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부조작 파문으로 K리그가 시끄럽다. 분명 실망스러운 사건이다. 하지만 그런 와중에도 K리그는 팬들을 감동시키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일부 선수의 잘못으로 리그 전체를 호도하는 건 문제가 있다. 승부조작이라는 아픈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지난 주말에도 굵은 빗줄기를 온 몸으로 맞으며 심장이 터져라 뛰는 선수들을 지켜봤다. 비록 우리는 아픔을 겪고 있지만 그 와중에도 흥미로운 변화가 생겨나고 있다. 오늘은 승부조작 파문 이후 K리그에 생긴 변화들에 대해 꼽아보고자 한다.

1. ‘골키퍼’ 이윤의가 주는 메시지
지난 주말 열린 서울과 상주의 경기에는 필드 플레이어 이윤의가 상주 골문을 지켰다. 세 명의 골키퍼가 승부조작에 연루됐거나 혐의가 의심돼 조사를 받고 있고 유일한 골키퍼 권순태까지 지난 경기에서 경고 누적으로 퇴장당해 골키퍼가 없었기 때문이다. 단 며칠 동안 골키퍼 수업을 받고 상주 골문을 지킨 이윤의는 서울의 결정적인 슈팅을 몇 차례 막아내는 등 최선을 다해 진한 감동을 선사했다. 비록 상주는 서울에 극적인 결승골을 허용해 2-3으로 패했지만 이 정도면 기대이상의 선전이었다.

이윤의는 지금까지 K리그에 딱 한 번 출전했던 선수로 주포지션인 측면 수비가 아니라 골키퍼로 두 번째 K리그 그라운드를 밟았다. 이제 다시 권순태가 돌아오고 이윤의는 또 언제일지도 모를 출장 기회를 위해 묵묵히 준비하고 기다려야 할 것이다. 아픈 일일수도 있다. 하지만 이윤의가 보여준 희망은 곧 K리그를 상징하기도 한다. 오히려 이 위기가 기회가 될 수도 있다. 네 명의 골키퍼 중 세 명이 승부조작에 연루되는 사상 초유의 사태로 인해 생긴 해프닝이었지만 어느 위치에 있건 최선을 다하는 이런 선수들이 있다는 건 K리그 팬으로서 행복한 일이다. 최은성은 지난 주말 7골이나 먹었으니 이윤의도 이 정도면 선방한 것 아닌가.

2. 골키퍼 품귀 현상
상주는 골키퍼 세 명이 자리를 비웠고 전북과 광주도 골키퍼를 잃었다. 가뜩이나 품귀 현상을 빚는 골키퍼가 한꺼번에 이렇게나 많이 자리를 비우게 되자 각 팀들은 골키퍼를 구하느라 애를 먹고 있다. 상주는 이례적으로 시즌 중반 입대자를 모집하기 위해 각 구단에 공문을 발송했고 전북은 백업 골키퍼였던 김민식에게 기회를 주고 있다. 인천은 이 와중에 핀란드 리그에서 뛰었던 권정혁을 데려오는 대박(?)을 쳤다. 개인적으로 봤을 때 송유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으로 보이는 허정무 감독은 권정혁을 곧바로 지난 주말 성남전에 투입하며 골키퍼 문제로 고민하는 다른 팀 감독들의 부러움을 사기도 했다.

현재 K리그는 골키퍼 품귀 현상을 빚고 있다. 하지만 먼 미래를 내다보면 분명히 긍정적인효과가 나타날 것이다. 지금까지 유소년 선수들 사이에서 골키퍼는 기피 포지션이었지만 이제 그들은 비교적 K리그 입성이 쉬운 골키퍼 자리에서 뛰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할 것이다. 각 구단이 골키퍼를 외국인 선수들로 채웠던 과거에는 “유망한 국내 골키퍼가 없다”고 걱정했지만 외국인 골키퍼 영입 금지 조항이 생긴 뒤에는 이러한 문제가 서서히 해결됐던 전례도 있다. 한 차례 K리그 드래프트에 실패했던 나도 내일 당장 골키퍼 장갑을 사 맹훈련에 들어가야겠다. 참고로 나는 겁이 많아서 승부조작은 못 한다.

