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스무살 적에 하루를 견디고 불안한 잠자리에 누울 때면 내일 뭐하지, 내일 뭐하지 걱정을 했지. 두 눈을 감아도 통 잠은 안 오고 가슴은 아프도록 답답할 때 난 왜 안 되지, 왜 난 안되지 되뇌었지. (중략) 말하는 대로, 말하는 대로 될 수 있단 걸 눈으로 본 순간 믿어보기로 했지. 마음먹은 대로, 생각한 대로 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순간 고갤 끄덕였지.” 이적과 유재석이 부른 <말하는 대로>의 가사다. 이 노래의 주인공은 유재석이지만 이 노래는 박호진을 위한 노래이기도하다.

광주FC 골키퍼 박호진이 K리그 통산 100경기 출장을 눈앞에 두고 있다. 지금까지 99경기에 나선 박호진은 오는 27일 제주와의 경기에서 프로 통산 1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우게 된다. 뭐 그러려니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K리그 무대에서 100회 출장은 돋보이는 기록이지만 그렇다고 전대미문의 업적을 쌓은 것도 아니다. 많은 이들이 100회 출장이라는 기록을 달성했다. 하지만 박호진의 100경기 출장은 무척 특별하다. 데뷔 12년 만에 한을 풀게 됐으니 1년에 10경기도 못 뛴 셈이다. 오늘은 박호진의 <말하는 대로>를 한 번 들어보자.

K리그에 입성한 대학 유망주, 하지만…
박호진은 대학 시절 꽤 잘 나가는 골키퍼였다. 그는 연세대학교 2학년이던 1997년 팀의 주전 골키퍼로 도약해 세상에 처음 이름을 알렸다. 3월 열린 대통령배 전국남녀축구대회 준결승 광운대전 승부차기에서 무려 세 개의 슈팅을 막아내는 선방을 펼치며 팀을 결승에 올려놓고 스타로 등극했다. 비록 결승에서 주택은행에 패하고 말았지만 듬직한 모습을 보이며 기대주로 주목 받았다. 그리고 3개월 뒤 봄철대학축구연맹전에서는 연세대를 4년 만에 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이 대회 준결승 대구대와의 승부차기에서도 박호진은 눈부신 선방을 보여줬다.

대학상비군 선발대회를 겸한 봄철대학축구연맹전에서 맹활약한 박호진은 곧바로 대학상비군에 선발됐다. 그리고 1년 뒤 박진섭(고려대), 김영철(건국대), 이길용(광운대), 김남일(한양대), 서기복, 성한수(이상 연세대) 등과 함께 2002년 한일월드컵 공동개최기념 덴소컵 대학선발에 뽑히면서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1999년 K리그 드래프트에 신청서를 제출한 그는 결국 수원의 선택을 받고 2000년 K리그 무대에 입성하게 됐다. 박호진과 수원의 긴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언론에는 박호진이 입단하자마자 이운재의 그늘에 가린 걸로 알려졌지만 사실 박호진이 처음 수원에 입단했을 때는 이운재가 없었다. 박호진이 입단하던 2000년 이운재가 상무에 입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박호진에게는 의외의 산이 있었다. 바로 김대환이었다. 1998년 수원에 입단한 김대환은 두 시즌 동안 이운재의 백업으로 활약하다가 이운재가 군대에 가자 곧바로 주전 자리를 꿰찼다. 김대환이 2000년 37경기에 나서는 동안 박호진은 리그컵 단 한 경기에 나선 게 전부였다.

기사 이미지

<사진2 : 박호진은 2006년 어렵사리 잡은 기회에서 맹활약을 펼치며 수원을 준우승으로 이끌기도 했다. 이 활약을 인정받아 2006년 K리그 베스트11에 오른 박호진의 모습. (사진=수원블루윙즈)>

동료이자 큰 산, 이운재와 김대환
이운재가 입대한 뒤 1년이 지난 2001년에는 김대환이 상무에 갔다. 하지만 수원에는 이운재 입대 후 김대환 백업 요원으로 부산에서 영입한 신범철도 있었다. 이운재와 김대환이 나란히 군대에 가자 수원은 신범철을 중용했다. 신범철이 중요한 경기에 나섰고 박호진은 간간이 경기에 출장할 수밖에 없었다. 박호진은 2001년 11경기에 출장해 13골을 내줬다. 그리고 2002년 이운재가 제대해 다시 붙박이 수문장 자리를 지키게 됐고 2003년에는 김대환까지 군 복무를 마치고 돌아왔다. 박호진으로서는 첩첩산중이었다.

