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오일뱅크 K리그 2011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다사다난했던 이번 시즌 K리그가 끝나고 이제는 한 시즌을 정리해야 할 시간이 왔다. 오늘은 2011년 K리그에서 가장 유쾌했고 의미 깊었던 골 세레모니 TOP10을 선정해 봤다. 물론 다 내 마음대로다. 자, 지금부터 골보다 특별했던 골 세레모니 속으로 들어가 보자. 여기에는 즐거움도 있고 감동도 있고 있어야 할 건 다 있다.

10. 죽기 살기로 뛴 대전이 전하는 메시지

지난 5월 29일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대전과 전북의 경기. 승부조작의 광풍이 몰아쳐 K리그가 최대의 위기를 맞은 시기였다. 특히 상당 선수가 연루된 대전의 분위기는 심각했다. 남아 있는 선수들 역시 팬들에게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아야 했다. 팬들은 대전에 배신감을 느끼고 있었다. 대전 선수들은 죽기 살기로 뛰었고 경기가 시작된 지 17분 만에 전북을 상대로 첫 골을 뽑아냈다. 황진산이 감각적인 드리블로 수비수를 제친 뒤 왼발 슈팅으로 골문을 흔든 것이다. 황진산은 프로 데뷔골에 신이 날 법도 했지만 곧바로 벤치로 달려가 통천을 꺼내 관중석으로 펼쳐보였다. 통천에는 ‘신뢰로 거듭나겠습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팬들의 실망에 대해 대전 선수들이 보내는 메시지였다.

9. 루이지뉴, 분노의 두 주먹

울산문수경기장에서 지난 6월 18일 울산과 인천이 맞붙었다. 특히 인천 루이지뉴는 이날 경기를 단단히 벼르고 있었다. 2009년 울산에서 단 두 경기에 출전하며 불만이 가득했던 루이지뉴는 인천에 입단한 뒤 울산과의 맞대결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기어코 전반 32분 일을 냈다. 한교원의 패스를 이어받아 골키퍼를 등지고 골을 뽑아낸 것이었다. 루이지뉴는 공이 골문을 가르자마자 울산 벤치 앞으로 가 두 주먹을 불끈 쥐어 보였다. 자신을 출장시키지 않은 울산 코치진에 대한 불만 때문이었다. 루이지뉴는 이후 인천 벤치로 향해 허정무 감독을 와락 껴안았다. 여기에서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알 수 있다. 루이지뉴가 얼마나 울산에 대한 적개심이 대단한지, 그리고 얼마나 사회생활을 잘하고 있는지 말이다.

8. 전남을 응원하던 한 소년

7년 동안 서울에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한 전남은 지난 3월 20일 안방으로 서울을 불러 들였다. 서울의 우세가 예상되는 경기였다. 하지만 전남은 이날 전반 35분 레이나가 페널티킥 골을 뽑아내며 서울을 압도하더니 후반 31분에는 지동원 대신 투입된 이종호가 쐐기골을 터뜨렸다. 수비수 두 명을 제치고 K리그 데뷔골을 뽑아낸 이종호는 곧바로 관중석 앞으로 달려갔다. 유소년 시절부터 함께 전남을 응원하며 가족같이 지낸 팬들을 위해서였다. 그라운드와 관중석이 가까운 광양전용구장 특성상 이종호는 팬들과 얼싸안고 7년 만의 서울전 승리에 감격스러워했다. 7년 동안 서울에 승리하지 못하는 모습을 지켜보던 꼬마는 시간이 흐르고 서울 격파의 선봉장이 됐다. 유럽축구에서 제 아무리 멋진 세레모니를 한다고 해도 우리는 텔레비전을 부둥켜 안는 게 전부지만 K리그에서는 골 넣은 선수와 관중이 직접 포옹할 수 있다.

7. 최용수 감독, “제 점수는요….”

