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중반, 축구계가 들썩였다. 브라질에서 축구 유학 중이던 임규혁 때문이다. 임규혁은 인터넷에 뜬 단 하나의 동영상으로 천재 소리까지 들으면서 모두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또한 ‘축구 황제’ 펠레가 극찬한 선수로도 유명했다. 유학파 선수를 동경하던 당시의 분위기상 임규혁은 금방 슈퍼스타가 될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는 소리 소문없이 사라졌다. 이제는 축구 선수의 꿈을 접고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하게 된 임규혁을 어렵게 수소문해 만나 봤다.

임규혁과 만나 허심탄회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가 이렇게 축구 인생에 대해 이야기 할 기회는 지금까지 많지 않았다. (사진=BITPHOTO)

반갑다. 일단 요새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부터 소개해 달라.

축구 선수 생활을 접고 지금은 '메이트 인터내셔널'이라고 유소년 축구선수들을 지도하는 회사를 직접 차렸다. 군대에서 지난 4월에 제대하고 6월에 회사를 설립해 서울과 성남 등의 생활체육회, 구청 등과 함께 유소년 축구 클럽 프로그램을 진행하려고 준비 중이다. 아마 내년 1월 1일부터 가시적인 성과가 나올 것으로 보인다.

축구선수에서 지금은 사장님으로 변신했다. 그러면 직원도 있나. 설마 혼자 차려 놓고 사장님이라고 하는 건 아닌가.

아니다. 지금 남자 직원 한 명과 여자 직원 한 명이 있고 다른 두 명은 또 교육을 받고 있다. 나까지 합하면 5명이다. 조촐하지만 회사는 회사다.

직원들 월급 주려면 회사가 잘 되어야겠다. 그런데 원래 유소년 축구 클럽에 관심이 있었나.

솔직히 처음에는 축구 클럽을 차리는 일에 큰 관심이 있었던 건 아니다. 축구 교실을 하게 되면 취미반 아이들과 선수반 아이들을 나눠야 하는데 이 두 반 아이들을 다르게 대우하고 지도해야 한다. 내가 어릴 적 한국에서 운동할 때 가장 싫었던 게 이런 부분이다. 실력에 따라 지도자들이 선수를 대하는 눈빛에서부터가 다르다. 아무래도 잘하는 친구들에게 더 관심이 가게 되고 그러다보면 실력이 조금 떨어지는 친구들은 상처를 받을 수밖에 없다. 그런데 주위에서도 유학 생활 경험을 살려 아이들을 지도해보는 게 어떠냐고 많이 권유했고 나도 내가 생각했던 이상대로 아이들을 지도한다면 좋을 것 같아 시작하게 됐다.

축구를 그만두고 젊은 나이에 유소년 축구 코치를 하는 이들은 종종 봤다. 하지만 직접 회사를 차린다는 건 쉽지 않은 일 일텐데 준비는 어떻게 해 왔나.

군대에 가기 전부터 이 일을 시작하겠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선수 시절 해외 여러 곳을 돌아다녔는데 그쪽과 유소년 육성에 대해 꾸준히 이야기를 나눠 오기도 했다. 브라질 생활을 꽤 오래 해 그쪽에 가면 지인들이 많아 참 편하다. 4월에 제대하고 나서 곧바로 브라질에 가 6주 정도 지내다 왔다. 경기도 보고 상파울루를 비롯해 유소년 시스템이 잘 갖춰진 곳에 가 아이들 지도하는 것도 유심히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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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에서 언론과 인터뷰하는 임규혁의 모습. 그는 브라질에서도 생방송 텔레비전 프로그램에 출연하는 등 큰 관심을 받았었다.

일단 당신의 선수 생활부터 천천히 이야기해보자. 당신의 축구 인생은 동영상 하나로 밖에 알려지지 않았다. 궁금해하는 이들이 많다. 2001년에 브라질로 축구 유학을 떠났는데 당시에는 축구 유학이라는 게 보편화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 같다.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브라질로 날아갔는데 정말 쉽지 않은 결정이었다. 원래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중학교 1학년 때 브라질에 가려고 했는데 집안 형편이 좋지 않아서 포기했었다. 중학교 3학년 때 다시 한 번 시도해 봤지만 집안이 살짝 기울어져 또 무산됐다. 그래서 원주공고에 입학했다. 당시 실력으로 꽤 주목 받아서 고등학교 1학년 때 괜찮은 대학교 몇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너는 졸업하면 무조건 데리고 간다”는 곳이 서너 곳 있었다. 그러자 아버지께서 고등학교 2학년 때 집안 형편이 좋지 않음에도 욕심이 나 무리를 해서 브라질로 보내주셨다. 내가 너무 가고 싶어 했고 브라질에 가 1년 정도 경험을 쌓다가 잘 되면 눌러 앉는 거고 잘 안 되더라도 갈 수 있는 국내 대학이 있다는 점 때문이었다. 나를 원하는 대학이 다들 좋은 학교여서 고등학교 3학년 때 한국으로 들어오면 어렵지 않게 선택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브라질에 처음 가서 성공 가도를 달린 걸로 안다.

