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새’ 황선홍과 ‘독수리’ 최용수.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축구를 이끌던 두 명의 대형 공격수였다. 이들은 비록 현역에서 물러났지만 여전히 전설적인 선수로 통한다. 하지만 두 명의 위대한 공격수가 동시대에 있었음에도 당시 한국 축구는 환희보다는 좌절을 더 많이 맛봤다. 더 놀라운 사실은 이 두 선수가 한 그라운드에서 호흡을 맞춘 시간이 무척 짧았다는 점이다. 왜 황새와 독수리는 함께 비상하지 못했을까. 오늘은 추억 속으로 떠나 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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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레이시아에서 벌어진 1996 애틀랜타 올림픽 축구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 결승 한국-일본전에서 최용수가 결승골을 넣은 후 기뻐하고 있다. (사진=연합)>

1996년, 그들이 축구를 지배했을 때
이 둘이 처음 그라운드에서 발을 맞춘 건 1996년이었다. 1994 미국월드컵에서 한 차례 좌절한 황선홍은 이후 축구에 눈을 뜨며 서서히 기량이 만개하고 있었다. 1995년 포항 아톰스를 K리그 준우승으로 이끈 것도 그였다. 1996 애틀랜타 올림픽을 앞두고 아나톨리 비쇼베츠 감독은 와일드카드로 이임생과 하석주, 그리고 28살의 황선홍을 낙점했다. 절정의 기량을 뽐내는 황선홍이 올림픽에 나가게 되자 8강 진출도 꿈이 아니라는 이야기가 나돌았다.

당시 올림픽 대표팀에는 부동의 스트라이커 최용수가 있었다. 1994년 LG 치타스에서 데뷔해 그해 신인왕을 차지한 그는 윤정환과 함께 올림픽 아시아 예선에서 완벽한 호흡을 보여주며 독보적인 활약을 펼쳤다. 더군다나 184cm로 당시에는 장신 축에 속했던 최용수는 서구적인 체형을 중시하는 비쇼베츠 감독의 철학에도 부합하는 공격수였다. 노련한 황선홍과 패기의 최용수가 투톱으로 올림픽에 나간다는 사실에 모두들 흥분했다. ‘역대 최고’라는 수식어가 아깝지 않았다.

1996년 7월, 올림픽 본선을 앞두고 대전에서 콜롬비아 올림픽 대표팀과 최종 평가전이 열렸다. 세상에 황선홍-최용수 투톱이 첫 선을 보인 순간이다. 하지만 호흡은 기대 이하였다. 황선홍과 최용수 투톱 밑에 186cm의 장신 이우영까지 배치해 공격력 극대화를 꾀했지만 결국 한국은 콜롬비아와 두 차례 평가전에서 1무 1패에 머물고 말았다. 비쇼베츠 감독은 “와일드카드가 합류한지 얼마 되지 않아 호흡이 잘 맞지 않는다. 보완이 필요하다”고 밝히기도 했다. 둘의 첫 만남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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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쇼베츠 감독은 변칙적인 전술로 가나전 승리를 따냈다. 하지만 황선홍-최용수 투톱은 결국 애틀랜타 올림픽에서 빛을 보지 못했다. (사진=연합)>

애틀랜타 올림픽, 아쉬운 첫 만남
그해 7월 22일, 역사적인 올림픽 축구 조별예선 가나와의 첫 경기가 열렸다. 하지만 비쇼베츠 감독은 모두를 놀라게 하는 전술을 들고 나왔다. 최용수를 벤치에 앉혀두고 황선홍을 원톱으로 세우는 변칙 전술을 선보인 것이다. 콜롬비아전 비디오 테이프를 입수해 황선홍-최용수 투톱을 줄기차게 연구한 가나의 허를 찌르겠다는 복안이었다. 윤정환을 공격 2선에 투입해 황선홍을 보좌하도록 했다. 결과적으로 비쇼베츠 감독의 전술은 맞아 떨어졌다. 황선홍은 전반 40분 가나 진영에서 반칙을 유도해 페널티킥을 얻어냈고 윤정환이 이를 침착하게 차 넣어 1-0으로 승리를 거뒀다.

