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바랜 은메달.’ 우리가 항상 올림픽을 보다 보면 접하게 되는 말이다. 은메달을 ‘따고’ 환하게 웃는 외국 선수들과 달리 우리는 은메달에 ‘머물고’ 슬픔의 눈물을 흘리는 선수들을 많이 봐 왔다. 우리에게는 언제나 1등만 기억되는 모양이다. 2등이라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우리는 언제나 화려하게 빛나는 1등만 주목하고 있다. 어제(4일) 전주월드컵경기장에서 벌어진 현대오일뱅크 2011 K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전북에 패해 준우승을 기록한 울산 선수들이 전북 선수들과 뜨거운 포옹을 나누는 장면은 그래서 더 뜻 깊다.

나는 울산의 준우승이 무척 값지다고 생각한다. ‘닥공’이라는 매력적이고 화려한 축구를 구사하는 전북은 충분히 우승할 자격이 있었고 그들의 우승을 진심으로 축하한다. 그러면서도 올 시즌 막판 돌풍을 일으키면서 기적을 써내려간 울산의 모습도 조명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이들은 한 동안 전북의 우승을 돌이켜 볼 것이고 역사는 1등 전북만을 기억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오늘 나는 아름다운 준우승 팀 울산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보려 한다. 울산이 6강 챔피언십에서 보여준 경기력은 감동 그 자체였다.

‘한 때’ 명문 울산의 현주소

울산은 한 때의 영광을 뒤로한 채 관심 밖에서 멀어진 구단이었다. 과거 울산공설운동장에는 관중석에 더 이상 앉을 자리가 없어 육상 트랙에까지 사람들이 가득 찼던 기억도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K리그는 관중이 없다”고 소개하는 사진 기사에는 단골로 울산문수경기장이 등장한다. 한국 축구를 이끄는 대기업 현대가 운영하고 있지만 그러면서도 늘 관심 밖에 있었다. 수도권에서 서울과 수원이, 지방에서 전북과 포항이 관중몰이를 하며 인기 구단으로 자리 잡는 동안 울산은 늘 외로웠다.

올 시즌에는 적지 않은 우여곡절도 있었다. 울산에서 치러져야 할 홈 경기가 충남 서산에서 치러지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아야 했다. 나 역시 연고 주의를 표방해야 하는 프로스포츠가 유랑 극단 신세를 면치 못한다는 사실에 그들의 선택을 비판하는 칼럼을 쓰기도 했다. 이 결정에 대해서는 아직도 분노한다. 울산 팬들도 경기장에서 구단이 고용한 용역업체 직원과 몸싸움을 벌이면서 시위를 펼치는 등 실망감을 감추지 못했다. 한 동안 울산 팬들은 응원 보이콧을 선언하기도 했다. 울산의 시즌 초반은 그리 순탄치 않았다.

냉정히 말해 김호곤 감독도 팬들에게 있기가 있는 지도자는 아니다. 김호곤 감독은 부임 후 내내 팬들로부터 질타를 받았고 매력 없는 축구라는 평가를 들어야 했다. 과거 김정남 감독 시절 ‘수비축구’라면서 울산을 평가했던 이들은 “이제 생각해보니 김정남 감독 시절이 더 나았다”고 할 정도였다. 울산은 이런 암흑기를 보내고 있었고 그들이 이번 시즌 K리그 6강 챔피언십에 오를 때만 하더라도 가장 먼저 탈락할 팀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서울과의 6강 챔피언십 경기를 지켜보기 전까지는 같은 생각을 했던 사람이다.

그들의 축구가 아름다웠던 이유

그런데 울산은 달랐다. 6강 챔피언십에서 보여준 울산의 모습은 너무나도 매력적이었다. 6위로 6강에 턱걸이한 울산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서울과 수원, 포항을 제압하는 놀라운 행보를 이어갔다. 결과를 떠나 경기 내용 역시 충분히 감동적이었다. 게으른 타겟형 스트라이커라는 평가를 거부하는 김신욱은 196cm의 큰 키로 수비에까지 적극 가담하면서 희생이 뭔지 몸소 보여줬다. 경기가 끝난 뒤 그는 “한 발 더 뛰면 더 좋은 선수가 될 수 있을 것이라 믿는다”는 가장 기본에 충실하면서도 우리가 쉽게 실천할 수 없는 걸 행동으로 보여줬다.

지난 시즌 K리그에 입성했지만 이렇다 할 활약을 보여주지 못하고 포항에서 좋지 않은 모습으로 울산에 들어온 설기현의 플레이도 인상 깊었다. 준플레이오프 수원과의 경기에서 승부차기에 나서 실패했던 그는 포항과의 플레이오프에서 페널티킥 키커로 나섰다. 이미 지난 경기에서 실축을 했고 포항전에서는 모따와 황진성이 먼저 페널티킥을 놓친 상황이라 부담감이 상당했을 것이다. 더군다나 설기현에 대한 야유가 극에 달한 포항스틸야드에서의 페널티킥이었으니 그의 부담감은 오죽했을까.