운 좋게 처음에는 잘 풀렸다. 맨 처음 유학 업체 소개로 브라질에 갔는데 유학 업체 사장과 사이가 좋지 않아 혼자 따로 현지 에이전트와 변호사를 통해 상파울루 팀으로 갔다. 고등학교 연령대 선수들과 함께 테스트에 임했다. 실력은 통했는데 말이 워낙 안 통하고 동양인이라 무시하는 애들이 많아서 항상 혼자 지냈다. 그러다 보니 운동에 집중할 수가 없어 4개월 만에 팀에서 나왔다. 그래서 지금은 브라질 2부리그에 속한 리메이라라는 팀에 잠깐 임대 형식으로 갔다.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리는 한 달이 넘는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서 나를 데려온 것이었다. 그냥 대회 때만 쓰려고 빌린 선수였는데 거기에서 꽤 잘했다. 그래서 당시 실력을 인정받아 산토스로 진출했고 산토스에 가서도 한 2년 동안은 승승장구했다. 내 실력도 실력이지만 잘하는 친구들이 워낙 많아서 우승도 많이 경험하고 무척 즐거운 시간이었다.

한국과 지구 반대편이 있는 브라질은 달라도 너무 다를 것 같다. 어떤 점이 특히 다르다고 느꼈나.

처음에는 무서웠다. 다 무섭게 생기고 운동도 무척 거칠었다. 한국에서는 동료들과 훈련을 하다가도 적당한 선에서 태클을 멈춘다. 하지만 브라질에는 그런 게 없다. 운동하다가 다친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처음에는 동료들의 그런 모습이 무척 무서웠는데 뭐 한 달 정도 지나고 나뒹굴다 보니까 적응이 되긴 하더라. 생활을 하는 데는 낙후된 샤워 시설과 화장실 말고는 괜찮았다. 워낙 다 잘 먹어서 음식도 입에 잘 맞았다.

나에게 브라질은 그런 거친 곳이 아니다. 아리따운 여성들이 허리를 돌리면서 삼바 춤을 추는 아름다운 나라다. 내 환상을 깨지 말아 달라. 당신이 국내 팬들에게 알려진 건 1분 짜리 동영상 하나 때문이었다. 동영상이 퍼지게 된 계기가 있나.

당시 조그마한 내 팬 카페가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내가 너무 먼 곳에서 뛰고 있으니까 소식이 궁금해 동영상을 올려 달라고 부탁했었다. 당시 에이전트가 방송 자료를 편집해 1분짜리 동영상을 팬 카페에 올렸는데 이게 엄청난 반응을 일으켰다. 에이전트가 올린 건 1분짜리 하나였는데 나중에는 어디에서 구했는지 더 많은 동영상이 인터넷에 퍼져 있더라.

폭발적인 반응에 부담감을 느꼈을 것 같기도 하다. 갑자기 찾아온 유명세가 당황스럽지는 않았나.

그냥 재미있었다. “아직은 때가 아닌데 벌써 왔나.” 이런 생각이었다. 그 때는 어릴 때니까 뭐 자신만만했다.

‘언젠간 찾아올 유명세가 일찍 찾아왔구나’라는 거였나.

그땐 그랬다. 당시에는 운동도 생각대로 잘 됐다. 유럽에서 스카우트가 와 내 변호사를 만나고 가고 그럴 때였다. 당시 동영상이 퍼질 때는 산토스 소속이었는데 팀 자체가 워낙 좋은 팀이라 나도 20대 초반이 되면 유럽에 가서 뛰고 있을 것이라고 당연하게 생각했다. 호비뉴 같은 애들이랑 같이 운동하면 기분이 어떨 것 같나.

내가 FM에서 호비뉴의 감독이 된 적은 있어도 실제로 호비뉴와 공을 차 본 적은 없다.

호비뉴 뿐 아니다. 엘라노와 알렉스, 그리고 올 시즌 아틀레티코 마드리드로 이적한 디에고, 인천에서 뛰던 루이지뉴도 그때 같이 운동했던 동료들이다. 당시 이 선수들은 정말 대단했다. ‘내가 언제 또 이런 친구들하고 운동을 해볼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정말 천재들은 달라도 뭐가 달랐다. 이 선수들하고 같이 뛰다보니 나도 성인이 되면 유럽에서 뛰고 있을 줄 알았다.

호비뉴는 잘 있나. 안부 좀 전해 달라.

그 친구들하고 지금도 연락을 하겠나. 호비뉴는 보면 인사하는 정도고 디에고하고 친했다. 디에고와 친한 선수가 나와 ‘베프’였다. 그래서 디에고와 함께 자주 어울렸었다. 그런데 애들이 다 성공하더니 MSN 메신저가 바뀌었더라. 지금은 연락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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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혁은 브라질에서 동양인에 대한 차별과도 싸워야 했다. 브라질에서 동양인이 팀의 중심이 되는 건 쉽지 않은 일이었다.