3. 여전한 팬들의 사랑
승부조작 이후 언론의 반응은 싸늘하지만 정작 K리그의 주인인 팬들은 여전히 꾸준하게 경기장을 찾고 있다. 지난 달 프로축구연맹이 발표한 전반기 결산 관중 자료에 따르면 전반기 120경기에서 143만 7086명이 K리그를 찾아 경기당 평균 1만 1916명이 운집한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해 같은 기간과 비교하면 4% 증가한 수치다. 기대 이하의 성적을 거둔 빅클럽 서울과 수원이 각각 16.%와 6.6%의 관중이 줄었다는 점에 비추어 보면 더 놀라운 기록이다. 성남과 대구, 대전, 부산, 울산, 인천, 전북, 포항 등은 오히려 관중이 늘어났다. 빅클럽들의 관중 동원이 다소 주춤했지만 전체적으로는 상향평준화 된 셈이다.

힘들 때 곁에 있어주는 친구가 진정한 벗이라고 한다. 좋은 일이 있을 때는 누구나 곁에서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다. 하지만 괴로운 시기가 되면 내 옆을 떠나는 친구들이 많다. 그런 면에서 K리그는 진정한 팬의 의미를 되새겨야 할 시기를 맞았다. 승부조작으로 아픔을 겪고 있지만 그럼에도 팬들은 변함없는 사랑을 보내고 있다. 지난 주말 서울은 상대적으로 비인기팀인 상주와 홈 경기를 치렀다. 장마철 집중 호우로 경기장에 사람들이 들어찰지 의문이었다. 하지만 이날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무려 28,034명이나 됐다. 언론을 통해 연일 실망스러운 K리그가 보도되고 중계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도 팬들은 이토록 K리그에 뜨거운 사랑을 보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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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3 : 대구 김민구는 올 시즌 무명 설움을 떨치고 맹활약하고 있다. 원래 영웅은 난세에 나는 법이다. (사진=대구FC)>

4. 새로 기회를 얻은 2군들
누군가가 떠났다면 누군가에게는 기회다. 실력은 그들보다 떨어질지 몰라도 이들은 적어도 팬들을 속이거나 기만하지는 않는다. 승부조작으로 선수들이 떠나간 빈자리를 채우는 이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흥미롭다. 대전은 포항 원정에 새로운 얼굴을 대거 투입했다. 박건영과 박민근, 김주형, 조홍규 등 이번 시즌에 기회를 자주 부여받지 못한 선수들이 경기에 나섰다. 비록 이들은 포항에 0-7로 대패했지만 언젠가는 이날 패배가 보약이 돼 그들을 성장시키는 밑거름이 될 것이다. 포항도 스포츠토토에 베팅해 방출된 김정겸의 빈자리를 메우기 위해 박희철과 이원재 등을 투입하며 새로운 자원 찾기에 나서고 있다.

대구 김민구도 눈에 띈다. 내셔널리그에서 뛰다 올해 대구에 입단한 뒤에도 줄곧 ‘2군용’ 리그컵에 나섰던 그는 최근 정규리그에서 맹활약하고 있다. 전남 이병윤은 리그 통산 두 번째 출장이었던 대전전에서 극적인 동점골을 뽑아내기도 했고 대전 한덕희 역시 데뷔골을 뽑아내며 감격했다. 누군가에게는 K리그가 자신들의 돈벌이를 위한 범죄의 수단이었을 수도 있지만 대부분의 나머지 K리그 선수들에게는 꿈의 무대다. 승부조작으로 떠나간 선수들의 잘못까지 등에 업고 속죄하는 마음으로 뛰는 이들의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오히려 승부조작이 터져 양심 불량 선수들을 솎아낸 지금의 K리그가 더 낫다는 생각도 든다. 꿈을 위해 노력하는 선수들이 마음먹은대로 생각한대로 할 수 있단 걸 알게 된 순간 고갤 끄덕이는 정의는 K리그에 있다.

