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틸야드 전광판 ⓒ 독자 제공
스틸야드 전광판 ⓒ 독자 제공

[스포츠니어스 | 포항=조성룡 기자] 어디가서 '광기'라는 표현은 함부로 쓰지 말자.

지난 16일. 주말 취재 경기를 배정받고 신청을 마무리했다. K리그는 규정 상 취재진이 경기 이틀 전까지 사이트를 통해 취재신청을 해야한다. 내가 가야 할 주말 경기는 포항-강원과 대구-전북이었다. 취재신청을 마친 뒤 퇴근하자 포항 구단 관계자에게 '카톡'이 왔다. "오신다고 들었습니다. 경기장에 오실 때 도착 10분 전에 전화 주세요."

포항 취재 경기에 포항이 지지 않는다는 '조성룡 징크스' 때문이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18일 새벽에 포항으로 운전했다. 보통 홈 경기 구단 관계자는 경기 준비에 바쁘다. 그런데 정오가 되자 귀신같이 구단 관계자에게 전화가 왔다. "어디신가요? 얼마나 걸리실까요? 그럼 도착 시간이 어떻게 될까요?" 뭔가 느낌이 이상했다. 그 때 도망갔어야 했다. 그 이후에 벌어질 사건을 생각하면.

꽃목걸이에 '공주님 왕관'까지 '제정신이 아니네'
그렇게 포항스틸야드에 도착했다. 무언가 포항 구단이 '작당모의'를 한 것 같아 불안해졌다. 그래도 부탁이 있었으니 전화를 걸었다. "조성룡입니다. 저 스틸야드에 도착했습니다." 그러자 구단 관계자는 별 일 없다는 듯 "네, 기자회견장으로 오시면 됩니다"라고 답했다. 불안했던 마음은 순식간에 가라앉았다. '내 생각이 기우였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포항스틸야드의 미디어 출입구는 선수단 버스 옆을 지나 라커룸을 거쳐 기자회견장으로 들어가게 된다. 별 생각 없이 주차 보안요원과 인사를 나누고 터벅터벅 걸어갔다. 그런데 갑자기 선수단 버스 앞에서 한 무리가 달려나왔다. 치어리더들과 함께 마스코트 '쇠돌이'와 '쇠순이'가 말 그대로 '뿅'하고 나타났다. 정신이 혼미해졌다.

한 번도 마주칠 일 없던 치어리더들이 갑자기 "조성룡 기자님 어서오세요!"를 외치더니 꽃목걸이를 걸어주고 꽃가루를 뿌렸다. 쇠돌이와 쇠순이도 옆에서 야단법석이었다. 갑자기 사진을 찍어야 한다며 현수막을 펼쳤다. 현수막에는 '스포츠니어스 조성룡 기자 스틸야드 방문의 날'이라고 쓰여져 있었다. 이게 도대체 뭔 상황인지도 모른 채 사진을 찍으래서 찍었고 포즈를 잡으래서 잡았다.

포항스틸야드 기자회견장 조성룡 기자 전용석 ⓒ 스포츠니어스
포항스틸야드 기자회견장 조성룡 기자 전용석 ⓒ 스포츠니어스

사진 촬영이 끝나자 이들은 나를 기자회견장으로 끌고 갔다. 그 와중에 '쇠돌이'는 내 가방까지 뺏어 대신 멨다. 그냥 사진 찍고 끝날 줄 알았지만 이들의 '광기'는 끝나지 않았다. 기자회견장에 가니 맨 앞줄에 '스포츠니어스 조성룡 기자 전용석'이라는 스티커가 붙어 있었다. 그 옆에는 각종 간식거리와 핫팩, 티슈와 더불어 쇠돌이 인형과 '라쉬반' 속옷세트까지 함께였다.

