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광주의 유니폼을 입었다. 감회가 남다를 수 밖에 없다 ⓒ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순천=조성룡 기자] 연어는 놀라운 귀소본능을 가지고 있다.

강에서 태어난 연어는 바다로 흘러가 생을 보낸다. 그러다 알을 낳을 때가 되면 자신의 고향을 향해 험난한 여정을 시작한다. 고향으로 돌아오는 과정은 힘겹다. 많은 상처를 안기도 하고 죽는 경우도 있다. 어쨌든 연어는 열심히 고향으로 향한다. 그들의 존재 가치는 고향에 돌아와야 비로소 완성되기 때문이다. 고향에서 알을 낳는 순간 어미 연어는 자신의 일을 다했다는 듯 생을 마무리한다.

연어처럼 우여곡절 끝에 다시 고향에 돌아온 선수가 있다. 2018시즌부터 광주에 합류한 박요한이다. 그는 2011년 광주의 창단 멤버로 입단해 프로 생활을 시작한 이후 충주험멜과 아산무궁화를 거쳐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하지만 단순히 이런 경력 만으로는 그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없다. 그가 광주에 다시 돌아오기까지 그는 너무나 힘든 과정을 거쳤고 때로는 좌절하고 눈물 흘리기도 했다. 지금부터 그의 풀스토리를 독자들에게 소개하고자 한다.

강등의 시련, 박요한을 바다로 나가게 하다

그의 축구 인생은 광주에서 시작했다. 광주 월곡초등학교, 북성중학교, 금호고등학교를 나온 광주 토박이가 박요한이었다. 이후 그는 연세대학교에 진학한 후 2011 K리그 드래프트에서 다시 한 번 고향으로 내려오게 된다. 광주가 4순위로 박요한을 지명한 것이다. 그는 그렇게 광주의 프랜차이즈 스타로 발돋움할 잠재력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프로의 세계는 냉정했다. 신인 박요한에게 주어지는 출전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2011시즌에는 주로 2군에 머물렀다. 2012시즌에는 고작 5경기를 뛰는데 그쳤다. 박요한의 설 자리는 점점 없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엎친데 덮친 격으로 광주는 K리그 챌린지(K리그2)로 강등 당했다. 수많은 선수들이 방출 통보를 받았고 그 중에는 박요한도 있었다. 그렇게 그는 떠밀리듯 첫 번째 시련을 맞이했다.

새 팀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서 박요한은 한 가지 고민을 하고 있었다. "군 문제를 해결해야겠다." 당시 군경팀은 점점 입대 경쟁이 치열해지던 상황이었다. 그는 군경팀 입단에 상당히 불리한 조건을 가지고 있었다. 대표팀 경력은 전무했고 K리그 출전 경력도 얼마 되지 않았다. "그 때까지 그냥 열심히 하면 되는 줄 알고 그렇게 뛰었는데 그게 아니더라구요. 무언가 사람들에게 나 자신을 보여줘야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어요."

그가 군경팀에 들어가는 방법은 단 한 가지였다. 최대한 K리그에서 많은 경기를 소화하는 것이었다. 그러던 와중 충주험멜이 손을 내밀었다. 당시 충주는 첫 시즌에서 최하위를 전전하던 중 이재철 감독이 사임했고 김종필 감독이 지휘봉을 잡은 상황이었다. 전력 강화를 위해 충주는 박요한을 주목했고 결국 그는 2013년 8월 충주 유니폼을 입었다. 출전 기회가 필요했던 박요한과 전력 강화를 노리는 충주의 이해 관계가 딱 맞아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그는 광주라는 고향을 떠나 바다로 향했다.

행복했던 충주에서의 기억, 그게 마지막일 줄이야

프로 입성 이후 두 시즌 동안 5경기 출전에 그쳤던 박요한은 충주에서 본격적으로 기회를 잡기 시작했다. 2013시즌 11경기를 뛴 것으로 시작해 2014년과 2015년에는 각각 26경기 출장을 기록했다. 특히 2015시즌에는 주장 완장을 차며 팀을 이끄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하지만 충주 입단 당시 박요한은 이렇게 충주에서 오래 뛸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언젠가는 군대에 가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박요한은 충주의 주장으로 팀을 이끌기도 했다 ⓒ 충주 험멜 제공

하지만 그는 무려 세 시즌을 연달아 충주에서 뛰었다. 당시 충주의 지휘봉을 잡고 있었던 김종필 감독의 진심이 통했기 때문이었다. 그가 입대를 고민할 때마다 김 감독은 설득에 나섰다. "우리 1년만 더 같이 해보자. 아직 입대 시기 여유 있잖아. 조금만 더 나와 같이 해보자." 누군가에게 인정 받는다는 것은 기분 좋은 일이다. 특히 축구선수라면 소속팀 감독에게 그런 이야기를 듣는 것은 더욱 행복한 일일 것이다. 그렇게 박요한은 충주에 정을 붙이고 있었다.

