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이랜드는 야심찬 목표를 가지고 출발했지만 지금은 실망스러운 모습만 보이고 있다. ⓒ서울이랜드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딱 10년 전인 2007년 12월 서울 그랜드힐튼호텔에 취재를 갔었다. 이름도 거창한 ‘VISION PROJECT K’라는 행사가 벌어졌기 때문이다. ‘K-리그 중장기 발전 계획을 위한 연구 공청회’였다. 프로축구연맹이 주최하고 한양대학교 스포츠산업 마케팅센터에서 주관한 행사였다. 입구에서부터 대단히 두꺼운 책자를 나눠줬고 공청회가 시작되자 마치 지루한 강의 같은 시간이 이어졌다. 누군가 똑똑해 보이는 이가 나와서 스크린에 나오는 그래프를 보고 열띤 설명을 했다. 지루했지만 “우리도 한 번 잘 해보자”는 각오로 연맹이 야심차게 준비했다니 끝까지 참고 들었다. 당시에 현장에 굉장히 많은 취재진과 축구 전문가들이 몰렸던 걸로 기억한다.

‘똑똑한 꼰대들’의 뻔한 이야기

대단한 자리였다. 이대로만 실행된다면 K-리그(당시에는 K리그가 아니라 K-리그였다)가 몇 년 안에 유럽 빅리그가 될 줄 알았다. 3년 뒤, 5년 뒤, 10년 뒤의 아주 상세한 목표와 계획까지도 제시돼 있었다. 오, 막 해외 사례가 나오고 그래프가 나오고 구체적인 년도까지 나온다. 막 영어도 나온다. 되게 있어 보였다. 하지만 그로부터 10년이 흘렀지만 K리그는 여전히 위기란다. 10년 전에 이미 대단한 목표를 세워놓았는데 지금도 이 모양 이 꼴이다. 10년 전 그 공청회에서 나온 이야기는 단순하게 말하면 우리도 해외 리그처럼 스토리 개발하고 지역 연고제 확립하고 팬 감동시켜 잘 살아보자는 뻔한 이야기였다. 그런데 축구 커뮤니티만 참고해도 될 이야기를 성대한 곳에서 똑똑한 분들이 아주 길고 전문적으로 했다는 게 다를 뿐이었다.

나는 이때부터 ‘똑똑한 꼰대들’을 안 믿었다. 계획을 세우는 일은 누구나 할 수 있다. 더군다나 그게 장기적인 계획이라면 얼마든지 성대하게 말만 늘어놓을 수 있다. 2020년까지 스토리 확립하고 2023년까지 평균 관중 1만 명을 돌파하고 2030년에는 FIFA 클럽월드컵 우승하자는 말은 나도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작 K리그에 필요한 건 허구한 날 중장기 프로젝트나 발전 방안 토론회, 보기 좋은 계획표를 세우는 ‘똑똑한 꼰대들’이 아니라 눈 앞의 일을 스토리로 만들거나 상품화하는 전문가들이다. 10년 전 이 말 뿐인 공청회를 주도한 책임연구자의 얼굴이 잊히질 않는다. 그 뒤로 이 사람이 쓴 글이나 정책을 보면 헛웃음부터 나왔다. 프로 스포츠계에서 툭하면 공청회를 열어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한 소리를 하던 이 사람은 얼마 전 포승줄에 묶였다. 김종 전 문화체육관광부 차관이다.

10년 전 이름도 거창했던 ‘VISION PROJECT K’ 공청회에 앉아 뻔한 소리를 듣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가 말했다. “이거 만든다고 연맹에서 한양대에 억대 연구비를 줬대.” 물론 현장에 있던 관계자들의 ‘카더라’였지만 두툼한 보고서와 그들의 근엄하고 진지한 얼굴을 보니 한두 푼짜리 연구 용역이 아닌 건 확실해 보였다. 그때부터 다짐했다. K리그 스토리를 발굴해 팬들에게 재미와 지역 유대감을 형성하고 흥행을 일으켜야 한다는 뻔한 소리 대신 작더라도 직접 K리그 스토리를 발굴하기로 마음 먹었다. 그리고 이때 받은 공청회 보고서는 지금도 고이 집에 모셔두고 있다. 훗날 축구 박물관을 열면 얼마나 이 ‘똑똑한 꼰대’들이 뻔한 소리를 궁서체로 했는지 남기고 싶기 때문이다. 가끔 이 보고서를 열어보기도 한다. 중장기 발전 계획이 현재와 얼마나 틀어졌는지 확인하고 싶어서다. 이 중 이뤄진 건 승강제 정도인데 이것도 AFC의 지침에 따라 가까스로 이뤄낸 결과다.

