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상병님 행정반으로 오시랍니다.” 군 시절 후임이 말했다. 행정반으로 향한 나는 중대장으로부터 무척 귀찮고 짜증나는 지시를 받았다. “작곡과 다니다 왔다며? 중대가 녹음 작업을 했으면 하네. 구전으로는 전해지는데 음원으로 남겨야겠어.” 황당한 소리였다. 악기도 있어야 하고 연주자도 있어야 하고 녹음 시설도 있어야 하는데 100명 남짓한 독립중대에서 이런 환경이 갖춰져 있을 리 없었다. “필요한 게 많다”고 중대장에게 말하자 답변이 돌아왔다. “일단 악기는 교회에서 빌리면 되고 필요한 인원을 다 말해보게.”

“악기 연주자가 있어야 합니다.” 내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중대장이 마이크를 잡았다. “전 중대원에게 알린다. 사회에서 악기 좀 다뤄봤다는 병력들은 지금 행정반으로 오도록. 이상.” 방송이 끝나고 3분이 지나자 행정반이 시끄러워지기 시작했다. “전 사회에서 베이스 좀 쳤습니다.” “저는 드럼 학원에 석 달 다녔습니다.” “동아리에서 색소폰 좀 불었습니다.” 믿을 수 없었다. 녹음 시설은 작업을 전문으로 하는 ‘보일러병’이 케이블 몇 개를 연결해 뚝딱 만들었다. 군대에서는 정말 안되는 게 없었다. 불과 몇 분 만에 중대가 녹음을 위한 밴드가 결성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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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보는 2004년 수원에 입단해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주전 경쟁을 펼쳤다. (사진=권기보 미니홈피)

이운재와 박호진, 김대환 그리고 권기보

1982년 부산에서 태어난 권기보는 인천으로 이사 와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는 초등학교 3학년 때까지는 장난끼 넘치는 평범한 학생이었다. 그런데 이웃 학교 축구부에서 그를 눈여겨봤다. 또래 친구들보다 월등히 큰 체격 탓이었다. 결국 권기보는 축구부 감독의 눈에 들어 초등학교 4학년 때 부평초등학교로 전학을 가 본격적으로 축구를 시작하게 됐다. 만수중학교와 운봉공고를 거치며 그는 꽤 촉망받는 골키퍼로 성장했다. 비록 본선 무대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U-19 청소년 대표팀에도 잠시 이름을 올렸다.

2004년 그는 K리그 입성을 준비했다. 당시에는 드래프트 제도가 없던 터라 각 구단과 자유롭게 계약을 맺을 수 있었다. 한 구단에서 권기보에게 관심을 보였다. “우리와 계약하자. 다른 곳으로 가면 안 된다”고 강력한 영입 의사를 나타냈다. 하지만 계약 마무리 과정에서 그 구단은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서 말을 바꿨다. 권기보는 졸지에 낙동강 오리알이 될 신세에 놓였다. 그런데 그때 수원 차범근 감독이 권기보에게 손을 내밀었다. “신체 조건이 좋고 세대교체를 위해 네가 필요하다”는 게 이유였다. 192cm에 이르는 그의 신장을 높게 평가한 것이었다.

당시 수원은 최고의 골키퍼를 수두룩하게 보유하고 있었다. 2002 한일월드컵 4강 주역 이운재는 물론 언제든 다른 팀에 가면 주전을 꿰찰 수 있는 박호진과 김대환도 그 뒤를 받치고 있었다. 하지만 이들은 모두 30대 중반을 향하고 있었다. 세대교체를 위해서는 반드시 젊은 골키퍼가 있어야 했다. 차범근 감독은 비록 크게 빛나지는 않지만 우월한 신체 조건을 앞세운 권기보에게서 희망을 봤다. 한 차례 다른 구단과 계약이 틀어졌던 권기보는 최고의 골키퍼들과 함께 운동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고 수원 유니폼을 입었다.

권기보의 잊을 수 없는 데뷔전과 희망

그는 하늘 같은 선배들과 함께 운동하며 많이 성장했다. 운봉공고 시절부터 정확했던 킥력이 더욱 향상됐고 수비 조율 능력도 점차 좋아졌다. 하지만 기복이 있었고 무엇보다 워낙 쟁쟁한 선배들과 함께 해 선발 출장 기회를 쉽사리 얻지 못해 아쉬움이 컸다. 이운재가 언제나 1순위였고 그가 대표팀에 갈 때면 박호진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박호진마저 부상일 경우 김대환이 골문을 지켰으니 권기보로서는 첩첩산중이었다. 권기보는 당시를 회상할 때마다 “열심히 하는데 쟁쟁한 선배들이 위에 있어서 주전 자리를 함부로 넘보지 못해 무척 힘들었다”고 했다.