에이, 그렇게 따지면 나도 <연예가중계> 리포터 김태진과 친한데 김태진은 이효리하고 알고 지내니 나도 이효리하고 친한 셈이다. 당신은 산토스에 있다가 리토라우FC라는 팀으로 이적했다. 여기가 그 유명한 ‘펠레 센터’ 아닌가.

약간 애매한 개념이다. 펠레 센터는 펠레가 만든 축구 학교다. 그런데 축구 학교를 설립한 뒤 펠레가 선수 육성에 대한 욕심이 생겨서 유럽으로 선수를 진출시키겠다는 꿈을 가지고 여러 팀에서 몇 명씩 다 불러서 만든 게 바로 리토라우FC다. 펠레 센터와 리토라우FC는 같지만 다른 곳이다. 나는 당시에 산토스에서 뛰고 있었는데 산토스에서 나를 포함한 네 명이 리토라우로 갔고 상파울루에서도 세 명이 갔다. 좋은 팀에 있는 유망주들을 불러와서 팀을 만든 거다.

각 팀 최고의 선수들을 리토라우로 불러 들였다는 이야기인가.

그건 아니다. 각 팀 최고의 선수들을 누가 내주겠는가. 가능성이 보이는 애들을 모은 거였다. 연습구장도 세 면이나 있고 시설도 괜찮았다. 그런데 지금은 없어졌다고 들었다. 다른 팀하고 합병됐다고 한다.

당시 언론에는 “임규혁을 펠레가 스카우트했다”라는 이야기가 퍼졌었다. 그러면 이게 과장된 건가.

어느 정도는 맞는 말이고 어느 정도는 틀린 말이다. 최종적으로 각 구단에서 누구를 리토라우로 데려올 것인가에 대해 펠레가 서명을 한다. “얘는 좋고 얘는 빼고…” 이런 식으로 리스트에 오른 선수를 평가한다. 직접 펠레가 처음부터 뽑은 건 아니었지만 최종적으로 OK를 한 건 펠레다.

펠레하고 친한가.

한 달에 한 번 올까 말까한 사람인데 어떻게 친해지나.

펠레가 당신 머리를 쓰다듬는 사진도 당시에는 무척 유명했다. 이것도 설정인가.

그 사진을 찍기 전 주에 경기에 나서는데 펠레가 이걸 보러 왔었다. 그때 내 등번호가 10번이었다. 사람들이 술렁였다. 축구에서는 10번이라는 등번호가 가진 의미가 무척 큰데 펠레가 만든 팀에서 한국 애가 10번을 달고 있으니 얼마나 황당했겠는가. 펠레가 경기를 보고 있으니 당연히 현지 언론에서 인터뷰를 했다. 질문 중에는 “동양 선수가 10번을 달고 뛰었는데 어떻게 평가하느냐”는 것이 있었다. 인터뷰에서 싫은 소리 할 사람이 누가 있나. 그날 내가 골도 넣었는데 당연히 펠레가 “괜찮은 선수”라면서 좋은 이야기를 해줬다. 그리고 다음 주에 행사가 있어 펠레가 또 찾아왔는데 언론에서도 많이 오니까 펠레가 내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준 거다.

펠레가 당신의 머리를 쓰다듬은 뒤 당신이 ‘펠레의 저주’에 걸렸다는 사람들도 있다.

그 분은 내가 함부로 말할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브라질에 가면 한국에서 보는 동영상보다 훨씬 많은 펠레의 동영상 자료가 있다. 그걸 보니 경이로웠다. 나보다 키도 작은 선수가 잔디도 개판이고 축구공과 축구화도 좋지 않은데 어떻게 저런 플레이를 펼치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펠레의 저주라기보다는 후에 내가 잘하지 못해 실패한 거라고 생각한다. 펠레와 손 잡고 말 섞어 본 게 영광이지 그걸 펠레의 저주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펠레가 세상을 떠나기 전까지 몇 명의 선수에게 그런 걸 해줄까.

들어보니 그렇다. 리토라우에서 과거 K리그 안양 소속이었던 안드레와 함께 생활했다고 들었다. 안드레는 잘 지내나.

안드레가 우리 옆집에 살았다. 자기가 한국에서 대박이었다고, 최고였다고 자랑을 수도 없이 한다. 매일 우리 집에 김치 먹으러 오는 친구였다. 안드레의 아내도 우리 집에 가서 김치 좀 가지고 오라고 시킨다. 지금은 상파울루 1부리그 브라간치누라는 팀 코치를 맡고 있는데 이번에 브라질에 갔을 때도 안드레가 표를 구해주고 경기장 앞에까지 마중을 나왔다. 요새도 잘 지낸다. 그런데 많이 늙었다.

안드레가 K리그에서 잘한 건 기억하지만 그는 플레이보다는 김남일과의 박치기 사건으로 더 유명했었다.

난 안드레가 K리그에서 잘했다고 자랑을 할 때마다 “난 네 경기 못 봐서 모른다”고 했다.

다음 번에 안드레를 만나면 “박치기 동영상 잘 봤다”고 하라. 그런데 당신은 2005년 박성화 감독의 부름을 받고 청소년 대표팀에 합류했었다.

