ 후회하는 것보다 더 끔찍한 건 없을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