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군대에서 제대하기 전날 밤을 잊지 못한다. 이날만을 손꼽아 기다렸지만 같이 먹고 자며 고생했던 전우들과 헤어지는 건 슬픈 일이었다. 둘러 앉아 이야기를 나누면서 즐거웠던 일과 고통스러웠던 순간에 대해 함께 떠올렸다. 혹한기 훈련 때 구두약에 불을 붙여 라면 끓여 먹는다고 하다가 걸려 분대원 전체가 영창에 갈 뻔했던 일, 유격 훈련 때 텐트에서 부루마블을 하다가 빌딩을 몰래 호텔로 바꾼 후임을 심하게 갈궜던 일 등 지난 추억을 웃으며 돌이켜 본 시간이었다.

만약 이런 작별의식이 없었다면 그냥 2년 동안 고생한 군대에서 해방된다는 후련함만 있었을 것이다. 제대 전날 후임들로부터 받은 편지와 앨범은 군대가 꼭 시간만 허비하는 곳이 아니라는 걸 느끼게 해줬다. 모포말이를 하면서 내 후두부를 강타한 녀석의 이름도 아직 기억한다. 뺀질뺀질한 고참 때문에 고생도 많이 한 후임들이었지만 내 군 생활 마지막 밤이라고 ‘냉동식품 파티’를 열어준 녀석들의 따뜻한 마음은 아직도 잊을 수 없다. 물론 다시 가라면 절대 안 가겠지만 말이다.

윤상철과 신태용, 쓸쓸했던 작별

만남만큼 중요한 게 이별이다. 하지만 그동안 K리그는 제대로 된 작별식을 해준 적이 없었다. 1997년 300경기 출장과 100골 돌파의 역사적인 기록을 세운 ‘K리그의 전설’ 윤상철은 “3년은 더 뛸 수 있다”고 했지만 소속팀 안양LG는 그를 내쳤다. 성대한 은퇴식도 없이 웨이트트레이닝장에서 구단의 감사패 하나 받고 팀을 떠나야 했다. 안양은 그리고 윤상철을 임의탈퇴했다. 결국 안양의 동의 없이 국내 타 팀으로 이적이 불가능했던 그는 호주로 건너가 2년 동안 더 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신태용은 1992년 프로에 데뷔해서 2004년까지 단 한 번도 성남을 떠난 적이 없었다. 401경기에 출전해 99골을 넣고 성남의 리그 6회 우승을 이끌었지만 결국 그는 은퇴경기도 하지 못하고 팀을 떠나야 했다. 노장이라는 이유로 재계약 과정에서 부딪혔고 결국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도 하지 못한 채 호주로 떠나 선수 생활을 이어가다가 은퇴했다. 만약 그가 감독으로 성남에 돌아오지 않았다면 우리는 신태용을 아련한 이름으로만 기억했을 것이다. K리그의 역사를 송두리째 바꿔놓은 우리의 전설들은 이렇게 팬들의 박수도 받지 못한 채 쓸쓸히 사라졌었다.

윤상철이나 신태용은 그나마 나은 편이다. 이들보다 활약이 다소 적었던 이들은 언제인지도 모르게 우리의 곁에서 사라졌다. 구단에 오랜 시간 헌신해도 나이가 들면 노장이라는 이유로 재계약 불가 방침을 정한 뒤 내치는 경우가 많았다. 그냥 구단 홈페이지 선수 소개란에서 사라지면 그게 끝이었다. 우리는 지금까지 ‘전설’들을 ‘전설’이라 부르지 못했다. 그냥 ‘노장’이라고 불렀다. 나이를 먹고 기량이 떨어지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정리해고 하는 게 K리그의 오랜 풍습이었다. 이들은 팬들에게 작별을 고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았다.

박수를 받으며 떠난 이을용

하지만 지금까지 레전드 대우에 인색했던 K리그가 최근 전설들을 대하는 태도는 무척 많이 달라졌다.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요 근래 K리그 구단들이 의식을 바꿔 레전드를 제대로 대우하는 모습을 보면 우리의 축구가 제대로 된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 같아 기분이 좋다. 잘못 된 걸 바로 잡는 것도 좋지만 잘하고 있는 걸 칭찬하는 일도 해야 한다. 오늘은 K리그의 레전드 대우에 대한 좋은 예를 짚어 보고자 한다. 이런 일은 칭찬을 듬뿍 해줘야 한다. 그래야 앞으로도 전례로 삼을 수 있다.

