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16일)는 저녁부터 수도권 지역에 비바람이 몰아쳤다. 주말마다 K리그 경기장을 우선으로 찾은 터라 오랜 만에 금요일에 열리는 내셔널리그 경기를 지켜보기 위해 비바람을 뚫고 우리 집에서 왕복으로 100km가 넘는 안산으로 향했다. 신한생명 2012 내셔널리그 안산HFC와 수원FC이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안산와스타디움이 아닌 보조경기장에서 열리는 경기라 모든 것이 열악했다. 선수들은 벤치 옆쪽 천막을 라커룸으로 이용했고 관중들도 비록 지붕이 있지만 바람으로 인해 들이치는 비를 그대로 맞아야 했다.

기사 이미지

영국인 마이크 브랜든(왼쪽)을 비롯한 안산HFC의 외국인 서포터스 클럽은 안산이 잠실로 떠날 것이라는 루머가 돌자 직접 플랜카드까지 만들었다.

100여 명 정도 되는 관중이 보조경기장 관중석에 옹기종기 모여 앉았다. 대부분이 선수 가족이었다. 그런데 서너 명의 외국인이 자리를 잡고 맥주를 마시며 이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무척 익숙한 풍경이었다. 속속 도착하는 외국인마다 서로 인사를 주고 받은 뒤 먹을거리를 꺼내면서 경기에 집중했다. 이 중에는 놀랍게도 안산HFC 유니폼을 입은 이도 있었다. 안산이 찬스를 놓쳤을 때는 머리를 쥐어 뜯었고 반대로 안산이 놀라운 선방을 했을 때는 환호를 보냈다. 과연 이들은 누구일까. 왜 한국인이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내셔널리그 경기장에서 비바람을 맞고 서 있을까.

“혹시 할렐루야와 관련한 종교 단체에서 온 사람들인가요?” 궁금한 마음에 달려가 물었다. 그러자 한 외국인이 친절하게 답변을 시작했다. 영국에서 왔다는 마이크 브랜든이라는 사람이었다. “우리는 안산의 외국인 서포터스 클럽이에요. 이 팀의 종교적인 색채와는 전혀 관련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는 안산 외국인 서포터스 클럽에 대해 더 설명했다. “60명 정도가 이 모임에 가입돼 있는데 실질적으로 활동하는 이들은 30~40명 정도 되죠. 보통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5~6명 정도씩은 모입니다.”

이들은 국적과 인종을 초월해 안산을 응원하기 위해 모였다. 브랜든은 말을 덧붙였다. “대부분이 안산에 살거나 이 주변에 사는 외국인들이거든요. 저는 영국 사람인데 제 옆에 있는 이 친구는 미국에서 왔어요. 뉴질랜드에서 온 친구도 있고 아프리카인도 있어요.” 그는 비바람과 추위를 무릅쓰고 얇은 안산HFC 유니폼을 입은 채 경기를 관전하고 있었다. 브랜든은 이렇게 말했다. “제가 안산 선수들과 함께 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수들에게 알리고 싶어서 추워도 이렇게 유니폼을 입고 경기를 관전하죠.”

브랜든에게 물었다. “왜 하필 안산을 응원하나?” 그러자 그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제가 안산에 살고 있기 때문이죠. 당연히 저는 안산을 응원해야 해요. 다른 생각을 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어요. 안산에 이사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일이 이 지역에 어떤 축구팀이 있는지 찾아보는 것이었어요. FC서울이나 수원블루윙즈 같은 빅클럽도 좋지만 저는 그 팀의 진짜 팬이 될 수는 없어요. 왜냐고요? 저는 안산 사람이니까요. 더 이상 무슨 설명이 필요할까요. 안산은 언제나 제가 응원하는 팀입니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유럽 구단을 내 팀인 것처럼 응원하는 이들이 지극히 정상적으로 비춰지는 한국의 축구 문화에서 브랜든이 던진 말은 가장 평범하면서도 의미 있었다. 그래서 한국에서 유럽 축구를 광적으로 바라보고 있는 현상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더니 이런 대답이 돌아왔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축구팀을 응원하는 일은 참 슬픕니다. 저는 우리 동네 팀을 응원하며 여기에서 야유를 보내면 바로 앞에서 뛰고 있는 저들이 저를 쳐다봐요. 그런데 한국에서 유럽 축구를 보며 아무리 야유를 해도 반응이 오나요? 축구의 매력은 가장 가까운데 있는 팀의 경기를 직접 보는 거죠.”

“영국은 아무리 유명한 팀이 있어도 무조건 그 팀을 응원하지 않아요. 자기 동네 팀을 응원하죠. 이렇게 우리 지역 팀 경기를 직접 보면서 응원하고 누군가를 만나면 그 팀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면 나눌수록 팀은 커져요. 한국에서도 자기 지역 팀을 응원하고 사랑해주면 그 팀이 더 발전합니다.” 그가 전하는 말은 평범하지만 정답이다. 한국이 그렇게도 열광적으로 바라보는 영국 축구를 직접 경험한 이가 전하는 말이니 이 말에 이견을 달 사람이 있을까. 결국 가장 우리가 사랑해야 할 팀은 우리 동네 팀이다.

