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정말 긴 하루를 실감한 적이 있었다. 여자친구에게 무참히 차이고 나서 좌절하고 있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 문자 메시지로 이별 통보를 받는 건 치욕스러운 일이었다. 그런데 몇 시간이 지난 뒤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내가 일하고 싶던 <풋볼위클리>라는 잡지사에서 면접에 합격했다는 통보를 받은 것이다. 날아갈 듯 기쁜 마음에 환호성을 질렀다. 나에게 있어 이날은 평생 잊지 못할 날이 됐다. 절망과 희망을 모두 느낀 긴 하루였다. 마냥 슬프지도, 그렇다고 마냥 기쁘지도 않은 복잡한 감정이었다.

딱 한국 축구의 어제와 오늘은 이랬다. 어제(10일) 저녁 한일전에서 대표팀이 보여준 최악의 경기력으로 분노할 때는 마치 한국 축구가 끝난 것 같았다. 이대로 칼럼을 쓰다가는 칼럼으로 육두문자를 내뱉을 것 같아 화를 가라 앉혀야 할 정도였다. 하지만 오늘(11일) 아침 청소년 대표팀은 ‘최강’ 스페인을 상대로 믿을 수 없는 멋진 경기를 펼쳤다. 어제의 분노를 가라 앉힐 수 있는 멋진 한판이었다. 한국 축구의 절망과 희망을 모두 경험한 긴 하루였다.

한일전, 변명할 수 없는 완패
일단 한일전에서 보여준 성인대표팀의 경기력에 대해서는 실망감을 반드시 표현해야겠다. 어떤 선수가 일본과의 대결에서 지는 걸 바라고 경기에 나서지는 않겠지만 그들이 보여준 경기력은 실망 그 자체였다. 마치 혼다는 메시가 된 것처럼 한국 수비 여러 명을 제치면서 패스 플레이를 이어갔다. 한국 수비는 일본의 패스에 속절없이 무너졌다. 이런 한일전은 태어나서 본 적이 없었다. 치욕 중의 치욕이었다. 이 경기가 닷새 뒤 광복절에 열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생각해야 할 지도 모르겠다.

내가 봤을 때 또 다른 문제점은 전문 윙어와 측면 수비수의 부재였다. 차두리만이 그나마 듬직하게 플레이했을 뿐 나머지 측면 선수들은 한 게 없다. 구자철과 이근호는 전문적인 윙어가 아니지만 이날 경기에서 날개로 나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김영권과 박원재는 플레이 시간이 짧았다고 쳐도 측면 수비수 박주호 역시 날카롭지 못했다. 틈만 나면 침투해 우리 수비진 사이로 돌아들어가는 일본 윙어와 풀백의 모습과는 확연히 달랐다. 우리는 그 모습을 뻔히 알면서도 90분 동안 당했다.

돔구장이나 일본의 열악한 훈련장 제공, 이청용과 손흥민, 지동원의 결장 등은 다 핑계다. 아무리 일본 홈이라고 하더라도 일본 선수들에게 돔구장은 똑같이 낯선 곳이다. 우리는 2002 한일월드컵 폴란드전을 앞두고 붉은악마가 폴란드 숙소에 새벽부터 찾아가 나팔을 불며 잠을 깨우는 등 홈 이점을 발휘하기도 했다. 일본이 제공한 열악한 훈련 여건도 원정 팀으로서는 피할 수 없는 일이다. 손흥민과 지동원은 지금까지 성인 대표팀의 주축 선수도 아니었다. 핑계 댈 것 없다. 이건 완벽히 진 것이다. 불리한 상황을 이겨내는 게 진정한 강팀이 해야 할 일이다.

스페인전, 기대 이상의 선전
반면 U-20 청소년 월드컵 16강 스페인전에서 보여준 청소년 대표팀의 경기력은 놀라웠다. 몇 차례 위기를 맞기도 했지만 물러서지 않고 당당히 ‘우승 후보’ 스페인과 맞써 싸우면서 팽팽한 경기를 펼쳤다. 조별예선에서 막강 화력을 뽐냈던 스페인은 120분 동안 한국에 단 한 골도 넣지 못했다. 경기 전부터 한국이 대패할 것이라던 많은 이들의 예상은 보란 듯이 빗나갔다. 한국은 비록 승부차기 끝에 졌지만 모두의 마음에 불을 당기는 아름다운 경기를 선보였다.

황도연이 부상으로 빠졌음에도 놀라운 집중력을 발휘한 수비진은 물론 최성근과 김영욱을 수비형 미드필더로 배치하고 백성동을 중앙으로 돌려세운 전략도 훌륭했다. 또한 무엇보다 ‘우승 후보’ 스페인을 상대로 주눅들지 않고 치고 받는 경기를 펼친 선수들의 자신감은 백 번 박수를 보내도 아깝지 않다. 국제무대에서 대진운 없기로는 피파 랭킹 1위인 우리의 상황을 감안했을 때 아마 스페인이 이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하고 우리는 16강에서 이들을 잡지 못했다는 사실에 무척 아쉬워 할 지도 모르겠다.

