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포시청 박완선은 FA컵 4강 울산현대와의 경기에서 눈부신 선방을 펼치며 '목폰'이라는 별명을 얻었다. ⓒ내셔널리그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2017년 9월 26일까지 아무도 몰랐던 한 선수가 있다. 그런데 이 선수는 하루 뒤에 축구팬 모두가 아는 선수가 됐다. 별명도 붙었다. 전설적인 골키퍼 부폰을 딴 ‘목폰’이었다. 2017 하나은행 FA컵 4강 울산현대와의 경기에서 눈부신 선방쇼를 펼친 목포시청 박완선이 바로 그 주인공이다. 비록 경기에서는 0-1로 패해 목포시청의 돌풍은 여기에서 끝났지만 경기가 끝난 뒤 가장 많은 주목을 받은 이는 온몸을 날려 울산현대 공격을 막아낸 ‘목폰’ 박완선이었다. 겉으로 보기에 그는 하루아침에 등장한 선수처럼 보일지 몰라도 사실은 그에게는 눈물 겨운 스토리가 있다. 박완선이 2017년 9월 27일 화려하게 등장하기 전까지의 이야기를 지금부터 공개한다.

무명의 내셔널리그 후보 골키퍼 박완선

1990년 전남 광양에서 태어난 박완선은 금호고를 거쳐 용인대에 진학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이름 좀 날리던 골키퍼였다. 대학교 1학년 때는 4학년 선배와 번갈아 경기에 나섰지만 선배가 졸업한 2학년 때부터는 줄곧 주전 골키퍼로 골문을 지켰다. 그는 이장관 감독이 이끄는 대학 정상팀 용인대를 주전 수문장이었다. 4학년을 마친 박완선은 2013년 내셔널리그 최강팀 울산현대미포조선에 입단했다. 비록 K리그는 아니었지만 그는 울산미포를 거쳐 꼭 K리그 무대에 서겠다는 열망이 강했다. 용인대 이장관 감독도 졸업하는 박완선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울산미포는 울산현대 관계자들이 유심히 지켜보는 팀이니 거기에서 잘하면 울산현대 유니폼을 입을 수 있을 거야. 네가 하기에 달렸다.”

하지만 성인 무대의 벽은 높았다. 때마침 울산미포는 울산현대 유망주였던 골키퍼 이희성을 임대로 데려왔다. 박완선과 동갑내기인 이희성은 2007년 U-17 대표팀을 거쳤고 울산현대 우선지명을 받은 뒤 숭실대에 진학해 전국대학축구대회 최우수 골키퍼상을 거머쥐기도 했던 수준급 골키퍼였다. 박완선은 2013년 울산미포에서 단 두 경기에 출장하는데 그쳤다. 그리고 1년 뒤 이희성이 울산현대로 돌아가자 이번에는 또 다른 경쟁자가 나타났다. 바로 구상민이었다. 2014년 시즌에도 박완선은 구상민에 밀려 8경기 출장에 머물렀다. 박완선은 울산미포와 계약된 두 시즌 동안 10경기밖에 나서지 못했다.

결론적으로 이희성은 이후 울산현대에서 10경기에 나섰고 구상민은 부산아이파크에서 44경기에 출장하고 있으니 그의 경쟁자들이 얼마나 쟁쟁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결국 박완선은 계약기간이 끝난 뒤 울산미포를 떠나 새로운 팀을 찾아야 했다. 박완선은 이 시기가 축구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고 회상했다. “축구선수는 경기에 나서야 자기를 알리고 빛을 낼 수 있는 법이잖아요. 그런데 저는 늘 경기에 나가지 못했어요. 항상 뒤에 있어야 했죠.” 더군다나 박완선은 울산미포를 떠날 당시 오른쪽 손가락 골절이라는 부상까지 안고 있었다. 2014년 12월 겨우 알아봐 내셔널리그 용인시청 입단 테스트에 응했지만 통증이 심해 공을 제대로 잡을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그는 용인시청 테스트에서 떨어지고 말았다.

