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 속 최악의 대회는 1997년 말레이시아에서 열린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20세 이하)였다. 나는 어린 나이에 ‘역대 최강’이라는 언론의 보도에 무척 들떠 있었다. ‘천재’ 이관우(한양대)를 비롯해 김도균(울산대), 안효연(동국대), 박진섭, 조세권(이상 고려대), 심재원(연세대) 등 당대 최고의 유망주들로 꾸려진 당시 청소년 대표팀은 무슨 일이라도 낼 것 같았다. 그리고 결국 이들은 내 기대와는 다르게 일을 내고 말았다. 우리는 14년 전 이 대회를 ‘쿠칭의 악몽’이라고 부른다.

남아공과의 첫 경기에서는 일방적으로 몰아쳤지만 0-0 무승부에 그치고 말았다. 특히 후반 막판 상대 골키퍼를 한 명 남겨두고 공격수 세 명이 골문 앞에 있었지만 이 결정적인 찬스에서 이관우의 슈팅은 골문을 외면해 결국 승리를 챙기지 못했다. 이후 2차전에서 프랑스를 만난 한국은 2-4로 패한 뒤 마지막 브라질전에서는 ‘최강’ 브라질을 맞아 무려 세 골을 넣었다. 하지만 잃은 골은 무려 10골이었다. 3-10. 있을 수 없는 스코어였다. 당시 또래들 사이에서는 우리 골문을 상대로 6골을 넣은 아다일톤의 이름에 ‘많을 다(多)’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심도 있는 분석을 하기도 했다.

쿠칭의 악몽, 전반 10분 만에 0-3

당시 프랑스전 이야기를 해보고자 한다. 지금 생각해보면 프랑스는 별들의 천국이었다. 한국 골문을 자기 집 안방 드나들듯 들쑤시고 다니던 꼬마를 지금 다시 떠올려 보니 그의 이름은 티에리 앙리였다. 앙리는 이 대회가 시작되기 전 레알 마드리드와 계약을 마칠 정도로 촉망받는 선수였다. 다비드 트레제게와 빌리 사뇰, 미카엘 실베스트르, 윌리엄 갈라스도 당시 멤버였다. 니콜라 아넬카가 후반 출격을 위해 벤치에 앉아 있을 정도니 이거 말 다했다. 감독하기 참 쉬운 팀이었다.

남아공전을 0-0으로 마친 한국은 브라질과의 3차전을 치르기 전에 승부를 봐야 했다. 박이천 감독은 수비력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고 미드필더 김도균을 수비로 돌리는 변형 4-5-1 포메이션을 선택했다. 박진섭이 스위퍼로 나섰고 그 위에 박준홍과 심재원, 김도균을 수비로 내세워 앙리와 트레제게를 막는다는 복안이었다. 지금은 잘 쓰지 않는 ‘전담 마크’가 한국의 수비 전략이었다. 우리는 죽어라 한 선수만 따라다니는 이 방법을 ‘그림자 수비’라고 불렀다.

그런데 경기는 시작하자마자 꼬일 대로 꼬였다. 경기 시작 휘슬이 울린지 불과 1분 6초 만에 한국의 골문은 쉽게 열렸다. 트레제게가 한국 수비 세 명을 뚫고 오른쪽 진영에서 크로스하자 앙리가 가볍게 왼쪽 골문으로 슈팅을 날렸고 이 공은 그대로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다. 이제 0-1이니 그러려니 했다. 하지만 1분 20초가 더 흐른 전반 2분 26초에는 앙리가 우리 진영 왼쪽에서 가운데로 가볍게 패스를 연결하자 트레제게가 방향을 바꾸는 슈팅으로 두 번째 골을 뽑아냈다. 전반 10분에는 앙리가 미드필드 왼쪽에서 15m를 치고 들어가 가볍게 세 번째 골을 기록했다.

14년 뒤 다시 만난 프랑스

전반 10분 만에 0-3이 됐다. 전의를 상실한 한국은 후반 9분 김도균이 헛발질 한 공을 트레제게가 대각선 슈팅으로 연결해 한 골을 더 허용했다. 이후 프랑스는 주축 선수들을 교체하며 여유를 부렸다. 결과적으로 한국이 두 골을 따라가긴 했지만 이는 이미 큰 점수차로 앞서 집중력을 잃은 프랑스 수비진을 상대로 한 것이었다. 한국은 박진섭이 두 골을 만회해 2-4로 패하고 말았다. 공을 발 끝에 달고 뛰는 앙리보다 느린 한국 수비진으로서는 네 골만 허용한 게 다행일 정도의 경기였다. 내 기억 속 최악의 악몽은 귀신 나오는 꿈이 아니라 바로 이 쿠칭의 악몽이었다.