최용수는 이 경기에서 후반에 교체 투입됐다. 전반이 끝나자 비쇼베츠 감독은 황선홍과 윤정환을 빼고 최용수와 정상남을 투입해 가나 수비진을 교란했다. 비록 후반에 골이 더 이상 터지지 않았지만 최용수는 후반 내내 가나 수비진을 상대로 위협적인 몸놀림을 선보였다. 팬들은 기대했던 황선홍-최용수 투톱을 보지는 못했지만 48년 만의 올림픽 본선 승리에 감격했다. 비쇼베츠 감독의 지략은 찬사를 받았고 이후 치러질 멕시코와의 2차전에서는 이 둘이 나란히 경기에 나서는 모습을 누구나 상상했다.

예상대로 2차전 멕시코와의 대결에서 황선홍과 최용수는 투톱으로 선발 출장했다. 꿈에 그리던 공격 조합이 국제무대에서 선을 보인 것이다. 하지만 불과 경기 시작 35분 만에 이 둘의 조합은 깨졌다. 황선홍이 발목 부상을 당해 실려 나갔기 때문이다. 결국 황선홍은 이원식과 교체됐고 최용수는 황선홍 없이 남은 경기를 치러야 했다. 와일드카드 이임생 역시 전반에 부상을 당해 이경수로 교체되는 등 와일드카드 세 명 중 90분을 소화한 선수는 하석주가 유일했다. 황선홍과 최용수 투톱, 그 불운의 시작이었다.

황선홍은 결국 부상을 극복하지 못하고 이탈리아와의 마지막 경기에도 결장하면서 한국의 1-2 패배를 지켜봐야 했다. 이탈리아전에서 원톱으로 나선 최용수는 두터운 이탈이라 수비진을 상대로 이렇다 할 공격을 펼쳐 보이지 못했고 황선홍은 벤치만 지켰다. 결국 한국은 1승 1무 1패로 가나와 동률을 이뤄 골 득실차까지 같았으나 다득점에서 조 3위로 밀려 탈락하고 말았다. 가나와의 첫 경기에서 기분 좋은 승리를 거두고도 짐을 싸게 된 것이다. 그렇게 이 둘의 첫 만남은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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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최종 예선은 최용수의 독무대였다. 그는 상대팀이고 광고판이고 가리지 않고 다 짓눌러 버렸다. 사진은 최용수가 카자흐스탄전에서 첫 골을 넣는 장면. 이날 경기에서 최용수는 해트트릭을 기록했다. (사진=연합)>

차범근호의 주역, ‘독수리’ 최용수
1997년 이 둘은 다시 만났다. 19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지역 1차 예선을 앞두고 나란히 대표팀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팬들은 황선홍과 최용수가 올림픽에서 풀지 못한 한을 월드컵에서 풀어주길 바랐다. 그렇지만 최용수가 상무 입대 후 훈련을 받아 경기에 결장하는 일이 생겼고 황선홍이 또 다시 다치면서 한 그라운드에는 서지 못했다. 황선홍은 아시아클럽선수권대회에 나갔다가 무릎 인대가 늘어나는 바람에 대표팀 명단에서 제외되고 말았고 독일에서 수술을 받은 뒤 재활에 매달려야 했다. 황선홍은 후배 최용수가 펄펄 나는 모습을 텔레비전을 통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당시 최용수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최종예선 1차전 카자흐스탄과의 대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는 등 한 해 동안 A매치에서 무려 11골을 넣으며 엄청난 폭발력을 과시했다. 이 중 아시아 최종 예선에서 기록한 공격 포인트만 해도 7골 2도움이었다. 이전 월드컵 아시아 예선이 한 군데 모여 치러졌던 반면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은 홈 앤드 어웨이로 치러졌기 때문에 관심도 대단했다. ‘도쿄대첩’에서도 서정원의 동점골을 어시스트 하는 등 그는 차범근호의 확실한 주전 공격수로 우뚝 섰다. 최용수는 대표팀의 프랑스 월드컵 본선 진출에 일등 공신이었다. 하지만 최용수가 엄청난 활약을 하는 동안 황선홍은 그렇게 잊혀져 갔다.

