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일 한국 실업축구의 큰 별이 졌다. 참으로 슬픈 소식이었다. 내셔널리그 대전한수원 배종우 감독이 신장암으로 투병하다 하늘로 갔다. 올 시즌 초만 하더라도 벤치를 지키면서 선수들을 독려하던 배종우 감독은 이제 고통 없는 세상으로 떠났다. 비록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는 팀의 감독은 아니었지만 그가 실업축구에 기여한 바는 무척 크다. 진심으로 한국 축구 발전에 이바지한 배종우 감독의 명복을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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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우 감독은 실업축구를 위해 평생을 몸 바친 이다. 그런 그가 지난 10일 하늘로 떠났다. (사진=내셔널리그)

한국전력의 전성기 이끈 ‘선수 배종우’

배종우 감독은 경상남도 함안에서 태어나 함양초등학교와 함양중학교, 진주고등학교를 나왔다. 조광래 국가대표 감독의 고등학교 2년 후배이기도 하다. 1975년 진주고등학교를 졸업한 그는 청소년 대표팀을 거쳐 당시 프로축구가 없던 환경에서 실업팀 한국전력에 입단하게 됐다. 1982년 FA컵의 전신인 전국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세 경기에서 모두 결승골을 뽑아내는 괴력을 선보이면서 한국전력을 준우승으로 이끌며 득점왕에 오르기도 했다.

1945년 10월 광복 직후 창단된 조선전업 축구단이 바로 한국전력의 전신이었다. 조선전업은 1943년 창단된 조선철도 축구단(현 인천 코레일)에 이어 두 번째로 오래된 역사의 팀이다. 이후 명칭을 조선전업에서 한국전력으로 바꾼 이 팀은 1960년대 들어 전성기를 구가한 뒤 침체기로 접어들었다가 배종우 감독이 선수로 활약하던 1980년대 초반에 제2의 전성기를 보내게 됐다. 물론 그 중심에는 선수 배종우가 있었다.

그는 1984년 현역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프로축구 출범과 함께 여러 프로팀에서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그는 한국전력과의 의리를 지켰다. 그가 선수 생활을 끝낸 후 첫 번째 맡은 역할은 구단의 트레이너였다. 말이 좋아 트레이너지 선수와 코치진을 잇는 다리 역할을 하면서 잔심부름을 하는 게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너무도 사랑하는 팀에서 묵묵히 최선을 다했고 이후 주무와 코치를 거쳐 2002년 이 팀의 감독이 됐다. 한국전력에서 한국수력원자력(이하 한수원)으로 팀의 명칭이 바뀌었다.

감독이 되어 명예회복에 나서다

하지만 한수원의 명성은 잊혀진지 오래였다. 모기업에서는 선수단 연봉을 모두 깎아 동결했다. 팀에서 잘하는 선수는 연봉이 높고 그렇지 못한 선수는 연봉이 낮은 게 정상인데 선수단 전체가 똑같은 연봉을 받는 이상한 시스템이었다. 물론 구단 운영비가 부족한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또한 정원도 22명으로 줄였다. 그러다보니 실력이 현저히 떨어지는 선수와 부상 선수를 제외하면 선발 명단 꾸리기도 빠듯했다. 당연히 성적이 나올 리가 없었다. 1945년 팀이 창단된 이래 가장 암울했던 시기였다. 내셔널리그에 참가하면서 대전을 연고로 삼았지만 홈 경기장은 대전에, 숙소는 서울에 위치한 이상한 팀이었다.

배종우 감독은 팀 개혁에 나섰다. 사실 준공무원 신분인 그는 성적에 크게 목을 매지 않아도 될 터였다. 사회적으로 지탄받을 일만 하지 않는다면 정년이 보장된 자리였다. 하지만 그는 1975년부터 수십 년간 몸 담아온 팀이 강해지는 꿈을 늘 꾸고 있었다. 지속적으로 모기업에 건의를 했고 결국 한수원 측에서는 배종우 감독의 뜻을 받아들여 2006년 선수단 정원 제한 규정을 없앴고 연봉 동결 정책도 풀었다. 배종우 감독은 좋은 선수를 찾아 전국 각지를 누볐고 27명의 선수로 팀을 구성했다. K리그에서 실패한 선수들도 배종우 감독을 믿고 한수원행을 결정했다.

배종우 감독은 한국 축구 역사상 두 번째로 깊은 역사를 보유한 팀의 명예회복에 결국 성공했다. 2008 내셔널선수권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한 한수원은 2009년에는 전국체전과 내셔널선수권대회 준우승을 차지하면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쓰러져가다시피 했던 한수원은 이렇게 다시 배종우 감독과 선수들의 노력에 힘입어 강팀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2003년 실업축구 출범 이후 단 한 번도 밟아보지 못한 정규리그 우승이라는 꿈을 향해 달려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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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메달 뿐 아니라 은메달과 동메달을 딴 선수들의 땀도 기억해야 하듯이 아쉽게 준우승에 그쳤지만 우리 선수들 그동안 정말 고생 많았다. 우리 선수들이 자랑스럽다.” 배종우 감독이 2010 내셔널리그 챔피언결정전에서 수원시청에 패한 뒤 가장 먼저 한 말이다. (사진=내셔널리그)