그는 충주에서의 생활을 "재밌었다"고 회상한다. "환경 자체는 진짜 어려운 팀이었어요. 성적도 좋지 않았어요. 하지만 매년 3~4명 씩 K리그 클래식(K리그1) 팀으로 선수들을 이적 시키는 팀이었어요. 그만큼 재기의 발판이 됐던 팀이라고 볼 수 있었어요. 많은 것이 어려웠지만 선수들끼리 끈끈하게, 그리고 재밌게 축구했던 곳이 충주였습니다."

하지만 계속해서 충주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그 역시 병역 의무를 다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과거와는 많이 달라졌다. 광주에서 한 경기 제대로 뛰지 못하던 박요한은 충주에서 에이스급 주전 선수로 자리매김했다. 덕분에 입대를 위한 기준을 충족시킬 수 있었다. 결국 2016 시즌을 앞두고 박요한은 입대했다. "당시 충주 구단 프런트들도 농담 반 진담 반으로 전역하면 꼭 돌아오라고 말했어요. 물론 저도 그러고 싶었죠. 하지만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몰랐어요."

군대에서 찾아온 시련, 해체와 부상

안산경찰청에 입대한 박요한은 다시 예전과 같은 모습으로 돌아갔다. 좀처럼 출장 기회를 잡지 못한 것이다. 입대 첫 해였던 2016시즌 그는 고작 5경기에서 모습을 드러냈다. 마음이 편할리 없었다. 하지만 경기에 나서지 못하는 것만큼 그를 흔들리게 한 것이 있었다. 바로 충주가 해체할 수도 있다는 소문이 돌기 시작한 것이었다.

"군대에 있어도 계속 축구를 하니 이야기는 계속 들려왔어요. 충주가 위태롭다는 이야기가 많이 들렸어요. 연고이전에 대한 얘기도 있었고 해체할 수도 있다는 이야기도 함께 들릴 때도 있었어요. 그 당시에는 저보다 충주에 남아있는 동료들이 안타까웠어요. 저는 그래도 전역할 때까지 경찰청에서 축구를 할 수 있잖아요. 그런데 그 선수들은 충주가 없어지면 당장 내일부터 걱정해야 하잖아요."

결국 충주는 해체됐다. 박요한은 그 이야기를 생활관에서 들었다. 워낙 흉흉한 소문이 예전부터 많이 돌고 있었다. 그래서 심리적인 충격은 덜했다. 하지만 부담감은 조금씩 그를 짓누르고 있었다. "축구선수가 팀이 없다는 것은 굉장히 좋지 않은 상황입니다. 그런데 저는 이제 팀이 없어진 거죠. 그것도 제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팀이 없어져서요. 돌아갈 곳이 없다는 압박감이 생각보다 크더라구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보다 충주에 남아있던 동료들을 먼저 걱정했다. "아직도 당시 팀 동료들을 생각하면 가슴 한 켠이 아파요. 그 때 충주에 서른 명이 넘는 선수들이 있었는데 지금도 프로 무대에서 축구를 계속 하고 있는 선수들은 열 명 안팎이에요. 대부분은 해체로 인해 축구화를 벗었어요. 대부분 제가 주장을 했을 때 있었던 선수들이잖아요. 아직도 그 친구들을 생각하면 안타까워요."

돌아갈 곳이 없으니 남은 1년의 군 생활 동안 그는 무언가를 세상에 보여야 했다. 이미 안산에서의 첫 시즌을 아쉽게 보낸 그는 더욱 굵은 땀방울을 흘렸다. 팀은 아산으로 연고지를 옮겨 새 출발을 준비 중이었다. 하지만 엎친데 덮친 격으로 사고가 발생했다. 부상을 당한 것이다. 그것도 시즌 개막을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다.

"한창 개막을 앞두고 컨디션을 조절하던 중이었어요. 그런데 개막 5일 전에 부상을 당했어요. 내셔널리그 강릉시청과의 연습 경기에서 다쳤어요. 손목 쪽 팔 부위가 부러졌어요. 이 부상으로 개막전에 나서지 못할 뿐 아니라 약 4개월 정도를 쉬었어요. 제 입장에서는 설상가상이었죠. 결국 2017 시즌에도 뭐 하나 제대로 보여주지 못했어요." 그렇게 그의 군 생활은 끝나고 말았다.