황선홍이 대표팀으로 돌아온 건 1998년 4월 1일이었다. 1998시즌 프로축구 개막전에서 두 골을 뽑아내는 등 완벽히 재기한 그는 약 15개월 만에 다시 태극마크를 되찾았다. 그가 대표팀에 합류하자 많은 이들은 물 오른 기량을 선보이는 최용수와의 호흡을 기대했고 차범근 감독 역시 공격력이 배가될 것이라 무척 흥분했다. 당시 최용수는 동계훈련에서도 7골이나 뽑아내며 쾌조의 컨디션을 이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역사적인 한일전에서 황선홍과 최용수는 투톱으로 나서 다시 호흡을 맞추게 됐다. “이번에는 제대로 한 번 해보자”고 열의를 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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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이 일본을 상대로 멋진 회심의 시저스킥을 성공시키며 결승골을 뽑아내는 모습. 한국 축구사에 길이 남을 명장면이다. (사진=연합)>

일본을 깬 ‘황새’ 황선홍의 골
비가 오는 날이었다. 당시 잠실종합운동장은 5만 관중석이 가득 찰 정도로 열기가 뜨거웠다. 절정의 기량을 선보이는 최용수와 ‘돌아온’ 황선홍, 프랑스 월드컵 예선의 열기, 그리고 평가전 상대가 일본이었으니 흥행이 안 되면 이상한 경기였다. 하지만 이전까지 펄펄 날던 최용수는 유독 이날 경기에서 부진한 모습을 보였다. 전반 30분 완벽한 찬스에서 골대를 맞췄고 후반에는 골키퍼와 일대일 상황에서도 득점에 실패하며 결국 후반 20분 김도훈과 교체됐다. 결국 한국은 황선홍의 그림 같은 시저스킥으로 승리를 챙겼지만 일각에서는 “두 선수가 함께 뛸 경우 스타일이 겹쳐 경기를 망칠 수 있다”는 우려의 목소리를 내기도 했다.

이런 우려는 대표팀의 유럽 전지훈련에서도 계속됐다. 황선홍-최용수 투톱을 가동한 차범근호는 5차례의 유럽 전지훈련 평가전에서 1승 2무 2패로 부진했다. 공격에서 둘의 동선이 겹치면서 날카로운 모습을 보여주지 못한다는 지적이 잦아졌다. 하지만 유고와의 마지막 평가전에서 최용수의 중거리 슈팅을 골키퍼가 쳐내자 황선홍이 달려들며 오른발로 가볍게 차 넣어 골을 기록하는 모습을 보며 희망을 품기도 했다. 차범근 감독은 “여러 번 발을 맞춰보면 무시무시한 위력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를 감추지 않았다.

당연히 황선홍과 최용수는 1998 프랑스 월드컵 최종 엔트리에 나란히 포함됐다. 차범근 감독은 이 둘을 비롯해 유럽파 서정원(프랑스 스트라스부르), 노정윤(네덜란드 NAC브레다)과 일본에서 뛰는 홍명보, 하석주, 김도훈, ‘신예’ 이동국 등을 선발했고 이기형과 윤정환, 진순진, 박남열 등은 상비군으로 격하했다. 이때부터는 본격적으로 황선홍-최용수 투톱의 호흡을 맞추기 위한 훈련에 돌입했다. 강릉에 모여 발을 맞추는 동안 상당 시간을 공격 전술 완성에 쏟았다. 본선 멕시코전을 대비해 초청한 자메이카전에서도 황선홍-최용수 투톱이 가동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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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월드컵을 앞두고 황선홍과 최용수는 자메이카전에 나란히 선발 출장해 괜찮은 움직임을 선보였다. (사진=연합)>

