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항상 새로운 것에만 열광한다. 이제 더 이상 아이폰3에는 관심이 없다. 아이폰4가 나왔기 때문이다. 몇 달이 지나면 역시 아이폰5가 나와 아이폰4 따위는 아무도 애지중지하지 않을 것이다. 축구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항상 새로운 신인들의 등장을 무척 기대한다. 하지만 그러면서 오랜 시간 묵묵히 K리그를 지키는 이들에 대해서는 그다지 뜨거운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지난 주말 의미 있는 기록을 남긴 이동국과 김은중을 주목해야 할 이유도 여기에 있다.

인간 승리의 주인공, 김은중

김은중은 1997년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대전시티즌 창단 멤버로 K리그에 입성했다. 그리고 1998년 3월 13일 울산과의 홈 경기에서 의미 있는 첫 골을 기록했다. 후반 코너킥 상황에서 헤딩으로 골을 넣으며 리그 통산 첫 번째 득점에 성공했다. 13년 뒤 100골을 채우기 위한 첫 출발이었다. 물론 시련도 있었다. 2007년 무릎 십자인대를 다친 후 2009년 FC서울에서 FA로 풀렸지만 서울은 그를 붙잡지 않았다. 국내 다른 팀 이적을 추진했지만 “한 물 갔다”는 평가만 이어졌고 결국 중국 슈퍼리그 창사 진더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는 여기에서 멈추지 않았다. 지난 해 제주에 입단한 그는 무려 17골 11도움이라는 경이적인 공격 포인트를 올리면서 완벽히 부활했다. 비록 제주는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김은중은 이례적으로 최우수선수(MVP)에 선정되는 영광을 누리기도 했다. 올 시즌 초반 다소 부진했지만 병상에 누워있는 신영록을 위한 골 세레모니를 하는 등 고참답게 동료들을 독려하는 모습에 많은 이들이 감동하기도 했다. 그리고 지난 주말 강원전에서 두 골을 기록하며 통산 100호골을 달성했다.

이 기록은 30년이 다 돼가는 K리그에서 단 7명만 가지고 있는 대기록이다. 윤상철과 김현석, 샤샤, 김도훈, 우성용, 이동국만이 이 위업을 달성했다. K리그에서 14번 째 시즌을 맞은 김은중은 이제 역사에 길이 남을 선수가 됐다. 1998년 고등학교를 갓 중퇴하고 K리그에 나섰던 소년은 이제 K리그 최고의 선수로 남을 자격을 얻었다. 비록 경기 중 사고로 한 쪽 눈의 시력을 잃었지만 그는 장애를 극복하고 진정한 인간 승리가 무엇인지 보여줬다.

비난을 찬사로, 이동국

이동국도 김은중의 경기가 끝나고 하루가 지난 어제(3일) 의미 있는 기록을 쏘아 올렸다. 그는 서울과의 홈 경기에서 이승현의 골을 도와 개인 통산 마흔 번째 도움을 기록했다. 그러면서 K리그 역사상 12번째로 40득점-40도움 클럽에 가입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동국은 이날 도움으로 개인 통산 109골 40도움을 채웠다. 포항 소속으로 1998년 3월 전북과의 아디다스컵 경기에서 데뷔골을 터트린 이동국은 13년 만에 40-40이라는 대기록을 달성해 냈다.

이동국은 다들 알다시피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2002년과 2006년 월드컵에는 경쟁에서 밀리고 부상을 당해 나서지 못했고 프리미어리그에서도 실패하고 돌아왔다. 많은 이들이 그를 ‘개발’이라고 욕했다. 2008년 성남에서 이렇다 할 활약을 하지 못했을 때도 역시나 조롱의 대상이 됐다. 하지만 그는 전북으로 이적해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올 시즌에는 10득점 8도움으로 각각 득점 2위와 도움 1위를 내달리고 있다. 적어도 K리그에서만큼은 이동국보다 독보적인 선수가 없다.

특히나 최근의 활약은 그의 나이를 무색케 할 정도로 탁월하다. 2009년 득점왕을 차지할 당시 도움이 1개도 없어 “이기적인 플레이를 한다”는 비난을 받았던 그는 올 시즌 도움 랭킹 1위를 내달리며 얼마나 축구에 확실히 눈을 떴는지 증명해 보이고 있다. 조광래 감독도 “한·일전에 그를 뽑겠다”고 천명했을 정도로 이동국은 최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 시련이 많고 비난이 많았던 만큼 그는 강해졌다. 그를 국내용이라고 비난하기에 앞서 K리그에서 40-40이 얼마나 힘든 기록인지 먼저 상기해 보는 게 어떨까.

세월이 가도 아름다운 그들

김은중과 이동국은 동갑내기 친구이면서 라이벌이다. 김은중이 40-40 클럽에는 먼저 가입했고 100호골은 이동국이 먼저 넣었다. 지난 주말에는 김은중이 100호골을 넣었고 이동국이 40-40 클럽에 가입하며 엎치락뒤치락 하고 있다. 친구이자 라이벌인 두 사람은 이제 K리그 역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존재가 됐다. 서로 의지하고 경쟁하면서 김은중과 이동국은 K리그 최고의 선수 반열에 올랐다. 우리가 새로운 신인의 등장에 열광하는 것 만큼 오랜 시간 K리그에서 활약하는 선수들에 관심을 갖는 일도 필요하다.

아직도 기억이 선명하다. 김은중과 이동국이 막 프로에 입단해 주목을 받았던 1998년이었다. 김은중과 이동국은 나란히 그해 10월 태국에서 열린 19세 이하 아시아청소년축구선수권대회에 한국 청소년 대표팀 투톱으로 나섰다. 중국과의 개막전에서 김은중이 두 골을, 이동국이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은 한국은 결승에서도 이 둘이 나란히 한 골씩 기록하며 일본을 2-1로 제압하고 대회 우승을 차지했었다. 특히나 이동국의 일본전 터닝슛은 아직도 기억하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당시 거칠 것 없던 이 10대들은 이제 노장이 됐다. 풋풋함은 사라졌지만 그들은 관록을 앞세워 여전히 멋진 기량을 선보이고 있다. 그 사이 숱한 비난과 좌절, 슬럼프를 겪으면서 오히려 더 단단해졌다. 몇몇 선수들의 그릇된 선택으로 K리그 전체가 비난받고 있지만 나는 김은중과 이동국이 전하는 감동이라면 K리그에 변함없는 사랑을 보낼 것이다. 세월이 가면 가슴이 터질 듯한 그리운 마음이야 잊는다 해도 한없이 위대했던 선수가 있었음은 잊지 말고 기억할 것이다. 그게 바로 김은중과 이동국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