은퇴도 고민했지만 그는 더 뛰고 싶었다

아산에서 군 생활을 마친 박요한이었지만 마냥 전역이 기쁠 수 없었다. 다른 선수들과 달리 박요한은 돌아갈 곳이 없었다. 그리고 그를 찾는 팀은 없었다. 박요한은 고민에 빠질 수 밖에 없었다. "정말 별 생각 다 해봤어요. 그냥 이대로 은퇴할까 고민도 많이 했어요. 전역은 했는데 불러주는 팀이 없었어요. 답답하고 외로운 시간이었어요."

박요한은 충주의 주장으로 팀을 이끌기도 했다 ⓒ 충주 험멜 제공

그가 선수 생활 동안 틈틈이 지도자 수업을 받은 것도 오히려 그를 더 고민하게 만들었다. 박요한은 2급 지도자 자격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앞날을 걱정하며 만난 지인들은 조심스럽게 지도자 생활을 권유했다. "나 아는 팀에 코치 자리가 하나 비었는데… 코치 할래?" 만일 이를 수락했다면 우리는 더 이상 선수 박요한을 볼 수 없었을 것이다.

박요한은 평생 축구인의 삶을 살고 싶었다. 물론 그가 평생 축구선수의 삶을 살 수 없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언젠가는 지도자의 삶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을 그 누구보다 박요한 자신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도자 자리의 유혹이 올 때마다 그는 마음 한 켠에서 들려오는 소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아직은 더 하고 싶다. 이대로 끝날 수는 없다. 더 뛰어보고 싶다."

결국 그는 다시 한 번 도전을 선택했다. 하지만 더 힘든 도전이었다. 혼자서 고독한 싸움을 이어가야 했다. 박요한은 외로이 훈련에 매진했다. "팀에서 훈련할 때는 동료들과 같이 하니까 어느 정도가 훈련량이 많고 적은지 알 수 있어요. 그런데 혼자서 하면 잘 몰라요. 그래서 그냥 제가 지쳐 쓰러질 때까지 했어요. 축구선수들끼리 하는 속된 말로 '괄약근이 풀릴 때까지' 했어요. 일주일에 3~4일은 그렇게 훈련한 것 같아요. 프로에 있을 때보다 더 열심히 했어요."

혼자서 열심히 훈련을 했지만 그렇다고 상황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축구는 팀 스포츠다. 그리고 실전 경기 감각도 굉장히 중요하다. 또한 프로 입단을 노리는 선수들은 전국에 널려있다. 그런 가운데 2년 가까이 제대로 된 경력도 없고 팀도 없이 혼자 훈련하는 선수를 선뜻 받아줄 팀은 K리그에 없었다. 그런데 정말 우연한 상황이 발생했다.

창단 멤버가 테스트 선수 되어 돌아오다

그는 개인 훈련을 할 당시 종종 모교인 금호고등학교에서 훈련을 했다. 박요한의 집은 금호고와 꽤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자식을 축구선수로 만든 그의 아버지 역시 축구팬이었다. 하지만 아들의 경기를 볼 수 없으니 금호고의 경기를 보러 다니며 허전한 마음을 달래곤 했다. "금호고 경기가 있는 날에는 저와 아버지가 함께 경기장에 갔어요. 아버지께 제가 뛰는 경기를 보여드리지 못하니 죄송한 마음이 컸어요."

2017시즌 금호고는 고등리그 후반기 왕중왕전에 진출했다. 그와 그의 아버지는 대회 장소인 창녕군으로 향했다. 역시나 금호고의 경기를 보기 위해서였다. 그곳에서 그는 광주 창단 당시부터 지금까지 구단에서 일하고 있는 한 관계자를 우연히 만났다. "오랜만에 봐서 반갑게 인사를 나눴어요. 근황을 물어보는데 뭐 딱히 할 말은 없었죠. 그저 혼자 훈련 하면서 새로운 팀을 알아보고 있다고 얘기했어요."

잠깐의 만남이었지만 이는 곧 소중한 기회로 이어졌다. 며칠 뒤 구단 관계자가 박요한에게 전화를 한 것이었다. "우리가 너에게 계약을 제안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야. 하지만 테스트에 참가할 수 있게 해줄 수는 있어. 외국인 선수와 신인들 대상으로 테스트하는 자리를 조만간 마련할텐데 너도 여기 한 번 와서 뛰어볼래?" 박요한은 고민할 것 없이 가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약간의 희망이 생겼다.

