킹카 친구 녀석과 함께 미팅을 나가보면 한없이 작아지는 내 자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나보다 키 크고 잘생긴 친구와 함께 앉아있는 건 무척 괴로운 일이다. 나는 이 자리에서 한 마리의 오징어가 된다. 이럴 때면 준비해 온 개그도 먹히지 않는다. 자신감이 바닥에 떨어졌기 때문이다. 반면 킹카 친구 녀석은 여유가 흘러넘친다. 매너와 유머는 바로 이 여유에서부터 나오는 법이다. 아무리 말을 많이 하고 재미있게 분위기를 주도하려고 노력해도 결국 가장 예쁜 여성의 전화번호를 얻는 건 킹카 녀석이다.

한국이 2014브라질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예선에 진출할 경우 톱 시드를 놓치게 될 것으로 알려졌다. 국제축구연맹(FIFA)의 권고에 따라 FIFA랭킹 상위 국가 순으로 시드 배정을 하기로 해 FIFA 랭킹에서 일본(16위)과 호주(23위)에 밀리는 한국(28위)은 톱 시드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커졌다. 3차 예선이 끝나는 내년 2월까지 781점을 기록 중인 한국이 831점의 호주를 따라잡지 못하면 한국은 톱 시드에서 밀려나게 된다. 사실상 내년까지 호주를 잡는 건 불가능하다.

일부에서는 엄살을 피운다. 큰일 났다는 반응이다. 호주나 일본 중 한 팀과 같은 조에 속하게 돼 월드컵 본선 진출에 적신호가 켜졌다고 한다. 지금까지 한국은 직전 월드컵 성적이 반영된 시드배정에서 톱 시드를 놓친 적이 없다. 브라질로 가기 위한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이 과거보다 더욱 험난할 것이라는 견해가 많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번에 바뀌게 될 시드배정 방식은 불리할 것도 없고 겁 먹을 것도 없다. 아직 라면 물도 끓지 않았는데 라면 다 먹고 배탈 날 걱정부터 한다.

일단 10개 국가가 두 조로 나눠 최종예선을 치르기 때문에 톱 시드 두 장은 크게 의미가 없다. 32개 국가를 6개 조로 나눠 톱 시드 6장을 주는 게 아니다. 어차피 톱 시드를 받건 받지 못하건 호주나 일본 중 한 팀과 같은 조에 배정될 확률은 50%였다. 우리가 톱 시드를 받는다면 호주나 일본 중 한 팀은 톱 시드를 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두 조로 나눠 치르는 최종예선에서 톱 시드는 큰 의미가 없다. 말이 좋아 톱 시드지 10팀 중에 두 팀이다. 한국과 이란이 톱 시드를 배정받고 호주와 일본이 2번 시드를 받는다고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다.

정작 더 중요한 건 톱 시드 여부보다는 사우디아라비아나 이란 등 만만치 않은 중동 팀들이 어느 한 쪽으로 몰리냐는 점이다. 어느 한 팀 만만하지도 않고 그렇다고 어느 한 팀 버겁지도 않은 게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이다. 오히려 우리와 이란이 같은 2번 시드를 받게돼 우리로서는 부담스러운 이란 원정을 덜었다는 건 장점이기도 하다. 호주나 일본도 못 이기면서 월드컵 본선 무대에 진출하려는 건 이기적인 욕심일 뿐이다. 결국 월드컵 본선 갈 팀은 실력으로 보여줘야 한다. 시드배정이 없어 한국과 호주 일본, 이란, 사우디가 한 조에 속한다고 해도 월드컵 갈 팀은 다 나가고 못나갈 팀은 괌, 부르나이, 부탄과 한 조에 걸려도 평생 못 나간다.