스승의 모든 걸 닮고 싶어서였을까. 서울 고명진은 지난 5월 25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챔피언스리그 16강 가시마 앤틀러스와의 홈 경기에서 후반 막판 팀의 세 번째 골을 뽑아내고 3-0 승리에 쐐기를 박더니 곧장 광고판 앞으로 달려갔다. 하지만 광고판을 훌쩍 뛰어 넘어 팬들과 기쁨을 함께 나누려고 했던 고명진은 결국 웃음만 선사하고 말았다. 중심을 잃고 광고판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이다. 13년 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 카자흐스탄전에서 광고판에 걸려 중심을 잃고 쓰러졌던 최용수 감독대행의 모습이 똑같이 연출된 것이다. 물론 의도한 상황은 아니었지만 스승과 똑같은 모습으로 실수를 한 고명진의 모습은 팬들에게는 큰 즐거움이 됐다. 최용수 감독대행은 경기가 끝난 뒤 “차라리 내가 하는 게 더 나았을 뻔했다”면서 제자의 세레모니에 독설을 날렸다.

6. 이동국, “골을 신고합니다.”

예비역의 힘을 보여준 경기였다. 물이 오를 대로 오른 이동국은 지난 9월 27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전북과 세레소 오사카와의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에서 맹활약했다. 전반 내내 상대 골문을 위협한 이동국은 후반 3분 자신의 이날 첫 번째 골을 기록하며 포효했다. 에닝요가 올른 코너킥을 그대로 헤딩슛으로 연결한 이동국은 곧바로 단체 관람을 하고 있던 일반 관중석의 한 무리 군인들 앞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군인들에게 차렷 자세로 서 멋진 거수경례를 올렸다. 2년 간의 현역 복무를 마친 이동국의 거수경례는 대한민국 예비역의 위엄을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이날 그는 오른발과 왼발, 머리 등 온 몸을 사용해 무려 네 골을 기록하며 팀의 6-1 대승을 이끌었다. 우리나라 예비군들 이 정도는 다 한다.

5. 선수보다 빠른 감독

지난 8월 13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는 서울과 전남의 경기가 펼쳐졌다. 팽팽한 0-0의 흐름으로 경기가 끝나가던 후반 45분 극적인 결승골이 터졌다. 서울 몰리나는 데얀의 패스를 받아 감각적인 왼발 슈팅으로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서울 벤치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코너 플래그 부근에서 슬라이딩 세레모니를 펼치고 있는 몰리나에게로 달려갔다. 그런데 놀랍게도 가장 빠르게 질주한 건 최용수 감독대행이었다. 그는 화끈하게 슬라이딩을 해 양복 바지가 찢어지기도 했지만 현역 시절 못지 않은 스피드로 모두를 놀라게 했다. 경기가 끝난 뒤 “참았어야 했는데 아직 젊은가 보다”라며 웃은 최용수 감독대행은 아직도 웬만한 현역 선수들보다도 빠르다. 골은 선수들이 넣고 세레모니는 감독이 한다. 참 독특한 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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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디션 프로그램 심사위원이 참가자를 바라보듯 후배들의 ‘을용타’ 패러디를 바라보는 ‘원조’ 이을용의 모습. (사진=강원FC)

4. ‘을용타’여 영원하라

지난 10월 23일 강릉종합운동장에서 열린 강원과 대구의 경기에서는 또 한 명의 월드컵 4강 영웅이 그라운드와 작별을 고했다. 이을용은 이날 경기를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하기로 돼 있었다. 강원 선수들은 대선배의 마지막 경기를 위해 뜻을 모았다. 후반 9분 강원 김진용은 결승골을 기록한 뒤 곧바로 벤치로 달려가 난 데 없이 국가대표 유니폼을 받아와 입었다. 그리고는 팀 동료 곽광선의 뒤통수를 때려 그를 그라운드에 쓰러뜨렸다. 충격적인 그라운드 내 폭행 장면이었지만 이 모습을 지켜본 관중들은 박장대소했다. 김진용이 입은 국가대표 유니폼에는 강원 선수들의 사인과 함께 ‘을용타’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었다. 한국 축구를 이끈 대선배 이을용의 은퇴를 기념하기 위한 이벤트였다. 김진용한테 맞은 곽광선은 아무 말 못하고 웃어야 했던 골 세레모니였다.

