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여름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지금도 그리 사정이 나은 편은 아니지만 당시에는 여자축구에 대한 인기가 더 부족할 때였다. ‘타이거풀스 토토컵’ 국제여자축구대회 한국-중국전을 보기 위해 도착한 수원월드컵경기장은 한산했다. 경기장에 도착해 로비 입구에서 서성이고 있을 때 정몽준 당시 대한축구협회장과 김근태 당시 민주당 최고위원이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정치인들이 축구장에서 유세 떠는 걸 싫어하는 편이라 별로 달갑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하지만 며칠 뒤 뉴스를 통해 알게 됐다. 못 말리는 축구팬 김근태 최고위원이 정몽준 회장과의 회동 장소를 축구장으로 정했다는 소식이었다.

거기다가 그는 한마디 더 덧붙였다. “정몽준 위원이 우리나라 여자축구 활성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데 그를 응원하는 순수한 차원에서 이번 만남이 이뤄졌다.” 남자대표팀 A매치도 아니고, 그렇다고 K리그 빅경기도 아니고, 여자축구라니…. 축구 팔아 유세하는 일부 정치인과는 전혀 다른 그의 언행은 10년이 지난 아직도 내 기억 속에 생생하다. 그때부터 나는 그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게 됐다. 같은 축구팬이라는 왠지 모를 동질감이랄까. 김근태 통합민주당 상임고문이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은 그래서 더 슬펐다. 오늘은 故김근태 상임고문의 특별한 축구 사랑에 대해 소개하고자 한다.

골프보다 축구를 더 좋아했던 이유

김근태 상임고문은 정치인들이 다 한다는 골프를 못한다. “정치하려면 골프는 필수적으로 배워야 한다”는 주위의 조언이 많았지만 그는 일부러 골프를 배우지 않았다. 아니, 강력하게 골프를 거부했다. 김근태 상임고문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골프는 서민적이지도 않고 결국 골프를 하다보면 정치인들이 골프로 접대를 받게 된다.” 골프라는 운동 자체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우리의 현실에서 정치인이 자주 골프장을 드나들 경우 좋을 게 하나도 없기 때문에 애당초 골프와 거리를 둔 것이었다. 김근태 상임고문은 생전에 골프장 출입을 거의 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어릴 적부터 축구를 즐겼다. 정치인이 되고 나서는 조기축구가 그의 가장 소중한 취미였다. 주말만 되면 밖에 나가 서너 시간씩 공을 차야 한주간의 스트레스가 풀린다고 축구 예찬론을 펼쳤다. 김근태 상임고문은 생전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축구가 너무 좋다. 함께 몸을 부딪히고 공을 차면서 땀을 흘리는 것만큼 기분 좋은 일은 없다.” 그는 고문 후유증으로 손을 떨고 몸놀림이 다소 둔해졌지만 왕성한 체력으로 그라운드를 누볐다. 사실 골문 앞에서 젊은 동료들의 패스를 받아 골을 넣는 기술을 자주 쓴 것도 사실이지만 주말마다 골프와 폭탄주의 유혹을 뒤로하고 동네 조기 축구회에서 공을 찼다는 것만으로도 참 대단한 정치인이다.

2005년에는 입법, 사법, 행정 등 3부가 국회에서 축구대결을 펼친 적이 있었다. 당시 이 축구대결은 큰 이슈가 됐다. 단순히 3부 소속 직원들의 축구 시합에 무슨 이슈가 있는지 고개가 갸우뚱 거릴 것이다. 하지만 그 어떤 경기보다도 빅매치였다. 여권의 차기 대권주자로 꼽혔던 정동영 당시 통일부장관과 김근태 당시 복지부장관이 각각 1청사팀과 2청사팀을 이끌고 대회에 나섰기 때문이다. 차기 대권주자가 나란히 그라운드에 서 적으로 만난다는 건 놓칠 수 없는 뉴스였다. 약 200여 명이 모인 이 대회에서 김근태 당시 복지부장관은 두 골을 기록하는 등 맹활약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 많은 이들을 놀라게 했다. 운동 신경이 그리 뛰어나 보이지 않는 그는 그라운드를 휘저으며 펄펄 날았다.

축구가 있어 가능했던 화합

그는 여·야 화합을 위해 축구만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같은 해 6월에도 열린우리당 차기 대권 주자로 거론되고 있던 김근태 장관은 당시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권 주자로 꼽히던 손학규 경기도지사와 그라운드에서 선의의 대결을 펼치기도 했다. 경기를 마친 후 이 둘은 서로를 격려했고 운동장 한 곳에서 양 기관 공무원들과 함께 어울려 음식과 음료를 마시며 웃음꽃을 피웠다. 축구로 맺은 우정이었다. 지적 장애인을 국회로 초청해 함께 공을 찬 뒤 축구발전기금 전달식을 가지기도 했고 국회의원 축구대표로 한·일 국회의원 친선축구대회에 나서서는 부동의 스트라이커로 활약하기도 했다.

김근태 당시 열린우리당 의장이 권위주의시절 민주화 운동을 함께 하며 40년의 우정을 쌓은 성공회대 신영복 교수가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환영연을 열어준답시고 곧바로 축구 경기를 주최한 것도 유명한 일화다. 1968년 통일혁명당 사건으로 구속됐다가 20년간 옥고를 치른 신영복 교수가 세상에 나오자마자 가장 먼저 한 게 김근태 의장의 손에 이끌려 축구화를 신은 것이다. 2006년 9월 신영복 교수가 정년퇴임을 하자 김근태 의장이 국회팀을 이끌고 신영복 교수가 속한 성공회대 교수팀을 불러 들여서 축구를 할 정도로 그의 축구 사랑은 특별하다. 2007년에는 인천유나이티드를 소재한 한 다큐멘터리 영화 <비상>을 보고 눈물을 쏟았던 일도 있다.

