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축구는 생소하다. 아직도 미국은 미식축구와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의 나라라는 인식이 팽배하다. 이 강력한 4대 프로스포츠가 자리 잡고 있는 미국에서 프로축구가 살아남기란 쉽지 않아 보인다. 하지만 미국에서도 축구의 성장세는 꾸준하다. 우리가 가볍게 생각할 수준이 아니다. 오늘은 ‘축구의 변방’으로 취급받는 미국 축구의 현주소에 대해 소개하려 한다. 요새 미국 축구 장난 아니다.

미국 축구의 시작과 발전
미국축구협회는 1884년 창립됐다. 하지만 두 개의 아마추어축구리그 AAFA와 AFA가 동시에 만들어진 뒤 크게 충돌하고 말았다. 이 두 리그는 국제축구연맹(FIFA)으로부터 미국을 대표하는 단체로 인정받기 위해 사사건건 부딪혔다. 결국 발전을 도모해야 할 단체의 협력 부족으로 미국에서는 축구가 제대로 자리 잡지 못했다. 유럽에서 축구가 크게 성장하는 동안 미국은 제자리걸음만 하고 있었다. 또한 자존심 강한 미국인들은 유럽에서 시작된 축구에 적지 않은 반감을 가지고 있었다. 이 시기 미국은 미식축구와 야구, 농구, 아이스하키 등 다른 프로스포츠의 급성장과 함께 했다.

시간이 흐른 뒤 1967년 실업리그가 공식적으로 출범했다. 미국은 상업 스포츠의 천국답게 축구 규칙도 상업적으로 바꿨다. 리그에서 승리할 경우에는 승점 6점을 줬고 무승부에는 승점 3점을, 패할 경우 승점을 주지 않는 제도를 도입했다. 세 경기 연속 골을 넣으면 승점이 또 1점씩 추가됐다. 당시 리그 우승팀 승점은 무려 185점이었다. 텔레비전 중계가 시작되면서 15분 마다 경기를 잠시 중단하고 광고를 내보내는 파격적인 규칙 변경도 이뤄졌다. 미국에서의 축구에 대한 인기도 서서히 달아오르고 있었다.

짧은 르네상스, 그리고 긴 침체기
프란츠 베켄바워와 게르트 뮐러(이상 서독), 에우제비오(포르투갈), 고든 뱅크스(잉글랜드), 조지 베스트(북아일랜드) 등 당대 최고의 선수들도 미국으로 향했다. 특히 미국 축구의 정점은 1977년이었다. 당시 코스모스와 스트라이커 팀의 맞대결에는 무려 77,691명이라는 어마어마한 관중이 들어찼다. 1980년대 초반까지도 이러한 구름 관중은 이어졌다. 유럽 축구를 금방 따라잡을 것이라는 의견이 팽배했다. 특히 펠레의 소속팀으로도 유명했던 코스모스는 슈퍼스타들을 연이어 영입하며 명문 구단으로 성장할 기틀을 갖췄다.

하지만 이게 끝이었다. 훗날 미국 축구 전문가들은 “1970년대의 인기를 제대로 이어가지 못한 게 미국에 축구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한 가장 큰 이유”라고 분석하기도 했다. 4대 프로스포츠와 달리 광고 시간이 현저히 짧은 축구에 대한 중계권 문제가 해결되지 못하면서 만년 적자에 시달렸다는 점이 가장 큰 패인이었다. 권위적인 FIFA에서는 텔레비전 중계를 위해 마음대로 규칙을 바꾸는 미국에 엄중 경고를 내렸고 결국 미국 축구에서의 중간 광고도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골을 많이 유도한다면서 오프사이드 규칙도 마음대로 바꾼 것도 FIFA의 심기를 건드렸다.

그러자 텔레비전에서도 축구를 외면했다. 4대 프로스포츠가 넘쳐나는데 축구는 당연히 소외됐다. 만년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데 팀들은 경쟁이라도 하듯 당대 최고의 스타를 영입하는데 집중했으니 재정적인 문제에 직면하게 된 건 당연한 일이었다. 유망주 육성은 안중에도 없었고 오로지 슈퍼스타들의 영입에만 혈안이 돼 있었다. 장기적으로 리그 발전을 도모하지 못한 근시안적인 선택이 문제였다. 결국 1980년대 들어 재정난을 견디지 못한 팀들이 하나씩 문을 닫기 시작하더니 1985년에는 아예 리그가 폐쇄되고 말았다. 이렇게 미국 축구의 짧은 르네상스는 막을 내렸다.

