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 강점기이던 1937년 ‘한국 축구의 대부’ 김용식은 축구를 잠시 그만둔 상태였다. 일본 와세다 대학교 선수로 잠시 활약했었지만 조선인에 대한 억압이 점점 심해지자 회의감을 느끼고 축구를 포기했던 그는 미국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인의 소개로 잠시 신문사 기자로 일하던 때였다. 그라운드를 누벼야 할 당대 최고의 스타 김용식은 스포츠만 전문적으로 취재하는 체육부가 따로 없어 사회부 기자로 일해야 했다. 일제 강점기가 낳은 슬픈 현실이었다.

그는 뛸 곳이 없었다. 일본은 조선의 체육 시스템을 모조리 파괴했다. 27세의 나이로 이제 축구 선수로 정점에 오른 김용식은 그라운드에 서지 못하고 신문사 책상에 앉아 있어야만 했다. 그는 기자 생활을 하면서 미국인 선교사에게 틈틈이 영어 공부를 하고 있었다. 비록 사회부 소속이었지만 시간이 날 때마다 경기장을 찾아 축구 경기를 관람했고 혼자 공을 다루기도 했다. 그에게 있어 언제나 마음 속의 본업은 축구였다. 언제든 축구를 위해 달려갈 준비가 돼 있었다.

“다시 축구화를 신게.” 1938년 6월 보성 전문학교에서 반가운 소식이 김용식에게 날아왔다. 전 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서 보성 전문 올스타를 초청한 것이었다. 당시 조선의 스포츠를 억압하던 일본이 의외의 결정을 내리자 김용식을 비롯한 보성 전문학교 출신 선수들은 놀랄 수밖에 없었다. 고민할 것도 없이 결정했다. “다시 축구를 해보겠습니다.” 그렇게 어제의 용사들이 다시 모였다. 김용식은 몇 달 다니지도 않고 신문사를 그만둔 채 동료들과 도쿄로 날아갔다.

일본이 전 일본 축구 선수권 대회에 보성 전문 올스타를 초청한 꿍꿍이는 따로 있었다. 사실 그들은 말로만 올스타일뿐 일본의 억압으로 인해 한 동안 축구를 포기했던 선수들이었다. 당연히 훈련도 제대로 돼 있을 리 없었다. 더군다나 당시 일본 와세다 대학은 일본 국가대표 선수를 12명이나 보유한 최강의 팀이었다. 와세다 대학이 곧 일본 국가대표나 다름 없었다. 와세다 대학이 보성 전문 올스타를 대파해 일본의 우수성을 보여주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 1년 전 와세다 대학에 몸담았다가 억압에 못 이겨 팀을 떠난 김용식도 반드시 보성 전문 올스타에 속하기 바랐다.

김용식을 비롯한 보성 전문 올스타도 이 속내를 모를 리 없었다. 그래도 그들은 파이팅을 외쳤다. “우리가 공을 찰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모든 걸 운동장에 쏟아내자.” 승승장구한 보성 전문 올스타는 결국 준결승전에서 ‘역대 최강’이라는 와세다 대학과 맞붙게 됐다. 일본에서는 깔아 놓은 멍석에 보성 전문 올스타가 의도한대로 등장하자 내심 흥분했다. 이제 일본 최강 팀이 어제의 용사들로 구성된 보성 전문 올스타를 대파하기만 하면 되는 일이었다. 조선의 사기를 완전히 꺾어놓을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경기가 시작됐다. 일본 관중의 일방적인 응원을 등에 업은 와세다 대학은 강했다. 하지만 보성 전문 올스타도 물러서지 않았다. 의외의 결과였다. 당시 와세다 대학과 이렇게 대등한 시합을 했던 팀은 없었다. 결국 연장전까지 치렀지만 2-2로 승패를 가리지 못했고 당시 규정에 따라 추첨으로 승부를 내야했다. 조선 팀을 대파하고 사기를 꺾어 놓을 것이라는 일본의 의도는 빗나갔다. 이제는 초조하게 추첨으로 결과를 기다려야 할 시간이 되자 대회 조직위원회는 분주히 움직였다.