정확히 10년 전 ‘VISION PROJECT K’라는 K리그 공청회에서 발표된 내용들.

초등학생 생활 계획표 같은 목표들

툭하면 ‘중장기 발전 계획’이 나온다. 먼 미래를 내다보고 계획하는 건 좋다. 이걸 비꼴 생각은 전혀 없다. 하지만 이게 과연 현실성이 있고 정말 이 계획대로 조금이라도 가고 있는지 살펴보면 실소부터 나온다. 정말 억대 연구비가 들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꽤 많은 돈이 든 건 확실한 ‘VISION PROJECT K’도 그냥 축구팬 누구나 할 수 있는 뻔하고 희망 섞인 계획일 뿐이었다. 그리고 10년 뒤 정말 이 계획대로 진행된 것도 없다. 당장 눈 앞에 있는 콘텐츠도 상품화하고 구매력을 끌어 당기지도 못하면서 툭하면 10년 뒤, 20년 뒤를 이야기한다. 연맹뿐 아니라 상당수 구단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나는 이런 ‘중장기 발전 계획’을 믿지 않는다. 이런 ‘중장기 발전 계획’ 대부분은 당장 눈앞에 성과가 없어도 비판을 회피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장기 플랜? 물론 있어야 하지만 장기 플랜이 무슨 겨울방학 시작할 때 세운 초등학생 생활계획표보다도 현실성이 없다.

이제는 유머사이트에나 돌아다닐 법한 자료도 있다. K리그에서 민폐란 민폐는 다 끼치고 도망치듯 떠난 할렐루야 축구단의 야심찬 계획이다. 이들은 2010년부터 2020년까지 K리그에 복귀해 정상에 서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면서 이 사이에 이영표 및 크리스천 대표 선수를 영입하며 유소년 축구학교를 설립하겠다고 했다. 1만 명의 개인 후원자와 500개의 교회, 50개의 기업 후원을 확보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이 팀은 2015년 시즌을 끝으로 정부 지원금을 횡령한 뒤 사라졌다. 2021년부터 2030년까지는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정상에 선 뒤 2031년부터 2040년까지는 FIFA 클럽 월드컵 정상에 오르겠다는 이들의 중장기 발전 계획은 웃음이 나온다. 꿈이야 크게 가지라고 있는 거지만 당장 눈앞의 성과도 내지 못하면서 꿈만 큰 것도 문제다.

더군다나 이건 개인이 하는 장사가 아니라 조직과 행정을 움직여야 하는 일이다. 이런 중장기 발전 계획 하나를 보고 팬들이 모여들고 누군가로부터 투자를 받아낸다. 피라미드를 하나 세워놓고 10년 단위로 툭툭 잘라서 K리그에서 우승하고 아시아 챔피언에 오르고 세계 정복하겠다고 선심 쓰듯 짠 계획이 과연 얼마나 실효성이 있을까. 그리고 이런 허무맹랑하고 구체적이지도 않는 계획에 아무도 제약을 걸지 않는 분위기, 더 나아가 동조하는 분위기는 더 위험하다. 스포츠는 누군가의 마음을 움직여야 하는데 자꾸 학문적으로 다가가고 계획표대로 착착 진행되길 바라는 건 아무리 세상이 비즈니스와 마케팅 중심으로 바뀌었다고 해도 마음에 영 내키지 않는다. 팬들의 마음 하나 움직이지 못하는 스포츠가 중장기 발전 계획이랍시고 그래프나 그려놓고 피라미드만 세워 놓는다고 발전할까.

정확히 10년 전 ‘VISION PROJECT K’라는 K리그 공청회에서 발표된 내용들.

