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과거 K리그에서 있었던 일이다. A팀은 전기리그 막판 1위를 내달리고 있었다. 2위팀 B와는 리그 막판 승점이 3점차였다. A팀이 마지막 라운드에서 패하고 B팀이 승리를 한다면 순위가 뒤바뀌는 상황이었다. A팀의 마지막 상대는 이미 전기리그 우승과는 거리가 먼 C팀이었다. 익명을 요구한 한 축구인은 “C팀이 A팀과 비겨주는 조건으로 후기리그에서 승리를 약속받았다”고 했다. 실제로 C팀은 A팀과의 경기에서 페널티킥을 허용하며 먼저 실점했고 후반 막판 한 골을 따라붙어 1-1 무승부를 기록했다. 경기는 이렇게 마무리 돼 결국 A팀은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후기리그에서는 반대의 상황이 펼쳐졌다. A팀은 페널티킥을 내줬고 퇴장까지 당한 끝에 C팀에 1-2로 패하고 말았다. 약팀이던 C팀은 극적인 승리를 거두고 감격하는 모습이었다. 익명의 제보자는 “전·후기리그 시절 이렇게 승패를 주고받는 담합 행위가 적지 않았다”고 했다. 당시에는 돈을 주고받는 형태로 대가를 받는 게 아니라 전·후기리그에 서로 승패를 나눠 갖는 게 보통이었다. 예를 들면 전기리그 막판 하위권 팀이 선두권 다툼을 하는 팀과 만나면 일부러 승점을 헌납하고 후기리그에 승리를 보상받는 방식이었다. 혹시라도 하위권 팀에 패할 경우 전기리그 우승을 놓칠 수 있는 상황에서 후기리그 경기를 양보하고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하는 건 손해 보지 않는 장사였다.
물론 이 사실은 공론화되지 않았다. 이런 식의 승부조작(?), 아니 단어가 무서우니 최선을 다하지 않은 경기라고 백번 양보해서 표현해도 이는 팬들을 기만하는 행위다. 하지만 이런 일이 벌어져도 다들 쉬쉬했다. 선수들 사이에서도 좋은 게 좋은 거라는 분위기가 흘러 나왔고 그 누구도 이 문제에 대해 이의제기를 하기 않았다. 대충 눈치는 채고 있었어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간 것이다. 두 팀이 서로 이해관계에 맞물려 부정한 행위를 했던 K리그의 슬픈 역사다. ‘져도 되는 경기’는 승부를 맥 빠지게 했고 결국 팬들의 신뢰를 잃게 만들었다. 막판까지 긴장감 넘쳐야 할 순간 ‘져도 되는 팀’은 K리그 흥행을 저해하는 요소였다.
“친구에게 미안하다. 슬픔 클 것이다.”
지난 달 29일 KEB 하나은행 2017 K리그 챌린지 마지막 라운드 취재를 위해 잠실종합운동장을 찾았다. 서울이랜드와 부천FC의 경기가 열렸는데 이 경기의 모든 초점은 부천에 맞춰져 있었다. 리그 5위를 기록 중이던 부천은 준플레이오프에 진출하려면 서울E를 반드시 잡고 다른 팀의 경기 결과를 지켜봐야 했기 때문이다. 반대로 이미 준플레이오프 진출이 일찌감치 좌절된 서울E 입장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경기였다. 8위를 기록 중인 리그를 8위로 마치느냐 9위로 마치느냐만을 결정하는 맥 빠진 경기가 될 것처럼 보였다. 한 쪽에는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였고 한 쪽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경기였다. 물론 이건 경기장에서 경기를 보기 전까지의 내 생각이었다.
경기장에 도착하니 한 부천 프런트가 경기장 밖에서 발을 동동 구르며 입장하지 않고 있었다. 이유를 물어보니 대답은 이랬다. “너무 긴장돼서 못 보겠어요.” 그 정도로 부천은 이 경기 승리가 간절했다. “그래도 8위냐 9위냐가 결정되는 서울E보다는 부천의 의지가 더 크지 않겠어요?” 덕담을 건넨 뒤 경기를 지켜봤다. 그런데 이 경기에서 부천은 물론 서울E 역시 죽을 힘을 다해 뛰었다. 깜짝 놀랐다. 서울E는 최치원이 전반 30분 선제골을 넣고 1-1 상황에서도 후반 23분 금교진이 또 골을 넣었다. 경기가 끝날 때까지 쉬지 않았다. 무조건 이겨야 하는 건 부천이었고 서울E는 ‘져도 되는’ 상황이라고 생각했던 건 나의 큰 착각이었다. 2-2로 팽팽한 후반 막판에는 오히려 부천보다 서울E가 더 위협적인 공격을 많이 했다.
결국 승부가 2-2로 끝난 뒤 서울E 선수들은 그라운드에 주저 앉았다. 서울E는 그렇게 2년 연속 승격 문턱에 오른 부천의 덜미를 잡았다. 부천은 다른 경기 결과를 따질 것도 없이 준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8위냐 9위냐를 따지는 서울E는 그렇게 막판까지 최선을 다했다. 경기가 끝난 뒤 만난 김병수 감독은 가장 먼저 이런 말을 했다. “정갑석 감독이 친구인데 미안하다 부천 입장에서는 아쉽기도 할 것이다. 1년 동안 잘해왔는데 오늘 마지막 한 경기 때문에 슬픔이 클 것 같다.” 그리고 김병수 감독은 팬들 앞에 서 한 시즌을 회상하며 눈물을 흘렸다. 이게 바로 진정한 스포츠인의 자세 아닐까. 한 살 터울 친구의 앞길을 막았지만 그는 승부를 위해 최선을 다했다. 그리고는 경기가 끝난 뒤 인간적인 미안함을 표했다.