당시 주위 사람들이 “기술위원회에서 너를 지켜보고 있다”면서 “11월이나 12월에 한국으로 부를 수도 있다”고 했다. 브라질에서 시즌을 마친 뒤에 가는 거라 그때쯤이면 몸 상태도 좋을 것이라고 기대했다. 그런데 그 시기 청소년 대표팀 스페인 전지훈련을 하는데 나를 부르지 않았다. 아쉬웠지만 나하고는 인연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브라질에서 더 열심히 하다 보면 나중에라도 기회가 올 것이라고 믿었다. 청소년 대표가 축구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이듬해 2월이 되어서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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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혁은 펠레로부터도 기대를 받는 선수였다. 누군가는 이 모습을 보고 ‘펠레의 저주’를 연상하겠지만 임규혁 본인에게는 잊을 수 없는 영광의 순간이었다.

아버지가 어떤 소식을 전했나.

아직도 정확한 날짜를 기억한다. 2005년 2월 22일 새벽이었다. 자고 있는데 새벽에 급하게 아버지한테 연락이 왔다. “대표팀에서 불러 24일 두 시까지 파주로 가야하니 빨리 한국으로 오라”는 내용이었다. 나는 “안 간다”고 했다. 브라질은 1월 중순부터 삼바 축제 기간이라 브라질 전체가 휴가다. 나도 휴가를 한 달 보내고 이제 운동을 다시 시작한지 갓 일주일이 지날 때였다. 몸이 엉망인데 어떻게 한국에 가나. 더군다나 박성화 감독님을 처음 뵙는 건데 이런 엉망인 몸 상태로는 보여줄게 없었다. 그런데 부모님 심정은 그게 아니었다. 아들이 대표팀에 가는 게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결국 아침에 일어나서 짐 챙기고 산토스에서 상파울루까지 두 시간 반에 걸쳐 비행기를 타고 이동한 다음에 저녁 비행기로 한국에 들어왔다. 한국에 오자마자 곧바로 파주로 가는 강행군이었다. 소집 통보 받고 이틀 만에 파주에 갔으니 얼마나 피곤했겠나.

몸 상태가 말이 아니었겠다.

그렇다. 일단 운동도 안 한 상태였고 비행기를 서른 시간 타고 입국했으니 몸이 정상이 아니었다. 그리고 파주에 입성하자마자 30분 만에 숭실대하고 연습 경기를 했다. 뭐 첫 경기는 그럭저럭 잘 했었다. 경기가 끝난 뒤 다음 날 “오빠 어제 경기 잘했다고 기사 났다”고 여동생한테도 문제 메시지가 왔다. 그런데 그 이후 심한 감기 몸살에 걸렸다. 당시 브라질은 기온이 43도까지 오를 정도로 더울 때였는데 한국에 오니 눈이 쌓여 있었다. 나름대로 몸 관리 한다고 샤워한 뒤에 머리도 바로 말리고 양말 신고 두터운 점퍼 입고 잤는데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였다.

그 이후로 대표팀의 부름은 없었나.

없었다.

이때 브라질 생활을 접고 한국에 정착한 걸로 알고 있다. 한국에 대한 향수 같은 거였나. 어떻게 된 건가.

상카에타노와 이적에 관한 일이 잘 진행되고 있었다. 그런데 청소년 대표팀에 갔다가 다시 브라질로 돌아가려고 하니 주변에서 한국에 있는 게 낫다고 했다. K리그 팀에서 운동하면서 여름에 유럽을 노리든 K리그 팀에 정식 입단하든 해보자고 하더라. 그래서 실제로 K리그 팀에서 잠깐 함께 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입단을 타진한 팀이 있었을 것 같은데.

2부리그 경기에도 나서면서 몸을 만들고 있었고 여름이 되자 스페인에서 나를 영입하고 싶다고 했다. 스페인에서 직접 한국에 와 내가 경기에 나서는 모습을 보겠다고 했는데 이때 발목을 크게 다쳤다. 수술도 못하고 재활로만 4개월을 허비했다. 아버지께서 5~6년간 끊었던 담배를 다시 피우셨다.

저런, 그러다가 K리그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넣었지만 어느 팀의 지명도 받지 못했다. 소속팀 없이 혼자 훈련하다가 재활하는 선수에게는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드래프트를 넣고 한 팀으로부터 전화를 받았었다. “이번에 너를 지명하려고하니 다른 구단에서 전화 오면 무조건 몸이 좋지 않다고 하라”는 내용이었다. 직접 감독님과 통화했는데 나는 8개월 동안 소속 구단도 없이 방황하던 상태였기 때문에 “감사하다. 무조건 열심히 하겠다”고 했다. 그런데 에이전트가 다른 프로팀과도 몰래 접촉했다. 나와 구단 사이에서 장난을 친 거다. 결국 그게 발각됐고 나는 어떤 팀의 선택도 받지 못했다.

어떻게 보면 괘씸죄에 걸린 것 같다.

