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벌어진 2011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은 비록 전북의 패배로 끝났지만 내 기억 속에 평생 남을 경기였다. 월드컵을 비롯해 나름대로 30년 동안 수도 없이 많은 경기를 현장에서 지켜봤지만 정말 솔직한 심정으로 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전보다 2006 독일월드컵 토고전보다 이번 경기에 더 강렬한 인상을 받았다. 전북의 승리로 끝났다면 더 좋았겠지만 이 경기는 앞으로도 30년 넘게 더 지켜볼 경기 중 가장 인상에 남는 톱3안에 들 것 같다.

과장된 표현이라고 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직접 이 경기를 보고 느낀 감정이 이러하다. 평소 “알레 알레”하는 서포터스의 동떨어진 응원 구호를 그리 좋아하는 편은 아니었다. 일반 관중이 따라할 수 없는 괴리감이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승현의 극적인 동점골이 터진 뒤 전관중이 서포터스 응원을 따라하며 들썩이는 모습은 지금 생각해도 소름이 돋을 정도다. 이런 분위기와 이런 극적인 경기, 이런 스토리가 있는 경기는 생전 처음이었다. 이번 결승전에는 모든 게 다 갖춰져 있었다.

최고의 경기이자 최악의 경기

전북은 경기에서 패했다. 분하고 아쉽지만 이 결과는 받아 들여야 한다. 이제 와서 후회해도 소용없다. 얄밉지만 8강전부터 숱한 위기 상황(?)을 이겨낸 알 사드의 우승에 축하를 보낸다. 전북은 경기를 주도하면서 넣을 수 있는 완벽한 찬스를 여러 차례 날린 반면 알 사드는 넣을 수 있는 상황에서 모두 득점에 성공했다. 전북의 승부차기 패배는 변명의 여지가 없다. 축구는 항상 이렇다. 이길 팀은 어떻게든 이긴다. 내용에서 압도하고도 진 경기에 대해 내용은 좋았으니 우리가 이긴 걸로 치는 건 없다. 알 사드는 우승할 자격이 있다.

그런데 아쉬운 건 짚고 넘어가야겠다. 이 경기에서 알 사드의 두 번째 골을 넣은 카데르 케이타는 원래 이 경기에 나설 자격이 없는 선수다. 알다시피 수원과의 4강 1차전에서 관중을 폭행해 퇴장을 당했고 누가 봐도 중징계가 불가피한 선수였다. 하지만 케이타는 버젓이 결승전에 나와 전북을 상대로 귀중한 골까지 기록했다. AFC의 납득할 수 없는 결정으로 인해 케이타는 관중을 때리고도 결승전에 나설 수 있었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만약 케이타가 결장했다면 어떤 상황이 펼쳐졌을지 모르겠다.

이걸 그냥 AFC를 비난하는 걸로 끝내면 우리 속은 시원할지도 모르겠다. 납득할 수 없는 이유로 알 사드 손을 들어준 AFC를 욕하고 애써 자위하면 분한 마음이 조금 풀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는 여기에서 교훈을 얻어야 한다. 우리는 왜 AFC가 이런 상식에서 어긋난 결정을 내리는 동안 목소리를 내지 못했을까. 우리는 챔피언스리그를 2년 연속으로 우승한 K리그를 보유했고 월드컵에서 4강까지 진출한 축구 강국이라고 자부해 왔는데 축구 행정력은 아직도 후진국이나 마찬가지다.

AFC에서 한국의 목소리는?

사실 AFC에서 한국의 영향력은 극히 부족하다.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AFC는 일본과 중동의 힘에 의해 움직였고 최근에는 여기에 중국의 파워까지 가세했지만 우리는 그냥 이 의견에 따르는 수준이다. 대한축구협회 국제부에서 파견된 소수의 인원이 AFC에서 일하고 있을 뿐 실질적인 영향력을 행사하는 한국인은 AFC 내부에 없다. 그러니 당연히 중요한 결정을 때릴 때 한국의 의견은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만약 AFC가 한국의 힘에 의해 움직였다면 케이타는 이번 결승전을 관중석에서 지켜봐야 했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결국 스포츠는 권력과 돈의 싸움이다. 스포츠를 페어 플레이와 정의의 승리로 믿어온 이들에게는 충격적일 수 있겠지만 이건 엄연한 사실이다. 전북이 알 사드와의 경기에서 당한 단 한 번의 패배(공식 기록상은 무승부)를 전술상으로 분석하는 건 사실 지금 상황에서 별로 중요한 게 아니다. 더 중요한 건 왜 전북이 관중을 때린 케이타에게 통한의 골을 허용했는지 이 상황을 분석하는 것이다. 전북이 아시아 정상 등극에 실패한 건 결국 거대한 AFC의 권력에 반하는 목소리 한 번 내지 못한 우리의 행정력 때문이다.

정몽준 회장 이후의 한국 축구

2002 월드컵 유치전 당시를 기억해보자. 일본은 우리보다 7년이나 먼저 월드컵 유치 준비에 들어갔다. 한국이 한참 늦게 유치전에 뛰어들자 다들 상대가 안 되는 승부라고 했다. 하지만 FIFA 부회장 선거에서 일본 마라타 타다오를 꺾고 당선된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의 힘은 막강했다. FIFA 집행위원이 없어 FIFA 내부에서 선거 유세를 펼치지 못한 일본은 ‘지일파’로 알려진 주앙 아벨란제 FIFA 회장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일본이 외곽만 빙빙 돌며 유치 활동을 하는 동안 정몽준 회장은 FIFA 집행위원을 직접 만나 유치전을 펼쳤다.