그리고 14년이 흐른 2011년 같은 대회에서 또 다시 프랑스를 만났다. 바로 콜롬비아 보고타에서 오늘(3일) 열린 2011 국제축구연맹(FIFA) U-20 청소년 월드컵에서다.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서 이름만 바뀐 같은 대회다. 결과적으로 한국은 이 경기에서 1-3으로 패하고 말았다. 14년 전 두 골차가 그대로 이어졌다. 표면적으로만 본다면 14년 동안 한국 축구는 제자리걸음을 한 것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경기 내용은 14년 전과 전혀 달랐다. 내가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점수차는 14년 전과 같았어도 우리는 이 기간 동안 프랑스의 간담을 서늘하게 할 정도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경기 내용에는 자신감이 넘쳤다. 14년 전 선배들이 경기 시작과 동시에 잔뜩 긴장해 가진 실력의 절반도 보여주지 못했던 것과는 달랐다. 오히려 먼저 유효 슈팅을 날려 기선을 제압할 정도로 배짱을 보여줬다. 먼저 실점을 한 뒤에도 14년 전처럼 그대로 무너지지 않았다는 점도 칭찬해주고 싶다. 후반 들어서는 주도권을 잡고 맹공을 퍼부으며 동점골 이후 역전 분위기도 마련했다. 유효 슈팅은 오히려 프랑스보다도 많았다. 경기 내용에서는 충분히 긍정적인 요소를 많이 발견할 수 있었다.

희망과 숙제를 동시에 안겨준 경기

개인적으로 꼽는 이 경기의 백미는 김영욱의 프리킥 골도 골이지만 1-1 상황에서 공격수 남승우와 이종호 투입을 준비했던 장면이었다. 이 장면은 한국이 프랑스를 상대로 무승부에 만족하지 않고 오히려 역전을 위해 공격력을 강화하기 위한 단적인 모습이었다. 14년 전 프랑스 공격에 잔뜩 겁을 먹고 김도균을 수비로 내리고 박진섭을 스위퍼로 쓰는 말로만 ‘변칙 전술’인 ‘치욕 전술’을 썼었다. 결국 이광종 감독의 선택은 두 골을 더 내주면서 실패로 끝났지만 이제 더 이상 지난해 U-19 유럽선수권대회 챔피언인 프랑스를 상대로 무승부에 안주하지 않으려는 모습은 놀라운 발전이다.

14년 전 앙리에게 철저히 농락당했던 것과 비교한다면 이번에는 당시 앙리를 대체하는 가엘 카쿠타을 훌륭히 막아냈다. ‘축구 신동’이라는 평가를 받는 그는 2007년 첼시가 영입 과정에서 논란을 일으킨 끝에 데려갈 정도로 대단한 선수다. 지난해 유럽선수권대회에서 최우수선수상을 수상하기도 한 그는 이번 대회에서도 가장 주목받고 있는 스타다. 그런데 프랑스는 한국전에서 카쿠타가 제대로 된 활약을 하지 못하자 결국 그를 후반 교체해야 했다. 14년 전 공보다 빠른 앙리를 지켜만 봐야 했던 한국으로서는 한 선수에 의해 무너지는 이러한 모습을 또 다시 연출하지는 않았다. 아마 10년이 흐른 뒤 오늘 경기를 다시 본다면 세계적인 선수로 성장한 프랑스 선수들을 보면서 “저 선수들과 맞붙었었다니…”라며 경악할 것이다.

하지만 아쉬운 건 프랑스의 유효 슈팅 세 개가 모두 골로 연결됐다는 점이다. 아직도 수비 집중력은 부족하다. 후반 동점골을 만든 뒤 더 넣을 수 있는 분위기를 만들었을 때 역전에 실패한 게 결국에는 패배로 돌아왔다. 결정적인 몇 차례 찬스에서 역전골에 성공했다면 아마 분위기는 달라졌을 것이다. 14년 전보다 잘 싸웠지만 또 다시 두 골차 패배를 당한 건 곱씹어 볼 대목이다. 우리는 경기를 잘 치러 놓고도 결국 1-3으로 졌다. 밥상 잘 차려 놓다가 식탁에 펄펄 끓는 찌개를 올려놓는 순간 찌개를 엎은 꼴이다. 맛있게 밥 먹을 수 있었는데 무척 아쉬운 한판이었다. 미드필드를 거치지 않고 수비에서 바로 넘어가는 긴 패스 위주의 전술과 후반 들어 급격한 체력 저하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필요가 있다.

이제는 ‘보고타의 기적’을 이야기하자

한 가지 반드시 이야기하고 싶은 건 프랑스의 두 번째 골에 빌미를 제공한 김진수는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점이다. 그는 수비수로서 최선을 다했다. 날아오는 슈팅을 머리로 막으려던 집중력은 오히려 칭찬받아야 한다. 공을 피하는 수비수라는 건 존재 이유가 없다. 아마 나처럼 겁 많은 이들이라면 무서워서라도 그 공을 피했을 것이다. 김진수는 이 상황에서 박수를 받아야 한다. 단지 운이 없었을 뿐이다. 머리를 날려 막아낸 공이 골문으로 향하는 건 그 누구의 힘으로도 어찌할 도리가 없다.

아직 대회는 끝나지 않았다. 콜롬비아와의 마지막 경기에 이제 모든 걸 걸어야 한다. 리옹과 마르세유, 릴 등 유소년의 산실에서 육성된 선수들이 즐비한 프랑스를 상대로 이 정도로 선전했다는 건 희망적이다. 14년 전 허무하게 무너졌던 선수들의 경기력과 정신력 모두 이제는 한 층 업그레이드 됐다. 결국 결과만 놓고 본다면 14년 전 두 골 차는 여전했지만 경기 내용은 전혀 달랐다. 오늘 경기가 정 답답한 이들이 있다면 14년 전 프랑스와의 경기 영상부터 보고 다시 이야기했으면 좋겠다. ‘쿠칭의 악몽’은 끝났다. 이제는 ‘보고타의 기적’을 이야기 할 시간이다. 비록 졌지만 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