하지만 그는 페널티킥을 성공시켰고 경기가 끝난 뒤 “이미 수원전에서 한 번 실패했기 때문에 이번에 실축해도 잃을 게 없었다”면서 “후배들이 부담감을 갖는 것보다는 내가 부담감을 갖는 게 낫다”고 했다. 포항 팬들에게는 배신자일지 몰라도 그는 울산 팬들과 동료들에게는 가장 든든한 고참 선수다. 설기현이 유럽 생활을 접고 포항에서 실패를 경험한 뒤 울산으로 이적해 팀의 주축이 된 것 만으로도 영화 한 편은 만들 수 있는 스토리다. 이번 시즌에도 설기현은 또 다시(?) 이동국의 활약에 가렸지만 언제나 1인자만큼 훌륭한 2인자 역할을 했다.

‘울산의 힘’ 에스티벤과 김승규

에스티벤은 6강 챔피언십에서 발견한 최고의 선수다. 개인적으로 제주 산토스와 전남 코니, 그리고 울산 에스티벤은 실력에 비해 저평가되는 외국인 선수 3인방이라고 생각한다. 다소 덜 인기 있는 구단에서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돋보이지 않은 포지션을 소화하고 있으니 그가 조명 받지 못하는 건 당연한 일일수도 있다. 그는 울산에서 2년 동안 63경기에 나섰지만 1골 1도움이 전부인 선수다. 화려한 기록이 없으니 당연히 주목받지 못했다. 하지만 에스티벤은 소리 없이 강한 선수다. 특히 서울전 후반 막판 상대 골키퍼와 맞은 단독 찬스에서 루시오에게 패스하는 장면은 이 선수가 어떤 마인드를 가졌는지 잘 알려주는 대목이었다고 생각한다.

울산이 올 시즌 리그 최소 실점을 기록한 것도 에스티벤과 이호가 든든히 중원을 지켰기 때문이다. 항상 사람들은 골을 넣고 화려한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들을 주목하지만 이번 6강 챔피언십에서는 에스티벤이 화려한 축구가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입증했다. 수비형 미드필더로, 때론 팀이 위기에 쳐했을 때 왼쪽 측면 수비수로 나서 궂은 일을 도맡아 한 에스티벤이 없었다면 울산은 오합지졸이 됐을지도 모른다. 에스티벤은 올 시즌 그라운드에서 ‘3D 업종’을 도맡아 한 헌신적인 선수다.

올 시즌 내내 부상으로 재활에만 매달렸던 골키퍼 김승규는 이번 6강 챔피언십에서 주전이 아니어도 기회를 잡으면 빛날 수 있다는 걸 보여준 선수였다. 수원과의 승부차기에 나서 팀을 승리로 이끌었고 포항전에서는 주전 골키퍼 김영광이 경고 누적으로 결장하자 대신 골문을 지켜 페널티킥을 두 개나 막아내는 놀라운 활약을 선보였다. 올 시즌을 부상으로 날리고도 언제 다시 올지 모를 기회를 위해 혹독한 재활을 거친 김승규는 준비된 선수는 언제든 빛날 수 있다는 사실을 직접 입증했다. 그는 자기 몫을 다하고 챔피언결정전에서 골문을 다시 김영광에게 내줬다.

기적의 드라마를 잊지 말자

올 시즌 울산의 준우승은 우리가 화려한 모습만을 바라볼 때 이들이 얼마나 묵묵히 땀을 흘려주는지 보여준 드라마였다. 비록 그들은 역사가 기억하는 우승 문턱에서 좌절하고 말았지만 충분히 아름다운 이야기를 써 내려갔다. 역사는 1등만을 기억하겠지만 우리는 훗날 2011년 K리그에서 울산이 보여준 기적의 드라마를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6위 팀이 우승을 노릴 수 있는 6강 플레이오프 제도에 대해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적어도 합당한 제도 안에서 최선을 다해 뛴 울산 선수들과 코치진들에게는 박수를 보낸다. 울산이 보여준 축구는 충분히 아름다웠다.

마지막으로 포항전에서 페널티킥을 두 개나 막아내고 팀의 승리를 지켜낸 김승규의 이야기를 소개하려 한다. 팀을 위해 헌신한 김승규의 이 말 한마디가 왜 올 시즌 울산이 기적의 드라마를 쓸 수 있었는지 대변하는 것 같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 “오늘 저의 목표는 우리가 챔피언결정전에 올라 (김)영광이 형이 다시 뛸 수 있게 하는 것이었어요.” 울산의 준우승은 충분히 멋지고 아름다운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