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다 살다 이렇게 자국 축구선수들에게 조롱을 일삼는 이들은 처음 봤다. 지금 콜롬비아에서 열리는 U-20 청소년 월드컵에 출전하고 있는 한국 청소년 대표팀은 가루가 되도록 까이고 있다. 아무리 냄비 근성이 판을 친다고 해도 이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다. 내 한 마디로 이런 패배의식, 아니 마치 자기가 스페인 국민이라도 된양 떠드는 네티즌들의 인식이 바뀔 리도 없지만 그래도 할 말은 해야겠다.

아쉬움 컸던 콜롬비아전은 끝났다
콜롬비아전 경기력이 좋지 않았던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일요일 아침 단잠도 포기한 채 지켜본 이 경기에 많은 이들은 실망할 수밖에 없었다. 나 역시 강렬한 인상을 남기지 못한 청소년 대표팀 선수들의 경기력에 무척이나 실망했다. 하지만 아직은 대회가 진행되고 있다. 지금은 비판을 가할 시간이 아니다. 더군다나 비판이 아닌 비난이라면 대회가 끝나고도 이 팀이 발전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질 않는다. 지금 우리가 하고 있는 건 비판이 아니라 비난이다.

청소년 대표팀은 이번 대회에 참가한 24개 팀 중에서 14위로 16강에 올랐다. 우리보다 못한 과테말라는 1득점 11실점이라는 최악의 성적으로도 16강에 올랐다. 우리는 첫 경기에서 난적 말리를 잡고 16강에 오를 충분한 자격을 갖췄다. 요행으로 올라간 16강이 아니다. 파라과이는 이번 코파 아메리카에서 5경기 연속 무승부를 기록하면서도 결승에까지 올랐었다. 이걸 보고 파라과이 팬들이 조롱을 보냈을까. 16강 갔으면 최소한 응원은 못해줄 망정 조롱은 하지 말자.

콜롬비아전이 평가전이었다면 지금 호된 비판을 해도 괜찮다. 하지만 우리는 지금 청소년 월드컵 본선을 치르고 있다. 지금은 당연히 힘을 북돋아줄 시기다. 더군다나 경기에 나서는 이들은 20세 이하의 어린 선수들이다. 팬들의 반응 하나 하나에 예민할 수밖에 없다. 스페인이라는 거함을 상대하는데 고국에서 열띤 응원을 해줘도 모자를 판국에 조롱만 보내고 있으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이 선수들은 아마 한국의 친구에게 전화를 걸어 이런 이야기를 듣고 힘이 빠질 지도 모른다. “너희들 지금 한국에서 겁나게 까이고 있어.”

이기길 포기한 팀은 이길 수 없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번 16강 상대는 스페인이다. 조별예선에서 엄청난 경기력을 선보인 스페인은 이번 대회 강력한 우승후보다. 바르셀로나와 레알 마드리드에서 육성한 선수들이 즐비하다. 상당수가 대학생인 한국에 대승을 하지 못하는 게 이상할 정도의 전력이다. 우리가 선전하려면 우리는 11명이 아닌 모든 축구팬이 이들과 맞서 싸워야 한다. 멀리서나마 응원을 보내는 게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다. 우리 스스로 채찍질 하는 것과 진심으로 우리가 대패하길 바라는 건 다르다. 지금 우리는 후자다.

장담컨대 이기길 포기하고 나서는 경기에서 이길 수 있는 팀은 아무도 없다. 아무리 약체가 강팀을 상대하더라도 “최선을 다하면 이길 수 있다”는 마음이 있어야 1%의 기적이라도 일어나는 법이다. 그런데 경기 전부터 국민들이 초 치고 앉아 있는데 없던 경기력을 발휘하기는커녕 있던 경기력이라도 제대로 나올까. 스페인전 대패를 예견하고 조롱을 보내면 마치 자기만 선진 축구를 접하고 인정하는 축구 전문가라도 된다고 생각하는 걸까.