그는 2006년 11월 처음 K리그 경기에 나섰다. 당시 수원은 FA컵 준결승과 정규리그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있어 체력을 안배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일주일에 세 경기를 치르는 강행군이었다. 차범근 감독은 정규리그 후기 마지막 라운드 전북과의 원정경기에 처음으로 권기보를 선발로 투입했다. 전북 역시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 출전 관계로 주전 선수들을 제외한 상황이었다. 그는 시작 5분 만에 전재운에게 헤딩슛을 내줬지만 이후 남은 시간을 무실점으로 잘 버텼다. 1-1 무승부로 끝난 경기에서 차범근 감독은 데뷔전을 성공적으로 치른 권기보에게 합격점을 내렸다. 권기보는 축구를 하면서 가장 행복했던 순간을 바로 이때로 꼽는다.

2007년이 되고 그는 경기에 나서지는 못했지만 백업 골키퍼로 주로 벤치에 앉을 만큼 성장했다. 통상적으로 선발 골키퍼 한 명과 백업 골키퍼 한 명을 제외한 나머지 골키퍼들은 아예 엔트리에도 들지 못한다. 권기보는 쟁쟁한 선배들 사이에서 두 번째 골키퍼로 뽑혀 엔트리에 들 정도로 기대를 모았다. 2007년에는 대표팀에 선발된 이운재, 부상을 당한 박호진을 대신해 김대환과 함께 수원이 첼시와 맞붙었던 미국 투어에 나서기도 했다. 비록 첼시를 상대로 단 한 골을 내주면서 맹활약한 김대환을 지켜봐야했지만 그는 세계 최강 팀과의 대결에서 한 그라운드에 있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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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군 경기에 나선 권기보의 모습. 그는 1군 경기에 단 한 차례밖에 모습을 드러내지 못했다. (사진=권기보 미니홈피)

상무 입대 좌절, 그리고 일반 사병 입대

하지만 권기보는 부상 악령에 시달리고 말았다. 2007년 겨울 이운재와 박호진이 나란히 부상을 당해 김대환과 함께 출전 기회를 놓고 다툴 기회에서 그 역시 손가락 부상을 당하고 만 것이다. 결국 당시 수원 골문은 김대환 혼자 지키게 됐고 권기보는 재활에 매달려야 했다. 만약 그가 이 기회를 잡았다면 더 큰 선수로 성장했을 것이다. 권기보는 2006년 전북전 단 한 경기 출장 기록을 남긴 채 2008년 시즌이 끝나고 군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상무에 입대 지원서를 넣었다.

그렇지만 상무는 그를 받아주지 않았다. 이미 2007년 김용대라는 확실한 골키퍼 자원과 함께 백업 골키퍼 이정래까지 데려온 상무는 권기보가 지원서를 넣은 해에 그보다 더 K리그 출장 경력이 많은 성경일을 뽑았다. 결국 K리그 단 한 경기에 나선 게 전부인 권기보는 상무에 입단하는 데 실패하며 좌절했다. 수원도 더 이상 그에게 미련을 두지 않고 계약을 포기했다. 그렇게 권기보는 그 누구의 관심과 박수도 받지 못한 채 K리그 무대에서 사라졌고 2009년 초, 서정원 축구교실에서 아이들을 잠시 지도하며 일반 사병으로 현역 군입대를 기다렸다.

“2010년 3월에 입대하라”는 입영 통지서가 날아들었다. 운동을 그만둔 뒤 군 입대를 기다리며 방황하던 그는 84kg이던 체중이 90kg 이상으로 불어 있었다. 더 이상 축구선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는 몸 상태였다. 그리고 봄이 막 세상을 향해 인사하던 2010년 3월 25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선수 생활을 이어갈 생각은 접은 채 머리를 빡빡 밀고 29살의 나이에 한참 어린 동생들과 구르고 기었다. 그리고 3월 말, 훈련소에서 축구 실력을 마음껏 뽐내며 사단장 최우수 표창을 받은 뒤 임진강을 코 앞에 둔 경기도 파주 25사단 70연대에 자대 배치를 받았다. 그는 골키퍼 장갑 대신 K2 유탄발사기를 손에 들었다. 혹독한 훈련으로 다시 체중도 현역 시절과 비슷하게 돌아왔다.