심지어 기자회견장 옆에 설치된 대형TV에는 아예 나를 환영하는 홍보 이미지까지 송출돼 있었다. 이 쯤 되면 무서워진다. 구단 창단 50주년과 K리그 명예의 전당 초대 헌액자를 다수 배출한 포항이 이러고 있었다. 슬슬 '미쳤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기자회견장에 앉아서도 사진 촬영을 해야했다. 정신을 좀 차리려고 하는 순간 다시 정신이 혼미해졌다. '나는 누구고 여긴 어디지?' 갑자기 쇠돌이는 젤리를 까더니 내 입에 집어넣기 시작했다. 신발도 벗기더니 곰돌이 푸가 그려진 푹신한 슬리퍼까지 신겼다. 심지어 머리에는 공주 티아라를 씌웠다. 이 쯤 되면 체념해야 한다. 이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해야 빠르게 끝난다. 포즈도 잡고 젤리도 먹어야 한다.

포항의 진짜 '광기'는 그라운드에서 시작된다
정신없이 기자회견장에서 사진 몇 장 찍고나니 경기 시작 90분 전이 됐다. 사전 선수 인터뷰가 가능한 시간이다. 구단 관계자들에게 "선수 인터뷰를 하겠다"라고 양해를 구하고 그라운드로 향했다. 그런데 자꾸 뒤가 켕겼다. 돌아보니 쇠돌이와 쇠순이가 '포항의 아들 조성룡', '멋지다 성룡아!'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있었다. 나는 서울시 영등포구에서 태어났다.

선수 인터뷰를 하기 위해서는 스틸야드 중앙 통로로 그라운드에 나와 코너 플래그 쪽으로 향해야 한다. 그라운드 중앙에는 이날 중계진인 임경진 캐스터와 정경호 해설위원이 있었다. 그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눌 때 쇠돌이와 쇠순이는 촐싹대며 플래카드를 흔들고 있었다. 그 순간 갑자기 장내 스피커에 우렁찬 목소리의 여성 아나운서가 코멘트를 했다.

"우리 포항스틸야드에 스포츠니어스 조성룡 기자가 취재를 왔습니다! 조성룡 기자는 지난 2022시즌 포항 경기를 취재했을 때 7승 1무로 무려 94%의 승률을 기록했습니다! 환영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대형 전광판에는 기자회견장에 송출됐던 환영 이미지가 선명하게 송출되고 있었다. 사람들이 말하는 이 징크스는 일종의 '밈'이다. 그런데 이걸 대놓고 경기장 스피커로 안내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포항이다.

스틸야드 중앙 통로 ⓒ 스포츠니어스
스틸야드 중앙 통로 ⓒ 스포츠니어스

그 순간 저 멀리서 전화 통화를 했던 포항 구단 관계자가 보였다. 전력질주해 멱살을 잡았다. 경기장을 일찍 찾은 관중들은 그 장면을 봤다. 하지만 이미 부끄러울 만큼 부끄러운 상황에 더 이상의 수치심(?)은 없었다. 포항 구단 관계자는 "저희가 정성을 다해 환영하려고 준비했습니다"라면서 싱글벙글이었다. 하지만 약 15분 뒤 더 큰 난관을 만나게 될 줄은 또 몰랐다.

예상치 못했던 한 마디 "아니 그렇게 승률이 좋아요?"
경기 시작 50분 전부터 양 팀 감독들과 취재진은 만나 경기 각오 등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다. 이날 포항과 강원의 경기 취재진은 혼자였다. 최근 강원은 분위기가 좋지 않다. 약간 무거운 마음으로 최용수 감독을 만났다. 그런데 대뜸 최용수 감독은 내게 이런 말을 했다. "포항 취재 오면 승률이 그렇게 좋다고요?"

강원 구단 관계자가 슬쩍 귀띔했다. "감독님께서 아까 방송사 인터뷰 하러 가시다가 전광판에 이미지 띄워진 거 보셨어요." 등짝에서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포항에서는 '밈'으로 나름 환영 받지만 상대 팀 입장에서 나는 그저 불편한 존재다. "아니…그게…저…" 그 순간 최 감독은 껄껄 웃더니 한 마디 했다. "나는 우리 구단(강원)에 관심 많이 가져주는 김귀혁 기자가 더 좋더라고."

