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가 아픈 것도 사실이다. 일본 여자 축구 대표팀이 2011 FIFA(국제축구연맹) 여자월드컵 대회 결승전에서 미국을 꺾고 우승을 차지했다. 일본 여자축구가 아시아 국가로는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 정상에 오르는 순간이었다. 남자 월드컵 만큼은 아니지만 그래도 여자 월드컵에서 아시아 국가가 우승을 차지한다는 건 실로 놀라운 일이다. 일본은 한 수 위 기량의 미국을 맞아 영리한 플레이를 펼치며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내심 그 자리에 한국 여자 대표팀이 섰으면 어떨까하는 상상을 해봤다. 무척 벅차고 감격스러웠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그라운드에서 최선을 다하는 우리 여자 선수들의 모습을 봐 왔기에 일본의 월드컵 우승이 부럽기도 하고 질투심이 느껴지기도 한다. 일본은 결승전에서 이전까지 3무 21패를 기록하며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던 미국을 제압하는 이변을 일으키고 일본 열도를 흥분의 도가니로 몰아넣었다.

이건 분명히 축하할 일이다. 같은 아시아 국가로서 일본이 세계 정상 무대를 밟았다는 건 불쾌한 일이 아니다. 그녀들의 도전은 아름다웠고 충분히 감동적이었고 우리에게도 희망을 줬다. “원숭이들이 대단한 일을 했다”고 조소를 보낼 일도 아니다. 최근 일본의 여자 월드컵 우승 보도에 대한 반응을 보고 오늘은 이 일에 대해 이야기 해보려 한다. 아직도 많은 이들은 일본의 여자 월드컵 우승에 대해 인정하지 못하는 분위기다.

한국 여자 축구, 어디까지 왔나

이거 무척 옹졸한 일이다. 나 역시 일본을 좋아하지는 않지만 그건 이것과 다른 문제다. 일본이 여자 월드컵 우승을 차지했는데 여기에 독도나 과거사를 언급하고 그들의 우승을 폄하하는 게 애국자의 도리일까. 애국을 하려거든 독도 문제나 과거사를 언급한 기사에서 하는 게 옳을 것이다. 일본 여자 대표팀은 국적을 떠나 아름답고 정정당당한 승부를 펼쳐 극적인 우승 드라마를 만들었다. 대지진으로 시름에 빠진 나라에서 이런 드라마를 만들어 냈다는 건 무척 멋진 일이다. 딱 이 정도로만 바라봐 주면 안 될까.

한국은 지난해 U-20 여자 월드컵에서 3위를, U-17 여자 월드컵에서는 우승을 차지했었다. 그런데 일본이 성인 월드컵에서 우승을 차지하니 다소 배가 아플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욕을 먹을 때 먹더라도 할 말은 해야겠다. 아직 우리나라 여자축구는 일본 따라가려면 멀었다. 실력은 살짝 뒤쳐지고 인프라에서는 한참 뒤쳐진다. ‘어쩌면’ 우리가 할 수도 있던 성인 여자 월드컵 우승을 운 좋게 일본이 차지했다고 생각한다면 큰 오산이다. 우리의 청소년 월드컵 우승 장면만 지켜보고 괜한 자신감 부리지 말자.

지난 6월 한국은 일본과 맞붙어서 1-1로 비겼다. 그간 역대전적에서 절대적인 열세였지만 이 정도로 우리 실력이 늘었다는 건 분명한 일이다. 앞서 내가 실력 면에서 ‘살짝’ 뒤쳐진다는 건 이 의미다. 예전이었으면 상대하기 버거울 정도의 실력 차이로 무너졌겠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일본과 해볼 만한 수준까지는 올라왔다. 물론 아직까지는 일본이 한국에 비해 경기력이 앞서는 건 사실이다. 우리도 잘 준비하고 당일 컨디션이 괜찮다면 이제는 승부를 걸어볼 만큼은 성장했다.

일본의 인프라, 우리도 배우자

하지만 인프라 이야기로 넘어가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일본 역시 선수에 대한 대우는 우리와 다르지 않다. 여자 축구는 세계 어디를 가도 다 비슷하다. 초특급 스타는 억대 연봉을 받기도 하지만 대부분이 그리 많지 않은 돈을 받으며 선수 생활을 한다. 연봉을 떠나 리그의 규모를 보면 우리는 일본을 따라잡아야 한다. 일본은 1989년 출범한 여자축구 리그 ‘나데시코 리그(L-리그)’와 함께 성장했다. 처음 8개 팀에서 출발해 지금은 10개 팀이 참가하고 있는 L-리그는 2004년부터는 승강제를 도입했고 지난해부터는 동부와 서부로 나눠 리그를 운영하는 등 점점 발전하고 있다.

이뿐 아니다. 47개 지역에서 연령별 지역 대표를 뽑고 이들을 모아 훈련을 한다. 그리고 이 중 가능성을 갖춘 선수들을 뽑아 연령대별 국가대표를 선발하는데 많은 일본 축구 전문가들은 일본이 어마어마한 선수층을 자랑하는 유럽과 미국을 꺾고 월드컵 우승을 차지한 건 이런 체계적인 육성 시스템 덕분이라고 입을 모은다. 또한 일본은 실력 있는 선수들을 해외 리그로 진출시키는 제도를 도입해 나가사토 유키(독일 포츠담)를 비롯한 많은 선수들의 실력 향상을 돕고 있다. 이 결과 일본은 여자 축구 도입 30년 만에 세계 무대를 제패하는 쾌거를 이룩했다.