강원은 최근 이을용 은퇴 경기를 치렀다. 이을용은 강원의 상징과도 같은 선수다. 그는 2009년 자신의 고향인 강원도에 K리그 팀이 생기자 만사를 제쳐두고 곧바로 달려왔다. 더 많은 돈을 벌 수도 있지만 그는 고향 팀을 위해 강원으로 이적해 선수 생활의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신생팀 강원은 ‘월드컵 스타’ 이을용으로 인해 지역 팬들에게 더 쉽게 다가갈 수 있었고 이을용은 강원도민을 위해 기부 활동을 하는 등 고향 팀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이을용의 은퇴경기는 무척 성대하게 치러졌다. 해군 1함대 군악대를 초대해 은퇴경기의 분위기를 달궜고 전·후반 7분에는 관중 전체가 1분 동안 기립박수를 보내기도 했다. 김진용은 골을 넣은 뒤 국가대표 유니폼을 입고 그 유명한 ‘을용타’ 세레머니를 해 즐거움을 선사했다. 경기가 끝난 뒤 이을용은 카퍼레이드를 하면서 경기장을 돌았고 관중들은 경기장을 떠나지 않은 채 이을용의 이름을 연호했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고향 팀에서 헌신한 이을용에 대한 마지막 예우였다.

배우 김선아는 자신의 미투데이에 “중국에 있어서 오늘 이을용 선수의 은퇴 경기를 보지 못해 이렇게나마 응원합니다. 당신의 땀과 열정을 기억하겠습니다”라는 글과 함께 강원 유니폼을 입고 찍은 사진을 공개했다. 단순히 한 연예인의 사담이라고 치부할 수도 있지만 만약 강원이 이을용의 마지막 경기를 성대하게 치러주지 않았다면 이러한 관심도 생길 수 없었을 것이다. 선수가 은퇴한다는 사실도 제대로 알리지 않은 과거의 상황을 떠올려 본다면 강원은 무척 멋진 일을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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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중용이 은퇴 경기를 마치고 팬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하는 모습. (사진=인천유나이티드)

임중용의 마지막 15분

일주일 뒤 인천에서는 임중용 은퇴경기가 열렸다. 시즌 개막 전 허정무 감독은 인천의 창단 멤버로 오랜 시간 팀을 위해서 뛴 임중용에 대해 “올해는 꼭 성대하게 임중용의 은퇴경기를 치러주고 싶다”고 했다. “5분이건 10분이건 팬들에게 마지막 인사를 할 수 있는 시간을 마련하겠다”는 말도 덧붙였다. 그리고 임중용은 이날 은퇴경기에서 후반 31분 투입돼 의미 있는 마지막 경기를 치렀다. 그라운드에 들어서며 팬들에게 손을 들어 인사한 그에게 팬들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경기는 0-0으로 팽팽한 상황이었다. 임중용은 이날 경기에서 원래 포지션인 중앙 수비수가 아닌 수비형 미드필더로 15분을 뛰었다. 1년 동안 제대로 된 훈련을 하지 않은 그를 투입한다는 건 승부의 세계에서는 위험한 일일수도 있다. 그런데 허정무 감독은 경기가 끝난 뒤 이런 말을 했다. “고민을 한 것도 사실이다. 임중용이 운동을 꾸준히 하지 못해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자칫하면 임중용의 교체 투입으로 경기에서 패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래도 팬들에게 마지막으로 작별 인사를 하는 게 도리인 것 같아 그의 교체 투입을 결정했다.”

