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로 2가 1-131번지, 한국 축구의 상징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2가 1-131번지는 한국 축구의 요람이다. 대한축구협회가 자리 잡은 축구회관이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가 흔히 텔레비전 스포츠 뉴스에서 보는 기자회견이 열리는 곳도 여기다. 히딩크 감독에서부터 박지성에 이르기까지 세계적인 인물들의 기자회견부터 명예기자 교육이 이뤄지는 곳이다. 이 5층 대회의실뿐 아니라 축구회관은 지하 2층 지상 6층으로 구성돼 한국 축구의 전반적인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이 곳이 없다면 한국 축구는 당장 내일부터 ‘올스톱’이다.

그냥 건물 하나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축구회관이 갖는 가치는 어마어마하다. 국내 스포츠 단체 중 독자적인 건물을 보유하고 있는 곳은 대한축구협회 뿐이다. 야구와 농구는 한 빌딩 몇 개 층에 임대료를 내고 생활하고 있다. 나머지 종목의 경우는 더 열악하다. 다른 종목과 비교하는 게 거부감이 들 수도 있지만 어찌됐건 축구회관은 다른 스포츠 종목에서도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는 한국 축구의 상징과도 같은 건물이다. 오늘은 축구회관의 설립 배경과 당시 상황 등을 소개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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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시 종로구 신문로에 위치한 축구회관은 지하2층 지상6층 규모로 한국 축구의 전반적인 업무를 총괄하고 있다. (사진=프로축구연맹)>

화려했던 협회의 견지동 시절

1993년 대한축구협회 수장으로 부임한 정몽준 회장은 서울시 종로구 견지동에 위치한 대한축구협회 건물에 가보고 깜짝 놀랐다. 조계사 옆 골목에 자리 잡은 이 건물은 어두컴컴하고 낡은 곳이었다. 회장실도 따로 없이 사무실과 부회장실만 있었다. 부회장실에는 낡은 책상 두 개와 5인용 소파 하나가 전부였다. 책상 두 개는 부회장과 전무가 나눠 쓰고 있었고 소파는 다리 한쪽이 부러져 있었다. 정몽준 회장은 한쪽 다리가 부러진 소파에 앉아 기우뚱한 자세로 업무 보고를 받아야 했다. 지하에는 담배연기 자욱한 다방이 있었다.

그나마 이 건물도 1975년 대한축구협회장과 국회의원을 겸직하던 김윤하 회장 시절 야심차게 꾸린 사무실이었다. 이전까지 사직동과 동대문운동장, 중학동, 조흥은행 별관을 거치며 유랑 생활을 해왔던 대한축구협회는 빚을 내 견지동에 사무실을 차렸다. 대지 50평과 연건평 254평의 견지동 대한축구협회 사무실은 당시 9,100만 원의 거액이 들었다. 빚을 내 건물을 산 뒤 즉시 은행에 8,000만 원을 담보로 잡혀 빚을 갚고 나머지 1,100만 원은 차차 갚았다. 대한축구협회장을 지낸 당시 조흥은행 고태진 행장이 자금 조달에 큰 도움을 줬다.

견지동 건물이 인기를 끌던 시절도 있었다. 근처 화신백화점과 안국동 사이의 도로가 넓어지는 바람에 골목 안에 있던 건물이 길가로 나오게 돼 건물 값이 뛰었기 때문이다. 9,100만 원 하던 이 대한축구협회 한신빌딩 건물은 매입 8년 만에 4억 원을 호가하는 노른자위 땅이 됐다. 여기에서 나오는 임대료로 관리비와 관리인 임금, 은행이자를 빼고서도 흑자 운영이 될 정도였다. 당시 대한체육회 33개 가맹단체가 대부분 무교동에 있는 대한체육회 건물에 방 하나씩을 얻어 업무를 보고 있는 상황에서 대한축구협회는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말뿐이던 축구인의 염원, 축구회관

하지만 대한축구협회 규모가 커지고 이 건물이 낡으면서 불편한 점이 많아졌다. 1986년 멕시코 월드컵 출전으로 할 일이 많아진 협회는 직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었지만 사무실은 점점 낡아가고 있었다. 좁고 낡은 견지동 사무실을 더 넓은 곳으로 이전하자는 의견이 나오기 시작했다. 한국축구지도자협의회도 최순영 회장 재임 시절인 1986년부터 줄기차게 개혁안을 요구하면서 축구회관 건립을 주장했다. 당시 한국축구지도자협의회는 국내축구 활성화 대책과 프로·실업·군 팀 증설, 협회의 행정 개선, 중고·실업·대학 연맹 부활과 함께 축구전용구장 및 축구회관 건립을 촉구했다.

