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살면서 많은 진실과 마주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가 알고 있었던 그 진실이 모두 거짓으로 밝혀진다면 어떠하겠는가. 실례로 미성년자 시절 성인 사이트에 가입하기 위해 순진한 사촌형 주민등록번호로 회원가입을 했더니 ‘이미 가입된 주민등록번호입니다’라고 떴을 때의 불편한 진실. 화끈한 영상이라는 말에 겨우 로그인을 하고 영상을 클릭했더니 이미 내가 다 본 영상일 때의 불편한 진실. 하지만 불편한 진실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는다. 우리가 관심 있게 지켜보고 있는 축구선수들의 해외 진출에서도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수 있다. 오늘은 해외 진출에 대한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불편한 진실1. J리그에 진출해야 국가대표가 될 수 있는 불편한 진실
과거 J리그 진출에는 공식이 있었다. K리그에서 최고의 활약을 펼치고 어느 정도 나이를 먹은 뒤 일본으로 진출하는 것이었다. 황선홍도 그랬고 최용수도 그랬다. 유상철 역시 K리그에서 오랜 시간 활약한 뒤 일본으로 날아갔다. 이들은 일본에 진출하자마자 대형사고를 치면서 득점 순위 상위권을 독식했다. 황선홍은 외국인으로는 최초로 J리그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날아온 최고의 외국인 선수들은 J리그를 점령했다. 당연히 이들은 대표팀에서도 중추적인 역할을 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은 다르다. 어린 선수들이 일찌감치 J리그 무대에 진출한다. 그리고 이들은 과거의 형님들처럼 J리그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지 않아도 대표팀 선발에 프리미엄을 얻는다. 김근환과 김보경, 김영권, 김진현, 조영철 등 아마추어 무대에서 곧바로 J리그에 진출한 선수들은 그다지 눈부신 활약을 펼치지 못했음에도 벌써 대표팀을 경험했다. 이 중 김근환을 빼면 모두 현직 대표 선수로 이번 한일전 엔트리에 이름을 올렸다. 일본은 J리그에서 최고의 경기력을 인정받아 유럽으로 진출한 선수들로 명단을 꾸렸는데 우리는 J리그에서 평타(?) 이상의 선수들을 소집했으니 이길 리가 있나.

과연 이들이 K리그 선수들과 경쟁해 우위에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나. 한상운과 하대성, 김동찬, 이승현, 홍철, 임상협 등이 J리그 선수들보다 뒤떨어지는 부분이 있을까. 과거에는 J리그 선수들이 성적 보증수표였을 때가 있다. 당시에는 K리그를 점령하고 더 좋은 조건을 찾아 일본으로 날아간 검증된 선수들이었으니 그게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J리그 소속이라고 경기력을 보장해 주지는 않는다. 자꾸 이런 식으로 J리그 선수들을 우대한다면 결국에는 대표 선수가 되기 위해 일본으로 건너가는 현상까지 나올 수 있다.

불편한 진실2. J리그 가면 박지성처럼 유럽 빅리그에 진출할 수 있을 것이라 믿지만 현실은 스위스 바젤 진출이 전부라는 불편한 진실
박지성은 K리그 경험이 없다. 대학 졸업 후 J2리그 교토 퍼플상가에 입단한 뒤 네덜란드 PSV 아인트호벤을 거쳐 잉글랜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성했다. J리그에 진출하는 선수들은 박지성을 롤모델로 삼는다. 박지성처럼 능력을 인정받으면 유럽으로 쉽게 진출할 줄 안다. 하지만 박지성은 특별한 케이스다. 그가 유럽 무대에 진출할 수 있었던 건 2002 한일월드컵 덕분이었다. 만약 월드컵에서의 활약이 아니었다면 박지성이 유럽에 가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그가 J2리그에서 유럽 스카우트의 눈에 띄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최근에는 J리그에서 뛰던 박주호가 스위스리그 바젤에 진출했다. 박지성이라는 특별한 사례를 제외한다면 J리그에서 유럽으로 진출한 한국 선수는 박주호가 유일하다. 그런데 바젤이 과연 K리그나 J리그의 상위권 팀과 비교해 봤을 때 나은 수준일까. UEFA 챔피언스리그 단골손님이지만 이 점을 빼면 그다지 매력적인 팀은 아니다. J리그에 진출하는 어린 선수들은 유소년 시절부터 엄청난 재능을 인정받아 거액에 일본으로 날아간다. 그런데 이들 중 박주호 한 명만이 스위스에 진출했다는 건 꼭 J리그가 선수를 망치는 곳은 아니어도 그다지 좋은 선택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최고의 유망주로 평가받던 김진규와 이강진, 김근철, 오장은 등은 한 차례씩 J리그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국내 무대로 돌아왔다.

