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에서 페어플레이의 의미를 다시 새겨봤으면 한다. ⓒFIFA 공식 트위터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1994년 미국월드컵 당시 한국이 독일, 스페인, 볼리비아와 한 조가 됐을 때 언론에서는 이렇게 말했다. “볼리비아는 반드시 이기고 스페인과 비긴 뒤 마지막 독일전에서 승부를 걸면 16강도 충분히 가능하다.” 어린 나이에 볼리비아는 그냥 '깔고 가는 상대'라고 생각했다. ‘녹슨 전차’라던 독일도 해볼 만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뤄진 건 없다. 그렇게 만만하게 보던 1승 제물 볼리비아와 0-0으로 비기면서 모든 게 틀어졌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당시에는 어땠나. 월드컵 첫 승 제물로 여겼던 멕시코를 상대로 1-3 완패를 당한 뒤 무너졌다. 지금 생각해보면 언론에서 무슨 근거로 멕시코를 그리 만만하게 봤는지는 모르겠다. 나는 어린 시절 볼리비아나 멕시코가 바레인이나 쿠웨이트 정도 되는 줄 알았다.

2014년 브라질월드컵 때도 마찬가지였다. 한국은 조편성 전부터 죽음의 조와 희망의 조를 이야기했다. 그리고 알제리와 한 조에 속하자 알제리를 콕 집어 1승 제물이라고 불렀다. 알제리는 이길 수 있으니 첫 경기인 러시아전이 관건이라고 했다. 알제리는 우리가 16강 경쟁을 하는데 별로 상관없는 팀처럼 여겼다. 러시아를 이기면 충분히 16강이 가능하다고 했다. 하지만 한국은 러시아와 1-1로 비긴 뒤 만만하게 보던 알제리에는 2-4로 참패했다. 마지막 벨기에와의 승부는 볼 것도 없었다. 언론을 믿으면 안 된다. 언론이 말해주는 죽음의 조와 희망의 조 같은 건 애초에 없다. 언론이 원하는 시나리오대로 갔으면 한국은 볼리비아도 이겼고 멕시코도 이겼다. 알제리는 우리의 상대도 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원하는 대로 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월드컵 조추첨에서 한국은 어떤 조에 속하게 될까. ⓒFIFA 공식 트위터

희망의 조? 혹은 죽음의 조?

오는 2일 2018 러시아월드컵 본전 조추첨이 열린다. 벌써부터 죽음의 조와 희망의 조를 논한다. 재미삼아 할 수는 있다. 나도 가상 조추첨 사이트에서 몇 번이고 클릭을 해봤다. 하지만 나는 애초부터 월드컵에 희망이나 죽음 따위로 나뉠 만한 상대는 없다고 생각한다. 월드컵에 나선 팀 중 한국보다 국제축구연맹(FIFA) 랭킹이 낮은 팀은 사우디아라비아(63위) 뿐이다. 62위인 한국은 모로코(48위), 파나마(49위)보다도 순위가 낮다. 상대가 보기에 한국은 ‘깔고 가는 팀’이다. 우리가 볼리비아와 멕시코, 알제리를 마주했을 때의 느낌보다도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팀이 한국과 한 조에 속할지는 모르겠지만 상대가 보기에 포트4 국가 중에 세르비아나 나이지리아를 만나는 것보다 한국을 만나는 게 더 반가울 것이다. 자존심이 상하지만 사실이다.

월드컵에서 조편성의 행운 같은 걸 바라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우리가 원하는 대로라면 포트1에서는 폴란드, 포트2에서는 페루, 포트3에서는 이집트 정도가 걸려야 희망의 조다. 아마 이대로 한 조에 속한다면 만세를 부르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1승 제물은 없다. 이미 몇 번이나 월드컵에 나갈 때마다 1승 제물로 꼽았던 팀들에 당했으니 이제 학습 효과라는 게 있어야 한다. 우리가 쓴 시나리오대로 된 적이 없다. 반대로 한국과 한 조에 속하면 폴란드와 페루, 이집트에서도 쾌재를 부를 것이다. 그들에게도 한국은 확실한 1승 제물이기 때문이다. 이런 조에 속해 “내심 3전 전승으로 16강에 가자”고 호들갑 떠는 이들이 없었으면 좋겠다. 우리가 또 이런 ‘상상 승리’는 잘하지 않는가. 2002년 한일월드컵 때 첫 승 상대였던 폴란드를 운운하며 마치 한국이 엄청난 행운을 주운 것처럼 생각하지는 않았으면 좋겠다.

반대로 한국이 스페인, 아르헨티나, 스웨덴과 한 조에 속할 수도 있다. 누군가는 이걸 죽음의 조, 혹은 최악의 조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나는 한국이 이런 조에 속했으면 좋겠다. 어차피 누구와 싸워도 불리한 한국이라면 이왕 강한 상대와 월드컵에서 붙는 모습을 보고 싶다.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한국이 월드컵에서 스페인, 아르헨티나, 스웨덴과 겨루는 모습을 원한다. 그래야 월드컵이다. 리오넬 메시를 막아내고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와 몸싸움을 해야 월드컵이다. 조 추첨 뽑기에서 상대적으로 약한 상대를 골랐다고 좋다고 세리머니하는 게 월드컵이 아니다. 폴란드나 페루, 이집트를 무시하는 건 아니지만 월드컵에서 한국-페루전보다는 한국-아르헨티나전을 보고 싶은 게 축구팬의 한 사람으로서 솔직한 심정이다.

