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파인 KBS에서 <날아라 슛돌이>와 <천하무적 야구단>을 제작한 PD는 과거에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었다. “야구 선수는 실수도 예능으로 포장되지만 축구 선수는 그렇지 못하다. 너무 신적인 존재로 비춰지기 때문이다.” 이 말에 상당 부분 공감한다. K리그 선수들은 예능도 다큐로 받아들이고 팬들은 여기에서 어긋나는 선수에게 손가락질을 해왔다. 앞으로 보다 친근한 K리그가 되기 위해서는 선수와 구단이 더 유연한 방식으로 언론을 대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승기 오빠’ 통해 알게 되는 이동국과 이근호

어제(8일) KBS <1박2일>을 무척 재미있게 지켜봤다. 평소에 시간 맞춰 ‘본방사수’하는 프로그램은 아니지만 지난 주와 이번 주에는 미리 방송 시간을 확인해 뒀다가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이동국과 이근호가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보기 드문 장면을 놓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 프로그램을 보면서 축구선수들, 특히 K리그 선수들의 방송 출연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었다. 나는 K리그 선수들이 대중에 더 어필할 수 있도록 마음을 열고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좋다고 생각한다.

마니아가 아니라면 K리그에 대해 알 기회는 많지 않다. 축구팬이라면 지난 시즌 K리그에서 전북이 우승했다는 걸 모두가 알고 있지만 우리 옆집 사는 여중생은 그런 거 모른다. 이동국이 우승 트로피에 입을 맞췄다는 사실도 모른다. 단지 ‘승기 오빠’가 ‘호동이 아저씨’가 떠난 빈자리를 메워주고 있다는 사실만 안다. 그런 의미에서 이동국이 “지난 해 K리그에서 우승을 차지했는데 올 해에도 꼭 우승컵을 들고 싶다”며 새해 소망을 빌고 한 겨울 바닷물에 입수하는 장면은 그 어떤 홍보보다도 효과가 크다. 우리 옆집 여중생을 책상에 앉혀 놓고 “이 사진 봐봐. 이 선수가 이동국이야. 그가 속한 전북이 K리그에서 우승했단다”라고 주입식으로 알려주는 것보다 훨씬 효과가 크다.

물론 축구 선수는 축구 실력으로 자신을 알려야 한다. 하지만 축구 외적으로 자신을 어필하는 것도 상품성을 키우는 데는 필요한 요소다. 신인 연예인은 지상파 한 번 나오는 게 소원인데 주말 황금 시간대에 가장 주목받는 예능 프로그램에 나와 K리그 우승 소식과 함께 내년 시즌 소망을 전하는 건 돈 주고도 못하는 일이다. <1박2일>을 즐겨보는 시청자라면 이제 지나가다 무심코 언론에서 이동국과 이근호가 언급될 때면 그들의 방송 모습을 떠올리고 한 번 더 관심을 갖게 될 것이다. 지상파 예능 프로그램의 힘은 무시무시하다. 내가 서울월드컵경기장을 찾은 티아라를 보고 그 이후 그녀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과 마찬가지 상황이다.

황금 시간대 지상파 방송, 어마어마한 힘

<천하무적 야구단> 방송 당시 프로야구 선수들은 이 프로그램에 출연해 대중에게 친근하게 어필했다. 한 선수가 등장하면 자료화면으로 활약상이 나오고 대단한 선수라는 자막이 흘러나왔다. 황금 시간대에 해당 구단과 선수, 그의 이력이 지상파를 통해 소개되는 건 단 한 줄이어도 어마어마한 일이다. 이건 마니아들의 즐겨보는 <비바! K리그>와 같은 스포츠 전문 프로그램을 통해 소개되는 것과는 차원이 다르다. <천하무적 야구단>을 보면서 프로야구 선수가 황금 시간대에 멋지게 소개되는 모습은 선수 개인의 가치는 물론 구단과 프로야구 전체에 큰 이득을 안겨줬다고 생각한다. 이 시간대 광고료만 해도 엄청나지 않은가.