협회에서도 축구회관 건립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터였다. 김우중 회장은 1991년 이런 발표를 하기도 했다. “올해 안에 축구회관을 마련해 협회 자립을 기틀을 반드시 마련하겠다.” 하지만 이는 쉽지 않았다. 서울 강남에 300평 정도의 대지를 마련하고 김우중 회장이 경영하는 대우그룹에서 건설을 맡기로 했지만 돈이 턱없이 부족했다. 1990 이탈리아 월드컵 수익 배당금 8억 원과 프로축구 수입적립금 7억 원, 견지동 건물 매각 대금 8억 원 등 총 23억 원으로 강남에 부지를 마련한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강남 땅값은 평당 3천~5천만 원을 호가하던 시기였는데 협회 예산으로는 백 평도 살 수가 없었다.

이듬해인 1992년에는 프로축구위원회가 협회로 흡수 통합된 뒤 3년 만에 프로축구 구단이 이를 문제 삼았다. 축구회관 건립 기금으로 모아놓은 돈의 소유권을 주장한 것이다. 프로축구 구단들은 이런 주장을 폈다. “텔레비전 중계료 수익 3억 원은 당연히 전액 프로축구단으로 돌아가야 한다. 또한 이탈리아 월드컵 수익 배당금 8억 원도 프로선수들이 얻어낸 것인데 왜 협회가 다 가져가느냐. 우리도 당연히 이 수익을 배분받아야 한다.” 적어도 백억 원은 있어야 축구회관을 건립할 수 있는 상황에서 견지동 사무실 매각 대금 8억 원을 제외한 15억 원도 나눠가져야 할 판이었다. 결국 축구인의 염원이던 축구회관 건립은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축구회관이 현실이 된 순간

매년 협회 이사회에서 이 문제가 논의 됐지만 아무런 대안이 없었다. 1993년에는 정몽준 회장이 축구회관 건립을 위해 모아놓았던 협회 돈으로 1994 미국월드컵 본선 진출에 성공한 대표팀 포상금을 지급하려고 해 축구인들이 결사반대를 외치기도 했다. 협회 이사회에서 “정몽준 회장의 약속대로 포상금을 지급하려 한다. 모아 놓은 축구발전기금에서 이 비용을 충당하겠다”고 하자 한국축구지도자협의회 측에서 “정몽준 회장 개인이 약속한 건 자비로 충당하는 게 맞다”면서 이를 저지한 것이었다. 결국 논란 끝에 축구회관 건립을 위해 모아 놓았던 축구발전기금은 온전히 지켰지만 그렇다고 이 돈으로 당장 축구회관을 지을 수는 없는 상황이었다.

2002 한일월드컵 공동 개최가 확정된 뒤 축구회관 건립은 더욱 간절해졌다. 도저히 견지동 사무실로는 이 어마어마한 대회 개최를 준비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미 한 차례 대한축구협회장을 지낸 정몽준 회장은 1997년 협회장 재선에 성공한 뒤 프로축구연맹 대의원총회에서 파격적인 발표를 했다.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이 공동 출자하는 축구회관 건립을 확정지은 것이다. 정몽준 회장은 “현재 협회 건물은 낡고 불편해 월드컵 준비에 무리가 있다”면서 “한두 달 안에 설계도를 완성하고 곧바로 시공에 들어가겠다”고 밝혔다. 축구인의 염원이었던 축구회관이 현실로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당시 월드컵 수익금으로 조성된 협회의 축구발전기금은 35억 원이었고 연맹이 모아 놓은 프로축구발전기금은 70억 원이었다. 총 105억 원이 모여 있었다. 하지만 이걸로는 부족했다. 그간 물가가 오른 탓에 축구회관을 지으려면 170억 원이 필요하다는 계산이 나왔다. 나머지 65억 원이 부족해 고민이던 순간 정몽준 회장이 대의원총회에서 이렇게 말했다. “부족한 65억 원은 제가 내겠습니다.” 이렇게 협회와 연맹, 정몽준 회장의 사비를 털어 170억 원이 모였고 곧바로 부지 매입에 나설 수 있었다. 당시 협회 예산이 54억 원이었던 걸 감안하면 무려 1년 예산의 세 배에 이르는 어마어마한 돈이 여기에 들어가는 셈이었다.

