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기간은 참 고통스럽다.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두려움과 싸워야 한다. 그러면서도 꿈을 멋지게 이룬 순간을 떠올리며 그 고통을 참아낸다. 하지만 수 개월 간, 혹은 수 년 간 한 가지 꿈을 위해 달려오던 이가 아예 꿈에 도전할 기회조차 얻지 못한다는 건 어떤 기분일까. 나처럼 한 여자에게 순정을 바치지 못하고 여기 저기 여자들에게 한 번씩 찔러보고 쉽게 포기하는 근성 없는 사람들은 상관없는 이야기지만 목표를 이루기 위해 쉼 없이 달려온 이들에게는 무척 중요한 일이다.

이해할 수 없는 시험 자격 요건

대한축구협회가 최근 FIFA(국제축구연맹) 공인 에이전트 시험 공지를 내놓았다. FIFA는 각국 축구협회에 공인 에이전트 시험을 일임한다. 협회에서 치르는 이번 시험에 합격하면 FIFA가 인정하는 에이전트 자격을 얻을 수 있어 수 많은 사람들이 이 시험을 기다려 왔다. 20문제 중 15문제가 영어로 치러져 영어 공부는 물론 민법까지 시험에 출제돼 나처럼 머리 나쁜 사람들은 엄두도 못내는 시험이다. 나는 그냥 영화 <제리 맥과이어>를 보면서 ‘우와, 정말 폼 난다. 부럽다’하고 말 일이다.

그런데 협회에서 이번에 내놓은 에이전트 시험 자격은 다소 황당하다. 다른 자격 요건은 여느 해 시험과 다를 바 없지만 새로운 자격 요건 하나가 추가됐다. ‘현직 대한축구협회장, 대한축구협회 이사, K리그 구단 사장(또는 단장) 중 1인의 추천을 받은 자’만이 이번 시험에 응시할 수 있다. 축구 관련 취재를 하는 나도 잘 볼 수 없는 사람인데 에이전트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들이 이런 높으신 분의 자필 추천서를 받는 건 불가능한 일이다. 내가 가수 지나한테 사인을 받는 게 오히려 더 확률이 높을 지도 모르겠다.

협회는 “시험이 과열되고 실제 자격증이 필요한 사람들이 자격을 취득하지 못하는 문제가 있다”면서 이 같은 자격 요건을 포함한 이유를 설명했다. 물론 시험에 합격하고도 활동을 하지 않는 이들이 많은 건 사실이다. 하지만 자격증이라는 게 다 비슷하다. 우리 어머니는 운전면허증을 따고 20년 동안 이 자격증을 고이 장롱 속에 넣어두고 계시면서 ‘20년 무사고’라는 사실을 무척 자랑스러워하신다. 실질적으로 자격증을 활용하는 것도 물론 좋지만 자신의 목표 성취를 위해 시험에 도전한다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다.

FIFA 규정과 위배되는 시험 자격

또한 에이전트 시험은 상대 평가가 아니다. 한 번 시험을 봐 등수로 자격을 부여하지 않는다. 일정 점수에 이르지 못하면 단 한 명의 합격자도 없을 수 있다. 실제로 2007년에는 148명이 지원해 단 한 명만이 합격하기도 했다. 한글로만 시험을 본 2004년에는 140명 중 무려 71명이 에이전트 자격증을 획득했었다. 지원자가 많다고 해 실제 자격증이 필요한 사람들이 자격을 취득하지 못하는 일은 없다. 떨어진 사람은 그만큼 노력이 부족했던 것이지 다른 사람이 그 자리를 대신해서 떨어진 게 아니다.

이번 에이전트 시험 자격 요건에는 모순이 있다. 축구 관련 고위층의 자필 추천서를 받아야 하지만 또 다른 자격 요건에는 이런 것도 있다. ‘국제축구연맹(FIFA), 대륙연맹, 축구협회, 모든 구단(프로/아마추어 포함) 및 그 연관 단체의 직원이 아니거나 현재 관련이 없는 자.’ 축구계 종사자가 아닌데 축구계 종사자의 추천서를 어떻게 받나. ‘술은 마셨는데 음주운전은 하지 않은 자’를 찾는 것과 비슷한 논리 아닌가. FIFA에서는 에이전트와 협회, 구단의 유착 관계를 엄격히 금지하기 위해 규정을 강화하고 있는데 우리 협회는 이런 사람들한테 추천서를 받아 오란다.

이번 자격 요건은 FIFA의 방침에도 어긋날뿐더러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는다. 올해 3~4월부터 자격 요건에 변화가 있을 것이라는 소문은 있었지만 협회는 지난달 29일 공식적으로 새로운 시험 자격 요건을 내놓았고 오는 15일까지 접수를 받기로 했다. 이 시험을 위해 직장을 그만두고, 군대를 미루고, 영어와 민법에 머리를 싸매고 공부하던 이들은 보름이 갓 넘는 기간 동안 축구계 고위층의 자필 추천서를 받아내야 한다. 이건 인맥이 없어도 열심히 공부해 축구계에 진입하려는 이들을 배척하는 일이다. 에이전트 시험 준비하는 학생들이 과연 이런 조중연 회장 만나서 추천서를 어떻게 받나. 얼굴 보기도 쉽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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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리 맥과이어가 한국에서 에이전트를 준비했다면 아마 조중연 축구협회장 자필 추천서 받으러 다니다가 포기하고 그냥 집에서 선풍기 틀어놓고 웃통 벗은 채 라면 먹으면서 스타크래프트 중계나 보는 내 친구 김동혁과 같은 인생을 살았을 것이다.

도전도 못하고 포기하는 일은 없어야

합격자가 많아 활동하지 않는 에이전트가 많은 게 싫다면 차라리 시험을 어렵게 출제해 합격자를 조금만 배출하는 편이 나을 것이다. 그리고 자격증 소지자가 좀 많아지면 뭐 어떤가. 결국에는 이게 다 우리의 에이전트 시장이 커지는 현상 아닌가. 함량미달의 에이전트가 생겨나는 건 문제지만 정정당당하게 노력하고 공부해 에이전트 자격을 얻는 이들이 많아지는 건 오히려 좋은 일이다. 장롱 면허가 많다고 해 운전면허 자격 갱신할 때 “1년간 운전을 10회 이상 하지 않았으니 자격을 박탈합니다”라는 것 봤나. 에이전트 자격을 얻은 이들이 많아지면 그만큼 이 시장도 더욱 투명해 질 수 있다.

과연 초면인 이들이 찾아와 “에이전트 시험 보고 싶으니 자필 추천서를 써 달라”고 한다면 자신의 이름을 걸고 추천서를 써줄 축구계 고위층이 있을까.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을 위해 직함을 걸고 서명하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초등학교 동창이 20년 만에 찾아와 보증 서달라고 하면 서줄 사람 있나. 지금 에이전트 시험에 필요한 건 이런 인맥이 아니라 실력을 판단하는 기준을 정하는 것이다. 이 꿈을 위해 수 개월간, 수 년간 노력한 이들이 아예 도전도 해보지 못하고 꿈을 접는 일은 없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