분대장 권기보 상병의 군 생활

“사회에서 뭐 하다 왔냐?” 선임들은 나이 많은 신병에 관심을 보였다. “축구 좀 했습니다.” 다들 코웃음을 쳤다. 사회에서 공 좀 차다 왔다는 신병치고 제대로 된 축구 실력을 보여준 이가 없었기 때문이다. “수원 삼성에서 골키퍼로 뛰다 왔습니다.” 한참 나이 어린 후임들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운재 알아?”, “조원희하고 친해?” 다들 신기해했다. 그리고 곧바로 연병장에 나가 실력을 보여줬다. 선임들은 지금까지 본 적 없는 골키퍼의 기막힌 선방쇼에 감탄했고 곧바로 중대 대표로 그를 선발했다.

그는 대대는 물론 연대, 사단 대표 등 숱한 대회에 차출됐다. 현역 선수 시절 대표팀에 차출되는 선배들을 부러워했던 그는 이제 군대 최고의 축구스타가 됐다. 축구로 휴가증을 휩쓸었다. 그는 최근 상병으로 진급해 이제 분대장으로서의 책임을 다하고 있다. 철야로 훈련하면서 군 생활에 적응하지 못하는 후임들까지 챙기는 그는 “축구보다 군 생활이 힘들다는 생각도 든다”고 밝히기도 했다. 다가올 휴가를 목이 빠져라 기다리는 남들과 똑같은 군인의 모습으로 최전방을 지키고 있다.

권기보는 사실상 현역 선수 복귀를 포기하고 있었다. 2년 간 국방의 의무를 다하며 체계적인 운동을 하지 못해 다시 K리그 무대를 두드리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지고 있다. K리그 상주 상무 골키퍼 네 명 중 세 명이 승부조작 혐의가 입증되거나 조사를 받고 있는 와중에 유일한 골키퍼 권순태마저 지난 대구전에서 퇴장을 당해 더 이상 골키퍼 자원이 없는 상황이다. 당장 다음 경기에 나설 골키퍼가 없고 앞으로 2군 경기에도 기용할 골키퍼가 필요하다. 그런데 1년에 한 번 상무 지원자를 선발하는 특성상 여름 이적시장에서 골키퍼를 구할 수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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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기보가 과연 극적으로 K리그 무대에 돌아올 수 있을까. (사진=권기보 미니홈피)

기적과 같은 드라마 연출될까

국군체육부대는 분주하게 움직였다. 60만 명에 이르는 국군 장병 중 분명히 사회에서 축구를 좀 해본 이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리고 여기저기 수소문한 끝에 희망적인 소식을 전해 들었다. “파주에 있답니다. 수원에서 한 경기 뛴 권기보라는 선수가 파주에서 일반 사병으로 복무 중이랍니다.” 국군체육부대는 곧바로 등록 절차를 알아보고 있다. 여름 이적시장이 열려 현역 군인이 상무 소속으로 K리그 경기에 나서는 게 문제는 없다는 판단이지만 프로축구연맹에 정확히 문의를 해놓고 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연맹에서 승인을 내리면 권기보는 25사단에서 국군체육부대로 전출돼 다시 K리그 무대로 돌아올 수 있다.

아직 확정된 건 없다. 이미 한 차례 K리그 무대에서 아픔을 겪고 일반 사병으로 군에 입대한 권기보가 기적적으로 K리그 무대에 서게 될 것이라는 확신은 없다. 하지만 만약 권기보가 다시 K리그로 돌아온다면 우리는 비록 승부조작이라는 가슴 아픈 소식을 접하는 와중에 감동적이고 아름다운 스토리를 접할 수도 있을 것이다. 상무 입대에 실패한 그가 극적으로 상무를 위기에서 구해내는 동화 같은 이야기가 현실로 이어졌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 기회를 발판 삼아 다시 권기보가 제대 후 K리그에 입성하는 건 꿈 같은 일이 벌어졌으면 좋겠다. 승부조작으로 아파하는 K리그에 권기보의 기적과 같은 드라마가 희망을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