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치를 잘 모른다. 그래도 텔레비전에서 국회의원들이 싸우는 모습을 보면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화가 난다. 서로를 못 죽여 안달하는 모습을 보면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정치판 참 개판이다.’ 그리고 조광래 감독이 대표팀에서 일방적으로 경질된 현 상황을 보니 또 한 번 이런 생각이 떠오른다. ‘우리나라 축구판, 정치판 못지않게 참 개판이다.’ 조광래 감독 경질의 이면을 들여다보면 답답함을 넘어 분노가 치솟는다.

이 상황을 액면 그대로 해석하면 안 된다. 여기에는 파벌 싸움과 스폰서 압력 등 온갖 잡다한 이해관계가 얽혀있다. 단순히 조광래 감독의 부진한 경기력과 2014 브라질월드컵 아시아 지역 예선 통과가 걱정된다면 오히려 협회에서 더 그를 전폭적으로 지원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단 한 경기로 월드컵 무대에서 멀어질 수도 있는 절체절명의 위기에 봉착해 있지 않나.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감독을 일방적으로 경질하는 건 대표팀 경기력에 심각한 영향을 끼친다. 그런데 협회는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다.

돈 내면 감독 경질 권한 주나요?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어제(8일) 기자회견에서 스폰서의 압력에 대해 인정했다. 협회의 돈줄이 감독 경질을 압박했다는 내용인데 이거 참 기가 차다. 아니, 협회가 결국 스폰서의 압력이 굴복하는 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협회는 최고의 경기력과 시스템으로 한국 축구 발전을 도모해야 하는 단체이지만 스스로 돈이 가장 우선인 수익 단체로 전락하고 말았다. 황보관 기술위원장이 자신의 입에서 이 같은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큰 충격에 휩싸이고 말았다. 이 사람 지금 뭔가 크게 착각하고 있다.

물론 협회도 당연히 수익 사업을 해야 한다. 돈을 벌어야 그걸로 유소년 육성에도 투자하고 대표팀도 더욱 탄탄해 질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나중 문제다. 돈 앞에서 협회의 자존심까지 파는 게 얼마나 당당한 일이기에 기술위원장이라는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기자회견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꺼내나. 중계권료 지불하는 방송사가 협회 결정권자보다 우위에 있나. 그럴 거면 아예 방송사 산하 단체로 들어가는 게 낫지 않나. 스폰서와 방송사가 돈을 댄다는 이유로 말도 안 되는 압력을 넣는다면 다른 스폰서를 찾는 게 협회가 해야 할 일이다. 저기에 복종하라고 있는 협회가 아니다.

협회 스폰서에 의해 감독이 경질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여기에서 또 다른 희망 하나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도 돈 모아 몇 십억 원 내면 감독 경질에 대한 권한을 가질 수 있게 됐으니 돈 많이 벌자. 대표팀 감독이 마음에 들지 않으면 돈 주고 모가지 내치면 된다. 기술위원회는 뭐하려고 존재하나. 그냥 스폰서 분들 입맛에 맞게 감독 쓰면 되지 않나. 우리나라 스포츠 경기 단체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하는 대한축구협회에서 저지른 이 같은 일은 아주 부끄럽기 짝이 없다.

KBS는 왜 밀실 해고에 침묵하나?

다음 월드컵 전까지 A매치 중계권을 가지고 있는 KBS가 조광래 감독 경질을 단독 보도했다는 것도 참 쿵짝이 잘 맞는다. 종편 채널이 생기면서 정치적 견해에 일방적인 방송들이 이어지고 있는데 이런 현상이 지금 축구판에도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MBC는 어제(8일) <뉴스데스크>에서 조광래 감독 경질에 관한 뉴스 세 꼭지 중 두 꼭지를 비판적인 시선으로 보도했다. 밀실 해고 논란과 대표팀 감독 잔혹사에 대해 언급하는 내용이었다. 대표팀 감독 경질 과정에 대해 의혹을 제기하면서 협회의 결정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봤다. 개인적으로는 이게 가장 중립적인 시선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A매치 주관 방송사 KBS의 보도는 전혀 달랐다. 조광래 감독 경질 후 새 감독 후보 3인방 예상에 대한 보도를 톱 뉴스로 배치했고 다른 언론과 팬들이 의문을 품는 절차상의 문제는 전혀 언급하지 않은 채 “조광래 감독 경질에 대한 팬들의 찬반 양론이 후끈하다”면서 “앞으로 쿠웨이트전을 위해 철저히 준비해야 한다”는 말만 했다. 철저히 A매치 주관 방송사와 협회의 이해관계가 맞아 떨어지는 보도였다. 지금 축구 관련 뉴스는 밀실 해고 논란으로 도배되다시피 했는데 KBS만은 이 문제에 대해 아예 입을 닫았다.