박호진은 이운재와 김대환이 모두 팀에 복귀한 2003년 군 입대를 택했다. 수원에서 세 시즌 동안 17경기에 나선 게 전부인 그는 광주상무에서 많은 경기에 나서고 싶었다. 그렇지만 여기에도 경쟁자는 많았다. 이미 2002년 입대해 주전 자리를 꿰찬 이광석은 물론 백민철과 염동균, 정유석 등도 상무에 버티고 있었다. K2리그(현 내셔널리그)도 같이 참가했던 당시 상무는 이 네 명의 골키퍼를 K리그와 K2리그에 번갈아 기용할 정도로 골키퍼 자원이 풍부했다. 박호진은 2003년에 K리그 6경기, 2004년에 K리그 17경기에 나서는데 그쳐 여기에서도 주전으로 도약하는 데 실패했다.

그가 다시 돌아온 수원은 더욱 암울했다. 2002 한일월드컵 이후 이운재의 아성은 더욱 견고해졌고 ‘동갑내기’ 김대환도 박호진이 군대에서 기회를 잡지 못하는 동안 꾸준히 성장했다. 박호진은 엄연한 ‘넘버3’ 골키퍼였다. 선발 한 명과 후보 명단 한 명뿐인 골키퍼라는 포지션 특성상 엔트리에 이름을 올리기도 쉽지 않았다. 그는 제대 후 첫 시즌인 2005년에 딱 네 경기밖에 나서지 못했다. 경기에 나서면 안정적인 모습을 보여줬지만 경기 출장 자체가 불가능하니 답답할 노릇이었다.

2006년의 영광, 2007년의 좌절
참고 기다리던 그에게 2006년이 되자 기회가 찾아왔다. 이운재가 독일월드컵에 다녀온 뒤 무릎 부상을 당했고 김대환까지 어깨 부상으로 쓰러진 상황이었다. 그렇게 ‘넘버3’였던 박호진은 우여곡절 끝에 기회를 잡았다. 당시 수원은 13경기 연속 무승(5무 8패)이라는 최악의 부진에 빠져 있었다. 기회가 오면 반드시 잡을 것이라 다짐하던 박호진은 이 상황에서 놀라운 선방쇼를 이어갔다. 2006년 7월 경남과의 경기에서 부상 당한 이운재와 교체돼 투입된 이후 리그컵과 정규리그를 통틀어 13경기 연속 무패(9승 4무)라는 놀라운 성적에 일등공신이 됐다.

끝없는 연패로 추락하던 수원은 박호진이 등장한 이후 승승장구했다. 결국 수원은 전반기 최악의 부진에도 불구하고 챔피언결정전에까지 오르는 기적을 일궈냈다. 이운재는 일찌감치 부상에서 회복했지만 차범근 감독은 이운재를 벤치에 앉혀 둬야 했다. 차범근 감독은 “박호진이 이렇게 잘하고 있는데 억지로 이운재를 투입할 이유가 없다”면서 “이제는 이운재가 기다려야 한다”고 했다. 수원은 비록 챔피언결정전에서 성남에 패했지만 박호진은 이 시즌에 K리그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25경기에 나서 19골을 내주며 0점대 방어율을 기록한 그는 FA컵에서도 16강과 8강에서 연이어 승부차기 승리를 따내는데 수훈을 세우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2007년 시즌 초반 세 경기에서 나서 6골을 내주고 스스로 2군행을 택한 뒤 발등뼈 피로골절 부상을 당했다. 한창 상승세를 타고 있던 와중에 일어난 뜻밖의 부상이었다. 부상도 보통 부상이 아니었다. 그는 무려 1년 6개월 동안 재활치료에만 매진해 2009년 다시 그라운드에 설 수 있었다. 그의 나이 33살 때였다. 남들은 모두 은퇴를 예상했지만 그는 부상을 털고 돌아와 다시 벤치에 앉았다. 선발 출전이 보장된 것도 아닌데 그는 기를 쓰고 재활에 매달렸다. 그렇게 2009년 네 경기에 나설 수 있었다.

