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수요일(14일) K리그 세 팀은 AFC 챔피언스리그 8강전에서 모두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하지만 이 사실보다 더 슬픈 건 새벽 두 시 반에 열린 알 이티하드와 FC서울의 경기를 제외하고는 수원-조바한전, 세레소-전북전이 모두 방송사들의 외면을 받았다는 점이다. 중계가 있어야 그 경기를 보고 슬퍼하건 말건 할 텐데 K리그 팬들은 그런 권리마저 빼앗겼다. 세레소-전북전은 새벽이 되어서야 두 개의 스포츠 전문 케이블에서 녹화 방송했고 수원-조바한전은 아예 방송되지 못했다. 박현범의 골은 그렇게 아무도 보지 못하고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루 이틀 일이 아니다. 매 번 칼럼으로 중계 문제를 지적하지만 바뀌는 건 아무 것도 없다. 그냥 벽보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하지만 이렇게 방송사들의 중계 외면 문제가 무감각해 질 정도로 당연시 된다면 그것 또한 큰 일이다. 벌써 많은 축구계 인사들은 이제 텔레비전에서 축구가 사라졌다는 게 당연한 일처럼 생각한다. 이 일에 대해 이렇게 무감각해지는 건 정말 무서운 일인데 말이다. 했던 말 또 하고 또 하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끝까지 중계 문제에 대해 물고 늘어질 것이다. 이 일을 당연하게 생각하는 순간 한국 축구는 끝난다고 생각한다.

챔피언스리그, 어떻게 성장했나
아시아 축구연맹(AFC)은 아시아 축구 전체를 관장한다. 그들은 특히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를 유럽 챔피언스리그처럼 대규모 대회로 성장시키기 위해 여러 방면으로 머리를 싸매고 있다. 그냥 동네 체육대회처럼 진행되던 대회를 2005년부터는 제대로 된 방식으로 진행하는 중이다. 유럽 챔피언스리그와 비교하면 질이 떨어질지 몰라도 방식에서는 유럽과 비교해 손색이 없다. 광활한 아시아 대륙에서 진행하는 홈 앤드 어웨이 경기는 그 규모가 블록버스터급이다. 호주에서부터 중동까지 사실 한 대륙이라고 보기에도 무척 큰 무리가 있지만 AFC는 이들을 한 데로 묶어 토너먼트를 진행한다.

대회가 성장한 데는 AFC의 노력이 있었다. 이들은 각 리그를 돌면서 진행 상황을 모두 파악, 개선책을 내놓으라는 압력을 가한다. AFC에서 구성된 실사단은 아시아 전역을 돌며 리그가 제대로 운영되고 있는지 감시 아닌 감시를 한다. 챔피언스리그 규모가 커지다보니 허술한 리그에 출전 티켓을 제한하겠다는 압력이 장난이 아니다. K리그 구단들도 지난해와 올해 모두 이 실사단 방문에 진땀을 뺐다. 그들은 마치 과거 내 여자친구가 내 핸드폰 통화 내역을 뒤지듯 재무 상황부터 경기장내 상업 시설까지 샅샅이 검사한다. 나는 다른 여성 문자메시지 몇 개 지우다 걸렸는데 K리그 구단들은 올 해 모두 이 실사를 무리 없이 통과했다.

AFC는 각 리그 연맹에도 엄격하게 지시 사항을 내놓았다. 승부조작에 휩싸였던 중국은 승부조작 및 도박행위 근절을 전제로 챔피언스리그 출전 티켓 넉 장을 겨우 유지했다. K리그 역시 올해 승부조작 사건에 대해 11월 중으로 AFC에서 징계를 결정할 방침이다. AFC에 잘못 보이면 타격이 크다. 챔피언스리그 진출 티켓이 줄어들면 그만큼 재정적으로도 피해가 있고 대외적인 위상 역시 감소할 수밖에 없다. 티켓이 넉 장인 것과 석 장인 것에는 무척 큰 차이가 있다. 이 시어머니 같은 AFC는 리그컵 우승팀에 챔피언스리그 출전 티켓을 주는 것도 반대한다. 정규리그와 FA컵 우승팀에만 자격을 줘 권위를 높이겠다는 뜻이다.

K리그, 챔피언스리그 흥행 저해하는 일등공신
한국 축구는 이미 몇 차례 승격제에 실패했다. 한국 축구 상황을 살펴본다면 승격제를 실시하는 게 오히려 불가능한 일이다. 사실상 포기한 제도였다. 하지만 AFC는 승격제가 진행되지 않는다면 K리그의 챔피언스리그 출전 티켓을 제한하겠다고 엄포를 놓았고 결국 대한축구협회와 프로축구연맹은 이제 승격제가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 됐다. 딱 때려야 말을 듣는 꼴이다. 어디 가서 뒤처지기 싫어하는 우리의 성격상 이제는 챔피언스리그 넉 장의 티켓을 사수하기 위해 반드시 승격제를 이뤄야 하고 결국 AFC의 압박 덕분에 이제는 승격제가 공론화 돼 준비 과정을 거치고 있다.