서울이랜드의 ACL 우승? 웃고 갑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게 10년 전만의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2015년 창단한 서울이랜드만 보더라도 이런 실소가 나오는 ‘계획표 만능주의’를 여실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들은 창단 1년 만인 2016년 평균 관중 1만 명과 K리그 클래식 승격을 이루겠다는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2018년에는 평균 관중 2만 명과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목표로 했고 서울 더비 흥행으로 최고 관중을 기록하겠다고 공언했다. 2020년에는 평균 관중 4만 명과 K리그, AFC 챔피언스리그 우승을 목표로 내세웠다. 이 계획대로라면 서울이랜드는 2016년 이미 K리그 챌린지에서 승격을 이루고 올 시즌 K리그 클래식 3위 안에 들거나 FA컵 우승을 해 내년 시즌 AFC 챔피언스리그 진출을 위한 선수단 구성에 몰두해야 했다. 평균 관중은 1만 5천여 명이어야 한다.

하지만 이게 얼마나 허무맹랑한 계획이었는지는 모두가 잘 알 것이다. 서울이랜드는 창단 3년 동안 벌써 감독을 세 번이나 갈아치웠고 올 시즌 K리그 챌린지 10개 팀 중 8위에 머물렀다. 지난 7월에 연맹에서 발표한 평균 관중수는 1,824명뿐이었고 이 중 유료관중수는 616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비율은 31.8%로 K리그 전체 최하위였다. 서울이랜드는 3년 전에 세웠던 계획 근처에도 가지 못했다. 창단한지 10년, 20년이 지나 적자가 쌓여 구단 운영에 회의적일 상황도 아닌데 3년 만에 해체설까지 나돌 정도다. 10년 전 ‘VISION PROJECT K’나 할렐루야 축구단의 허무맹랑한 계획은 그래도 공소시효(?)라도 지났지 서울이랜드를 향한 조롱 섞인 시선은 피할 수 없다. ‘도대체 뭘, 구체적으로 어떻게’는 없고 몇 년 뒤 K리그 우승, 몇 년 뒤 아시아 정복만 있는데 그게 이뤄지면 더 이상한 일 아닌가.

똑똑한 분들이 축구계에서 많은 계획표를 만든다. 하지만 나는 이 계획이 예정대로 진행되는 걸 본 적이 없다. 그나마 염원이던 승강제가 이뤄진 것도 AFC의 지침 때문에 가까스로 이뤄졌다. 길게, 멀리 내다보는 일은 당연히 필요하고 K리그도 그래야 한다. 하지만 ‘길게 보자’, ‘멀리 보자’는 이들에게 정작 눈 앞의 ‘디테일’은 없다. 팀에 오래 공헌한 선수와의 작별 하나 포장하지 못하고 사연 있는 선수의 스토리도 발굴하지 못하면서 중장기 발전 계획에는 ‘스토리 발굴’이 명시돼 있다. 동네 사람들은 여전히 언제 우리 동네에서 왜 축구를 하는지도 모르는데 ‘지역 연고’를 확립해 관중 대박을 노리겠다는 장기 계획을 세운다. 이럴 바엔 상주상무 시절 올스타전에 참가하겠다고 상주에서 트랙터를 타고 출발한 이근호 같은 유쾌한 콘텐츠가 훨씬 더 필요하다. 책상에 앉아 중장기 발전 계획표만 세운다고 K리그가 발전할 일은 결단코 없다.

정확히 10년 전 ‘VISION PROJECT K’라는 K리그 공청회에서 발표된 내용들.

‘디테일’ 없으면 ‘큰 그림’도 없다

중장기 발전 계획은 차치하고 일단 눈앞의 콘텐츠나 목표를 허투루 넘기지 않길 바란다. 이런 작은 콘텐츠나 목표 하나 하나가 모여야 중장기적인 발전도 가능한 법이다. 특히나 서울이랜드를 보면 한숨부터 나온다. 매력적인 연고지와 지도자를 갖춰 놓고도 그 정도 밥상을 걷어차는 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책상 앞에 앉아 초등학생의 겨울방학 생활 계획표마냥 비현실적인 일만 가득 채울 줄 알았지 이걸 실천할 의지와 능력은 전혀 없다. 눈앞의 ‘디테일’이 없는데 10년 뒤 ‘큰 그림’이 있을 리가 없다. 10년 전에도 속았는데 지금도 속고 있다는 건 한국 축구계에 큰 문제다. 방구석에서 중장기 발전 계획표로는 누가 세계 정복을 못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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