“우린 너를 영원히 노래해. 만세 만세 임중용.” 이날 경기장에는 임중용을 위한 응원가가 끝없이 울려 퍼졌다. 경기가 끝난 뒤 동료들은 함께 은퇴식을 치른 김이섭과 임중용을 무등 태우고 경기장을 돌았다. 배효성은 임중용에게 마지막으로 주장 완장을 넘겨줬다. 이러한 장면은 인천 팬들에게는 감동 그 자체였다. 임중용의 마지막을 기억하려는 팬들은 선수단 출입구에서 기자회견을 마치고 한참 뒤에 나오는 임중용을 기다렸다가 사인을 받으며 기뻐했다. 임중용은 약 20분 동안 일일이 모든 팬들에게 사인을 해줬다.

허정무 감독의 배려가 훌륭했다. 또한 인천 구단의 은퇴경기에 대한 노력도 멋졌다. 이을용과 임중용은 동갑내기 친구다. 비슷한 시기에 은퇴를 하게 돼 여러 모로 비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인천 구단 관계자도 “사실 강원의 이을용 은퇴경기를 보고 우리도 뒤쳐질 수 없다고 생각해 더 열심히 준비했다”고 전했다. 임중용도 우스갯소리로 “을용이 은퇴식보다 더 멋지게 해 달라”고 부탁했다. 이런 라이벌 구도와 경쟁은 언제든 환영한다. 레전드 대우에 대한 경쟁은 하면 할수록 K리그를 풍성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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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동은 최근 500경기 출장의 대기록을 세웠고 포항에서는 이 대기록에 맞춰 기념 티셔츠를 제작하는 등 전설에 대한 예우를 다하고 있다. (사진=포항스틸러스)

‘전설’과 ‘그냥 노장’의 아주 미묘한 차이

포항도 최근 500경기 출장의 대기록을 달성한 김기동을 위해 직접 기념 티셔츠를 제작했다. 500경기 출장 기록이 달성되자 빗속에서도 1만여 명의 관중이 기립 박수를 보내는 장관이 연출됐다. 디자인은 촌스러울지 몰라도 훗날 김기동 500경기 기념 티셔츠를 가지고 있는 팬은 자신이 ‘전설’의 일부를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을 뿌듯하게 생각할 것이다. 경기마다 자동차 경품을 내거는 것보다는 이런 전설적인 선수를 조명하는 게 더 K리그가 가야 할 옳은 길이다. 결국 이런 역사가 많이 쌓이는 팀일수록 명문이 되는 법이다.

만약 경기장에서 관중의 폭동이 일어났다고 가정해 보자. 경찰 출동한다고 쇠고랑 찬다고 말려도 이건 제지할 수가 없다. 하지만 이때 만약 ‘인천의 레전드’ 임중용이 마이크를 잡고 “여러분. 저 임중용입니다. 이런 행동은 하지 말아 주세요”라고 한다면 어떻게 될까. 이 사람들 경찰 말은 안 들어도 임중용 말이라면 듣는다. <볼턴 레전드 아무개, “이청용은 위대한 선수”> 이런 유럽 축구 기사를 본 적이 있을 것이다. 훗날 이 레전드가 백수로 전락하더라도 그는 수십 년 전 선수로서의 가치는 계속 남아 있다. 그만큼 축구에서 레전드가 차지하는 위상은 엄청나다. 은퇴 경기 활성화를 시작으로 앞으로는 레전드를 대우하는 환경 자체에도 변화가 있었으면 좋겠다. 20년 후에도 이을용과 임중용, 김기동의 유니폼을 입은 팬들이 넘쳐나야 한다. 레전드를 제대로 만들어야 충성심 높은 팬들을 계속 유지할 수 있다.

우리는 지금까지 별로인 상품을 멋지게 포장하기는커녕 제대로 된 상품도 신문지에 싸서 창고에 쳐 박아 뒀었다. 인천 구단 관계자의 말처럼 앞으로는 레전드 대우에 대해 구단들이 경쟁을 더 펼쳤으면 좋겠다. 물론 우승 횟수도 명문 팀으로 가는데 중요한 요소가 되지만 진짜 명문 팀은 레전드를 얼마나 많이 보유하고 있느냐다. 다가올 드래프트에서 얼마나 좋은 선수를 뽑는 것도 중요하지만 정작 더 중요한 건 우리가 가진 전설들을 얼마나 제대로 돋보이게 하느냐는 것이다. 이들을 ‘전설’로 남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노장’으로 남게 할 것인가는 우리의 의지에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