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열린 2010 광저우 아시안게임에서 중국 축구대표팀의 10번으로 나선 선수의 이름은 뱌오청이었다. 비록 중국은 졸전을 거듭했지만 뱌오청에 대한 평가는 달랐다. 한때 중국 올림픽 대표 주장을 맡기도 했던 그에 대해 중국 중앙TV 해설자는 “기술과 정신력이 한 수 위”라는 평가를 내렸다. 그는 중국 최고의 테크니션으로 꼽힌다. 하지만 뱌오청에게는 다른 이름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한국명 박성이다. 그렇다. 그는 조선족 출신 중국 국가대표 축구선수다. 박성은 중국 축구를 이끌어 나갈 재목으로 큰 기대를 받고 있다.

진징다오라는 이름으로 활약하고 있는 김경도 역시 마찬가지로 조선족이다. 지난 3월 중국 대표로 A매치 데뷔전을 치른 그는 가오홍보 감독의 총애를 받고 있다. 19살의 나이로 중국 축구의 간판급 선수들인 가오린과 장린펑, 정즈, 취보 등과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큰 기대를 모으는 중이다. 김경도는 지난해 아시아청소년선수권 대회에서 중국의 주장으로 활약한 뒤 초고속 성인 대표팀 합류로 주목받고 있다. 올 시즌을 앞두고 K리그 광주FC에서 그의 영입을 추진하기도 했다. 이 두 선수는 연변FC가 만들어 낸 작품이다.

기사 이미지

연변FC의 유니폼(빨간색)에는 아무런 로고도 붙어 있지 않다. 후원 기업이 없기 때문이다. (사진=중국축구협회)

연변FC, 유일한 소수 민족 축구팀

연변FC는 조선족으로만 구성된 축구팀이다.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그 중 유일하게 축구팀을 가진 민족은 조선족뿐이다. 중국에서는 이 연변 지역을 ‘축구의 고향’이라고 부를 정도다. 1955년 길림성 축구팀으로 시작해 아직까지도 중국내에서 가장 축구 열기가 뜨거운 곳으로 손꼽힌다. 이 곳은 고종훈과 이광주, 이홍군 등 중국 국가대표를 무려 40여 명이 배출할 정도로 축구에 대한 자질이 뛰어난 곳이기도 하다. 10억 중국 인구 중 200만 명뿐인 조선족이 일궈낸 대단한 성과다.

1965년 전국대회 우승을 차지하지도 했던 연변FC는 1997년에는 최은택 감독의 지도를 받으면서 1부리그 4위에 오르는 기적을 연출하기도 했다. 선수층은 두텁지 못했지만 우리 민족 특유의 근성을 발휘해 일궈낸 성적이었다. 3만 명이 수용 인원인 경기장에 무려 5만 여명이 몰릴 정도로 열기도 대단했다. 경기장에 들어가지 못한 관중들이 주변 나무에 올라가 경기를 관전하기도 했다. 중국 언론에서는 이 광경을 보고 사람 열매라는 뜻의 ‘수과’라는 표현을 썼다. 경기장에는 북과 꽹과리 소리가 흥겹게 울려 퍼졌다. 현대와 삼성 등 국내 기업의 후원도 있었다.

하지만 외환위기 이후 국내 기업의 후원이 끊겼고 결국 2000년 구단의 문을 닫아야했다. 저장성에 팀이 팔렸고 그렇게 조선족 축구팀의 명맥이 끊기는 듯했다. 하지만 조선족은 축구 없이는 살 수 없었던 모양이다. 이듬해 십시일반으로 힘을 모아 팀을 재창단했다. 그렇게 다시 탄생한 연변FC는 2004년 3부리그에서 17승 1무라는 믿기지 않는 성적을 거두고 2부리그 승격을 확정지었다. 1부리그 팀 입단 제의를 받는 선수들이 꽤 많았지만 조선족의 자존심을 걸고 팀을 1부리그로 올려놓겠다는 의지로 이를 대부분이 거절했다.

기사 이미지

연변FC를 응원하고 있는 조선족들의 모습. 이들의 홈 경기장에는 한복을 입은 이들과 사물놀이패 등이 등장해 마치 한국의 시골 마을 같은 분위기를 연출한다. (사진=중국축구협회)

기적의 팀, 연변FC

재정이 열악하다보니 월급이 6개월 넘게 밀리는 건 일도 아니다. 선수단 유니폼을 지원해주는 곳이 없어 직접 의류 공장을 찾아 유니폼을 제작할 정도다. 밥도 알아서, 청소도 알아서, 빨래도 알아야 해결해야 한다. 원정 비용을 아끼기 위해 딱 필요한 선수들만 원정 길에 오른다. 2부리그에서도 연변FC는 가장 가난한 팀으로 꼽혔다. 하지만 연변FC는 지난해 2부리그에서 3위를 기록하며 희망을 봤다. 지난 시즌 승부조작으로 강등됐던 광저우와 청두가 1,2위를 차지했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연변FC의 3위는 사실상 2부리그 1위나 마찬가지였다.

