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경기에서 후반 막판 딱 15분을 뛴 선수가, 그것도 팀 승리가 굳어진 상황에서 교체 투입돼 별로 보여준 것도 없는 선수가 언론과 축구 커뮤니티를 도배하다시피 했다. 우리는 이 현상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동국이 어제(11일)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열린 2014 브라질 월드컵 아시아 지역 3차 예선 UAE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15분 간의 활약은 참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왜 우리는 이토록 이동국의 움직임 하나 하나에 큰 관심을 보이는 것일까.

'K리그 대표' 이동국
이동국의 이번 대표팀 복귀는 K리그 팬들의 염원이 담겨있었다. 유럽 리그에 비해 무시를 받아야 했던 K리그로서는 이동국이 다시 대표팀에 뽑히자 그가 K리그의 위대함을 알려주길 바랐다. 올 시즌 K리그를 통째로 씹어 삼킨 그가 대표팀에서도 멋진 활약을 이어간다면 유치한 발상이지만 K리그 선수도 유럽에 진출한 선수 만큼 능력이 있다는 걸 간접적으로 입증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마치 이동국은 즐비한 유럽파들 사이에서 ‘K리그 대표’로 그 자리에 선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대표팀에서의 이런 묘한 구도는 지금까지 본 적이 없다.

이동국 옹호론과 비판론이 팽팽한 것도 이 때문이다. 신기하게도 전북의 팬 뿐 아니라 평소 전북과는 사이가 좋지 않은 K리그 팬들 대부분 역시 이동국을 응원했다. 이건 클럽 축구 시스템에서는 흔치 않은 일이다. 반대로 대표팀 경기나 유럽 축구를 주로 보는 이들은 “이동국은 대표팀에 필요 없다”고 했다. 이번 대표팀에서의 이동국에 대한 호불호는 K리그 팬과 대표팀 및 유럽 축구 팬으로 나뉘었다는 인상이 강하다. 딱 경기 막판 15분을 뛴 공격수가 이토록 여론의 중심의 있는 건 특별한 일이다.

K리그 팬들은 이동국을 통해 대리만족을 원했다. 그가 대표팀에서도 전북에서 보여준 활약을 이어간다면 “거봐, 이동국은 저런 능력을 가진 스트라이커야”라고 할 수 있었을 것이다. 대표팀 경기보다 자신이 응원하는 K리그 팀 경기를 더 재미있게 지켜보던 팬들도 이번에는 대표팀 경기를 보기 위해 경기장과 텔레비전 앞으로 모여 들었다. 어제 UAE전보다 K리그 수원-서울전 관중이 더 많았다는 건 최근 분위기가 대표팀에서 K리그로 넘어가고 있고 그러면서 K리그 팬들의 목소리가 커졌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동국은 그 중심에 있었다.

오랜 부침 끝에 돌아온 이동국
또 하나, 그에 대한 폭발적인 관심은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태극 마크를 달고 부상 투혼을 발휘했던 이동국에 대한 미안함의 표출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붕대를 칭칭 감고 국가를 대표했던 그가 혹사를 당해 잊혀졌다가 다시 돌아오자 팬들은 그의 모습을 더 유심히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그 사이 세월은 흘러 신예 선수들이 등장했지만 우리는 아직도 어린 시절 앳된 얼굴과 환한 미소 속에 부상의 고통을 감추고 뛰던 이동국을 잊지 못한다. 수 없는 부침을 겪은 이동국이 다시 대표팀에서 펄펄 날기를 바란 것이다.

이들은 그가 대표팀에서 동화 같은 스토리를 쓰길 원했다. 1998 프랑스월드컵에서 대표팀이 최악의 졸전으로 무너지는 동안 발견했던 실낱 같은 희망이 바로 10대 소년 이동국이었다. 이제 세월이 흘러 30대가 된 이동국이 다시 한 번 한국 축구에서 큰 획을 긋는 모습을 상상했을 것이다. 부상 중에도 진통제를 먹고 테이핑을 한 채 경기에 나서던 그가 오랜 만에 다시 대표팀에 돌아왔는데 잘 되지 않기를 바랐던 사람이 있을까. 전술적 가치 여부를 떠나 이들은 이동국이 다시 대표팀에서 웃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마치 이동국에 빙의돼 그의 상황을 내 일처럼 받아들이고 응원한 팬들이 많다.

