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정남’ 칼럼 이후 나에게 축구계의 애매한 상황을 해결해 달라는 문의가 많이 들어온다. 경기장에 가면 여고생 축구팬들이 달려와 “제가 XXX 선수를 좋아하는데요. 그러면 저는 ‘얼빠’인가요? ‘팀빠’인가요?”하고 묻는다. 가장 난감했던 순간은 "‘얼빠’와 ‘팀빠’의 기준으로 선수의 결혼 여부를 내세웠는데 이혼한 선수나 약혼한 선수는 어떻게 판단해야 하는 것인가"라는 100분 토론에나 나올 법한 무척 진지한 질문을 한 초등학생 축구팬에게 받았을 때였다.

오늘(5일) 전북과 알 사드의 2011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을 앞두고도 비슷한 질문을 많이 받았다. K리그 팬들이 ‘공공의 적’ 알 사드를 격파하는 전북을 응원하기 위해 전주성이 총집결할 예정인데 과연 자기가 응원하는 팀 유니폼을 입고 가도 되느냐는 것이었다. 물론 자기 마음이다. 이 추위에 민소매 티셔츠를 입고 가건 슬리퍼를 신고 가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된다. 하지만 어느 정도의 예의는 필요한 법이다. 지금부터 내 생각을 밝히려 한다.

일단 전주성에 다른 K리그 팀 유니폼을 입고 가는 건 그렇게 바람직한 모습은 아닌 것 같다. 많은 이들은 전북을 K리그 대표라고 생각하고 어떤 K리그 팀 유니폼을 입어도 상관없다고 생각할지 모르겠다. K리그 대표를 응원하는 마음이야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오늘 경기는 전북이 상대팀을 안방으로 불러들여 치르는 홈 경기다. K리그를 대표하기에 앞서서 전북을 대표하는 축구팀이 경기를 하는 날이다. 그것도 최대 과제인 아시아 정상 트로피를 놓고 혈투를 펼치는 날이다. 이건 K리그 올스타전이 아니다.

형형색색 다른 팀 유니폼을 입고 경기장에 가는 건 최대한 자제했으면 좋겠다. K리그의 축제가 되는 모습을 상상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오늘 경기의 주인인 전북에서는 이 경기가 K리그 축제라기보다는 전북이 아시아 정상을 확인하는 경기가 되길 원한다. 마지막 관문에 올라서기 위해 대장정을 치른 전북으로서는 챔피언스리그에서 수원도 적이었고 서울도 적이었다. 아직 K리그의 축제를 치르기에는 이른 시기다. 가장 중요한 일전이 남았기 때문이다.

비신사적인 행위를 일삼은 일 사드가 보기 좋게 무너지는 장면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정 전북의 승리와 알 사드의 패배를 현장에서 지켜보고 싶거든 어느 정도는 예의를 갖추고 전주성을 찾는 게 어떨까. 다른 팀 K리그 팬들이 전북 유니폼을 사 입고 응원하는 건 자기가 응원하는 팀에 대한 자존심을 버리는 일이다. 나는 고향국민은행을 응원하던 시절 목에 칼이 들어와도 울산현대미포조선 유니폼을 입을 생각은 없었다. 응원하는 팀을 버리고 다른 유니폼을 입는다는 건 중학교 시절 수학여행에서 여장을 하는 것보다 더 창피한 일 아닌가.

내 생각에는 전북의 팀 컬러인 녹색 계열의 옷을 입고 가는 정도면 아주 예의 바른 선택이라고 본다. 꼭 전북의 상징인 형광 초록색 옷을 구해 입지 않아도 된다. 그냥 쑥색이건 국방색이건 녹색 계열이라면 상관없을 것이다. 이 정도 에티켓은 지키는 게 K리그의 축제를 지키는 예의라고 생각한다. 내가 응원하는 팀에 대한 자존심도 지키면서 전북이 K리그 대표로 아시아 정상에 서는 걸 염원하는 의미로 이 정도면 충분하다. 관중석이 형형색색으로 물든 모습보다는 전북의 상징인 녹색으로 물든 모습이 더 멋져 보인다.

나도 개념 없이 행동한 적이 몇 번 있다. 서울에서 열리는 서울-수원전에 푸른색 티셔츠를 입고 간 적도 있고 수원에서 열리는 수원-서울전에는 빨간 점퍼를 입고 간 적도 있다.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입고 갔는데 이건 예의에 어긋나는 일이다. 원정팀 상징색 옷을 입고 경기장에 갔다고 해 경찰 출동하는 것도 아니고 쇠고랑 차는 것도 아니지만 이건 기본적인 에티켓이다. 꼭 특정팀을 응원하는 마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중립적인 입장이라면 홈팀의 바탕색 정도를 입고 가는 게, 정 아니라면 원정팀 바탕색 정도는 피하는 게 옳다.

수원월드컵경기장에 가면 첼시 유니폼을 입고 수원을 응원하는 이들이 종종 있다. 이걸 굉장히 좋지 않게 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들이 수원의 상징색을 미리 알고 같은 푸른색 유니폼을 입고 온 정성이 더 멋져 보인다. 수원 유니폼을 입고 응원하는 게 가장 이상적이겠지만 같은 바탕색 유니폼이라면 적어도 붉은 티셔츠를 입고 관중석에 앉아 있는 것보다는 낫다. 전주성을 찾을 때는 서울이나 수원 유니폼보다 오히려 녹색 계열의 셀틱 유니폼이 더 낫다.

시각적인 효과는 상당하다. 전주성이 녹색 물결로 가득 찬다면 아마 알 사드 선수들은 경기 전부터 잔뜩 긴장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전북이 K리그 대표로 알 사드를 꺾고 아시아 정상에 서길 원하는 이들이 있다면 관중석을 녹색으로 물들이는데 미약하나마 힘을 보태는 게 어떨까. 이런 작은 정성 하나 하나가 모이면 관중석을 녹색 물결로 가득 채울 수 있다. 일단 나는 옷장 뒤져보고 마땅한 녹색 옷 없으면 군대에서 입던 녹색 티셔츠라도 입고 갈 생각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