프랑스행을 준비한 황새와 독수리
차범근 감독은 “멕시코전에서 황선홍과 최용수를 투톱으로 내세우는 3-5-2 포메이션을 쓰겠다”고 공언했다. 이 둘이 최전방에 서고 좌우 윙백 하석주와 최성용, 리베로 홍명보는 이변이 없는 한 멕시코전 선발이 유력했다. 무승부를 목표로 하는 네덜란드전에는 황선홍을 원톱으로 하는 3-6-1 포메이션이 사실상 확정된 상태였다. 모든 훈련 스케줄은 이 전술에 맞춰져 있었다. 자메이카전에서 이 둘의 움직임도 나쁘지 않아 많은 이들은 본선에서의 경기에 큰 기대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본선 출국이 코앞에 닥친 상태에서 치른 체코와의 평가전에서는 의도와는 다른 투톱을 가동할 수밖에 없었다. 최용수가 체코전 당일 배탈이 나 선발 출장이 어려웠기 때문이다. 결국 차범근 감독은 황선홍의 파트너로 김도훈을 낙점했다. 그런데 오히려 황선홍의 움직임은 최용수와 같이 호흡을 맞출 때보다 나아 보였다. 황선홍은 체코전에서 한국의 첫 번째 골을 성공시키며 쾌조의 컨디션을 자랑했다. 더 재미있는 건 몸 상태가 어느 정도 회복돼 후반 32분 교체 투입된 최용수도 골을 기록했다는 점이다. 최용수는 황선홍과 교체돼 경기장에 들어간 상태였다. 둘은 이날 경기에서 함께 뛰지 못했다.

국제축구연맹 규정상 1998 프랑스 월드컵 개막 8일 전인 6월 2일까지 최종 엔트리를 제출해야 했다. 당연히 한국은 기존 엔트리를 그대로 국제축구연맹에 전달했다. 이런 저런 이유로 여러 번 가동한 적은 없었지만 황선홍-최용수 투톱은 여전히 전폭적인 신뢰를 받고 있었다. 그리고 대표팀의 프랑스 출국을 단 하루 앞두고 그들의 운명을 바꿔 놓은 마지막 평가전이 열렸다. 1998년 6월 4일 잠실종합운동장에서 벌어진 중국과의 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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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은 이 부상으로 프랑스 월드컵 출전 꿈이 날아가고 말았다. 결국 우리는 프랑스 월드컵 본선 무대에서 황선홍-최용수 투톱을 볼 수 없었다. (사진=대한축구협회)>

황선홍의 부상, 날아간 투톱의 꿈
이날 경기에서 황선홍과 최용수는 투톱으로 선발 출장했다. 출정식을 겸해 열린 경기라 당연히 발을 맞춰야 했고 팬들에게 인사를 해야 했다. 위대한 두 명의 공격수가 나란히 등장하자 경기장은 뜨거워졌다. 하지만 이 행복한 시간은 경기가 시작되고 불과 10분 만에 끝이 났다. 황선홍이 공을 향해 중국 수비진으로 돌진하는 순간 중국 골키퍼가 몸을 던지며 뛰쳐나왔고 결국 황선홍은 공중에서 한 바퀴를 돌며 왼쪽 무릎으로 그라운드에 떨어졌다. 고통을 호소하는 황선홍은 결국 김도훈과 교체됐다.

큰 부상이 아닐 것이라고 예상했다. 황선홍은 벤치로 가 얼음주머니를 차고 경기를 지켜봤다. 경기가 끝난 뒤 병원으로 긴급 후송돼 진단을 받은 결과도 긍정적이었다. “뼈와 근육에는 이상이 없어 월드컵에 나서는 데는 문제가 없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황선홍은 경기 다음날 출국을 할 때 심한 통증을 느껴 진통제를 투여받기도 했지만 본선 무대에 나서지 못할 것이라는 걱정은 하지 않았다. 모두가 황선홍-최용수 투톱을 그렇게 기대했고 당연한 듯 생각했다. 부상자가 생기면 최종 엔트리를 변경할 수 있지만 황선홍이 큰 부상일 것이라 생각하지 않아 엔트리 그대로 프랑스로 떠났다.