정확한 통계가 될 수는 없지만 내 주위의 반응을 보면 대개 K리그에 관심이 있고 이동국의 청소년 대표 시절부터 경기를 지켜본 20대 중·후반부터는 이동국을 지지했다. 반면 유럽축구나 대표팀 경기에 더 관심을 보이면서 이동국의 청소년 대표 시절 모습을 지켜보지 않은 청소년층은 이동국 기용에 대해 반대했다. 누가 정답이랄 수는 없지만 이동국 지지층과 반대층이 이렇게 나뉜다는 건 흥미로운 사실이다. 이동국의 대표팀 발탁에 대한 논란에는 이런 배경이 존재한다.

이동국의 전술적 가치
하지만 이동국에게는 기회가 많지 않았다. 나는 며칠 전 “이동국에게 폴란드전 90분 풀타임 기회를 달라”고 주장했지만 결국 조광래 감독은 박주영을 주전 공격수로 낙점했다. 나는 의견을 내는 사람이고 조광래 감독은 대표팀 선수 선발에 대한 최종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다. 아쉽지만 조광래 감독의 선택을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K리그의 영웅이자 어린 시절부터 부상 투혼으로 한국 축구를 이끌었던 노장 공격수가 다시 대표팀에 돌아와 벤치를 지키는 모습은 참 가슴이 아팠다.

조광래호에서의 이동국이 어떤 전술적 가치를 지녔는지는 이제 다들 알 것이다. 그는 박주영과 지동원 같은 공격수와 스리톱을 이루면 보여줄 게 확실히 줄어든다. 쉽게 말해 박주영과 지동원을 선택하고 이동국을 포기하느냐, 아니면 이동국을 선택하고 박주영과 지동원을 포기하느냐는 문제에 직면한다. 내가 감독이라고해도 창창한 박주영과 지동원을 포기하지는 않을 것이다. 결국 이동국은 이렇게 대표팀에서 멀어지고 있다. 분명한 건 이동국의 실력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조광래 감독의 스타일에 맞지 않는다는 점이다.

폴란드전 전반 45분 동안 보여준 이동국의 플레이는 좋고 나쁘고를 따질 수 없을 만큼 팀이 전체적으로 수세에 몰렸었다. 이동국이 아니라 원톱의 정석이라 불리는 전성기 시절 판 니스텔루이가 왔더라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중원은 뒷걸음질 치는데 바빴고 지동원과 박주영 등 윙포워드도 제대로 된 돌파를 선보이지 못했다. 이동국은 결국 그렇게 고립됐다. 표면적으로 결국 이동국 카드는 전반에 실패를 맛봤지만 제대로 된 흐름이 아닌 상황에서 이동국 카드를 써보지 못하고 이른 시기에 교체했다는 건 아쉽다. 어쨌든 결과는 그렇게 나왔다.

이동국의 등장, 그리고 15분
차라리 이동국을 아예 안 뽑는 게 더 나았다. K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있는 선수를 데려다 벤치에만 앉혀 두는 건 K리그 최고 선수의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주는 일이다. 더군다나 이동국은 전북 소속으로 수원과의 중요한 원정 경기도 포기한 채 대표팀에 합류했다. 그런데 폴란드전 45분 동안 전북 스타일에 구색만 맞춘 전술로 그를 활용하고 포기하는 건 무척 아쉬운 대목이다. 전북에서 정말 행복한 표정으로 축구를 하는 최고의 스트라이커가 온갖 굴욕을 당하고 대표팀 벤치에 앉아 있는 건 참 가슴 아픈 일이다. 여론에 밀려 뽑아놓고 “이 정도 봤으면 이제 아니란 걸 알겠지?”라는 느낌이었다.