박완선이 울산현대미포조선에서 뛰던 당시의 모습. ⓒ박완선 제공

그가 현역으로 군 입대한 이유

그는 고향인 전남 광양으로 내려갔다. 고향에는 함께 축구선수를 꿈꾸던 친구와 선배들이 있었다. 이들은 박완선에게 하나 같이 이렇게 말했다. “차라리 빨리 군대 문제를 해결하고 다른 일을 알아보는 게 좋을 것 같아.” 대학교 4년을 꽉 채우고 내셔널리그에서 후보로 2년을 전전한 그는 어느덧 26세의 적지 않은 나이가 돼 있었다. 결국 박완선은 쓸쓸히 축구화를 벗었다. “축구로는 여기까지인가 싶었어요.” 일반병으로 군대에 가려면 신청 후 한참을 기다려야 해 지원하면 곧바로 입대할 수 있는 운전병에 지원했다. 그러자 2015년 4월에 입대하라는 영장이 날아왔다. 박완선은 고향에서 하는 일 없이 입대 날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K리그 입성을 꿈꾸던, 특히 울산현대 유니폼을 입는 게 꿈이었던 그는 이렇게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전직 내셔널리그 선수가 됐다.

그가 입대 날짜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안 지인들이 한 가지 제안을 했다. 전남도민체전에 광양시 대표로 출전해 달라는 것이었다. 대회는 공교롭게도 군 입대 시기와 겹쳐있었다. 고민 끝에 박완선은 군 입대를 한 달 더 미루고 광양시 대표로 전남도민체전을 준비했다. 선수 생활을 했던 이들이 은퇴 후 고향을 위해 뛰는 무대였다. 동료들은 다들 직장에 다니고 있어 저녁에 모여 미니게임을 하며 몸을 만들었지만 박완선은 하루 종일 집에 있다가 동료들이 모이는 저녁에만 운동에 참여했다. 그러다 대회 2주를 앞두고는 동료들과 본격적인 합숙에 들어갔다. 그래도 전라남도에서는 12개 팀이 나오는 큰 대회였기 때문이다. 이 대회 준결승에서 박완선은 상대 승부차기 세 개를 연속적으로 막아냈고 결승에서도 무실점하며 팀을 우승으로 이끌었다. 5경기 1실점의 대단한 선방이었다.

하지만 광양시에서만 알아줄 뿐 이 대회를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박완선은 우승을 하고 일주일 뒤인 2015년 5월 19일 용인 55사단 신병교육대에 입소했다. 이때까지 축구밖에 할 줄 몰랐던 그는 갑자기 통제된 생활이 너무나도 힘들었다. “막막했어요. 그래도 조금이라도 어렸을 때 군대에 갔으면 나을 뻔했는데 동기들에 비해서는 나이도 많은 편이었고 축구 외에 다른 걸 해본 적이 없어서 참 힘들었죠.” 하지만 운전병 임무를 부여받고 야전수송교육 후반기 교육을 받는데 그가 축구선수 출신이라는 말이 퍼지면서 인기가 급상승했다. 야수교 조교들은 서로 박완선을 데려가려고 했다. 박완선만 뽑아가면 21개월 동안 축구 걱정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시 야수교 조교 정원은 꽉 차 있었고 박완선은 야수교의 러브콜(?)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경기도 포천 5공병여단에 배치 받았다.

박완선이 울산현대미포조선에서 뛰던 당시의 모습. ⓒ박완선 제공

현역병 생활, 다시 박완선을 꿈틀거리게 하다

비록 내셔널리그 후보 선수였지만 선수 출신이 오자 부대에서는 난리가 났다. 그의 기량을 확인한 간부들은 박완선을 너무나도 예뻐했다. 골키퍼 출신인 그는 군 생활 내내 부대에서 열리는 경기 동안 단 한 번도 골키퍼를 본 적이 없다. 무조건 최전방 공격수였다. 그가 차는 슈팅을 상대팀 골키퍼가 막아낼 재간이 없었다. “원래 선수 시절부터 ‘슈팅빨’이 좋다는 평가를 많이 받았었거든요. 축구선수들 중에서도 슈팅이 강한 편이었는데 일반 사병들을 향해 슈팅을 하니 아예 막지 못하더라고요. 항상 골을 막는 입장에서 군인이 된 후에는 골을 넣는 사람이 됐죠. 그때 골을 많이 넣었어요.” 간부들은 축구 시합이 있을 때마다 항상 박완선을 불러 승리를 챙기고 박완선에게는 맛있는 음식을 사줬다. “작업도 많이 빼줬어요. 엄청 예쁨 받았죠.”