<1박2일> 프로그램 특성상 이동국과 이근호의 스토리가 많이 담기지는 못했다. 이동국이나 이근호가 단독으로 출연한 프로그램이라면 모르겠지만 10명의 출연자가 나와 긴박하게 미션을 수행하는 프로그램에서 이들의 축구 이야기를 듣는 건 다소 무리가 있다. 하지만 이런 홍보 효과는 나중 문제다. 이들이 가장 많은 대중이 지켜보는 프로그램에 나와 축구 선수의 소탈한 면을 보여줬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이런 식으로 축구 선수들이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옆집 형 같은 이미지로 받아들여진다면 대중은 앞으로도 허물없이 그들을 바라볼 수 있을 것이다. 전문적인 축구 이야기는 그 후에 다뤄져도 늦지 않다. 대신에 이동국이 단독으로 출연하는 <힐링캠프>에서는 더 많은 스토리가 담겨지길 기대한다.

스포츠와 예능을 접목했던 PD는 앞서 말한 것처럼 축구 선수가 너무 신격화 돼 있다고 했다. 축구 선수들은 굉장히 경계심이 강하다. 자신의 과거 실수를 웃으면서 이야기하는 데 거부감이 상당하다. 완벽한 인간도 없고 완벽한 선수도 없을 텐데 유독 축구 선수는 이런 실수에 민감하다. 하지만 실수도 예능으로 포장하면 유쾌해진다. 경기 도중 벌어진 어처구니없는 실수도 예능으로 다뤄지는 게 대중이 더 친근하게 축구를 접하는 길이다. 선수를 영웅화하면 실수하는 선수는 패배자로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그라운드 내에서는 최선을 다해야겠지만 그 과정에서 생기는 실수도 유쾌하게 그려내야 한다. 옆집 형 같은 이미지가 K리그에는 다소 부족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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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호는 이동국에게 “페어플레이 하라”고 했다. 밥 앞에서는 선배고 뭐고 없다. (사진=1박2일 방송 캡쳐)>

이동국의 ‘탁구 굴욕’과 선배도 없는 이근호

또한 K리그 구단들은 이런 축구 외적인 활동에 대해 굉장히 인색하다. 한 방송국 관계자는 “축구선수 섭외하는 게 하늘의 별따기”라고 표현한 적이 있다. 엄격한 잣대로 방송 출연을 걸러내기 때문이다. 전지훈련을 앞두고는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전지훈련 후에도 “휴식을 취해야 한다”고 고사한다. 일부에서는 프로야구 선수들에 비해 방송 출연이 적은 K리그 선수들을 보며 방송사의 치우친 애정을 지적하지만 이건 잘못됐다. 섭외 잘되고 호의적이면 K리그 선수들도 방송에 못 나갈 이유가 없다. 물론 어마어마한 훈련량 때문에 축구 외적인 스케줄을 많이 잡을 수는 없지만 부정적으로 무조건 섭외를 거절하는 것 보다는 긍정적인 검토가 필요하다.

이동국과 이근호가 축구 스타로 비추지는 것도 좋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라운드 안에서 만이다. 그들이 <1박2일>에서 마치 유승민처럼 탁구를 했다면 재미없었을 것이다. 미들스브러 시절 ‘탁구왕’이라는 소문이 떠들썩했던 이동국이 알고 보니 허당이었다는 사실이 더 유쾌하고 즐겁다. 밥 앞에서는 선배도 없던 이근호의 모습은 나를 보는 것 같아 무척 친근했다. 그라운드에서는 찔러도 피 한 방울 안 날 것 같은 강인한 모습을 보여주는 전사들이지만 그라운드 밖에서는 허당 느낌도 풍겨줘야 인간미 넘치고 정도 간다. 이동국과 이근호는 <1박2일>에 잘 출연했다. 대중은 축구선수라면 누구나 있는 복근에도 큰 관심을 가질 정도로 축구 선수들에 대한 호기심이 있다. 아마 축구에 관심 없는 사람들은 이근호가 그렇게 빠른 줄 미처 몰랐을 것이다.