전술적 이야기는 여기까지만 하겠다. 판단은 조광래 감독이 했다. 나는 어제 경기를 눈보다는 가슴으로 봤다. 이동국이 뛴 마지막 15분은 경기 내용과 상관없이 나에게 큰 감동을 줬다. 만약 UAE전에서 박주영이 후반 막판 부상을 당하지 않았다면 이동국은 출전 시간이 더 줄어들었거나 아예 그라운드를 밟지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는 박주영의 부상으로 후반 추가 시간을 포함해 약 15분 간을 뛸 수 있었다. 이동국은 이 15분 동안 보여준 게 별로 없지만 그는 마지막일지도 모를 자신의 대표팀 경기에서 최선을 다해 뛰었다.

이동국이 등장할 때 경기장에는 엄청난 박수와 환호성이 들렸다. 사람들은 이동국을 연호했다. 주전 공격수의 부상으로 겨우 15분 출장 기회를 잡은 K리그 최고 골잡이는 자존심이 상했지만 얼굴 표정을 숨기고 그라운드에 들어섰다. 이미 2-0 상황에서 다른 선수들은 여유로운 경기를 풀어가고 있었다. 개인기로 수비를 상대했고 ‘오프 더 볼’이 되어도 크게 서두르지 않았다. 표정에서도 여유가 보였다. 그런데 딱 한 명, 이동국만은 마치 한국이 지고 있는 것처럼 플레이했다.

감동이 있던 마지막 전력 질주
그는 좌우 측면으로 빠져 공을 받아 크로스까지 연결하는 등 좀처럼 K리그에서 볼 수 없던 모습을 선보였다. 이는 조광래 감독이 강조하는 스위칭 플레이다. 이미 승패는 사실상 결정된 상황이었지만 이동국은 끝까지 조광래 감독이 원하는 축구를 보여주려고 노력했다. 나 같으면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골이라도 시원하게 꽂아 넣기 위해 온갖 재주를 부려 문전으로 돌진했을 테지만 이동국은 그렇지 않았다. 다시는 대표팀에서 자신을 부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그는 끝까지 팀 플레이에 치중했다.

많은 이들은 무심코 흘려 보냈을지 모르지만 가장 감동적이었던 장면은 후반 41분경 기성용의 프리킥 상황이었다. 승리를 예감한 선수들은 문전 쇄도할 준비도 하지 않고 뒤쪽에 포진해 있었다. 기성용이 딱 직접 프리킥으로 연결하기에도 좋은 위치였다. 누가 봐도 직접 기성용이 골문을 겨냥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기성용이 도움닫기 해 찬 공은 골대를 한참 넘어갔다. 나는 이때 이동국을 봤다. 그는 기성용이 프리킥을 하는 순간 전력 질주해 골문으로 향했다. 혹시라도 골키퍼에 맞고 흐를지 모를 2차 상황에 대비한 것이다.

이 장면을 본 나는 먹먹해졌다. 32살의 나이에 이미 승패가 결정난 경기에서 저렇게 죽을 힘을 다해 뛰는 선수를 본 적이 없다. 이미 K리그를 평정한 공격수가 대표팀에서의 15분 투입에 저렇게 혼신의 힘을 다하는 모습을 상상이나 했을까. 사람들은 그저 후반 막판 2-0 상황에서 의미 없는 프리킥이라 생각할지 몰라도 이동국에게는 그게 아니었다. 15분을 뛴 이동국은 경기가 끝난 뒤 땀에 흠뻑 젖은 채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그렇게 마지막일지도 모를 이동국의 대표팀 15분 경기는 막을 내렸다.

이동국이 보여준 15분은 감동이었다. 이제 그는 더 이상 대표팀의 부름을 받지 못할 수도, 받았다고 해도 거절할 충분한 명분도 생겼다. 이동국이 다시 대표팀 유니폼을 입고 경기에 나서지 못할 가능성이 더 커 보이는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는 이게 마지막일지라도 끝까지 최선을 다한 선수로 팬들의 기억에 남을 것이다. 이동국의 대표팀 경기는 이렇게 막을 내렸지만 그에게는 대표팀보다 더 소중한 전북현대가 있다. 그를 전적으로 믿어주는 최강희 감독과 전적으로 응원해주는 팬들이 있는 전북에서 행복한 축구를 더 이어갔으면 좋겠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한국 국가대표팀 벤치가 아니라 ‘K리그 대표팀’ 전북 최전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