이광종호는 콜롬비아전이 끝난 뒤 엄청난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나 역시 그들을 응원하자는 칼럼을 썼다가 숱한 항의 메일을 받았다. 마음이 돌아선 팬들은 어떤 이야기를 하더라도 불만 뿐이었다. 차마 글로 담을 수 없는 인신공격성 댓글도 넘쳐났다. 하지만 어린 선수들은 이런 비난에도 흔들리지 않고 평정심을 유지하며 멋진 경기를 펼쳤다.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 등 세계 최고의 유소년 시스템에서 길러진 선수들을 상대로 우리의 ‘대딩’들은 전혀 굽히지 않았다.

두 경기에서 얻을 수 있는 교훈
한국 축구의 절망과 희망을 모두 맛본 긴 하루가 지났다. 우리는 한일전이 끝난 뒤 분노하고 스페인전이 끝난 뒤 감동하면서 일희일비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어제와 오늘 열린 두 경기에는 모두 교훈이 있다. 한 번 졌다고 “죽일 놈” 운운하지도 한 번 멋지게 싸웠다고 “만세”를 외치는 건 조울증 환자나 다름없다. 여기에서 얻은 교훈으로 한일전처럼 실망스러운 경기를 펼치지 않고 꾸준히 스페인전처럼 멋진 경기를 펼치는 게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서도 옳은 일이다.

일단 한일전 패배의 이유를 곱씹어봐야 한다. 측면 공격을 번번이 허용하면서도 거의 무방비에 가까운 전술로 90분을 보내지는 않았나 되돌려보자. 이적 문제로 혼자 훈련하는 선수를 최전방에 세운 전술은 어땠나. 과거에는 J리그에서도 최상급 플레이를 펼치는 선수만을 대표팀에 선발했지만 이근호와 김영권, 조영철, 김진현, 김보경 등이 일본에서 뛴다고 현재 프리미엄을 받고 있지는 않는지도 고민해봐야 한다. 측면 윙어와 풀백의 재발견도 필요하다. 조광래 감독의 전술에 선수들을 끼워맞추지는 않는지 생각해 볼 시간이 필요하다.

반대로 청소년 대표팀이 스페인을 상대로 전술변화를 통해 압박에 성공한 것도 우리로서는 큰 교훈이다. 제 아무리 훌륭한 개인 기량을 가진 선수라도 결국에는 11명이 모여 경기를 치러야 한다. 선수 개개인의 기량은 상대팀에 비해 부족할지 몰라도 이 11명이 모여 대등하게 싸울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준 경기였다. 현대축구에서 자꾸 투혼을 이야기하는 게 시대에 뒤떨어질지 몰라도 이 경기에서 보여준 선수들의 투혼은 분명히 큰 교훈을 준다. 성인 대표팀에 박지성과 이영표, 이청용이 없었듯 청소년 대표팀에도 지동원과 손흥민, 석현준, 남태희가 소속팀 차출 거부로 빠졌음에도 이들은 스타 선수 없이 멋지게 싸웠다.

강팀은 꾸준한 경기를 펼친다
1998년 3월 1일이었다. 아직도 날짜를 정확하게 기억하는 건 이 3·1절에 한국이 일본을 맞아 졸전 끝에 1-2로 패했기 때문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일본을 꺾어야 하는 3·1절에 한국은 일본을 상대로 최악의 경기를 펼쳤다. 결과는 1-2이었지만 어제 열린 한일전에 맞먹는 저조한 경기력이었다. 국내에서는 비난 여론이 들끓었고 선수들은 졸지에 ‘매국노’가 됐다. 그로부터 딱 한 달이 지난 뒤 다시 일본과 맞붙었다. 그리고 이 경기에서 한국은 극적으로 2-1 승리를 따냈다. 많은 이들이 기억하는 황선홍의 발리슛이 바로 이 경기다.

콜롬비아전에서 최악의 경기력으로 지탄의 대상이 됐던 청소년 대표팀은 불과 나흘 만에 믿기지 않은 경기력으로 찬사를 받았다. 축구란 게 이런 것이다. 한 달 만에 통쾌한 복수전을 펼칠 수도 있고 나흘 만에 다른 팀으로 변신할 수도 있는 게 바로 축구다. 물론 이 반대일 수도 있다. 진정한 강팀은 이러한 기복을 줄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 면에서 앞으로는 어제 한일전 같은 치욕스러운 경기를 줄이고 오늘 스페인전처럼 멋진 경기를 자주 펼치는 게 진정한 강팀으로 나아가는 길이다. 두 경기 모두에서 교훈을 얻었으니 이제 실천하는 일만 남았다. 가나와 세르비아를 상대로 멋진 경기를 펼친 조광래호가 일본을 상대로 이런 졸전을 펼칠 것이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나는 신을 믿지는 않지만 ‘축구의 신’이 있다면 그는 아마 ‘밀당 종결자’일 것이다. 어제 저녁 최악의 참사를, 그것도 한일전에서 선사하더니 오늘 아침에는 최고의 경기를, 그것도 최강 스페인전에서 선사했다. 아마 한국 축구팬들에게 자만도, 그렇다고 낙담도 하지 말고 적당히 긴장하라는 의미인가보다. 만약 다음에도 이런 중요한 두 경기가 하루 동안 펼쳐진다면 그때는 희망만 볼 수 있길 바란다. 멍청한 사람은 결과에 일희일비하지만 현명한 사람은 이 결과에서 교훈을 얻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성인 대표팀 선수들은 당신들의 졸전을 잊게 해준 동생들한테 거하게 밥 한 번 사라. 동생들 아니었으면 당신들은 지금쯤 공항에서 날계란 들고 기다리는 팬들을 마주했을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