하지만 작은 부상이 아니었다. 프랑스로 날아가서도 여전히 무릎이 욱신거렸다. 선수 생활의 위협을 느낄 정도로 진통제를 6번이나 맞으며 참았지만 무리였다. 조깅을 하면서도 힘들어했다. 결국 의료진은 멕시코전, 네덜란드전 출장은 무리라고 보고 마지막 벨기에전에는 회복이 빠를 경우 뛸 수 있을 것이라는 뒤늦은 판단을 내렸다. 뒤늦게 알려진 사실이지만 황선홍은 이미 무릎 십자 인대가 끊어진 상태였다. 차범근 감독으로서는 막막한 순간이었다. 그동안 황선홍-최용수 투톱에 모든 기대를 걸었던 그는 황선홍이 부상으로 빠지면서 전력의 상당 부분을 잃고 본선 무대에 나서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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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프랑스 월드컵 멕시코전 선발 원톱은 김도훈이었다. 황선홍과 최용수를 이야기할 때 김도훈 역시 빼놓을 수 없다. 그는 비록 황선홍과 최용수에 비해 조명 받지 못했지만 충분한 능력을 지닌 선수였다. (사진=연합)>

소속팀에서 더 빛난 두 선수
멕시코와의 첫 경기. 고민하던 차범근 감독의 선택은 황선홍도, 최용수도 아니었다. 바로 김도훈이었다. 황선홍은 부상으로 잃었고 최용수는 컨디션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득점력은 높지만 볼을 갖고 돌파할 능력이 떨어지는 최용수를 고집하지 않는 대신 몸싸움에 능하고 볼 키핑력도 뛰어나 황선홍을 대체할 수 있는 김도훈을 최전방에 배치해 최용수 마크에 골몰해온 멕시코의 허를 찌르겠다는 작전이었다. 하지만 이날 경기에서 한국은 결국 1-3으로 멕시코에 패하고 말았다. 네덜란드에도 0-5로 대패한 한국은 결국 두 경기 만에 일찌감치 탈락이 확정됐다. 그리고 황선홍은 기대했던 마지막 벨기에전에도 나서지 못했다.

실패로 끝난 1998 프랑스 월드컵이 끝나고 무서운 신예들이 치고 올라왔다. 이동국과 설기현, 이천수 등 젊은 선수들은 이제 황선홍과 최용수의 자리를 넘보고 있었다. 다음 월드컵을 준비하는 대표팀도 황선홍과 최용수보다는 유망주를 중용하는 분위기였다. 황선홍은 1999년 세레소 오사카 소속으로 J리그 득점왕을 차지했고 최용수는 2000년 안양LG 유니폼을 입고 팀을 K리그 우승으로 이끌어 MVP를 수상하는 등 소속팀에서 더 빛났다. 최용수는 2001년 J리그 제프 유나이티드 이치하라로 이적, 득점 순위 2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렇게 이 둘은 2002 한일월드컵을 맞았다. 거스 히딩크 감독은 황선홍과 최용수, 김도훈, 설기현, 안정환, 이동국, 이천수, 차두리 등에게 골고루 기회를 줬다. 이 중 황선홍이 경쟁에서 가장 앞섰고 설기현과 안정환, 이천수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히딩크 감독은 최고의 조합을 찾기 위해 선수들을 번갈아 짝지어 기용했고 투톱에 국한되지 않고 원톱이나 스리톱까지 자유자재로 변형했다. 그러다가 황선홍과 최용수가 1998년 6월 중국전 이후 처음으로 나란히 경기에 나선 건 2001년 9월 나이지리아와의 평가전에서였다. 이 둘은 투톱이라기보다는 황선홍이 처진 스트라이커로, 최용수가 최전방 공격수로 나서는 변칙적인 포메이션으로 기용됐다. 이 경기에서 둘을 골을 기록하지 못했고 결국 2-2로 비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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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과 최용수. 이 둘을 빼놓고 한국 축구를 논할 수는 없다. 옆에 있는 윤정환과 안정환도 마찬가지다. 안정환 참 잘 생겼다. (사진=연합)>