포항 김기동 감독은 구단 관계자의 '광기'를 전혀 모르고 있었다. 김 감독 또한 경기 당일에 이벤트를 접했다. 그는 오히려 내게 "도대체 구단 관계자들이 조기자가 취재 오는 걸 미리 어떻게 알았느냐"라고 되물을 정도였다. 그러면서도 재미있어 하는 표정이었다. "역시 우리 구단 사람들이 일을 잘해."

포항스틸야드 기자석 전용석 ⓒ 스포츠니어스
포항스틸야드 기자석 전용석 ⓒ 스포츠니어스

폭풍과도 같은 경기 전 일정이 끝나고 본격적으로 취재를 위해 관중석 상단에 위치한 기자석으로 올라갔다. 아뿔싸. 포항의 '광기'는 디테일했다. 이들은 기자석에도 '스포츠니어스 조성룡 기자 전용석'이라는 스티커를 붙여놨다. 다행히 앞서 정말 수많은 일들을 경험했기에 나름대로 덜 부끄러웠다. 역시 사람은 적응의 동물이다.

전쟁 같았던 경기는 강원 갈레고의 선제골과 후반 막판 포항 이호재의 동점골이 터지면서 1-1 무승부로 종료됐다. 이호재의 동점골이 들어가자 눈치 없는 쇠돌이와 쇠순이는 그라운드에서 관중석을 향해 플래카드를 흔들고 있었다. 아… 마지막까지 이 사람들은 진심이었다. 심지어 김기동 감독은 경기 후 기자회견에서 "조성룡 징크스가 이어지길 바라는 마음에 이호재를 넣었다"라고 했다. '광기'가 김 감독에게도 전염된 모양이다.

알고보면 황당한 포항 '광기'의 발단
포항 구단 관계자에게 이 '광기'의 이유를 물었다. 발단 또한 지난 16일로 거슬러 올라간다. 홈 경기 준비에 지친 포항 구단 관계자들은 사무실에서 한창 일을 하고 있었다. 그 때 임정민 차장이 한 마디 했다. "우리 이번 경기 이기겠는데요?" 직원들이 이유를 묻자 "조성룡 기자가 포항에 옵니다"라고 답했다.

그 때 신주현 팀장은 팀원들을 다 소집해 간략 회의에 들어갔다. 힘들고 지친 와중에 광기 어린 이벤트로 활력소를 불어넣자는 것이다. 포항 직원들이 툭툭 던진 아이디어가 하나하나 모여 이런 이벤트가 완성됐다. 취재 결과 내게 공주 티아라와 봉을 쥐어주자고 제안한 사람은 포항 쇠돌이 SNS 관리자가 유력하다. 포항 구단 관계자 또한 "그 직원이 조성룡 기자 마주치면 안 된다고 도망 가던데요?"라며 힘을 실었다.

모든 취재가 끝나자 포항 구단 관계자는 "우리가 준비한 선물 다 가져가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꽃목걸이부터 속옷과 공주 티아라까지 다 바리바리 싸들고 가게 생겼다. 이벤트는 포항 구단이 한 건데 부끄러움은 왜 내 몫일까. 문득 궁금해 물었다. "기자회견장과 기자석 전용석은 언제까지인가요?" 포항 구단 관계자는 "무패 기록 깨질 때까지"라고 답했다.

시간이 흐를 수록 내 부끄러움은 커져만 가고 포항 구단 관계자들의 뿌듯함도 함께 커져간다. 마지막으로 포항 구단 관계자는 인사하면서 또다시 내 가슴 한켠에 불안감을 심어놓았다. "내일 대구 가신다고 하셨죠? 저희가 대구에 연락 한 번 넣어놓겠습니다." 아냐. 넣어둬. 제발.

 

wisdragon@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