축구 가족이 모두 모인 한국 축구의 상징

협회는 견지동 사무실 옆 건물을 사들여 현대식 규모로 회관을 신축하려 했지만 땅 매입에 실패한 뒤 6억 5천만 원에 견지동 건물을 매각했다. 그리고는 서울시 종로구 신문로 2가 성곡미술관 옆 부지를 사들였다. 그렇게 24년 동안 한국 축구의 살림을 책임져 온 견지동 사무실을 떠나 멋진 축구회관이 탄생할 수 있었다. 연건평 2천여 평 규모인 축구회관은 지하 2층과 지상 6층 현대식 건물로 한국 축구의 자부심과 같은 건물이었다. 완공을 앞두고는 1930년 조선축구단의 기념품부터 1954 스위스 월드컵 당시 사진 10여점, 역대 국가대표 유니폼과 우승 트로피, 1986 멕시코 월드컵 당시 허정무가 신었던 축구화와 1990년 이탈리아 월드컵에서 골을 기록했던 황보관의 축구화 등 다양한 기증품을 받아 새 건물 1층 로비에 축구박물관을 꾸렸다.

없는 돈을 짜내 새 건물에 입주하게 된 협회는 최대한 집기를 재활용했다. 당초 집기 구입을 위해 1억 원을 쓸 예정이었지만 직원들이 마음을 한 데 모아 견지동 사무실에서 옮겨갈 수 있는 것들은 모조리 새 축구회관 건물로 옮겼다. 때가 탄 소파와 커튼은 세탁했고 찢어진 소파도 쓸 수 있으면 버리지 않고 챙겼다. 자물쇠가 고장난 철제 캐비넷은 청소 도구 사물함으로 재활용하는 등 직원 전체가 절약을 위해 합심했다. 당시 조중연 전무는 소파 하나만 구입하고 나머지 사무 용품은 견지동 사무실에 있는 것들을 그대로 가져갔다. 협회 직원들의 재활용 정신으로 천 만 원을 절약했는데 돈도 돈이지만 당시 직원들의 절약 정신이 크게 주목받기도 했다.

드디어 모든 살림을 옮기고 1999년 5월 19일 역사적인 축구회관에서의 공식 업무가 시작됐다. 24년간 한축 축구 살림을 챙겨온 견지동을 떠나 새로운 곳에서 새 출발하는 날이었다. 한국유소년축구연맹을 비롯해 중등축구연맹, 고등축구연맹, 대학축구연맹, 실업축구연맹, 프로축구연맹까지 축구 가족들이 모두 둥지를 튼 축구인들의 자부심을 상징하는 건물이 드디어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순간이었다. 준공식에 참석한 축구원로들은 감격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이제야 우리의 염원을 이뤘다”고 했다. 당시 2000년 시드니올림픽 아시아 예선에 참가할 박지성과 이영표를 비롯한 젊은 선수들도 준공식에 참석해 의미를 더했다.

한국 축구사와 함께 하는 축구회관

이렇게 한국 축구는 체육 단체 중 유일하게 독자적인 건물을 보유하게 됐다. 이는 한국 축구의 자랑이자 자부심이다. 한 건물에서 온전히 축구만 생각하고 축구에 대해 고민하고 축구인들이 함께 토론할 수 있다는 건 그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이다. 지금도 축구회관에 가면 1층 축구박물관에 전시된 귀중한 자료들은 물론 한국 축구 전체를 만날 수 있다. 엘리베이터를 타면 김주성 사무총장과 마주치고 화장실에 가면 김정남 부총재를 만날 수 있는 곳이 바로 축구회관이다. K리그 입성을 위한 드래프트 신청도 여기에서 처음 이뤄지고 히딩크 감독 취임 기자회견도 여기에서 했다. 한국 축구의 역사와 함께 하는 곳이 바로 여기다. 축구와 관련된 모든 공식 발표와 기자회견은 물론 현안 결정도 다 이곳에서 열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얼마 전 협회에서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 한 직원이 비리를 저질렀고 옆 사무실에 가 용품까지 절도하다가 붙잡혔다. 이는 결국 협회 수뇌부까지 연루됐다는 의혹으로 번졌고 김진국 전무이사가 사퇴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정몽준 회장이 사비를 털고 협회와 연맹이 없는 돈을 쪼개 어렵사리 만든 한국 축구의 성지에서 축구인이 양심을 파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이제는 당연하게 출퇴근하는 사무실이지만 이 축구회관이 건립되는데 얼마나 많은 이들의 고민과 노력, 헌신이 필요했는지 다시 한 번 생각해보자. 축구인들이 그토록 염원했던 한국 축구의 자랑, 축구회관에는 축구를 사랑하는 이들로 가득 차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