그런 셈이다. 에이전트가 나한테 무척 미안했는지 또 다시 입단을 추진했다. 포르투갈 구단에서 너를 원하는데 일단 브라질에서 잠깐 뛴 뒤에 거기로 가자고 했다. 에이전트 따라서 브라질 3부리그 팀으로 갔다. 현지 통역이라는 사람이 믿을 만하지 않아 보여서 내가 직접 아는 사람을 불러서 통역을 요청했는데 알고 보니 한국에서 들었던 이야기와는 달랐다. 금액도 달랐고 알고 있는 내용도 달랐다. 그렇다고 굉장히 좋은 팀도 아니었는데 또 다시 속은 것 같아 화가 났다. 그래서 혼자 상파울루로 가 아는 형 집에 있으면서 직접 에이전트에게 전화를 했다. “지금 뭐하는 건지 모르겠다. 차라리 내가 팀을 구할 테니 포르투갈 쪽 일이나 잘 진행시켜 달라”고 했다.

도움을 줘야 할 에이전트가 오히려 일을 더 꼬이게 만든 것 같다.

브라질에 친구들이 많아 여기저기 수소문했다. 예전에 나를 지도했던 코치가 이뚜아누라고 브라질에서는 알 만한 클럽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래서 그 코치에서 솔직하게 말했다. “내가 여름에 포르투갈에 갈 것 같은데 몇 개월만 계약해서 뛸 수 있겠느냐”고 하자 “언제든 환영한다”고 했다. 결국 혼자 일주일 만에 그렇게 팀을 구했다. 그리고는 몇 개월 뒤 포르투갈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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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 대표팀에 입성해 훈련을 받고 있는 임규혁(오른쪽)의 모습.

우여곡절의 연속이다. 포르투갈로 날아가서는 일이 잘 풀렸나. 제발 잘 됐으면 좋겠다.

포르투갈에 가서 언론에도 소개됐다. 브라질에서 온 한국 선수에 대한 관심이 컸다.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는데 누가 와인을 선물로 주면서 “여기 신문에 나온 선수 아니냐. 잘 됐으면 좋겠다”고 한 적도 있다.

이후 이적 추진 과정은 어땠나.

처음에는 기마랑스에 입단한다고 하더니 또 말이 달라졌다. 그러면서 에이전트가 “사실은 기마랑스와 함께 휘아베라는 팀 입단을 동시에 추진하고 있었다”고 말을 바꿨다. FC서울에서 뛴 히칼로의 전 소속 팀이다. 휘아베에 가 운동을 시작했는데 내가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알아 어느 정도 거기 감독과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감독이 나한테 이런 말을 했다. “우리 팀에는 인원이 다 찼다. 내가 직접 팀을 알아봐주겠다. 너 정도면 충분히 갈 수 있는 팀이 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의욕을 잃었다. 에이전트의 말 바꾸기도 질렸다. 그래서 “마음은 고맙지만 사양하겠다”고 하고 운동 기간이 남았는데도 그냥 그 팀을 나왔다. 더 이상 거기에서 운동을 해봤자 의미가 없었다. 다시 한국에 와 아는 분이 코치로 있던 한성디지털대학교에서 잠깐 운동을 하다가 싱가포르에 가 홈 유나이티드를 비롯한 2~3개 팀에서 코치를 겸하며 공을 계속 찼다. 운동을 한동안 못해 따뜻한 곳에서 몸을 만들고 다시 브라질로 돌아가려고 했다.

이야기를 들어 보면 산토스 이후 한 팀에서 안정적으로 선수 생활을 한 적이 없는 것 같다.

나도 무척 답답했다. K리그 진출을 타진할 때 영입에 관심이 있던 팀이 7개 정도나 됐다. 설마 내가 아무 생각 없이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넣었겠나. 다 이야기가 되고 있는 팀이 있었는데 드래프트 직전에 감독님이 경질된 경우도 있고 앞서 말한 것처럼 괘씸죄에 걸려 선택을 받지 못한 경우도 있다. 여러 군데 돌아다니면서 몸을 만드는 일만 반복했다.

결국 그렇게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K리그 구단을 비롯해 여러 곳에서 “와서 같이 운동부터 해보자”고 했다. 그러면 나는 항상 말했다. “전 준비가 아직 안 됐습니다.” 그러면 “몸이야 들어와서 운동하며 만들면 된다”고 한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기다려주지 않더라. 한국에 와서 정상적인 몸 상태로 운동한 적이 없었다. 이적 문제로 너무 오랜 시간을 허비했다.

들어보니 너무나 아쉽다. 이후 당신은 K3리그(현재의 챌린저스리그) 천안FC에서 잠시 생활을 했었다.

영웅심리 같은 게 있었다. “네가 여기에 와서 몸을 만들고 우리가 좋은 성적을 내면 너도 K3리그에 이바지하고 더 좋은 곳으로 갈 수 있을 것”이라는 이야기를 듣고 솔깃해 지더라.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 그럴 수 있겠다.”

주변의 반대도 많았을 것 같다.