청소년 월드컵 우승 한 번 했다고 한국 여자 축구가 세계 최정상이라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다. 적어도 청소년 무대에서는 한국도 경쟁력이 있지만 이 사실이 성인 대표팀으로까지 이어지는 건 아니다. 우리는 아직 갈 길이 멀다. 일본이 여자 월드컵 원년인 1991년부터 매 대회마다 본선에 오르는 동안 우리는 딱 한 번 이 무대에 섰다. 이번 대회에서도 우리는 아시아 예선에서 밀려 탈락했다. 이래도 마냥 일본의 여자 월드컵 우승에 비웃음만 보낼 건가. 장담컨대 이런 분위기로는 절대 일본을 못 잡는다. 청소년 월드컵의 주역들을 어떻게 애지중지 키워낼 건지 더 고민해야 한다. 일본 우승이 그렇게 배가 아프면 우리도 여자 축구를 키워 우승하면 된다. 그 전까지는 이런 반응이 그냥 질투심일 수밖에 없다.

일본, 적이지만 동료이기도

상대를 이기는 건 열세를 인정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런데 지금 우리 분위기는 그렇지 않다. 일본의 우승 소식에 방사능이나 운운하고 원숭이나 언급하는 게 지금 우리 수준이다. 일본에 패해 준우승에 머문 미국 언론은 일본 여자 선수들을 ‘대지진 속에서도 희망을 불씨를 지핀 영웅들’이라고 표현했다. ‘대재앙을 극복하고 있는 일본 국민의 자세를 보였다’는 반응도 있었다. 이런 훈훈한 반응을 우리나라에서도 원하는 건 지극히 내가 뉴요커가 되고 싶은 사대주의자이기 때문일까.

일본에 패해 ‘버럭’할 줄 알았던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도 “세계 챔피언에 오른 일본에 축하를 보낸다”고 했고 축구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영화배우 톰 행크스 역시 “미국 대표팀을 사랑한다. 고마워서 눈물을 흘렸다. 하지만 우승을 차지한 일본도 축하한다”고 전했다. 미국이 ‘대인배’라서 그런가. 우리는 일본 우승을 폄하하면서도 우리나라는 왜 저 무대에 서지도 못했는지 고민하는 이들이 몇 명 없다. 마냥 일본이 우승을 해 배가 아픈 이들만 수두룩하다. 결승전 상대팀 미국도 인정하는 데 우리는 ‘대인배’가 되려면 아직 멀었나보다.

일본의 우승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앞서 밝힌 것처럼 비록 풍족한 대접을 받지는 못하지만 탄탄한 자국 리그가 있고 협회 차원에서도 적극적인 투자가 있었다. 우리도 조금만 더 노력하면 여자 월드컵 우승이라는 거짓말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날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전달해주기도 했다. 일본의 여자 월드컵 우승은 우리에게도 좋으면 좋았지 절대 나쁜 일이 아니다. 일본은 우리가 넘어야 할 산이지만 그러면서도 미국과 유럽 등 여자 축구 강호들을 맞상대해야 하는 ‘같은 편’이기도 하다. 또한 대재앙으로 실의에 빠진 자국 국민들에게 희망을 준 선수들은 국적을 떠나 무척 가슴 짠한 감동을 전해주기도 했다. 여로 모로 일본의 여자 월드컵 우승은 많은 걸 우리에게 던져줬다.

우리 얼굴에 침 뱉지 말자

반일 감정을 표현하는 건 일본의 월드컵 우승 소식에 비아냥을 보내는 것 말고도 옳은 방법이 많다. 적어도 일본의 월드컵 우승은 우리가 그 사실을 받아들이고 축하를 보내고 배워야 할 것들이 훨씬 많다. 일본의 우승이 그렇게 배가 아프다면 오는 9월 1일부터 중국에서 열리는 2012 런던올림픽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부터 관심 갖고 응원하는 게 어떨까. 한국은 일본을 비롯해 중국과 호주, 태국, 북한 등과 풀리그를 치러 2위 안에 들어야 올림픽 본선에 나간다. 쉽지 않은 승부다.

이것도 싫다면 당장 오늘 위안부 할머니들의 수요 집회에 동참하자. 그게 오히려 더 반일 감정을 애국으로 승화하는 방법이다. 일본의 여자 월드컵 우승을 폄하하는 건 애국의 길이 아니다. 적어도 여자 축구에서 만큼은 일본이 우리를 앞서고 있고 우리는 이 사실을 인정해 그들을 따라 잡을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인터넷으로 몇 마디 끄적이는 게 애국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하자. 그렇게 따지면 ‘방사능 먹은 원숭이’들이 월드컵 우승할 동안 우리는 월드컵 무대에나 섰나. 제발 우리 얼굴에 침 뱉지 말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