3.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

지난 5월 8일 제주 신영록이 경기 도중 의식을 잃고 쓰러지는 충격적인 사건이 벌어졌다. 그리고 사흘이 흐른 11일, 제주는 멜버른과의 챔피언스리그 조별예선 경기를 치러야 했다. 많은 이들은 신영록이 다시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다고 걱정하던 상황이었다. 어수선한 분위기 속에서 경기가 열렸지만 전반 24분 만에 제주가 먼저 골을 뽑아내면서 분위기를 달궜다. 김은중은 박현범의 패스를 이어받아 왼발 발리슈팅으로 선제골을 뽑아냈다. 그리고 그는 곧장 중계 카메라 앞으로 가 유니폼을 들어올렸다. 거기에는 ‘일어나라, 영록아’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다. 사랑하는 후배를 위해 직접 경기 전에 준비한 골 세레모니였다. 신영록은 김은중의 간절한 외침을 들었는지 의식을 잃은 뒤 무려 44일 만에 기적적으로 깨어났다. 간절히 원하면 이뤄진다는 걸 김은중이 직접 보여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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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선수들은 골을 넣어도 기뻐할 수가 없었다. 먼저 하늘로 간 동료 때문이었다. (사진=서혜민)

2. 슬프지만 아름다운 동료애

K리그에 가장 큰 슬픔이 찾아온 5월이었다. 故윤기원이 하늘로 간 뒤 치른 인천의 첫 경기는 지난 5월 8일 대전과의 원정경기였다. 인천 팬들은 검은 옷을 입고 추모 걸개를 내걸었고 선수들 역시 검은 완장을 차고 경기에 임했다. 양 팀 모두 경기 시작 10분 동안 단체 응원을 하지 않고 고인을 추모했다. 경기는 박진감 넘쳤지만 어딘가 모르게 슬펐다. 하지만 인천은 대전에 0-1로 뒤진 후반 10분 카파제가 얻은 프리킥을 박준태가 직접 슈팅으로 연결하며 힘을 냈다. 박준태가 골을 넣고 서포터스 앞으로 달려가자 동료들이 뒤따랐다. 그리고는 모두 어깨동무를 한 채 고개를 숙였다. 박수를 보내던 팬들 역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고개를 숙였다. 짧지만 긴 침묵이 대전월드컵경기장에 흘렀다. 故윤기원을 기리는 슬프지만 아름다운 골 세레모니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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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신욱은 올 시즌 챔피언십이 낳은 최고의 스타다. 실력은 물론 쇼맨십까지 대단했다. 내 귀에 캔디, 아니 야유를 원하는 김신욱의 모습. (사진=울산현대)

1. 김신욱의 대담한 도발

지난 11월 23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펼쳐진 수원과 울산의 준플레이오프 경기. 울산은 6강 챔피언십에서 서울을 3-1로 제압하고 상승세를 타고 있었다. 이 경기 역시 예상과 다르게 울산이 수원을 상대로 선전하면서 경기는 승부차기로 이어졌다. 잔인한 승부는 이렇게 시작됐다. 울산의 세 번째 키커로 나선 김신욱은 강력한 슈팅을 날릴 것처럼 정성룡을 노려봤고 정성룡은 김신욱이 킥을 하려는 순간 미리 방향을 예측하고 몸을 달렸다. 하지만 김신욱이 찬 공은 골문 한 가운데로 힘 없이 빨려 들어갔다. 굴욕적인 승부차기 실점을 허용한 수원 팬들은 김신욱에게 거센 야유를 보냈다. 하지만 김신욱은 골을 넣은 뒤 더 당당한 모습으로 수원 팬들에게 도발했다. 손을 귀에다 대고 ‘더 야유해 보라’는 의미를 전달했다. 이 정도 ‘깡’은 아무나 못 부린다. 연맹은 경기가 끝난 뒤 김신욱에게 음주 측정을 해봤어야 한다.

골보다 아름다운 세레모니는 언제나 팬들을 가슴 뛰게 한다. 올 시즌 K리그에서는 유쾌하면서도 때론 감동적인 골 세레모니가 참 많았다. 특히나 그 어떤 시즌보다 다사다난했던 올 한 시즌 동안 우리를 행복하게 했던 K리그 선수들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전한다. 고생한 만큼 잘 쉬고 내년에도 팬들을 위해 그라운드에서 멋진 골 세레모니를 더 많이 보여줬으면 한다. 우리를 울리고 웃긴 2011년 K리그는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