여자 축구가 잘 나가는 이유
이 와중에 미국 여자축구는 눈부신 발전을 이뤘다. 특히 1972년 미국 연방정부의 교육 법령 수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미국 연방정부는 학교에서의 성차별을 없애기 위해 각종 교육 프로그램을 진행할 때 성별로 균등한 기회를 제공하라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특히 엘리트 체육 자체에 이 법령이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쳤다. 학교에서는 남자 운동부를 5개 유지하려면 여자 운동부도 5개를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이때까지 대다수의 남자 운동부만을 운영했던 학교들은 남자 운동부 유지를 위해 부랴부랴 여자 운동부 창설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 법령 이후 6년 동안 무려 7배가 넘는 여자 운동선수가 생겨났다. 기하급수적으로 여학생의 운동 참여가 늘어난 것이다. 그 중 가장 큰 덕을 본 종목이 바로 축구였다. 여러 장비를 준비해야 하는 종목보다는 공 하나만 있으면 누구나 쉽게 즐길 수 있는 축구를 선택하는 학교들이 많아졌고 결국 여학생들이 축구를 접할 수 있는 기회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났다. 실제로 미국 고등학교에는 아직까지도 남자 축구부에 비해 여자 축구부의 비율이 높을 정도다. 현재 미국 여자 유소년 축구선수는 약 3백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결국 이는 여자 대학교 축구부 창단으로 이어졌다. 운동부를 운영해야 정부의 보조금을 지원받을 수 있는 상황에서 각 대학들은 어마어마한 인프라를 구축하고 있는 여자 축구에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이 법령 이후 미국 여자축구는 탄탄한 인프라를 구축하게 됐고 국제무대에서도 최정상에 오를 수 있는 토대가 됐다. 단순히 국가대표 선수를 길러내는 게 목적이 아니라 남학생과 여학생에게 균등한 운동의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수정된 법령으로 인해 미국 여자축구는 급성장할 수 있었다.

분수령 된 1994 월드컵
이때만 하더라도 미국 남자 축구는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 미국이 다시 축구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건 1994년 미국 월드컵을 유치하면서부터였다. 월드컵 유치로 막대한 재정적 효과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한 미국은 본격적으로 월드컵을 개최하기 위해 동분서주했다. 당시 미국은 엄청난 자본력을 보유하고 있었지만 자국 축구 리그가 없다는 게 유치의 최대 약점이었다. 미국은 경쟁 국가들이 이 부분을 물고 늘어지자 대안을 내놓았다. “월드컵을 개최하는 조건으로 프로축구 리그를 창설하겠다.”

결국 미국은 1994년 월드컵 개최에 성공했고 약속대로 1993년 12월에 프로리그를 창설했다. 원래 1995년부터 리그를 시작할 예정이었지만 준비기간이 짧아 1996년 4월 역사적인 첫 시즌을 시작할 수 있었다. 우리가 익히 들어 본 메이저리그 사커(Major League Soccer, 이하 MLS)의 첫 걸음이었다. MLS는 1996년 10개 팀으로 시작해 올 시즌 18개 팀이 리그에 참가하는 규모로 성장했다. 내년 시즌에는 캐나타 퀘벡 주 몬트리올을 연고로 하는 몬트리올 임팩트가 리그에 합세할 예정이다. 몬트리올 임팩트는 토론토FC와 밴쿠버 화이트캡스에 이어 세 번째 캐나다 연고의 MLS팀이 된다.

MLS는 현재까지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최근 4년 동안 네 팀이 창단할 정도로 창단 열기가 뜨겁다. 로타어 마테우스를 비롯해 흐리스토 스토이치코프 등 명망 있는 선수들이 MLS 출범 이후 대거 미국으로 건너왔다. 비록 전성기를 지난 선수들이지만 팬들은 그래도 이들의 모습을 직접 볼 수 있다는 사실에 열광했다. 또한 여자 축구가 세계를 제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미국인들의 축구에 대한 인식도 달라졌다. 자존심이 강한 미국은 이전까지 국제무대에서 힘을 쓰지 못하는 축구에 일부러라도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는 터였다. 유럽에서 건너온 남의 나라 경기라는 인식이 팽배했었다.

최고의 커미셔너, 최고의 선택
MLS가 돈 가버(Don Garber)라는 커미셔너를 스카우트한 것도 훌륭한 결정이었다. 미식축구(NFL) 등에서 무려 20년 동안 일하면서 명망을 쌓은 돈 가버는 1999년 MLS 커미셔너로 부임한 뒤 공격적인 마케팅을 시작했다. 2000년대 초반 두 개 팀이 해체되는 등 위기를 겪던 순간에도 돈 가버의 능력은 빛났다. 철저한 상업주의를 표방하는 돈 가버는 전 구단 전용구장 의무화를 목표로 내걸고 이를 강력하게 추진하고 있다. 돈 가버 부임 전까지 단 한 개였던 전용구장은 최근 9개 구단이 전용구단을 건설했고 5개 구단도 전용구단 건설을 추진하는 등 눈부신 성과로 나타나고 있다. MLS는 2016년까지 모든 구단이 전용구장에서 경기를 하는 걸 목표로 잡았다.