중국 언론에서도 난리가 났다. “연변 팀 정신이 살아났다”고 했고 “백두산 호랑이가 하산했다”고 했다. 연변FC는 다시 1부리그로 올라가 1997년의 영광 재현할 날을 꿈꾸고 있다. 특히 유소년 육성에 힘을 써 박성과 김경도 같은 유망주를 대거 발굴했다는 점이 희망적이다. 최근 이들과 함께 중국 대표팀에 꼽힌 위구르족 출신 바리와 마이티장 같은 선수들이 중국 엘리트 육성 시스템을 거친 것과는 달리 박성과 김경도는 오로지 연변에서 조선족의 힘으로 키워낸 선수들이다. 1,000만 명의 위구르족이 해내지 못한 일을 200만 명의 조선족이 해내고 있다.

연변 사람들은 “축구가 없으면 안 된다”고 입을 모은다. 정헌철 연변FC 단장은 “우리팀은 민족정신을 가지고 있다. 우리 민족이 살아있다는 걸 알리기 위해 연변FC는 반드시 필요하다”고 했다. 중국 대표로 히로시마 아시안게임에 나섰던 김광주 감독은 “축구는 조선족의 자존심이다. 조선족이라면 누구나 축구 선수가 되는 꿈을 안고 성장한다”고 밝혔다. 연변FC뿐 아니라 연변 지역에는 무수히 많은 생활체육 축구팀이 경기를 펼치고 있다. 이들은 축구를 통해 민족정신을 이어간다.

기사 이미지

FC코리아는 전원이 조선인으로 구성된 축구팀이다. 과거의 영광을 뒤로하고 현재는 5부리그에서 재도약을 준비하고 있다. (사진=일본축구협회)

일본 축구사의 전설, 재일조선축구단

일본에서 살고 있는 우리 동포도 축구로 근심을 잊는다. 자이니치라는 이유로 일본 사회에서 억압받은 그들은 이 억압을 축구로 풀었다. 1961년 일본에서 재일동포의 힘으로 만든 재일조선축구단은 일본 축구 역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강팀이었다. 창단 이후 17년 동안 570번을 싸워 527승 26무 17패라는 믿기지 않는 성적을 거둔 이 팀은 자이니치의 자존심과도 같았다. 일본 전역을 돌며 경기를 해 한민족의 축구 실력을 널리 뽐낸 이들은 매 경기 자이니치의 뜨거운 응원을 등에 업고 축구 이상의 감동을 전했다.

당시 주장이던 리창석은 일본 언론에서 “이론의 여지가 없는 당대 최고의 선수”라는 평가를 받았다. 일본 축구 영웅 가와부치 사부로와 비교될 정도의 탁월한 능력을 지녔었다. 수 많은 일본 팀에서 “원하는 만큼 돈을 줄 테니 일본 이름으로 바꾸고 뛰어 달라”는 제의를 받았다. 하지만 그는 이 같은 제의를 모두 거절했다. 리창석은 이렇게 말했다. “나는 조선 사람이다. 일본 이름을 달고 뛸 수 없다.” 리창석은 자이니치의 자존심과도 같은 선수였다. 무수한 일본 최강 팀들을 격파한 재일조선축구단은 억압된 일본 사회에서 우리의 자랑이자 상징이었다.

일본 팀과의 경기에서 일본을 응원하던 이가 몰래 찾아와 “숨기고 있었지만 사실은 나도 조선인”이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린 적도 있었을 정도로 이 팀은 축구 이상의 가치를 지녔었다. 재일조선축구단은 조선인임을 숨기고 살아가야 했던 과거 일본 사회에서 우리 민족의 가장 큰 힘이었다. 그들은 “축구로 우리 동포들에게 용기를 줄 수 있다는 사실이 너무나도 행복했다. 사명감을 가지고 공을 찼다”고 입을 모았다. 아직도 재일조선축구단은 일본 축구 역사에서 가장 강력했던 팀으로 기억되고 있다.