사실 영웅이라기 보다는 내가 가서 어린 친구들 이끌어주고 좋은 성적 내면 좋은 시선으로 바라봐 줄 것이라는 기대를 했다. 하지만 아버지가 무척 심하게 반대하셨다. 어머니는 몇 번 K3리그에서 뛰는 나를 보러 온 적이 있으셨는데 아버지는 한 번도 오지 않으셨다. 원래 어릴 적부터 내가 경기에 나서면 꼭 챙겨 보시고 브라질까지 와서 응원해 주셨는데 K3리그에서 뛰는 아들은 한 번도 찾지 않으셨다. 아들이 K3리그까지 가는 건 아니라고 생각하신 모양이다.

천안에서의 K3리그 생활은 어땠나.

처음에는 의욕적이었다. 아침에 일어나면 후배들을 이끌고 산책을 나갔다. 사소한 일에도 자기 관리의 중요성을 일깨워주고 싶었다. 김밥천국에 가서 밥 먹으면 5천원이고 갈비탕을 먹어도 5천원이다. 이왕이면 분식 대신에 갈비탕을 먹으라고 잔소리 할 정도였다. 애들 데리고 운동도 열심히 했다. 그런데 다들 남자이다보니 뭔가 단합을 하려면 술이 필요했다. 10명 정도 불러서 술 사주면서 이야기를 많이 했다. 그러면 애들이 당연히 나를 따를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나중에는 이런 시간이 잦아지다보니 내가 경기만 끝나면 애들을 데리고 이야기하면서 술을 찾게 되더라. 그때 이대로 가다가는 회복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느꼈다. 이렇게 선수 생활을 더 이어가다가는 나중에 어중이떠중이가 될 것 같았다. 그래서 결국 천안에서 선수 생활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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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혁은 이제 아픈 과거의 이야기도 웃으면서 들려줄 정도로 성숙해졌다. (사진=BITPHOTO)

그렇게 현역 생활을 마친 뒤 당신은 놀랍게도 현역으로 군복무를 마쳤다. 그것도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가게 됐는데 어떤 생각이었나.

사실 군대를 면제 받을 수도 있었다. 10년 넘게 다닌 병원이 있는데 거기 원장님이 너 정도면 아무리 못해도 4급은 나올 것이라고 했다. 선수 생활하면서 MRI를 13번이나 찍을 정도로 온 몸이 종합병원이다. 무릎 양쪽이 다 정상이 아니었고 허리와 발목도 성한 곳이 없다. 척추분리증이라고 허리에도 뼈가 하나 없다.

나 같으면 솔직한 심정으로 그 정도 상황이라면 군대를 안 갔을 것 같다.

나는 이때부터 유소년 축구 클럽을 차리는 일에 관심이 생겼다. 나중에 시간이 흘러서 회사를 성장시키는데 군대 생활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왜 우리 사장은 운동선수 출신이라면서 군대도 안 갔다 왔느냐”는 직원들의 수군거림도 듣고 싶지 않았다. 당당한 사장님이 되고 싶었다. 운동은 전처럼 못하지만 생활하는 데는 큰 불편이 없으니 군대에 가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군대에 가기로 마음 먹고 이틀 뒤 입대를 신청하려고 했는데 아버지께서 “그래도 그건 좀 아니지 않느냐”고 하셔서 “그러면 다음 주 월요일에 가겠다”고 했다. 입대를 결정한 뒤 나흘 만에 군대에 갔다.

나흘 만에 군대에 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닐 텐데.

수요일에 입대를 결심하고 저녁에 인터넷으로 지원하니 바로 다음날 곧바로 접수증이 날아 오더라. 컴퓨터로 입영통지서 출력해서 곧바로 다음 주 월요일에 훈련소로 갔다.

정말 우리나라는 최고의 병역 시스템을 보유한 것 같다. 군대 연기하는 데는 엄청 많은 서류와 시간이 필요한데 군대 가고 싶다고 하면 모든 걸 일사천리로 해결해준다. 축구선수 출신은 군대에서 무척 편한 생활을 할 수 있는데 당신도 그랬나.

일부러 말 안 했다. 훈련소에서 처음 신상명세서를 작성하고 면담을 하는데 소대장이 무척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더라. 나이는 스물 여섯 살인데 고등학교 중퇴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으니 당연한 것 아닌가.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면서 “솔직히 26살에 되기 전까지 무슨 일을 했는지 말해보라”고 하기에 “그냥 놀았다”고 했다. 훈련소에서도 밥 먹고 있으면 다른 훈련병들이 “혹시 임규혁 아니냐”고 묻더라. “이름은 임규혁이 맞다”고 하면 “혹시 축구선수 아니었느냐”고 물었다. 그러면 그냥 아니라고 했다. 한 때 잠시나마 관심을 받던 선수가 이렇게 됐다는 걸 별로 알리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자꾸 피하게 됐다.

군 생활 내내 펠레에게 찬사를 받던 자신의 신분을 속였나.

자대에 가니 알아보는 선임들이 있더라. 인터넷을 통해 내 존재를 알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축구로 이등병 때 딱 한 번 포상 휴가를 받고 일병 때부터는 거의 축구를 못했다. 원래 축구선수 출신이라면 군대에서 축구를 많이 시킨다는데 나는 자대에서 일만 하느라 축구도 별로 안 했다. 일만 있으면 간부들이 나를 불러냈다. 욕 먹는 거 싫어서 빨리 빨리하니까 일을 잘하는 걸로 생각한 모양이다.