이게 현실이다. 협회와 그를 위에서 조종하는 이들은 철저히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행동으로 자신들을 합리화하고 있다. 이게 종편채널에서 지극히 편향적인 시선으로 정치적 뉴스를 전하는 것과 다른 게 뭔가. 현재 우리나라 축구는 우리나라 정치하고 똑같은 모습이다. 자신들의 이해관계에만 혈안이 돼 있을 뿐 대안이 없는 상태에서 눈 가리고 아웅한다. 조광래 감독 경질을 단독 보도한 KBS라면 누구보다도 지금 협회 돌아가는 사정을 잘 알 텐데 왜 이들은 밀실 해고 논란에 대해 침묵하고 있을까.

취임 한 달 된 위원장의 결정

의문은 또 있다.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이제 갓 취임한지 한 달 밖에 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기술위원회도 소집하지 않은 채 독단적으로 대표팀 감독 경질을 결정할 만큼 이 문제에 정통하지는 않다. 세상에 어떤 회사 사장도 부임한지 한 달 만에 부장급 직원을 정리하지는 않는다. 돌아가는 사정을 살펴보고 판단하는 데는 꽤 긴 시간이 필요한데 중소기업도 아니고 협회라는 큰 단체에서 기술위원장이 된지 한 달 만에 대표팀 감독을 내치는 게 과연 타당한 일일까. 나는 이 부분에서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결국 누군가의 지시를 받는 ‘행동대장’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초고속으로 승진했다. 올 시즌 초반 FC서울 감독으로 팀을 최악의 상태로 몰아넣었던 그는 경질된 지 한 달 만에 협회 기술교육국장으로 임명됐다. 그리고 불과 4개월 만에 협회에서 가장 막강한 영향력을 지닌 기술위원회의 수장으로 선발됐다. 아니, K리그에서 지난 시즌 우승한 강팀을 맡아 능력도 보여주지 못한 감독이 어떻게 협회 기술교육국장이 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기술위원장이 될 수 있나. 이게 상식적으로 가능한 이야기인가. 또한 그 동안 많은 비판 여론에도 꿈쩍하지 않던 이회택 기술위원장이 스스로 자리에서 물러난 것도 의문이다.

그는 기술교육국장 시절 기술위원회 회의에 딱 두 번 참석했다. 그리고 기술위원장이 된지는 이제 한 달이 채 지나지 않았다. 그런 그가 기술위원장이 되고 가장 먼저 한 일이 조광래 감독을 경질하는 것이었다. 그는 지금 기술위원회를 열어 심도 있게 대표팀 전력 강화를 위해 노력해야 하는 자리에 앉아 있으면서도 이를 모두 무시한 채 최윗선의 지시를 받아 행동하는 꼭두각시에 불과하다. 기술위원들도 모르는 경질을 그 혼자 처리했다는 건 상식적으로 납득할 수 없다. 그가 조광래 감독 경질의 비난을 온몸으로 혼자 틀어막고 있는 동안 조중연 회장은 어제 기자회견에 참석하기로 했다가 돌연 자리를 피했다.

결국에는 정치 싸움이다

결국 이번 사태는 정치 싸움 때문이다. 2013년 초 열리는 협회장 선거에 대한 사전 작업이라는 의혹이 강하게 남는다. 조중연 회장이 재선을 노리는 가운데 그의 대항마인 허승표 피플웍스 회장(전 한국축구연구소 이사장)도 다시 한 번 출마할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허승표 회장 지지 세력, 정확히 말하면 조중연 회장 반대 세력의 규모도 만만치가 않다. 실제로 지난 선거에서는 불과 8표 차이로 조중연 회장이 당선될 만큼 아슬아슬한 승부가 이어졌었다. 최근 조중연 회장이 허승표 회장을 지지하는 지역축구협회장을 압박한 정황도 포착되고 있다. 선거를 앞두고 표밭 다지기에 다선 것이다.