브랜든은 경기 내내 직접 컴퓨터로 뽑아온 플랜카드를 접었다 폈다했다. 여기에는 이런 글귀가 써있었다. ‘잠실로 가지마’ 안산HFC가 서울 잠실로 연고를 옮길 수도 있다는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준비한 플랜카드였다. 언론 보도를 통해 안산HFC의 잠실 입성은 뜬소문이었다고 알려졌지만 브랜든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이런 메시지를 준비했다. “안산은 인구도 많고 좋은 경기장도 가지고 있어요. 이런 곳을 떠나 팀이 사라지는 건 무척 불행한 일이죠. 어떻게든 이 팀을 붙잡고 싶은 마음에 직접 플랜카드를 만들었어요.”

기사 이미지

수원FC를 응원하기 위해 딸과 함께 경기도 의왕에서 안산으로 달려온 존 벌리의 모습.

안산을 응원하는 이들 바로 옆에는 7살짜리 딸과 함께 축구를 관람하고 있는 또 다른 외국인이 앉아 있었다. 이번에는 그에게 다가가 이야기를 건넸다. 존 벌리라는 이름의 그 역시 영국에서 왔단다. “저는 수원FC의 팬이에요. 한국에 온지 10년이 됐는데 수원FC을 응원하게 된지도 3년이 흘렀어요.” 그가 과연 수원FC를 응원하게 된 이유는 뭘까 궁금해 물었더니 아주 간단한 대답이 돌아왔다. “제가 경기도 의왕에 살거든요. 제가 사는 곳에서 가장 가까운 축구팀이 바로 수원이죠. 그 이유 말고는 없어요. 오늘도 딸과 함께 지하철을 타고 여기까지 왔어요. 우리 딸도 수원FC를 참 좋아해요.”

그 역시 브랜든과 비슷한 의견이었다. “영국에서 축구는 삶의 일부입니다. 그게 꼭 몇몇 빅클럽이 있어서 일어난 현상은 아니에요. 내가 사는 곳에 있는 축구팀을 응원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축구가 삶의 일부가 된 거죠. 그런데 한국에서는 그렇지 않아요. 한국 사람들은 우리 동네에도 이런 멋진 팀이 있는데 꼭 유럽의 빅클럽만을 좋아하더라고요. 경기도 의왕에 사는 저와 FC바르셀로나는 아무런 연관이 없는데 왜 바르셀로나를 응원해야 하죠? 많은 관중이 응원하면 경기력이 좋아져요. 한국도 내 지역에 있는 팀을 응원하는 문화가 생긴다면 더 탄탄한 리그가 만들어질 겁니다.”

그는 딸을 무릎에 앉혀 놓고 수원 선수들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제 막 8살이 된 그의 딸도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그라운드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이토록 영국이 탄탄한 축구 리그를 보유하게 됐는지는 여기에서 알 수 있었다. 내가 사는 지역의 팀을, 어릴 때부터 아버지와 함께 보며 자란 이들이 대부분이니 그런 열기가 뿜어져 나오는 것이다. 그의 8살된 딸에게는 바르셀로나보다 수원FC가 더 친숙한 팀이 될 것이다. 벌리는 수원이 득점에 성공하자 딸과 함께 박수를 치며 그 누구보다도 환호했다.

보조경기장 특성상 홈과 원정팬을 구분하는 좌석이 없어 진풍경이 벌어졌다. 안산HFC를 응원하는 외국인들과 수원FC를 응원하는 외국인이 한 데 어우러져 있었다. 비바람을 피해 아담한 관중석에 옹기종기 모여앉아 골이 터질 때마다 환호와 탄식이 양쪽에서 번갈아 나오는 모습은 마치 영국의 작은 동네 축구팀이 경기를 하는 모습을 연상케 했다. 이들은 서로 초면이었지만 인터뷰 도중 같은 영국 출신이라는 사실을 알고 눈인사를 나누더니 자기가 응원하는 팀이 골을 넣을 때마다 상대방 팬 앞에 가 애교 섞인 도발을 하기도 했다.

이날 경기는 후반 들어 네 골이 터지는 명승부를 연출하며 2-2로 끝이 났다. 보조경기장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비바람을 맞으며 경기에 나섰던 이들은 주심의 종료 휘슬이 울리자 모두가 그라운드에 주저 앉을 만큼 혼신의 힘을 다했다. 정작 우리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내셔널리그 경기장에 영국인이 북적대면서 자기 동네 팀을 응원하는 모습을 어떻게 바라봐야할까. 우리가 유럽 축구에 맹목적인 애정을 보내고 있는 동안 오히려 이와는 반대로 외국인이 K리그도 아닌, 내셔널리그에 이렇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는 사실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지구 반대편에 있는 팀보다 우리 동네 팀이 더 매력적”이라는 이들의 말은 평범하지만 큰 울림으로 다가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