월드컵 조추첨에서 한국은 어떤 조에 속하게 될까. ⓒFIFA 공식 트위터

월드컵은 원래 강팀 만나는 대회

어차피 우리는 잃을 게 없는 도전이다. 내가 이렇게 강팀과 한 조에 속하길 바라면 나를 보고 축구팬도 아니라고 손가락질 할 사람도 있다. 하지만 오히려 이런 강팀과의 격돌이 한국 축구에 더 큰 도움이 된다고 믿는다. 최근 대표팀 인기는 식고 있다.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A매치를 치러도 경기장을 꽉 채우지 못한다. 뭐 월드컵 본선이 열리는 날이면 여지없이 관심이 쏠리겠지만 이 열기가 과거만큼 대단하지도 않다. 그런데 한국이 폴란드, 페루, 이집트와 한 조에 속한 것과 스페인, 아르헨티나, 스웨덴과 한 조에 속한 건 월드컵의 무게감부터 다르다. 한국에서 월드컵이 더 흥행하고 지지를 얻으려면 한국은 강팀과 한 조에 묶여야 한다. 이집트를 1-0으로 이기는 것보다 스페인과 2-2로 비기는 게 훨씬 더 축구팬들의 마음을 흔드는 길이다. 한국 축구는 지금 팬들의 마음을 흔들어야 한다.

월드컵에서 행운이 중요한가, 재미가 중요한가를 따진다면 여러분은 어느 쪽을 고를 것인가. 월드컵에서 단 한 번도 승리를 거두지 못하던 시절에는 나도 상대가 누구든 되도록 만만한 상대를 만나 1승이라도 해보길 바랐다. 하지만 이제는 월드컵에서 행운(?)보다는 재미가 더 중요하게 느껴진다. 이왕 붙는 거 못 이기고 16강에 못가도 좋으니 강팀과 재미있게 한 번 해봤으면 하는 마음이 더 크다. 약체를 안방으로 불러들여 1.5군과 치르는 경기만 줄곧 하니 요즘은 대표팀 경기를 보는 긴장감이 별로 없다. 진짜 제대로 된 세계 최고의 스타급 선수들이 다 소집된 상대 1군과 제3지역에서 맞붙는 모습을 원한다. 월드컵에 행운이란 게 있을 리 만무하지만 누군가가 말하는 행운이란 것 없이 한국이 조추첨에서 ‘재수 없게’ 강팀과 만났으면 한다. 4년에 한 번 하는 대회인데 스페인이건 브라질이건 후회 없이 한 번 싸워보자.

죽음의 조와 행운의 조 같은 건 믿지 않는다. 하지만 많은 이들이 죽음의 조라는 표현을 쓰니 그대로 빌려 오겠다. 한국이 죽음의 조에 속했으면 좋겠다. 그리고 이런 조에 속해 패배 의식에 찌들어 ‘우리는 안 될 거야’라는 마음을 갖는 게 아니라 다같이 ‘이왕 이렇게 된 거 한 번 제대로 해보자’는 마음으로 뭉쳤으면 한다. 가상 조추첨 사이트에서 아무리 클릭을 해봐도 폴란드-페루-이집트는 우리와 한 조에 걸리지 않더라. 그렇게 모여도 어차피 만만치 않은 상대인데 그럴 확률도 적다는 걸 생각하자. 그냥 월드컵은 원래 스페인이나 아르헨티나, 브라질 같은 세계 최강팀하고 붙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하면 마음이 편할 것이다. 이게 정상이고 그나마 만만해 보이는 상대를 만나는 게 월드컵에서는 비정상이다.

한국-스페인-아르헨-스웨덴을 바란다

‘누구랑 붙어도 이왕 탈락할 거 강팀하고 붙어서 탈락하자’는 자조 섞인 이야기가 아니다. 어떤 조에 속하건 최선을 다해 16강 이상 진출했으면 한다. 하지만 이왕 월드컵이라는 무대에 선 만큼 만만한 상대가 없다는 마음으로 누구와 붙어도 좋다는 마음이길 바란다. 그리고 이왕이면 한국이 흔히 말하는 죽음의 조에서 살아남는 멋진 월드컵이 됐으면 좋겠다. 만약 월드컵에서 이탈리아, 잉글랜드, 우루과이와 한 조에 속하면 우리는 어떤 반응을 보였을까. 희망의 조를 바라던 이들이었다면 이런 조 편성을 보고 포기하거나 낙담했을 것이다. 하지만 2014 브라질월드컵에서 이 세 팀과 한 조에 묶인 코스타리카는 2승 1무를 거두며 죽음의 조에서 1위로 16강에 올랐다. 누구를 만나건 이기면 되고 후회 없이 싸우면 된다. 한국이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 스페인과 아르헨티나, 스웨덴을 꼭 만났으면 좋겠다. 월드컵은 원래 이런 강팀하고 붙으라고 하는 대회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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