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에 아파본 사람들은 알 것이다. 세상이 여기에서 끝날 것 같은 기분을 말이다. 더군다나 일방적인 이별 통보를 당했다면 그 충격은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아무 것도 모르던 어린 시절 여자친구에게 배신을 당했던 나는 일주일 동안 밥 한 끼 먹지 못하고 잠도 못자고 누워만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고 보면 이것도 다 그냥 가볍게 웃어 넘길 수 있는 추억이 돼 있다. 결국 모든 건 시간이 해결해 준다. 조광래 감독도 일방적인 경질이 무척 충격적이고 슬픈 일이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이 일도 웃으면서 이야기 할 수 있을 것이다.

조광래 감독이 대표팀에 입성할 때는 무척 큰 기대를 한 게 사실이다. 그리 유명하지 않은 선수들을 이끌고 경남에서 그가 보여준 축구에 감동했던 나는 조광래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을 때 기대 반, 아쉬움 반이었다. 경남 시절 축구는 분명히 매력적이었고 이 모습이 대표팀에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에 큰 기대를 가졌었다. 하지만 한 편으로는 조광래 감독이 이제 막 본 궤도에 오른 경남을 떠나야 한다는 게 무척 아쉽기도 했다. 지난 해 ‘조광래 유치원’에 열광했던 이들은 아마 나와 비슷한 마음 아니었을까.

하지만 그는 결국 대표팀에서 실패하고 말았다. 경질 과정에서의 문제도 있었지만 조광래 감독이 보다 멋진 경기력을 선보였다면 파벌 싸움과 스폰서 압력도 문제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결국 조광래 감독은 여러 외부적 요인도 있지만 실망스러운 경기력으로 경질의 빌미를 제공했다고 생각한다. 물론 대표팀 감독이 지휘봉을 놓으면서 대한축구협회 대회의실이 아닌 서울의 한 호텔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떠난 모습은 협회가 두고 두고 반성해야 할 부분이다. 1년 5개월이나 대표팀 감독을 지낸 이를 이런 식으로 떠나보내는 건 잘못됐다.

‘조광래 유치원’을 여전히 기억하는 이유

조광래 감독은 평생을 축구와 함께 살았다. 결국 다시 돌아갈 곳도 축구다. 경남 시절 클럽하우스 내 조광래 감독의 방에 들어간 적이 있었는데 축구에 관한 메모들이 빼곡히 벽지를 대신하고 있었다. 상대팀 포메이션에서부터 선수들의 장단점까지 손수 메모한 것들이었다. 밤 11시가 넘어서 클럽하우스를 떠날 때 조광래 감독은 트레이닝복을 입고 안경을 쓴 채 혼자 공부를 하다가 나를 배웅하기도 했다. 이날 가장 늦게 불이 꺼진 것도 조광래 감독 방이었다. 그 어떤 지도자도 노력을 게을리하지 않지만 조광래 감독의 학구열은 대단하다.

조광래 감독은 뭔가 독특한 구석이 있다. 흔히 선수들의 훈련은 코치들이 앞장 서서 돕고 감독은 큰 그림을 그리는 게 보통이다. 훈련장에서 뒷짐을 지고 전체적인 선수들의 움직임을 지켜보는 감독들의 모습을 자주 봤다. 하지만 조광래 감독은 다르다. 가장 나이 어린 코치처럼 선수들을 맨 앞에서 이끈다. 할아버지에 가까운 나이지만 어떤 코치보다도 훈련장에서 많이 뛴다. 어떤 지도 방식이 낫다고는 할 수 없지만 조광래 감독은 달라도 뭐가 다른 지도자다. 퇴장을 당한 것도 아닌데 “관중석이 더 잘 보인다”며 경기 도중 스탠드로 올라가는 감독도 조광래 감독 말고는 본 적이 없다. 남 눈치는 안 본다.

경남 시절 보여준 그의 축구는 대단했다. 나는 당시 경남 축구를 ‘개떼 축구’라고 표현하고 싶다. 정말 개처럼 그라운드를 누비는 선수들은 상대팀 선수들이 얼마의 연봉을 받고 얼마나 유명한 선수인지 따위는 잊은 채 멋진 경기를 펼쳤다. 아직도 지난 해 초 경남이 안방에서 서울을 1-0으로 제압하고 구단 창단 역사상 처음으로 1위에 올랐던 그 순간은 전율이 느껴진다. K리그가 추춘제를 도입했다면 2009년 말부터 2010년 초까지 성적을 토대로 경남이 우승을 차지할 만큼 그들의 경기력은 대단했다.