결국 “한국은 절대 안 될 것”이라는 반응을 깨고 한국은 일본과 월드컵 공동 개최를 이뤄냈다. 한국에 비해 월등히 유치전에서 앞서있던 일본에서는 대결에서 사실상 패배했다고 할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 정몽준 회장은 불가능한 일을 결국 현실로 만들었다. 많은 이들이 한국의 월드컵 유치를 위해 노력했지만 만약 정몽준 회장이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도 월드컵을 남의 이야기로만 생각했을 것이다. 이렇듯 막강한 힘을 보유한 행정가가 있다는 건 유럽파 축구 선수를 보유한 것 이상으로 큰 영향력이 있다.

다시 AFC로 돌아와 보자. 우리는 지금 AFC에서 전혀 영향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있다. 중동과 일본이 AFC를 휘어잡는 동안 아무 것도 못했다.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를 2년 연속으로 제패하는 등 공 차는 실력은 나날이 늘었지만 오히려 행정력은 한참 뒤로 퇴보했다. 진짜 축구 강국이 되려면 공 차는 실력만큼 행정력도 수반되어야 한다. 관중을 폭행하고도 보란 듯이 경기에 나오는 상대팀 선수를 막아낼 도리가 있을까. 그 선수가 그라운드를 휘저으면서 골까지 넣는데 어떻게 전북이 이길 수 있을까.

스포츠 행정 인재가 나오려면

스포츠 외교에 대한 현실을 인정하고 최근 들어 각 대학에서는 이를 집중적으로 공부하는 학과를 개설했다. 인재를 육성해 스포츠 전반적인 분야에 진출하겠다는 야심찬 목표를 세웠다. 하지만 현실과의 괴리감은 적지 않다. 현실적으로 이를 학문으로 다룬 이들이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위치에 선다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스포츠 외교에 뜻을 품고 열심히 공부해 좋은 대학에 가 전공을 살린다고 해도 이들이 IOC나 FIFA, AFC 등에서 영향력 있는 자리에 설 수 있을까. 아마 하늘의 별따기 만큼 어려울 것이다.

현실적으로 국제 스포츠계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이는 바로 문대성 현IOC 위원이다. 일단 큰 힘을 얻는 자리에까지 올라가려면 올림픽 금메달이나 월드컵에서의 맹활약은 수반되어야 한다. 아무리 공부를 열심히하고 학문적으로 이를 연구했다고 하더라도 선수 출신으로 큰 업적을 쌓은 이들보다 높은 자리에 올라서기는 어렵다. 혹시 삼성그룹 총수 아들이라면 모를까 ‘공부해서 IOC나 FIFA’ 가는 건 <슈퍼스타K>에서 우승하는 것보다 어렵다. 결국 운동으로 최고 수준에 올랐던 이가 행정가로서의 노력을 기울이는 게 가장 현실적인 방법이다.

스포츠 외교 분야에서 일하기 위해 열심히 공부하는 이들에게 이는 참 잔인한 말일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앞서 내가 말한 건 얼마 전 만난 스포츠 행정학 교수가 한 말을 인용한 것일 뿐이다. 현장에서의 목소리도 이렇다는 말이다. 결국 인재 육성 시스템이 바뀌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운동으로 한가닥 했던 이들은 은퇴하면 대부분 지도자의 길을 걷는다. 올림픽 메달 리스트나 유럽에서 활약했던 축구선수들도 은퇴하면 자신보다 능력이 뛰어난 선수를 육성하는데 집중한다. 물론 이도 당연히 해야 할 일이지만 행정가로 나서는 사람도 나와야 한다.

“장외에서도 힘이 있어야 한다”

박지성이 은퇴 후 축구 행정가가 된다면 한국 축구도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박지성 본인의 선택이다. 누가 강요할 수는 없다. 이제 한국 축구계는 전세계적으로 많은 관심을 받는 한국 선수들이 은퇴 후 행정가로 활동할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프로그램을 개발해야 한다. 한국 축구는 정몽준 회장 이후 국제 무대에서 힘을 발휘할 인물의 계보가 사실상 끊겼다. 케이타의 골을 단순한 한 골로 바라봐서는 안 된다. 이건 스포츠 시장의 권력과 힘의 구조가 어떤 것인지 보여주는 단적인 예다.

전북의 패배는 여전히 씁쓸하다. 이틀의 시간이 흘렀지만 아직도 마음 한 켠이 허하다. ‘침대축구’나 일삼는 팀에 우승컵을 넘겨줬다는 사실에 분노하는 것도 다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냉정해 질 필요가 있다. 왜 우리는 관중을 때리고도 버젓이 결승전에 나서는 케이타를 보고 있어야만 했는가. 최강희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기자회견에서 이런 의미심장한 말을 했다. “아직도 한국 축구가 힘이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 매년 AFC 챔피언스리그에 네 개 팀씩이나 나가는데 그만한 힘이 장외에서도 있어야 하지 않겠나.”

나는 여기에 덧붙여 이런 말을 하고 싶다. “그치? 이렇게 가서는 또 당하겠지? 앞으로 이런 불합리한 일 당하지 않으려면 사람 불러야 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