이영표와 이천수, 박주영, 이청용, 기성용, 지동원, 구자철 등은 K리그에서 유럽 무대로 직행했다. 안정환과 이동국, 조원희, 김두현도 마찬가지다. 대표팀에 뽑히지 않으면 유럽 무대에 나갈 수 없는 것 아니냐고 반문할 이들을 위해 친절히 정조국의 사례도 소개한다. 정조국은 최근 들어 대표팀 경력이 없었지만 K리그에서의 활약을 인정받아 프랑스 리그로 진출했다. 박지성이라는 특별한 사례를 믿고 J리그에 진출하는 건 도박이다. K리그에서도 실력만 인정받으면 충분히 유럽에 진출할 수 있다. 스위스 리그 바젤에 선수 한 명 보낸 걸로 논리를 앞세울 거면 K리그에서 체코(배해민), 핀란드(권정혁, 김현관), 오스트리아(노병준), 포르투갈(이형상)로 보낸 선수들은 어떻게 설명할 건가.

불편한 진실3. 유럽 최고의 무대는 프리미어리그라고 생각하지만 열기는 분데스리가가 더 뜨겁다는 불편한 진실
마이크 피아자, 에릭 캐로스, 라울 몬데시, 숀 그린, 토드 질. 오랜 만에 들어보는 이름일 것이다. 박찬호가 LA다저스 시절 함께 했던 동료들이다. 당시 전국민은 다저스의 1번 타자부터 9번 타자까지 줄줄이 꿰고 있었다. ‘불 붙이던 소방수’ 제프 쇼도 기억난다. 케즈만, 로벤, 브루잉크, 롬메달, 보겔, 반 봄멜, 보우마, 오이에르, 바테루스도 기억할 것이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PSV 아인트호벤에서 뛸 때 함께 했던 선수들이다. 당시 아인트호벤 베스트11 모르는 사람은 외계인 취급 받았다. LA다저스와 PSV 아인트호벤은 ‘국민 팀’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우물 안 개구리다. 우리나라 선수가 진출한 팀 위주로만, 그 리그 위주로만 바라본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프리미어리그에서 큰 성공을 거두자 프리미어리그는 ‘국민 리그’가 됐다. 아마 K리그 팀 이름은 줄줄 못 꿰어도 프리미어리그 팀 이름은 술술 읊을 수 있는 이들도 많을 것이다. 이제 어린 선수들한테 “꿈이 무어냐”고 물으면 이런 대답이 돌아온다. “꼭 유럽 무대에서 뛰고 싶어요. 프리미어리그에 진출하고 싶어요.” 우리에게는 유럽 무대가 곧 프리미어리그라는 고정관념이 박혔다. 하지만 프리미어리그가 무조건 꿈의 최종 목표가 되어선 안 된다. 독일도 있고 스페인도 있고 이탈리아도 있다.

박지성과 이영표가 성공했다고 해서 아무런 고민 없이 프리미어리그 진출만 생각하는 건 문제가 있다. 이건 내가 중학교 시절 아디다스 찍찍이를 다 신고 다니던 유행과 다를 바 없다. 만약 박지성이 은퇴한다면 프리미어리그 인기도 더불어 시들해질 것이다. 가장 이상적인 건 유럽 빅리그에 우리나라 선수들이 골고루 진출하는 것이다. 이곳 저곳에서 뛰는 선수들이 많아야 한국 축구도 튼튼해진다. 우리는 프리미어리그가 최고라고 생각하지만 2009-10시즌 경기당 평균관중은 독일 분데스리가가 42,630명으로 제일 많았다. 프리미어리그(3만3,934명)보다 평균적으로 만 명 가깝게 더 들어왔다. 평균 관중수로 리그 수준을 따지는 건 옳지 않은 일이지만 프리미어리그만이 최고가 아니라는 사실만은 알아주길 바란다.