2002년, 그들의 마지막 만남
이 둘은 2002년 1월 북중미 골드컵 쿠바전에서도 나란히 선발 출장했지만 이렇다 할 공격을 선보이지 못한 채 0-0 무승부에 머물렀고 같은 해 3월 핀란드 원정 평가전에서는 설기현-최용수-차두리 스리톱이 가동된 뒤 후반 황선홍이 투입돼 혼자 두 골을 뽑아내는 원맨쇼를 펼치기도 했다. 특히 두 번째 골은 최용수의 크로스를 이어받아 뽑아내기도 했다. 이후 터키와의 평가전에서는 둘이 나란히 최전방에 섰지만 또 다시 무득점에 허덕이며 0-0으로 비기고 말았다. 이미 황선홍은 투톱이건 스리톱이건 한 자리를 차지하는 상황이었고 최용수가 경쟁에서 다소 뒤처지는 형국이었다.

그렇게 한일월드컵이 다가왔고 히딩크 감독은 스리톱을 최종적으로 낙점했다. 한일월드컵을 앞두고 치러진 마지막 프랑스와의 평가전에서도 히딩크 감독은 황선홍을 설기현, 최태욱과 함께 스리톱으로 선발 출장시켰고 후반이 시작되자마자 황선홍과 최용수를 맞바꿨다. 둘의 플레이 스타일이 비슷해 같이 기용할 경우 파괴력이 떨어진다는 판단에서였다. 둘은 한일월드컵에서 단 한 순간도 같이 그라운드를 누빈 적이 없다. 황선홍이 주로 선발로 나서 후반을 앞두고 교체 아웃된 반면 최용수는 미국전에서 후반 교체로 출장한 게 전부였다.

미국전에서 황선홍은 후반 9분 안정환과 교체로 그라운드를 빠져 나왔고 최용수는 13분 뒤 유상철을 대신해 그라운드로 들어갔다. 따지고 보면 이 둘이 한 그라운드에서 호흡을 맞춘 게 2002년 3월 26일 독일 보훔에서 열린 터키와의 평가전이 마지막이었다. 황선홍은 폴란드전에서 결승골을 넣고 멋지게 포효한 반면 최용수는 미국전 실수로 고개를 떨군 채 마지막 인연을 마쳐야 했다. 그 후 황선홍은 2003년, 최용수는 2006년 현역에서 물러났다. 황선홍-최용수 투톱은 이제 추억 속에서나 되새겨야 할 과거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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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선홍과 최용수를 한 경기장에서 볼 수 없다고 실망할 필요가 없다. 이 둘은 이제 유니폼이 아닌 말끔한 양복을 차려 입고 대결을 펼친다. (사진=연합)>

하지만 끝이 아니다
한 시대를 풍미한 공격수가 둘이나 있었다. 하지만 이 둘은 현역 시절 한 클럽에서 뛴 적도 없고 한 선수가 부상을 당하거나 원톱을 쓰는 전술상의 문제로 함께 뛴 시간도 무척 짧았다. 팬들에게는 무척 아쉽기만 한 일이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 위대한 공격수와 같은 시절을 살았다는 게 무척 행복하다. 황선홍이 없었다면 2002 한일월드컵 4강 신화도 없었을 것이고 최용수가 없었다면 1998 프랑스 월드컵에 나가지도 못했을 것이다. 전설적인 두 명의 공격수가 있어 오늘날 한국 축구가 이토록 강해졌는지 모른다.

그렇다고 이 둘을 한 그라운드에서 보지 못해 아쉬워 할 필요는 없다. 1996년 처음 그라운드에서 호흡을 맞추던 황선홍과 최용수는 15년이 지난 지금 각각 한 팀의 감독이 돼 한 경기장에 나란히 모습을 드러낸다. 비록 황선홍과 최용수는 같은 유니폼을 입고 한 골문을 향해 돌진하지는 못하지만 이제는 나란히 말끔한 양복을 차려 입고 양쪽 벤치에 서서 선의의 대결을 펼칠 예정이다. 그것도 현역 시절 가장 그들을 빛냈던 클럽, 포항과 서울을 이끌고 말이다. 바로 일요일(17일)이다. 오후 7시 포항스틸야드에 가면 전설 속의 그 공격수, 황새와 독수리가 한 경기장에서 격돌하는 모습을 지켜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