김근태 상임고문의 축구 사랑은 어릴 적부터 시작됐다. 경기도 양평과 평택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동안 친구들과 축구공이 없어 돼지 오줌통을 차며 축구에 대한 애정이 싹텄다. 그는 2004년 CBS라디오 <김어준의 저공비행> 인터뷰에서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야구에 대해서는 약간의 원한이 있다. 어릴 적 동네에서 축구를 하고 있으면 방학에 서울 애들이 내려와 학교 운동장을 장악하고 야구를 한다고 난리였다. 우리를 껴주지도 않아 자존심이 무척 상했다. 아주 미웠다. 미운털이 한 번 박히고 나니까 평생 야구는 도시의 잘난체하는 애들이 하는 운동이라는 선입견이 박혔다. 나는 야구보다 축구가 더 좋다.”

축구공을 환갑 선물로 받은 사연

김근태 상임고문은 특별한 일정이 있지 않는 한 아예 일요일에는 약속을 잡지 않았다. 조기축구에 나가야 하기 때문이다. 가족들도 일요일에는 그를 건드릴 수가 없었다. 전화도 받지 않을 정도로 오전 내내 공을 찼기 때문이다. 공식석상에 서면 “어제 조기 축구에서 내가 해트트릭을 했다”는 게 첫 인사일 정도로 축구 사랑이 유별났다. ‘파랑새 축구단’이라는 자신이 속한 동네 조기 축구팀에 대한 애정과 자부심도 엄청났다. 2007년 2월, 열린우리당 당원들은 그의 환갑을 맞아 어떤 선물을 했을까. 명품 손목시계? 명품 넥타이? 아니다. 바로 축구공과 축구화였다. 그는 이 선물을 받아들고 무척이나 기쁜 표정을 지었었다.

그의 연설에서도 축구가 자주 등장했다. 2006년 독일월드컵 한국-토고전이 끝난 뒤 열린우리당 비상대책위원 회의에 나선 그는 “한국 팀은 정신력이 높아 서로를 비난하지 않는다”는 딕 아드보카트 당시 축구대표팀 감독의 인터뷰를 소개하면서 “우리도 모든 문제에 대해서 할 말이 많지만 비난하지 말고 서로 돕는 축구대표팀의 교훈을 배우자”고 하기도 했다. 두 달 후 독일 지적 장애인 월드컵 한국 대표팀 결단식에도 직접 참석해 “나도 국회의원으로 구성된 국회의원 축구대표팀의 멤버다. 넉 달 전 경기에서 차였던 정강이가 아직도 아프다. 그 범인 좀 찾아달라”면서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우리 대한민국이 선진국으로 나가면서 우리 모든 딸과 아들들이 자신들의 역량을 골고루 발휘하는 미래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는 응원 메시지를 전달하기도 했다.

그의 명답 중 하나를 더 소개하려 한다. 2006년 관훈클럽 초청 토론회에 참석한 그는 대중정치인으로서 감동 스토리가 없다는 지적에 대해 이런 말을 했다. "지난 주말에도 어김없이 축구를 해 얼굴이 벌겋게 탔다. 그랬더니 이미경 의원이 관훈토론에 나오면 얼굴이 상기된 것으로 나올 텐데 그것도 고려하지 않았냐고 충고하더라. 내가 축구를 좋아하는 것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한 것도 있지만 다른 의미도 있다. 장영달, 정봉주 의원이 패스를 해줘서 눈먼 골이 골문으로 들어가는 재미가 있었는데 지금은 주력이 떨어져서 젊은 의원들이 잘 패스를 안 해준다. 그래서 마음을 바꿔 이제 내가 젊은 의원들에게 패스를 해준다. 감히 이런 것이 대중적인 게 아닌가 생각한다."

故김근태, 조기축구 최고의 스트라이커

김근태 상임고문은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낙선한 뒤에도 꾸준히 조기축구에 나서며 건강을 지켰다. 반독재 민주화운동을 하다 고문을 당한 후유증으로 파킨슨병을 선고받았지만 그럼에도 축구화는 여전히 벗지 않았었다. 약물치료를 받으면서도 매주 일요일이면 그라운드에 서 건강을 다지면서 재기의 꿈을 놓지 않았다. 하지만 그는 결국 지난해 12월 초, 파킨슨병에 이어 뇌정맥혈전증까지 생겨 입원 치료를 받다가 결국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민주화 운동의 대부인 그는 이렇게 우리와 작별했다. 故김근태 상임고문은 오늘(3일) 발인과 영결식을 마치고 이제 하늘로 간다.

故김근태 상임고문의 축구 사랑은 1965년 반독재 민주화운동에 투신해 안기부 남영동 분실로 끌려가 보름 가까이여덟 차례 전기고문과 두 차례 물고문을 받으면서도 민주화에 앞장섰던 일에 비하면 당연히 조명 받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축구를 사랑하고, 이 축구를 통해 자신의 행복은 물론 대립하는 사회의 화합을 위해 노력했던 故김근태 상임고문을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기억하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오늘 우리 곁을 떠나는 민주화의 대부이자, 이 시대가 낳은 조기축구 최고의 스트라이커 故김근태 상임고문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