추첨을 위해 보성 전문 올스타의 주장 김용식이 본부석으로 향했다. 와세다 대학 주장도 함께였다. “보성에서 먼저 뽑으시오.” 김용식은 고민 끝에 두 장의 종이 중 한 장을 선택했다. 남은 용지 한 장은 와세다 대학 주장이 뽑았다. 그러자 조직위원회 관계자는 이렇게 말했다. “보성에서 먼저 종이를 펴시오.” 김용식은 긴장하며 접힌 종이를 폈다. 그곳에는 믿기지 않는 글자가 써 있었다. ‘패(敗)’였다. 하늘이 무너지는 느낌이었다. 이렇게 보성 전문 올스타는 일본 최강이라던 와세다 대학과 대등하게 싸웠지만 추첨에서 밀리고 말았다.

그런데 와세다 대학 주장 표정이 이상했다. 그는 자신이 뽑은 종이를 바라보면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때 본부석의 관계자가 재빨리 마이크를 잡고 입을 열었다. “추첨 결과를 발표하겠습니다. 이번 경기의 승리 팀은 와세다 대학입니다.” 그러자 와세다 대학 주장은 만세를 부르면서 환호했다. 열악한 상황에서 사실상 일본 대표팀과 다를 바 없는 와세다 대학과 당당히 싸운 보성 전문 올스타 선수들은 고개를 떨궜다. 와세다 대학은 보성 전문 올스타를 추첨 끝에 이기고 결승에 진출했다.

며칠 뒤 조선으로 돌아온 보성 전문 올스타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게 됐다. 조직위원회는 당시 두 장의 추첨 용지 모두에 ‘패’라는 글자가 써 놓고 김용식이 뽑아든 종이를 먼저 펴게 하는 치졸한 수법을 쓴 것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이건 와세다 대학이 추첨승을 거둘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이 소식을 들은 김용식은 분노했다. “그때 와세다 대학이 뽑은 종이도 확인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다”고 동료들에게 미안해하기도 했다. 이건 일제 강점기에 억압 받는 조선인의 모습이었다.

김용식은 6개월이 지난 1938년 12월 일본 축구 협회가 주최하는 조선과 관서, 관동을 포함한 세 지역 축구대회에 조선 대표로 나섰다. 6개월 전 치졸한 방법에 당해 추첨 끝에 졌던 울분을 실력으로 갚아주기 위해 이를 갈았고 결국 김용식이 이끄는 조선은 일본 오사카 갑자원에서 열린 대회에서 당당히 실력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이번에는 추첨까지 갈 일도 없이 조선이 상대 팀들을 상대로 대승을 거뒀다. 그들은 이 불리한 조건을 실력과 투혼으로 이겨냈다.

오늘(10일) 75번째 한일전이 열린다. 일본은 안방에서 한국을 꺾기 위해 텃세를 부리고 있다. 우리로서는 생소한 돔구장에서 경기를 치르게 한 건 애교 수준에 불과하다. 일본은 한국이 공이 굴러가지도 않는 그라운드에서 제대로 된 조명도 없이 야간 훈련을 하도록 했다. 이건 A매치를 위해 방문한 팀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일본은 열악한 훈련 환경을 제공하면서 우리의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한국은 이청용과 손흥민, 지동원 등 유럽파도 부상과 배려 차원에서 제외하고 경기에 나서야 한다. 모든 면에서 일본에 유리한 면을 찾기 힘들다.

하지만 한일전은 언제나 실력 이상의 투혼을 발휘하는 팀이 승리를 따냈다. 치졸한 방법에 당해 추첨패한 선배들은 거기에서 물러서지 않고 더 당당히 싸워 6개월 뒤 통쾌한 승리를 따냈다. 당시에 비하면 지금의 상황은 불리한 축에도 끼지 못한다. 일본의 억압에도 물러서지 않고 싸웠던 선배들의 투혼을 오늘 경기에서도 보여주길 바란다. 또 한 번의 멋진 한일전 드라마가 펼쳐지길 기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