사실 자존심이 상할 법 했다. 광주의 창단 멤버였던 그가 이제는 광주의 테스트 선수 신분이 된 것이다. 하지만 그는 절박했다. "경기장에 갔는데 외국인 선수들과 신인 선수들이 있었어요. 외국인들을 제외하면 제가 제일 나이가 많은 것 같았어요. 솔직히 그 때는 자존심이고 뭐고 없었어요. 반드시 여기서 좋은 모습을 보여서 팀에 들어가야 겠다는 생각 뿐이었어요."

"솔직히 광주에 서운한 마음이 하나도 없다면 그건 거짓말이에요. 그래도 나름 창단 멤버잖아요. 하지만 그 당시에는 서운한 마음보다 감사한 마음이 훨씬 컸어요. 팀도 없이 혼자서 훈련하는 제게 테스트 자리라도 마련해준 것은 광주에서도 저를 신경 써줬다는 뜻이거든요. 물론 악착같이 뛰고 나서 집에 오는데 살짝 이런 생각은 들더라구요. '아… 어쩌다가 내가 이렇게까지 됐을까'"

준비된 자에게는 기회가 오는 법이고 간절한 자는 하늘이 돕는 법이다. 테스트가 끝난 후 며칠 뒤 그는 광주에서 계약하자는 연락을 받게 된다. "제 인생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 중에 하나입니다. 2011년에 지명됐을 때보다 더욱 기뻤어요." 강등으로 방출되고 군대에 갔다가 팀이 해체되어 전역 후 실업자 신세를 졌던 박요한이 우여곡절 끝에 다시 고향인 광주로 돌아오는 순간이었다.

"다시 찾아온 기회, 이제는 절대 놓치지 않을 겁니다"

현재 박요한은 광주 전지훈련에서 경기력 끌어올리기에 매진하고 있다. 물론 쉽지는 않다. 박진섭 감독은 부임 초기부터 강도 높은 피지컬 프로그램으로 선수들을 단련시키고 있다. 기존에 뛰는 선수들도 "죽을 것 같다"고 말하는데 박요한은 더욱 힘들 수 밖에 없다. "솔직히 지금이 축구 하면서 가장 힘들게 훈련하는 것 같아요."

박요한은 충주의 주장으로 팀을 이끌기도 했다 ⓒ 충주 험멜 제공

그래도 박요한은 뛸 수 있다는 것에 대해 만족하고 있다. "처음 겪어보는 프로그램이지만 하다보면 체계적이라는 것이 느껴져요. 혼자 훈련할 때와는 확연히 다르죠. 힘들어도 배우는 것이 많아요. 코칭스태프의 훈련 프로그램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어요. 예전에는 쓰지도 않던 훈련 노트도 이제는 열심히 쓰고 있어요. 언젠가는 제가 몸으로 느끼고 본 것들이 다 도움이 될 것 같아요."

광주에서도 박요한에게 많은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 한 구단 관계자는 "박 감독의 선수 시절 포지션이 박요한의 포지션이다"면서 "연습 경기할 때는 박 감독이 박요한에게 정말 많은 것을 주문한다. 때로는 내가 듣기에 이해가 잘 가지 않는 주문도 박 감독은 그에게 적극적으로 요구한다. 그런데 신기하게 박요한이 그걸 또 소화해낸다. 올 시즌 우리 팀의 에이스가 될 것 같다"라고 웃었다.

2011년 창단 멤버이자 신인이었던 박요한은 약 일곱 시즌 만에 다시 광주로 돌아왔다. 광주도 박요한도 많이 달라졌다. 박요한은 이제 중고참의 위치에서 팀의 승격을 위해 K리그2 무대를 누벼야 한다. "이제 더 이상 창단 멤버는 저 말고 없더라구요. 그나마 구단 프런트들 중에 절반 정도가 창단 멤버여서 반가웠어요. 광주라는 팀이 좀 새롭게 느껴지지만 그래도 친근한 마음은 드네요."

"정말 뛰고 싶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무엇보다 기회를 준 광주에 감사해요. 이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도록 열심히 훈련해야겠죠. 하지만 제 개인적인 성공보다 팀의 승리와 승격에 보탬이 되고 싶어요. 광주에 어린 선수들이 많아요. 때로는 제가 잘 이끌어가고 때로는 함께 의지하면서 좋은 한 시즌을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연어처럼 고향에 돌아왔다. 하지만 그의 여정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현재진행형이다. 연어는 알을 낳아야 연어 자신의 가치를 다할 수 있듯이 축구선수 박요한은 경기장에서 뛰고 멋진 모습을 팬들에게 선보여야 자신의 가치를 다할 수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향에 돌아온 박요한은 다시 한 번 꿈을 꾸고 있다. 과거에 그랬던 것처럼 축구장에 서 있을 때가 가장 빛났기에 그는 그 시절을 광주에서 다시 만날 수 있기를 기다리며 땀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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