기사 이미지

양수성과 원창승, 김굉명(왼쪽부터) 등은 FC코리아에서 뛰다가 경남FC에 잠시 몸을 담았지만 큰 족적을 남기지 못하고 결국 일본으로 돌아갔다. (사진=경남FC)

명맥만 유지하고 있는 FC코리아

하지만 지금 이 팀은 명맥만 근근이 유지하고 있다. 일본축구협회는 이들이 일본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억압하기 시작했다. 협회 가입을 불허했고 정 대회에 나서고 싶거든 선수들에게 일본으로 귀화하라고 요구했다. 그럼에도 그들은 굴복하지 않았다. 축구화를 벗는 한이 있더라도 일본으로 국적을 옮기는 일은 하지 않겠다고 했다. 결국 재일조선축구단은 쇠퇴하기 시작했고 지금은 FC코리아라는 이름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선수 수급에 한계를 느끼고 재정적으로도 열악해진 FC코리아는 현재 5부리그격인 관동지역 2부 사회인 리그에 소속돼 있다.

한국 기업의 후원조차 받지 못한 이들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한국 무대에 고상덕과 김굉명을 진출시키기도 했다. FC코리아뿐 아니라 재일교포인 정대세와 안영학, 량용기, 이충성 등이 큰 성공을 거두면서 축구는 자이니치 사회에서 없어서는 안 될 존재가 됐다. 1억 2천만 일본 인구에 60만 명뿐인 이들이지만 그들은 축구에서 만큼은 소수가 아니다. 그렇게 자이니치들은 축구를 통해 조국을 배웠다. 지금도 일본 내 조선학교에서는 우리의 역사를 공부하면서 축구선수의 꿈을 이루려는 이들이 무척이나 많다.

축구는 만국공통어다. 전세계 어디에서도 축구공 하나면 친구가 될 수 있다. 중국의 조선족과 일본의 자이니치는 차별을 받으면서도 축구를 통해 민족정신을 이어나가고 있다. 지구 반대편 아르헨티나에도 한국인으로 구성된 축구팀이 있을 정도다. 축구로 인해 우리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살아가는 이들이 우리가 상상하는 것 이상으로 많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함께 공을 차며 달래 온 이들은 지금도 민족의 자존심을 잃지 않고 공을 찬다. 이건 축구가 전세계의 사랑을 받는 스포츠여서 가능한 일이다.

그들도 결국에는 우리의 팀이다

그들은 중국 기업에 의해 손쉽게 1부리그에 올라설 수도 있었고 국적만 바꾸면 여전히 최강팀으로 군림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민족 정체성을 잃기 싫어 이렇게 버텨오고 있다. 고국에서는 그 누구도 관심을 갖지 않고 있지만 그들은 머나먼 타국에서 조선인이라는 자부심 하나로 살아가고 있다. 이제 중국에도, 일본에도 조선 출신 국가대표가 탄생할 정도로 대한민국 축구의 입지도 크게 성장했다. 그들을 단순히 국적을 바꾼 조선족이나 자이니치로 바라볼 게 아니라 억압된 환경에서 얼마나 많은 땀과 눈물을 흘렸을지 되돌아보는 건 어떨까.

나는 전세계에 걸쳐 뿌리 내린 우리 민족이 하나가 되는 데 축구만큼 좋은 게 없다고 생각한다. 대한축구협회에서는 유망주를 선정해 해외로 축구 유학을 보내는 등 유소년 축구 발전을 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 전세계로 뻗어 있는 우리 동포를 후원하는 일에는 관심이 부족하다. 몇몇 유망주를 집중 육성하는 것도 좋지만 머나먼 타국에서 우리 민족과 축구의 끈을 놓지 않고 있는 이들을 돕는 일에도 신경 썼으면 좋겠다. 한국 음식을 먹고 한국말을 하면서 자란 이들이 남의 나라 국가대표가 되는 건 어딘지 모르게 씁쓸하다.

정책적으로 협회에서 이들을 지원했으면 좋겠다. 전폭적인 투자 만큼은 아니더라도 “고국에서 이 정도로 관심을 갖고 너희들을 응원하고 있다”는 메시지라도 전달됐으면 한다. 협회가 지원하는 우리 동포들 중 한국 국가대표가 한 명도 배출되지 않더라도 그게 큰 문제가 되지는 않는다. 협회가 보다 강력한 대표팀을 만드는 것만큼 우리 민족이 축구로 하나가 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도 해야 한다. 후원 기업이 없어 유니폼에 아무런 로고도 없이 경기에 나서야 하는 연변FC와 5부리그에서 1부리그로 올라가기만을 바라는 FC코리아도 결국에는 우리의 팀 아닌가. 연변FC에서 선수 생활을 한 김맹산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조선족이 축구를 하지 않는다는 건 민족에 미안할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