불편한 진실4. 유망주라고 무척 기대했는데 현실은 이산, 임규혁이 벌써 축구를 그만뒀다는 불편한 진실
가끔 인터넷에 보면 유럽 구단 유소년 팀에서 뛰고 있는 10대 초반 꼬마의 행보까지도 알아내 흥분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우리의 어린 선수들이 빅리그의 빅클럽 소속으로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는 사실에 10년 후면 한국 축구의 패러다임을 바꿀 빅스타가 탄생할 것이라 기대한다. 하지만 이런 지나친 기대는 접어두는 편이 낫다. 1군 정규 주전이 되기 전까지는 아무 것도 결정된 게 없다. 그들의 도전 정신과 용기를 폄하할 생각은 없지만 이런 기대는 오히려 그들에게 부담이 될 뿐이다. 수백, 아니 수천 명의 선수가 빅클럽 유소년 팀에서 같은 꿈을 꾼다.

잉글랜드로 조기 축구유학을 떠나면서 많은 팬들의 기대를 받았던 이산과 브라질로 축구 유학을 떠난 뒤 동영상 하나로 ‘천재’라 평가받던 임규혁은 모두 이른 나이에 축구를 그만뒀다. 석현준은 아약스 소속으로 ‘본의 아니게’ 엄청난 관심을 받았지만 방출된 뒤 흐로닝언에서 새로운 축구 인생을 시작했다. 우리 기준에서는 실패일지 몰라도 그들은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다했고 아쉽지만 그 결과를 받아 들였다. U-20 청소년 월드컵에 나서도 성인 대표팀 자리를 보장받지 못하는 마당에 이제 막 축구의 즐거움에 눈 뜬 10대 초반의 어린 선수들에게 우리 스스로 거대한 목표를 설정해주지는 말자.

개인적으로는 너무 이른 나이에 낯선 환경에서 축구를 하는 것보다는 이제 어느 유소년 육성 시스템과 비교해도 열악하지 않을 정도로 자리 잡은 K리그 유소년 클럽에서 축구를 접하다가 재능을 인정받으면 해외로 나가는 게 더 옳다고 생각한다. 지금 대표팀에 오르내리는 선수들 중에도 국내 유소년 시스템을 거르고 한 번에 외국으로 나가 성장한 선수는 없다. 또한 축구선수로서 실패할 가능성에도 대비해 국내에서 운동과 공부를 꾸준히 병행하는 자세도 필요하다. 어린 나이에 빅클럽 유소년 팀에서 뛴다는 게 성공을 보장하지는 않는다.

불편한 진실5. 젊을 때 해외로 나가면 일이 다 해결될 줄 알았는데 박주영은 군대 문제 때문에 이적도 쉽지 않다는 불편한 진실
얼마 전 칼럼에서도 이야기했다. 무조건 어린 나이에 해외로 나간다고 능사는 아니다. 우리는 특수한 정치적 상황 때문에 건장한 남성이라면 누구나 병역 의무를 수행해야 한다. 군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 유럽으로 날아간 박주영은 이제 병역이라는 큰 산에 가로 막혔다. 모나코 측에서도 “박주영이 군 문제만 연기할 수 있다면 장기 계약을 원하는 팀이 많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해외 진출을 원하는 선수라면 하루라도 빨리 상무에 입대해 병역을 해결하는 편이 낫다. 박주영이 병역 문제를 해결했다면 그는 어마어마한 몸값을 받고 빅리그로 진출하는 게 한결 수월했을 것이다.

해외 진출에 대한 불편한 진실들에 대해 몇 가지를 꼽아봤다. 결론적으로 내 생각은 최근 해외로 나간 선수 중 구자철이 가장 옳은 선택을 했다고 본다. 구자철은 J리그를 돌아 유럽으로 나가지 않고 K리그에서 유럽으로 직행했다. 또한 ‘국민 리그’인 프리미어리그가 아닌 분데스리가에 입성하며 새로운 도전을 선택했다. 국가 유공자인 아버지 덕분에 병역 혜택도 받았고 어린 나이에 해외로 나간 게 아니라 K리그에서 충분히 경험을 쌓았다는 점도 돋보인다. 가장 이상적인 해외 진출 사례로 꼽을 만하다.

이제 승강제 실시를 앞두고 드래프트 제도도 개선될 예정이다. 이 악습으로 인해 많은 선수들이 해외로 도피 아닌 도피를 선택했지만 구자철의 사례를 본다면 결국 드래프트 제도 때문에 K리그를 외면한다는 것도 다 핑계다. 구자철은 드래프트에서 비인기 구단이면서 성적도 별로였던 제주의 선택을 받았지만 실력으로 결국 유럽 진출에까지 성공했다. 해외 진출에 대한 불편한 진실, 결국에는 아무리 해외로 나갈 좋은 조건을 찾아 머리를 굴려도 가장 중요한 건 실력이라는 진실에 도달하게 된다. 실력은 통하는 법이다. 이것 만큼은 진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