돈 가버의 행보는 혁신적이었다. 당초 MLS에는 팀 연봉 상한 제도가 있었다. 선수단 연봉 총합이 특정 액수를 넘으면 안 된다는 규정이었다. LA갤럭시가 데이비드 베컴 영입을 시도할 때 이 규정으로 인해 난항을 겪게 되자 돈 가버는 아예 규정을 변경해줬다. 각 구단에서는 지정한 선수 한 명의 연봉을 팀 연봉 상한 제도에 포함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였다. 결국 초대형 스타 영입을 놓고 고민에 빠진 LA갤럭시는 커미셔너의 유연한 대처에 따라 데이비드 베컴을 데려올 수 있었다. MLS에서는 이 규정을 ‘베컴룰’이라고 칭한다. 돈 가버의 결정이 아니었다면 베컴은 미국에서 큰 인기를 누릴 기회조차 얻지 못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은 MLS가 멕시코와 베네수엘라, 아르헨티나 등 중남미 아메리카 출신을 통칭해서 부르는 히스패닉만의 리그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는 어느 정도는 맞고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다. 물론 리그 출범 초기 히스패닉이 보인 축구에 대한 관심이 지금까지 MLS가 이어져 온 원동력이 됐다는 점은 부인할 수 없다. 지금도 볼리비아 국가대표 제이미 모레노(DC유나이티드)는 많은 히스패닉 팬들을 몰고 다닌다. 그의 소속팀은 히스패틱이 주로 거주하는 남서부와는 거리가 있는 워싱턴에 연고를 두고 있지만 그를 보기 위해 히스패닉은 장거리 원정도 마다하지 않는다. 그는 리그 최고의 스타다.

멕시코 구단 치바스 과달라하라 역시 히스패닉 시장을 공략하겠다는 목표로 LA에 치바스 USA라는 팀을 만들기도 했다. 치바스 USA는 치바스 과달라하라와 선수를 교환하고 유소년 발굴도 함께 한다. 이 팀은 많은 히스패닉으로부터 사랑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인터리그와 비슷한 개념의 수페르리가를 창설해 MLS 상위권 팀과 멕시코 리그 상위권 팀이 맞붙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도 했다. 이렇듯 축구라면 죽고 못사는 히스패닉이 MLS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건 부인할 수 없다. 흑인을 추월해 백인에 이어 미국내 두 번째로 많은 인종이 된 히스패닉은 앞으로도 MLS에 큰 영향력을 행사할 것이다.

중산층 스포츠인 축구와 ‘사커맘’
하지만 더 놀라운 사실은 백인 사회가 MLS에 큰 관심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지난해 경기당 평균 38,495명이 입장해 MLS 평균 관중 1위를 기록한 시애틀은 인구의 90%이상이 백인인 도시다. ‘축구 수도’ 시애틀 외에도 토론토와 필라델피아 등 히스패닉이 많이 살지 않는 도시의 구단이 관중 동원에서 상위권을 차지했다는 점은 의미하는 바가 크다. 반대로 히스패닉 비율이 가장 높은 뉴멕시코주를 연고로 하는 MLS 구단은 아직 없다. MLS 경기장이 히스패닉으로만 가득찰 것이라는 우리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MLS 경기장에는 백인의 비율이 압도적으로 높다.

우리는 흔히 축구를 서민의 스포츠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에서는 이야기가 다르다. 미국에서의 축구는 중산층의 스포츠다. ‘사커맘’이라는 단어를 한 번씩은 들어봤을 것이다. 미국에서 농구 코트처럼 운동 환경이 보편화되지 않은 축구는 부모들의 뒷바라지가 필요한 종목이다. 시 외곽에 있는 훈련장으로 가기 위해 부모들은 경제적 여건과 시간이 있어야 한다. 또한 축구 교육 프로그램이 보편화되지 않아 훈련 참가비도 만만치 않은 편이다. 그냥 잔디밭에서 공놀이를 하는 수준은 누구나 가능하지만 집안에 어느 정도 여유가 없으면 전문적으로 축구를 즐길 수 없다.