꼭 대중이 아닌 K리그 마니아 사이에서도 이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큰 재미를 준다. 이동국이 생선 이름을 댈 때 ‘대구’를 언급한 건 큰 의미가 없지만 팬들로서는 상당한 재미다. 바로 옆에 대구FC 출신 이근호가 있었기 때문이다. 대구 대신 전복을 선택했어야 한다는 심도 깊은 주장도 있다. 전복이 생선이냐 아니냐에 대해 토론이 벌어질 정도로 K리그 마니아들에게는 새로운 재미를 선사한 방송이었다. 만약 이번 시즌에 이동국이 대구를 상대로 골을 넣는다면 이동국은 대구 때문에 밥도 먹고 골도 넣은 사나이로 흥미를 더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유치한 논란이 가능한 건 단 하나의 이유 때문이다. 지금까지 K리그 팬들은 축구 선수가 예능 프로그램에 나간 모습을 본 적이 없다. 그래서 이런 사소한 것까지도 집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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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 후 이슈가 된 이동국의 복근. 이 정도 복근은 다 있지 않나. (사진=1박2일 방송 캡쳐)

그라운드 밖에서는 망가져도 좋다

물론 경계해야 할 것도 있다. 축구 선수는 어디까지나 축구에 집중해야 한다. 이런 식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이 독이 될 수도 있다. 부진할 경우 “한 눈 팔고 축구에 집중하지 않으니 그렇다”는 질타를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이렇게 리그가 다 끝난 뒤 휴식기를 이용해 대중에게 어필하는 정도라면 적당한 선에서 아주 훌륭한 선택을 했다고 생각한다. 시즌 중에 광고 찍고 예능 프로그램 나가면서 경기력을 저해하는 게 아니라면 비시즌에는 팬들에게 그동안 보여주지 못했던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프로 선수다운 서비스 아닐까. 휴식기에 술 한 번 안 마시면 이런 프로그램에는 얼마든지 출연할 시간도 나고 몸 관리에도 큰 영향은 없다.

언론도 선수가 부진할 때 괜한 트집으로 이런 걸 들춰내는 건 자제했으면 좋겠다. 안 그러면 K리그 선수들은 또 마음의 문을 닫는다. 톡톡 튀는 많은 K리그 선수들이 이제는 그 선수가 그 선수가 된 천편일륜적인 상황에는 개성을 인정하지 않은 언론과 팬들의 탓도 있다. 결국 K리그 선수들이 극도의 경계심을 가지면 이들을 비춰야 할 언론이 피곤해지고 이들을 즐겨야 할 팬들이 지루해진다. 사석에서 만나면 굉장히 유쾌하고 유머 감각 넘치는 선수들도 언론만 만나면 뻣뻣해지는 경우를 자주 봤다. 인터뷰를 할 때면 마치 모범 답안을 내놓고 채점 받는 학생이 된다. K리그 선수들이 언론을 대하는 자세가 이렇다.

<1박2일>에서 보여준 이동국과 이근호의 모습은 사실 조금 어색했다. 하지만 지난 주 첫 방송보다는 이번 주 두 번째 방송에서의 모습이 더 자연스러웠고 다음 주 족구 경기를 할 때는 더 적응된 모습으로 프로그램의 주인공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국가대표급 선수들이 허물없이 망가지는 모습은 창피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이들이 그라운드에 설 때 우습게 보는 이들도 없다. K리그 선수들은 신적인 존재가 아니라 친근한 옆집 형 같은 존재여야 한다. <1박2일>에 출연한 이동국과 이근호는 K리그 선수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길을 제시해 줬다. 티에리 앙리도 <무한도전>에서 물공을 받으며 익살스러운 모습을 보인 적이 있다. 그라운드 밖에서는 철저히 망가질 수 있는 선수가 더 멋진 선수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