당신이 수능시험을 앞두고 있다고 치자. 그런데 당신 친구가 밤마다 물 떠놓고 당신 수능시험 답안지 밀려 쓰라고 고사를 지내면 기분이 어떨까. 나 같으면 화나서 주먹부터 나간다. 우리는 지금 청소년 대표팀의 다가올 스페인전을 이런 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크게 져서 현실을 인식하고 발전하라는 의미로 비난하는 겁니다”라는 핑계는 말도 안 된다. 그러면 당신도 수능시험 망쳐 현실을 인식하고 재수해서 서울대 법대가길 바라는 마음으로 고사 지내는 친구의 넓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나.

청소년 대표팀은 완성된 팀이 아니다
나는 평소 이종격투기에는 큰 관심이 없다. 그냥 채널을 돌리다가 우연치 않게 접하게 되면 보는 정도다. 당연히 선수들도 잘 알지 못한다. 그런데도 한국 선수가 나오면 잠시나마 마음 속으로라도 응원한다. 한국 선수가 피를 흘리면서 다른 나라 선수에게 맞는 모습이 보기 싫은 건 당연하지 않나. 그런데 지금 이 상황에서 청소년 대표팀이 대패하길 바라고 조롱하는 이들이 있다니 참 놀랍다. 여기 스페인인가보다. 아니면 자국 팀의 대패를 바라는 노예 근성에 젖은 나라일 수도 있다.

청소년 월드컵은 스타 선수들의 등용문이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이 선수들이 모두 성인 무대에서 성공을 거두는 것도 아니다. 통상적으로 볼 때 한 대회에 나선 한 팀 선수 중 서너 명이라도 성인 대표팀에 안착하면 성공적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역대 최강으로 꼽히는 2007년 U-20 청소년 대표팀 선수 중 성인 무대에서도 주전으로 도약한 이는 기성용과 이청용뿐이다. 그 범위를 대표팀 승선으로 넓힌다고 해도 박현범과 김진현 정도가 언론에 회자되는 수준이다.

4강이라는 위업을 달성한 1983년 멕시코 청소년 대표팀 선수 중 성인 무대에서도 꾸준히 태극마크를 단 건 김풍주와 김판근 단 두 명이다. 18명의 선수 중 나머지 16명은 이후 성인이 돼 대표팀에 얼굴을 내밀지 못했다. 그만큼 청소년 대표팀은 완성된 팀이 아니다. 결과 하나 하나에, 경기력 하나 하나에 일희일비할 만큼 갖춰지지 않다. 만약 청소년 월드컵 성적이 3~4년 후 성인 대표팀으로 이어진다면 우리는 1986년 멕시코 월드컵에서 4강이나 8강 정도는 올라갔어야 한다.

2년 전 열광하던 이들은 어디로 갔나
물론 쉽지 않은 승부일 것이다. 객관적으로 전력 차가 적지 않다. 물론 극적으로 스페인을 이긴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고 해도 나는 이 어린 선수들이 최선을 다하는 플레이를 펼친다면 만족할 수 있다. 지금은 이들에게 응원을 보낼 때다. 적어도 이들을 ‘남’으로 본다면 대패를 하건 말건 상관없다. 하지만 ‘우리’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우리는 지금 태극마크를 달고 지구 반대편에서 혈투를 준비 중인 어린 선수들을 ‘우리’가 아닌 ‘남’으로 보고 있지는 않나.

말리전 승리 때만 하더라도 분위기는 들끓었다. 폭우 속에서 보여준 저력이 멋졌다면서 찬양 일색이었다. 그런데 콜롬비아전이 끝나니 언제 그랬냐는듯 조롱이나 일삼고 있다. 콜롬비아전에서 투혼을 보여주지 못한 것에 대한 아쉬움을 팬의 입장으로 표현할 수는 있지만 스페인전 앞두고 우리의 대패를 간절히 원하면 당신이 무슨 유럽 축구 선진국 스페인 국민이라도 되나. 나는 스페인전에서 크게 지는 것보다 이런 냄비근성이 더 창피하다. 이 세대가 2년 전 U-17 청소년 월드컵에서 8강 갔다고 가슴 벅차 하던 이들은 다 어디 갔나. 동네 냄비 가게에 가면 찾을 수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