그러다보니 흑인보다는 백인들이 축구를 수월하게 접할 수 있는 환경이 됐다. 또한 아무리 MLS가 발전하고 있다고 해도 축구선수로 성공하는 건 미국 사회에서 별다른 매력이 없는 게 사실이다. 미식축구와 농구, 야구에 비하면 아직도 MLS의 시장은 작다. 올 시즌 MLS 연봉 랭킹에 따르면 데이비드 베컴(LA 갤럭시)이 72억 원을 받아 최고 연봉 선수로 기록됐고 티에리 앙리와 라파엘 마르케스(이상 뉴욕 레드불스)가 그 뒤를 따랐다. 하지만 미국인 선수 중 가장 많은 돈을 받은 랜던 도노반의 연봉은 25억 원에 불과(?)했다. 운동에 생계를 걸어야 하는 빈곤층은 한가하게 축구나 하고 있을 시간이 없다. 미식축구나 농구 등 성공 가능성이 더 큰 스포츠에 집중해야 한다.

결국 이 같은 현상은 MLS가 재정적으로 여유 있는 백인들의 관심을 끄는 요인이 됐다. 실제로 미국내에서는 전문적인 선수가 아니라 그냥 단순한 취미로 축구를 즐기는 이들을 살펴봐도 대부분이 백인이다. 축구에 대한 중산층의 관심이 꾸준하다보니 기업 스폰서들도 꾸준히 MLS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1990년 초반 콜로라도 덴버 시의회 선거에 나선 한 여성이 처음 만들어낸 신조어 ‘사커맘’은 이제 미국내에서 자녀들에게 고급 스포츠를 접할 수 있을 정도의 능력을 지닌 중산층을 대변하는 단어가 됐다. 미국 대표 선수 중에도 백인의 비율이 압도적이라는 건 시사하는 바가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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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지난해 MLS에서 우승을 차지한 콜로라도 래피즈 선수단과 기념 촬영을 하는 모습. (사진=콜로라도 래피즈 공식 홈페이지)>

축구의 중심을 향해 가는 MLS
이유야 어찌됐건 미국 축구와 MLS는 성공가도를 달리고 있다. 빌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은 2010 남아공 월드컵 현장을 직접 찾아 미국이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순간 라커룸으로 향했다. 전직 대통령이 국가대표팀의 16강 진출에 이토록 관심을 갖는다는 건 현재 미국의 축구 위상을 대변하는 일이기도 하다. 빌 클린턴은 라커룸에서 선수들과 맥주를 마시면서 16강 진출에 대한 기쁨을 나누기도 했다. 미국은 최근 세 차례 월드컵 중 한 번은 16강에 올랐고 한 번은 8강에 오를 정도로 축구 강국이 됐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해 MLS 우승팀 콜로라도 래피즈를 백악관으로 초대하기도 했다. 그는 이 자리에서 딸 사샤가 축구팀에서 활동하고 있다면서 자신을 ‘사커 대드(soccer dad)’라고 표현했다. 오바마 대통령은 콜로라도 래피즈가 플레이오프에서 보여준 결과에 대해서도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는 래피드 사장에게 10번 유니폼을 선물 받은 뒤 웃으면서 이런 말을 했다. “허허. 나와 메시가 같은 번호군요.” 변방에 불과하던 축구에 대해 미국 대통령의 대접과 인식 자체가 달라졌다는 건 큰 의미를 지닌다.

지난 시즌 MLS는 놀라운 성과를 냈다. 경기장 규모와 경기수 등 여러 변수가 있어 이 수치를 절대적인 인기의 척도라고는 할 수 없지만 이 사실만으로도 대단한 일이다. MLS는 경기당 평균 17,870명의 관중을 기록하며 NFL(경기당 66,950명)과 MLB(경기당 3,0352명)에 이어 미국 프로스포츠 중 평균 관중 3위라는 기록을 세웠다. NBA(경기당 17,319명)와 NHL(경기당 17,126명)을 앞서는 놀라운 성과였다. 스코틀랜드 프리미어리그(경기당 13,677명), 잉글랜드 2부리그 격인 챔피언십리그(17,388명)보다도 많은 수치였다.

물론 아직은 MLS가 4대 미국 프로스포츠에 비하면 영향력이 큰 편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MLS는 눈부시게 발전했고 앞으로의 잠재성도 무궁무진하다. 브라질에 이어 전세계에서 등록된 축구선수가 두 번째로 많은 미국은 ‘축구의 변방’에서 ‘축구의 중심’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 MLS가 4대 미국 프로스포츠 시장을 뒤흔들 정도로 더 성장한다면 아마 전세계 스포츠 시장의 흐름이 또 어떻게 바뀔지 모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