허승표 회장은 최근 <스포츠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해 다시 협회장 도전장을 내밀었다. 아직 다음 선거에 나설지 여부는 확답을 피했지만 현 협회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비판을 칼날을 세웠다. 다음 선거를 앞두고 서서히 행동에 나선 것이다. 지난 선거에서 김호, 김강남, 박병주, 이장수 감독, 신문선 해설위원 등 현 집행부에 반감을 가지고 있는 ‘야당 인사’들의 지지를 받은 허승표 회장을 가까스로 제압했던 조중연 회장 측에서는 당연히 그가 좋게 보일 리 없다. 그런데 조광래 감독이 바로 허승표 회장과 꽤 오랜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야당’ 쪽이다.

일각에서는 대표팀 사령탑이 조광래 감독이라는 점이 결국 허승표 회장 지지 세력을 결집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평가하기도 했다. 한국축구연구소와 지도가협의회가 와해되면서 힘을 잃었던 현 협회 반대 세력이 조광래 감독을 통해 뭉치는 분위기가 형성됐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조광래 감독은 현 집행부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갖춘 이회택 전 기술위원장과 대놓고 충돌한 적도 있었고 이 과정에서 여론을 등에 업고 자신의 뜻을 관철시키기도 했다. 한 동안 수면 아래에 있던 허승표 회장이 인터뷰를 통해 살아 있음을 알리던 날 밤 조광래 감독이 전격 경질됐다. 이게 과연 우연의 일치일까. 우리는 지금 축구계의 가장 추악한 정치 싸움을 지켜보고 있다.

각본 있는 드라마 ‘조중연 회장 구하기’

자, 이제 차기 감독에 대해 예상해 보자. 두 가지로 나뉠 수 있다. 우선 외국인 감독이다. 일단 능력은 둘째 문제고 가장 중요한 건 협회의 꼭두각시 노릇을 할 수 있을지 여부다. 협회의 간판인 대표팀 감독이 ‘야당 인사’로 채워지는 건 협회로서는 가장 골치 아픈 일이다. 협회가 시키는 대로 순순히 따를 수 있는 인물이 필요한데 세계적인 명장이 과연 이런 꼭두각시 역할을 할까. 아마 과거 히딩크 감독처럼 선수 선발에 압력을 받으면 대놓고 불만을 드러낼 것이 뻔하다. 대표팀 감독이라는 명예를 위해 양심을 팔 B급 외국인 감독이라면 모를까 세계적인 명장은 시기상, 정황상 가능성도 없을뿐더러 올 사람도 없다.

황보관 기술위원장은 “12월 내로 감독 선임을 마무리하겠다”고 했다. 그래봤자 이제 20일 정도 남았다. 일단 일주일 정도는 외국인 감독을 물색하다가 결국에는 “시간이 촉박하다”면서 국내 감독 선임으로 방향을 선회할 가능성이 적지 않다. 자, 이제부터 잘 지켜보자. 새로 감독에 선임되는 인물이 조중연 회장을 지지하는 현 집행부 세력인지 말이다. 어제부터 엉뚱하게 흘러나오는 후임 감독 물망에 오른 이는 현 집행부와 아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인물이다. 결국 이번 사태는 단순한 대표팀 감독의 경기력 문제가 아닌 스폰서의 압력과 정치 싸움이 만들어 낸 쇼라는 인상이 강하다.

협회 수뇌부는 대단히 큰 착각을 하고 있다. 자신들이 이런 식으로 협회를 휘어잡고 있어도 돈 벌이 잘되고 축구판이 잘 돌아가니 문제가 없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이건 당신들의 능력이 뛰어나서가 아니라 단순히 축구가 범국민적인 스포츠로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만약 하루 하루가 생존을 위해 살얼음판을 걷는 비인기종목이었다면 벌써 이런 식의 협회는 붕괴되고도 남았을 것이다. 당신들의 이 같은 정치 싸움에 서서히 지쳐가고 등 돌리는 이들이 많다는 걸 잊지 말자. 이러다가 정말 한국 축구 큰 일 난다. 조광래 감독 경질이라는 각본 있는 드라마, ‘조중연 회장 구하기’는 한국 축구를 위해서라도 멈추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