이제는 편견과도 싸워야 하는 조광래 감독

물론 그는 대표팀에서 실패를 맛봤다. 경남 축구를 기대하던 이들에게는 대단히 실망스러운 결과다. 나 역시 해외파 의존과 이동국의 기용 문제에 무척 많은 불만을 가졌었다. 조광래 감독이 대표팀에 가 한국 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꿀 역할을 하길 기대했지만 내용과 결과 모두 실망스러웠다. 패스 축구로 한 단계 더 성장하고 싶다던 그의 목표는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는 불과 1년 5개월 사이 K리그 대표 감독에서 대표팀을 ‘조각낸’ 감독으로 추락했다. 그것도 가장 올바르지 못한 방법의 이별이었기 때문에 더더욱 아쉽다.

아마 그의 대표팀 감독 경력이 앞으로 축구 인생을 살아가는 데는 큰 오점으로 남을 수도 있을 것이다. 월드컵에서의 한 순간 실수 이후 K리그에서 염기훈과 이동국이 펄펄 날아도 결국 사람들은 월드컵에서의 한 장면만 기억하고 그들을 폄하하는 세상이다. 비난과 논란의 중심에 있던 조광래 감독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비슷할 것이다. 그가 다시 K리그에 돌아와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도 결국 ‘국내용 지도자’라는 비아냥을 들을 것이다. 조광래 감독은 이제 편견과도 기나긴 싸움을 벌여야 한다. 한국 축구사에서 황선홍을 빼면 이 편견을 떨치고 해피엔딩으로 축구 인생을 마감한 이들을 꼽기 어렵다.

당장 그가 돌아갈 곳이 있는 것도 아니다. 경남은 조광래 감독이 떠난 뒤 김귀화 감독대행 체제 이후 최진한 감독을 정식 감독으로 임명했다. 경남과 조광래 감독의 이별은 훈훈했고 여전히 끈끈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조광래 감독을 다시 데려올 수는 없다. K리그 16개 구단 중 상주상무를 제외하면 감독이 공석인 구단도 없다. 조광래 감독이 새로운 일자리를 찾는 데는 시간이 필요할뿐더러 대표팀에서의 실패로 인해 그를 원하는 구단에서도 상당한 부담감을 안아야 한다. 1년 5개월 전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떠났던 조광래 감독은 지금 외로운 신세가 됐다.

다시 날아오를 조광래 축구를 기대한다

하지만 결국 그가 돌아올 곳은 K리그다. 그는 K리그에서 가장 빛났고 앞으로도 빛날 수 있는 지도자다. 조광래 감독은 지속적으로 훈련을 하지 못하는 대표팀보다는 동거동락하며 유망주를 육성하고 정교한 기술을 갖출 수 있는 클럽 축구에 더 적합한 지도자다. 대표팀에서 조광래 감독이 보여준 지도력은 비판을 대상이 될 수 있을지 몰라도 K리그에 오면 또 달라진다. 조광래 감독은 이미 경남에서 이 같은 사실을 직접 실력으로 보여줬었다. 나는 그가 K리그에서 다시 한 번 멋진 경기력으로 날아오르길 기대한다. 대표팀의 몇몇 경기만이 아니라 경남 시절부터 쭉 조광래 감독의 축구를 지켜본 이들이라면 비난보다는 응원을 보내는 게 어떨까.

조광래 감독은 자신을 일방적으로 경질한 협회에 분노하고 있다. 조광래 감독이 다시 K리그로 돌아와 훌륭한 성적을 거두는 게 가장 통쾌한 복수다. 협회의 결정이 틀렸다는 건 백 마디 말보다 성적 하나면 입증이 끝난다. 당장은 그에게 자리가 없겠지만 보다 많은 공부를 통해 K리그에서 자신의 철학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보여줬으면 좋겠다. 모두가 ‘독이 든 성배’ 대표팀 감독을 고사할 때 스스로 총대를 멘 조광래 감독에게 진심으로 고생했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당신의 축구에 대한 열정과 철학이라면 분명히 다시 날아오를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 나를 배신한 여자친구에게 가장 통쾌하게 복수하는 건 그녀보다 더 아름다운 여자를 만나 행복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