대구와 전북이 보여준 스포츠맨 정신
‘져도 되는 팀’이 상대를 밀어주는 건 꼭 서로 담합하고 승부를 조작해 지는 방법만 있는 건 아니다. 선수들 점검 차원에서 주력 선수들을 빼고 최선을 다하지 않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다. ‘져도 되는’ 경기에서 선수들의 집중력이 떨어지는 것도 상대 입장에서는 반가운 일이다. 하지만 서울E는 쓸 수 있는 모든 카드를 동원해 부천의 앞길을 막았다. 이날은 전북현대가 K리그 클래식에서 제주유나이티드를 꺾고 우승하던 날이어서 다들 그 경기에 관심을 쏟았다. 또한 같은 시간 바로 옆 경기장에서는 프로야구 한국시리즈가 열리고 있어 많은 이들은 이 한국시리즈에 집중하고 있었다. 하지만 K리그 클래식 우승과 한국시리즈가 동시에 펼쳐지던 날 나는 서울E 선수들의 모습을 현장에서 보며 그 어떤 것도 대신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다.
그리고 지난 4일 대구FC와 광주FC의 K리그 클래식 경기 또한 잊을 수 없다. 대구는 이미 잔류를 확정지은 상황이었고 광주는 이 경기에서 패하면 다이렉트 강등이 결정되는 경기였다. 대구가 티 나지 않게 은근슬쩍 힘을 빼도 뭐라고 할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이미 잔류가 확정됐으니 선수들이 집중하지 못했다”고 해도 핑계로는 충분했다. 하지만 이 경기에서 대구는 광주를 2-0으로 완파했고 결국 광주를 K리그 챌린지로 보내버렸다. 1-0으로 앞선 상황에서 후반 47분 에반드로가 두 번째 골을 넣은 뒤 포효하는 세리머니를 하는 순간 ‘져도 되는 경기’라고 생각한 나 자신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강등이 확정돼 안타까워 하는 광주 선수들 사이로 ‘져도 되는’ 대구 선수들이 승리한 뒤 하이파이브를 나누는 모습은 스포츠의 묘미를 제대로 보여주는 명장면이었다.
그리고 하루 뒤인 어제(5일) 울산현대는 전북현대와 마주했다. 아시아축구연맹(AFC) 챔피언스리그 진출 티켓을 노리는 울산은 반드시 전북을 잡아야 유리한 고지를 점령할 수 있었다. 반면 지난 경기에서 우승을 확정짓고 전주시내에서 우승 카퍼레이드까지 한 전북에는 큰 의미가 없는 경기처럼 보였다. 하지만 전북은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을 모두 썼다. 최전방에는 김신욱이 섰고 로페즈와 이재성 등 주전 선수들이 총동원됐다. 그리고 전북은 1-1로 맞선 후반 33분 이동국의 통산 201호 골로 결국 승리를 따냈다. 이미 우승이 확정됐으니 ‘져도 된다’는 건 나 혼자만의 생각이었을 뿐 전북 선수들은 전혀 그럴 마음이 없어 보였다. 갈 길 바쁜 울산은 전북이 참 밉겠지만 그건 울산의 입장일 뿐 전북은 울산의 상황을 봐 주지 않았다.
세상에 져도 되는 경기는 없었다
과거 K리그에서는 ‘져도 되는’ 분위기가 팽배했었다. 특히나 전후기리그로 운영될 당시는 그런 분위기가 더 강했다. 전기리그 우승팀이 후기리그 들어 최하위권에 머문 경우가 많았다. 6차례 중 전기리그 우승팀이 꼴찌를 한 경우가 두 번이나 있고 나머지 네 차례의 경우에도 전기리그 우승팀이 간신히 꼴찌를 면했다. 전기리그 우승을 차지한 팀 감독은 후기리그 들어 주전을 100% 가동하지 않았고 선수들도 가진 능력을 다 보여주지 않았다. 그러다 맨 처음 언급했던 것처럼 상대팀이 반드시 이겨야 하는 경기에서는 힘을 완전히 뺀 채 경기에 임하기도 했다. 이렇게 ‘져도 되는’ 경기를 하는 걸 비판하는 이들도 별로 없었다. 그렇게 K리그는 조금씩 멍들어갔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적어도 최근 2주 사이에 서울E와 대구, 전북의 모습을 보니 점점 K리그가 이 부분에 있어서 만큼은 건강해졌다는 생각이 든다. 과거였으면 전력을 100% 다하지 않아도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을 경기에서 이들은 최선을 다했고 갈 길 바쁜 상대의 발목을 잡았다. 부천과 광주, 울산 입장에서는 대단히 뼈아픈 경기였겠지만 앞으로도 이런 경기가 더 많아지길 기대한다. 이들의 모습을 보니 ‘져도 되는’ 경기가 있다고 믿었던 나 자신이 굉장히 부끄럽게 느껴진다. 스포츠의 세계에서 ‘져도 되는’ 경기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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