입장을 바꿔놓고 생각해 보자. 지금 떨고 있어야 하는 건 호주와 일본이다. 톱 시드를 받았다고 호들갑 떨다가도 한국과 같은 조에 속하게 되는 팀은 톱 시드의 의미가 없다. 군대에서 휴가증 받았는데 써먹지도 못하고 제대하는 것도 이보다는 낫다. 호주와 일본은 한국과 맞붙을 50%의 확률에 긴장할 수밖에 없다. 차라리 한국과 함께 2번 시드를 받을 것으로 예상되는 이란을 만나는 게 훨씬 이들로서는 낫다. 아시아에서 그 어떤 상대를 만나더라도 한국만 피하면 이들로서는 브라질행 티켓 끊기 위해 여권 만들 상황까지는 간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은 세계에서 단 6개뿐인 월드컵 본선 7회 연속 진출 국가다. 브라질(18연속)과 독일(14연속), 이탈리아(12연속), 아르헨티나(9연속), 스페인(8연속) 다음가는 위대한 기록이다. 유럽과 남미를 제외한 대륙에선 한국이 처음으로 7회 연속 진출을 달성했다. 톱 시드 받아놓고도 이런 아시아의 독보적인 축구 강국과 한 조에 속하는 팀은 그냥 톱 시드는 쓰레기통에 쳐박는 꼴이다. 최홍만과 내가 링 위에 마주 섰는데 최홍만이 쫄아야 하나. 내가 쫄아야 하나. 한국 축구는 최홍만인데 오히려 김현회한테 주눅 들었다.

이건 우리가 불안해 할 일이 아니라 한 조에 속하게 될 호주나 일본 중 한 팀에 우리가 미안해 할 일이다. 부루마블에서 뉴욕에 호텔 네 개 지어놓고 내가 걸렸다고 환호하다 우대권으로 해결할 때 내 친구 김동혁의 표정이 이러했다. 과거에 비해 요새는 피 튀기는 한일전 해 본 기억이 없는데 최종예선에서 한일전이 펼쳐진다면 이거 참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드라마 시크릿가든 보려고 텔레비전 앞에서 광고 틀어놓고 기다리는 것처럼 흥분이 된다. 이왕 만날 거 축구팬들에게 화끈한 재미 선사할 수 있도록 다이나믹한 조에 포함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 어떤 조편성이건 아시아 최종예선에서는 요행이란 있을 수 없다.

물론 앞으로는 FIFA 랭킹 관리에도 신경 써야 한다. 페루(25위)가 한국보다 랭킹이 높고 나이지리아(43위)가 벨라루스(42위)보다 순위가 낮고 생전 들어보지도 못한 카리브해의 소국 앤티가 바부다(106위)가 UAE(109위)보다 더 높은 자리에 위치하고 있는 FIFA랭킹은 지금까지 공신력이 별로 없었던 탓에 우리가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하지만 앞으로 시드배정 방식이 FIFA랭킹에 의거한다면 이제부터라도 FIFA랭킹이 높은 상대를 섭외해 A매치를 치르는 등 순위를 끌어올리기 위한 노력을 할 필요는 있다. 딱 그 정도로만 준비하면 된다.

개인적으로는 3차예선 A조에서는 이라크와 요르단(혹은 중국), B조에서는 한국과 UAE(혹은 쿠웨이트), C조에서는 일본과 우즈벡, D조에서는 호주와 사우디, E조에서는 이란과 카타르(혹은 바레인)가 최종예선에 오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이 중에는 우리가 잡지 못할 팀도, 그렇다고 설렁설렁 할 상대도 없다. 한 경기 한 경기 최선을 다하면 8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위업도 자연스레 달성할 수 있다. 시드배정 방식 변경으로 우리가 불안해 할 필요는 전혀 없다. 미팅 나가서 킹카가 움츠린 채 자신감 없이 눈치나 보는 모습 봤나. 잊지 말자. 우리는 아시아에서 최초로 월드컵 4강을 경험한 축구 강국이다. 아시아에서는 우리가 제일 잘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