내가 당신 같은 선임 만나서 군 생활 내내 고생했다. 작업을 잘하는 유전자를 가진 고참이 꼭 있다. 주특기는 뭐였나.

논산의 32사단 예하부대에 있었다. 60mm 박격포였다. 상병을 달기도 전에 분대장이 돼 풀린 군번이라는 소리를 들었는데 덕분에 살이 좀 많이 쪘다.

선수 생활을 그만둔 뒤 후회가 남지는 않나.

최대한 후회하지 않으려고 하긴 하는데 안 남을 수가 없다. 사무실에 앉아 있거나 혼자 ‘멍 때릴’ 때면 과거의 일들이 자주 떠오른다. ‘그때 이렇게 하지 않고 이렇게 했으면 어땠을까’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훗날에는 좋은 경험이 되겠지만 내가 가장 좋아했던 일로 많은 상처를 받았다. 가장 행복했던 시간이면서도 씁쓸했던 시간이다. 더군다나 20세가 된 이후에는 내가 가진 걸 다 보여주지도 못하고 무의미하게 시간을 흘려보냈다. 그게 가장 아쉽다.

시간을 다시 되돌린다면 어떤 선택의 순간으로 돌아가고 싶나.

2005년 청소년 대표팀의 부름을 받고 한국에 왔다가 브라질로 돌아가지 않았던 순간이 가장 후회된다. 브라질에서 1년 정도 더 실력을 키운 뒤에 도전했더라면 선수로서 더 많은 걸 누릴 수 있지 않았을까하는 후회가 남는다.

동영상 이후 당신이 기대만큼 성공하지 못하자 “임규혁은 거품”이라는 의견도 많았다. 어떻게 생각하나.

동영상이 처음 알려질 때 사람들은 나를 천재라고 했었다. 그때 ‘내 플레이를 제대로 보지도 못한 사람들이 왜 나를 천재라고 할까’ 의아했다. 반대로 거품이라고 하니 왜 내가 뛰는 걸 보지도 않았으면서 그런 말을 하는지 또 의문이다. 거품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나는 어디에서도 공을 차면서 손가락질 당한 적은 없다. 나는 나만의 스타일에 자부심을 느낀다.

요즘 조기 축구 유학 바람이 불고 있다. 축구 유학을 다녀온 사람으로서 어떻게 생각하나.

남미 같은 경우는 집안 형편이 좋아서 어머니가 함께 가거나 아는 지인이 현지에 있는 경우라면 모르겠지만 어린 나이에 홀몸으로 가기에는 쉽지 않은 곳이다. 브라질에서 가장 완벽하다는 산토스와 상파울루, 코린치안스 같은 팀들도 유소년 클럽은 낙후된 시설에서 생활한다. 국내 유학 업체를 통해 남미로 가면 시설은 좋지만 한국 선수들끼리 모여서 운동을 한다.

그러면 한국에서 하는 것과 다를 게 없지 않나.

그렇다. 브라질 코치가 가르쳐 주지만 이건 큰 차이다. 어떤 선수들과 운동을 하느냐도 굉장히 중요하다. 환경이 잘 갖춰지고 치안도 안전한 유럽이라면 모를까 남미는 아직도 위험하다. 또한 남미 만큼 동양인을 그렇게 무시하는 곳은 없을 것이다. 한 번 ‘개무시’ 당하면서 손가락질 받아도 꿈쩍하지 않고 1년 정도 경험해 볼 마음이라면 실력은 성장될 수 있는 곳이지만 환상을 가져서는 안 된다. 우리는 파라과이 청소년 대표 출신만 봐도 “우와”하면서 감탄하는데 걔네는 그런 애들 보면 그런다. “뭐 어쩌라고.” 무서운 동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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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규혁의 새로운 축구 인생은 이제 시작이다. 그는 선수로 뛰던 당시에는 결국 꿈을 이루지 못했지만 이제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간다. (사진=BITPHOTO)

당신의 현역 인생은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이제부터는 희망적인 이야기를 좀 들어보자.

내 이야기 들으니 술 생각나지 않나.

여기에 소주를 판다면 소주부터 시켜놓고 더 이야기하고 싶을 정도다. 단순히 동영상과 펠레의 극찬이 당신의 축구 인생 전부인줄 알았는데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은 선수인지 새롭게 느끼게 됐다. 현재 유소년 축구 클럽 사업은 어떤가.

지금은 한두 팀 정도 맡고 있다. 내가 생각하는 축구에 대한 철학은 지킨다. 부모님들이 오셔서 “우리 아들 실력 좀 급성장 시켜달라”고 하시는 경우가 종종 있다. 무척 큰 기대감을 안고 오신다. 하지만 나는 내 원칙에 따라 아이들을 지도할 뿐 그런 마법을 부리는 사람이 아니다.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실망하고 돌아가는 부모님들도 많다.