37년 간의 헌신, 그리고 안타까운 이별

이듬해인 2010년 기어코 내셔널리그 전기리그 우승이라는 역사를 썼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다. 한수원의 우승만 바라보고 달려왔던 배종우 감독은 몸에 심각한 이상을 느껴 병원을 찾았고 신장암이라는 선고를 받았다.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몸을 생각해야했지만 자신만 믿고 따라온 선수들을 외면할 수도 없었다. 후기리그 들어 투병 생활에 들어가 벤치를 지키지 못하는 일이 잦아졌지만 그는 전기리그 우승 자격으로 후기리그 챔피언 수원시청과 맞붙는 챔피언결정전에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끝까지 벤치를 지켰다.

결국 한수원은 수원시청에 무릎을 꿇고 통합 우승의 꿈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한수원은 수원시청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만큼 성장한 모습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배종우 감독은 “내년 시즌에도 우리 한수원은 우직한 소처럼 나아가겠다”고 미래를 그렸다. 1975년 선수로 입단해 36년 동안 이 팀에서 우직하게 한 길을 걸어온 배종우 감독다운 말이었다. 그는 시즌이 끝난 뒤 병마와 싸우면서도 한수원을 끝까지 놓지 않았다. 2011년 개막 후에도 병색이 완역했지만 벤치를 지키면서 선수들을 독려했다.

결국 배종우 감독은 지난 10일 향년 57세의 나이에 하늘로 갔다. 57년의 일생 중 한수원과 함께한 시간만 올해로 무려 37년이었다. 그렇게 실업축구의 아버지로 불렸던 그는 생이 다하는 마지막까지도 한수원과 함께 했다. 고인이 선수로 활약하던 1980년대 초 한수원은 제2의 전성기를 누렸고 2000년대 들어서는 감독이 된 고인의 노력 덕분에 내셔널리그에서 또 다시 정상을 노리는 강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고인은 실업축구의 아버지이자 한수원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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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과 조중연 대한축구협회 히장, 김진국 대한축구협회 전무가 최동원 감독의 빈소를 찾아 조문하는 모습. 영역만 다를 뿐 같이 스포츠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충분히 훌륭한 행동이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아쉬움도 남는다. (사진=대한축구협회)

‘내 식구’도 못 챙기는 축구계 어른들

비슷한 시기 프로야구에서도 두 큰 별이 졌다. 나도 어릴 적부터 응원했던 장효조 감독과 최동원 감독이 세상을 떠났다. 노파심에 말하지만 나는 오늘 칼럼에서 축구와 야구의 편가르기를 할 생각은 전혀 없다. 다만 축구계 수장의 아쉬운 행동을 지적하기 위해 오늘 칼럼을 쓴다. 내 식구 챙기기도 제대로 하지 못하는 축구계 가장 큰 어른들의 잘못된 행동을 꼬집으려는 것이니 축구가 우월하고 야구가 우월하고의 문제로 확대해석되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다.

지난 15일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명예회장과 조중연 대한축구협회장, 김진국 대한축구협회 전무가 최동원 감독의 빈소를 찾았다. 이들은 유족들에게 심심한 위로의 말을 전하고 고인의 명복을 빌었다. 물론 여기까지는 좋다. 종목을 따지지 않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스포츠 스타의 마지막 가는 길에 조문을 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축구협회장이라도 야구 감독의 빈소를 찾지 말라는 법은 없다. 충분히 잘한 일이다.

하지만 이들은 정작 ‘내 식구’ 배종우 감독의 빈소에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추석 연휴가 끼어 있어 유족들은 3일장이 아닌 5일장을 치렀지만 조화만 배달됐을 뿐 정몽준 명예회장이나 조중연 회장은 배종우 감독의 빈소를 찾지 않았다. 협회 사진기자까지 대동해 야구 감독의 빈소를 찾아 보도자료까지 보냈던 이들이 축구계에서 큰 일을 한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에는 무신경해도 너무 무신경했다. 내셔널리그 연맹 차원에서 고인의 장례에 큰 도움을 준 건 분명하지만 수장들이 고인의 마지막 가늘 길을 함께 하지 않은 건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이들이 최동원 감독 빈소를 찾은 일은 정말 잘한 일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앞서 이들이 한국 축구에서 묵묵히 소처럼 일한 이의 마지막 가는 길에 관심을 갖지 않은 건 잘못된 일이다. 최동원 감독 빈소를 찾는 게 ‘선택’이었다면 배종우 감독의 빈소를 찾는 건 ‘의무’가 아니었을까. 내 식구도 못 챙기면서 어떻게 축구계의 수장 역할을 할 수가 있나. 정작 집안에서는 가족들에게 자상하지 못한 사람이 집밖에서 다른 사람들한테 잘하는 게 상식적인 일은 아니다. 부디 앞으로는 축구계 수장들이 내 식구 챙기는 일에 소홀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마지막으로 배종우 감독과 최동원 감독의 명복을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