5.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선수들
요새 들어 축구를 자주 한다. 내셔널리그 출신 선수들과 함께 모여 공을 차는데 5분만 뛰면 체력이 방전이다. 평소 운동을 게을리 했고 날도 더워 뛰질 못한다. “저것밖에 못 뛰나”라며 K리그를 보고 손가락질했던 내 자신이 무척 민망할 뿐이다. 그리고 지난 주말 K리그 경기장을 찾았다. 넓디 넓은 그라운드를 죽어라 달리는 선수들은 90분 경기가 끝나자 곧바로 털썩 주저앉았다. 한 동안 가쁜 숨을 내쉬며 그라운드에 누워 일어날 줄을 몰랐다. 관중들은 경기가 끝나면 곧바로 관중석을 뜨지만 앞으로 잠시만 더 그라운드를 응시했으면 좋겠다. 그들은 90분 동안 심장이 터져라 뛰고 또 뛴 뒤 그라운드에서 탈진한다. 골 장면도 빼놓을 수 없지만 나는 이 장면을 놓치면 경기장에 직접 온 매력이 사라진다고 생각한다.

모든 K리그 선수가 손가락질을 받고 의심의 눈초리를 받고 있다. 설령 자책골이나 결정적인 실수라도 기록한 날이면 의심은 더욱 커진다. 선수들은 과거에도 최선을 다했지만 이제는 90분이 지나면 그라운드에 서 있을 힘이 없을 정도로 모든 걸 쥐어 짜낸다. 주심의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기 무섭게 그라운드에 드러누운 선수들을 보면서 그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었다. “살기 위해 뛰었다”며 울먹이던 최은성의 말이 무슨 의미인 줄 알았다. 생존을 위한 투쟁, 지금 K리그의 모습이다.

6. 짜릿한 버저비터
지난 주말 K리그 8경기 중 세 경기 결승골이 후반 추가 시간에 터졌다. 제주 원정을 떠난 경남은 0-2로 끌려가다 3-2로 극적인 역전승을 따냈다. 특히 김인한은 후반 46분 거짓말 같은 역전골을 터뜨려 명승부에 마침표를 찍었다. 부산 역시 대구에 1-2로 뒤진 후반 40분부터 두 골을 연거푸 뽑아내 3-2로 경기를 뒤집었다. 한상운이 후반 47분 기록한 역전골은 이번 시즌 최고의 골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멋졌다. 서울도 후반 48분 방승환이 헤딩슈팅에 성공해 2-2로 끝나가던 상주와의 경기에서 팀의 극적인 승리를 이끌었다.

성남-인천전도 명승부였다. 공교롭게도 사샤와 배효성의 자책골로 1-1 균형을 이루던 두 팀은 후반 막판 짜릿한 명승부를 연출했다. 후반 37분 인천 카파제가 한 골을 뽑아내자 성남은 4분 뒤 송호영의 기막힌 중거리 슈팅으로 2-2 무승부에 성공했다. 두 선수 모두 후반 교체 투입돼 팀의 득점을 이끌며 명승부의 주인공이 됐다. 승부조작에 연루된 선수들이 만들어낸 연극이 끝난 뒤 진정한 축구의 매력에 빠져들 수 있는 각본 없는 드라마가 연일 K리그 경기장에서 펼쳐지고 있다.

7. K리그를 이야기하는 사람들
평소에 내 주변에는 K리그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런데 승부조작 사건 이후 나에게 K리그에 대해 묻는 이들이 늘었다. 노이즈 마케팅이라면 노이즈 마케팅이다. “진짜 K리그는 다 승부를 조작해?”라는 질문은 받으면 나는 이에 대해 친절히 설명하기 시작한다. 이를 계기로 친해진 여성들도 꽤 있다.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어찌됐건 고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