나 같으면 일단 아이들부터 받고 보겠다. “해봤는데 안 되네요”라고 나중에 부모님들한테 이야기 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나는 축구가 정답이 없다고 생각한다. 정답을 강요할 수 없다. 패스를 이쪽으로 주면 좋았을 텐데 한 아이가 다른 쪽으로 패스를 했다고 가정해보자. 이 패스가 성공했다면 플레이는 이어지고 있는 거다. 이 아이가 우리보다 더 큰 생각을 했을 수도 있다. 세계적인 선수 네이마르의 플레이도 정석은 아니다. 인사이드 패스를 해야 하는 상황에서 어떤 선수는 인사이드 패스보다 아웃사이드 패스가 더 정확하고 편할 수도 있다. 그러면 그 선수에게는 그게 정답이다. 그래서 아이들과 운동할 때는 정답을 강요하지 않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누구에게나 똑같은 기준으로 정답을 제시해서는 안 되는 게 축구다. 매 순간 창의력이 중점이 되어야 한다. 한 선수의 기량을 급성장시키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좋은 습관을 길러주면 공부를 하는데 있어서도 이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중요한 이야기라고 생각한다. 당신의 유소년 지도 철학을 더 들려줬으면 좋겠다.

어차피 좋은 시스템을 가져다 놓아도 내일 당장 프로 선수가 나오는 게 아니다. 10년은 넘게 운동을 해야 결과가 나타난다. 어린 선수들한테는 축구가 즐겁고 재미있는 거라는 걸 심어줘야 한다. 어떻게 했을 때 함께 하는 운동에서의 뭉클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지 좋은 습관, 좋은 생각을 갖게 해줘야 한다. “지금부터 너는 공격수이니까 골을 넣어야 해. 너는 미드필더니까 무조건 어시스트를 해야 해” 이런 건 안 된다. 초등학교 애들이 포지션이 정해진다고 성인이 되어서도 그 포지션에서 뛰는 건 아니다. 큰 강요는 하지 않을 생각이다. 대신 정말 재능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선수가 있다면 이걸 더 극대화 할 수 있는 창의력을 갖게 해주고 싶다.

당신은 선수 시절 그리 빛을 보지는 못했지만 누구보다 우여곡절을 심하게 겪었다. 이런 점들이 아이들을 육성하는데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다.

브라질과 포르투갈 등을 돌아다니면서 재미있고 유익한 훈련 방식을 많이 배웠다. 처음 가서 나도 무척 신기했던 훈련 프로그램이 많았다. 그 중 결합하면 더 좋을 걱 같은 훈련이 많아 직원들과 상의해서 이걸 새로운 형태의 훈련으로 만들기도 했다. 술래잡기를 축구공과 엮기도 하고 웃고 떠들면서 레크리에이션처럼 즐길 수 있는 운동도 있다. 많은 곳을 돌면서 이런 좋은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이제는 아이들에게 이러한 것들을 전달할 생각이다. 또한 이 아이들이 커서 선수 생활을 이어가며 꾸준히 연락을 해 온다면 그때는 내가 경험한 것에 비추어서 좋은 이야기를 해줄 수 있을 것 같다. 그 힘든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한 회사의 사장으로서도 지난 날들의 힘든 시기가 오히려 득이 될 것으로 보인다.

이제는 많은 상처를 받으면서 흔들림이 없어졌다. 무슨 일을 해도 덤덤하게 원칙을 내세울 수 있다. 당장 어떤 걸 선택하지 않아 회사가 휘청거릴 것 같아도 내가 생각했을 때 옳다고 생각하는 일이면 원칙을 지켜나갈 용기가 생겼다. 힘든 시기를 지내다보니 이제는 강해졌다.

나도 당신 회사에서 축구 좀 배워도 되나. 키보드만 칠 줄 알지 실제로 축구는 정말 못 한다.

개인 지도도 하고 있다. 그룹으로 신청하면 그룹으로도 진행한다. 언제든 환영한다.

곧 당신을 찾아가 축구를 배우고 싶다. 마지막 질문이다. 앞으로는 어떤 지도자가 되고 싶은가.

축구로 공유할 수 있는 것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다. 축구 쪽 일만 하려면 그냥 ‘임규혁 축구교실’을 만들었을 테지만 축구를 메인으로 하면서 함께 공유할 수 있는 것들을 고민하고 전달하고 싶어서 새로운 형태의 회사를 설립했다. 축구가 승패를 떠나 즐길 수 있다면 얼마나 재미있는 것인지 어린 아이들에게 느끼게 해주고 싶다. 지금까지 나의 실패를 거울삼아 축구의 행복을 전달하는 역할을 했으면 좋겠다.

임규혁은 인터뷰 내내 아픈 과거의 이야기도 솔직하게 들려줬다. 속으로는 수천 번 눈물을 흘렸겠지만 이 힘들었던 과거가 앞으로 그의 새로운 축구 인생에 있어서는 좋은 경험이 됐을 것이다. 한 때 축구 천재로 불리면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던 그는 이제 더 이상 그 꿈을 이룰 수 없게 됐지만 새로운 꿈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 임규혁의 축구 인생은 이제 막 전반전이 끝났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