만약 AFC의 압박이 없었다면 우리는 평생 승격제를 넋 놓고 기다렸을 것이다. 아직 승격제를 이루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이렇게 승격제를 공론화하게 해준 AFC가 고마울 뿐이다. AFC는 승격제와 더불어 K리그에 유료 관중수 해결과 전임사장제 도입, 법인화 완료 등의 조건을 챔피언스리그 티켓과 연관 지었고 연맹은 이 문제를 하나씩 해결해 나가고 있다. 평소에 잘 하면 참 좋은 데 꼭 불이익을 준다고 협박해야 잘한다. 군대에서 잘하면 휴가증 준다고 해도 대충하던 일이 못하면 영창 보낸다고 할 때 잘 돌아가는 것과 비슷한 이치다. AFC는 이렇게 챔피언스리그를 발전시켰다.

그런데 AFC 입장에서 K리그는 챔피언스리그 발전을 저해하는 요소다. 자국에서 생중계도 되지 않는 이런 허접하기 짝이 없는 리그가 매년 좋은 성적을 내고 있으니 흥행이 잘 될 리가 없다. 열심히 승리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에게는 미안하지만 K리그가 승승장구하는 건 곧 챔피언스리그가 망하는 지름길이다. 들썩들썩한 분위기에서 치러져야 할 중요한 토너먼트 경기가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조용히 진행되고 있으니 선수들 아깝고 경기장 아깝고 시간 아깝고 상대팀 아깝다. 노홍철은 텔레비전에 나와 “시청자들과 나만 아는 비밀”이라고 하던데 진짜 비밀은 텔레비전에 나오지도 않는 챔피언스리그 K리그 출전팀 경기다.

AFC, 중계 없는 K리그에 철퇴를
나는 K리그를 사랑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식이라면 K리그는 AFC의 철퇴를 맞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AFC가 챔피언스리그를 대규모 대회로 성장시키기 위해 노력하는데 돕지는 못할 망정 방해나 하는 꼴은 더 이상 있어선 안 된다. 차라리 이렇게 자국에서 중계가 이뤄지지 않는 K리그 팀이 선전하는 것보다 매 경기 꼬박꼬박 생중계해주는 J리그가 이번 대회에서 우승하는 게 정의라면 정의다. 중계도 안 해주는 나라에서 8강에 세 팀이나 올라가 8차례의 8강전 1,2차전 경기 중 6경기나 외면 받는 건 민폐다. 장담컨대 이번 달 말에 치러지는 8강 2차전 역시 국내에서 생중계가 이뤄지지 않는 건 지난 수요일 1차전 경기와 다를 게 없을 것이다.

AFC는 경기력을 떠나 여러 흥행 요소를 고려해 챔피언스리그 출전 자격을 부여하고 있다. 당연히 여기에는 자국에서의 생중계 요건도 포함되어야 한다. 자국리그 팀이 출전하는 챔피언스리그 8강전 경기를 생중계하는 게 당연한 일이라 생각돼 AFC측에서는 이 요건을 포함하지 않았을지도 모르지만 지금 한국에서는 상식 밖의 일이 일어나고 있다. 남의 나라 인터넷 방송으로 자국리그 팀들이 챔피언스리그에 나서는 모습을 봐야 하는 게 우리의 현실이다. 참 대단한 아랍어 조기 교육 나셨다. 챔피언스리그가 발전하려면 생중계 따위는 없는 K리그부터 철퇴를 내려야 한다.

협회와 연맹에서는 AFC의 압력에 못 이겨 승격제를 준비하고 있다. AFC에서 챔피언스리그 참가 자격에 생중계 요건까지 포함한다면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는 시늉이라도 할 것이다. 스포츠 전문 케이블 3사가 안 된다면 새로운 중계 루트라도 찾을 것이다. 불이익 주겠다고 하면 뒤늦게 달려드는 우리의 성격상 AFC는 생중계 요건을 챔피언스리그 참가 자격과 연관 지어 연맹을 압박해야 한다. 지금은 위기 의식을 느끼지 못하지만 챔피언스리그 진출 티켓이 걸리면 연맹에서도 분명히 내놓을 답안이 있다. 추석 명절까지 반납하고 챔피언스리그를 준비한 자랑스러운 우리 K리그 선수들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챔피언스리그를 그들만의 리그로 만들어 버리는 이런 K리그는 대회에서 사라져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