기사 이미지

<사진4 : 박호진은 12년 만에 100경기 출장을 기록하게 됐다. K리그 선수로 100경기 돌파는 흔한 일이지만 박호진에게는 12년 동안의 선수생활을 되돌아보게 하는 이정표나 다름없다. (사진=광주FC)>

“기다리면 언젠가는 기회가 온다”
그는 올 시즌을 앞두고 축구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11년 간 뛰었던 수원을 떠나 신생팀 광주FC로 이적하게 된 것이다. 그는 수원 코치였던 최만희 감독을 따라 광주로 향했다. 본인의 도전 의식도 작용했지만 수원에서도 더 이상 노장이면서 주전이 아닌 그를 붙잡을 수는 없었다. 수원에는 국가대표 수문장 정성룡이 들어왔고 박호진은 열악한 신생팀 광주에서 플레잉 코치 역할을 하며 골문을 지키게 됐다. 올 시즌 22경기에 나선 그는 팀내 최고참으로서 이리 저리 몸을 날리며 솔선수범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 최고의 훈련 시설을 자랑하는 수원을 떠나 이제는 인조잔디에서 연습하는 신세가 됐지만 그래도 행복하다.

나이를 잊은 왕성한 활약으로 올 시즌 벌써 두 번이나 주간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린 그에게도 사실 올 시즌 들어 위기는 있었다. 승부조작의 유혹이 기승을 부리던 올 초 그에게도 솔깃한 제안이 들어 왔었다. 팀 동료였던 성경모는 “큰 돈을 벌 수 있으니 함께하자”며 박호진에게 승부조작을 제안했었다. 이제 선수 생활의 끝을 맞는 그로서는 거액의 유혹에 흔들릴 수도 있었다. 포지션 특성상 골키퍼는 가장 유혹이 심하다. 하지만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리고는 성경모에게 이렇게 말했다. “그런 일에는 관심 없다. 너도 인생 망치고 싶지 않으면 당장 그런 짓 그만둬라.”

이후 승부조작에 연루된 이들이 대거 적발되면서 축구계를 떠났다. 만약 박호진이 검은 유혹에 흔들렸다면 이렇게 영광스러운 K리그 100경기 출장 기록을 세우지 못하고 떠났을 것이다. 그는 항상 그늘에 가린 2인자, 혹은 3인자였지만 묵묵히 자기가 할 일에 최선을 다하고 인내하면서 이렇게 12년을 보냈다. 그리고 K리그에 입성한 지 12년 만에 100경기 출장이라는 기록 달성을 눈앞에 두고 있다. 만약 그가 주전 경쟁에서 밀려 포기했거나 부상으로 꿈을 접었거나 검은 유혹에 흔들렸다면 이런 날은 오지 않았을 것이다.

100경기 출장은 K리그 붙박이 주전이 3~4년이면 채우는 기록이다. 하지만 박호진은 이 기록을 위해 12년을 기다렸다. 박호진은 축구선수뿐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에게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다. 그는 이런 말을 남긴 적이 있다. “보여줄 기회조차 잡지 못해서 안타까웠어요. 그런데 기다리는 게 무척 힘든 일이지만 제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기고 열심히 준비한다면 언젠가 기회는 주어지는 것이라 믿어요. 기회가 자주 찾아오는 게 아니기 때문에 항상 몸 관리에 더 신경 쓰고 언제든 경기에 나설 수 있도록 준비하면 언젠간 저에게도 웃을 날이 올 거라 믿습니다.” 그는 이렇게 12년을 지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