그는 군 생활을 하면서 골키퍼를 딱 두 번했다. 부대 내에서는 무시무시한 슈팅을 날리는 선수였지만 제3군사령부 대표선수로 뽑힌 경기에서는 골문을 지켜야 했다. 국방부 장관 축구대회에 나가자 프로 출신들이 즐비했기 때문이다. 성남일화에서 무려 5년 동안 뛰었던 신영철과 대구FC 5년차 선수였던 이동명이 같은 제3군사령부 대표선수였다. 이 팀만 그런 게 아니었다. 각 팀마다 프로나 내셔널리그를 경험하지 않은 선수들은 명함도 못 내미는 큰 대회였다. 전국에서 공 좀 찬다는 군인들은 다 모였다. 박완선은 군 생활 내내 이등병 때와 병장 때 딱 두 번 이 대회에서 골키퍼를 했다. “이등병 때는 엄청 열심히 했는데 병장이 되고 나간 대회에서는 살짝 군기가 빠졌던 것 같아요.” 박완선이 속한 제3군사령부는 2015년 대회에서는 3위를 했고 2016년 대회에서는 예선 탈락했다.

현역 선수에 대한 갈증을 잊고 살아온 박완선이 다시 축구에 관심을 갖게 된 건 주변 사람들 때문이었다. 동기와 선후임, 간부들이 무척이나 그를 자랑스러워했기 때문이다. “그 분들이 저를 선수 출신이라고 너무 높게 평가해주셨어요. 전역해서 다시 축구를 통해 결과를 보여주면 그 분들이 자기 일처럼 좋아할 것 같더라고요. ‘쟤 나랑 축구했던 애야’ 그런 소리를 어디에 가서 꼭 할 수 있게 해주고 싶었거든요.” 축구선수 출신이라고 박완선을 자랑스러워하고 예뻐했던 많은 이들은 다시 박완선의 마음을 움직였다. 또한 군 생활이 적성에도 잘 맞아 직업 군인으로의 전향도 고민했고 평범한 회사원도 생각해 봤지만 마지막 도전을 꼭 해보고 싶은 마음도 강했다. “K리그 무대에 한 번 서보겠다고 10년 넘게 축구한 걸 포기하기에는 너무 아깝더라고요.” 박완선의 꿈은 K리그 경기장에 딱 한 번만이라도 서보는 것이었다.

박완선이 울산현대미포조선에서 뛰던 당시의 모습. ⓒ박완선 제공

그에겐 새로운 도전, 춘천 그리고 목포

그는 전역 6개월 전 지인들에게 연락을 돌렸다. “어떤 팀이라도 좋으니 내가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는 곳이 있다면 알아봐 줘.” 이때부터 그는 다시 선수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만들기 시작했다. 선수 시절에도 유독 타고난 몸이 좋아 잠깐 쉬다가도 운동을 조금만 하면 금방 회복하는 능력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하루에 줄넘기를 2천개씩 하며 체중을 관리했고 일과가 끝나면 웨이트트레이닝장으로 향해 근력 운동을 했다. 부대에서는 ‘뜀걸음 마일리지’라고 300km를 내달린 사병에게 3박 4일의 휴가를 주는 제도도 있었는데 박완선은 이 휴가증도 따냈다. 이 ‘뜀걸음 마일리지’ 300km를 달성한다는 건 박완선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엄두도 내지 못하는 일이었지만 박완선은 해냈다. 하지만 그가 군대에서 할 수 있는 건 이런 체력 및 근력 운동 뿐이었다. 축구공을 가지고 하는 골키퍼 훈련은 전혀 하지 못했다.

그 와중에 울산미포에 같이 있던 동료 골키퍼 원유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제대하고 몸을 만들고 싶으면 K3리그 춘천시민축구단으로 가봐.” 그에게 K3리그라는 무대는 상관이 없었다. 박완선은 2017년 2월 18일 전역해 일주일 만에 곧바로 춘천시민축구단으로 합류했다. 당장 경기에 나서는 게 목적이 아니라 선수 시절의 몸을 만드는 게 목적이었다. 주전 골키퍼가 따로 있었고 박완선은 주전의 부상 때나 잠깐 나가는 선수였다. 교체로도 가끔 뛰었다. 하지만 경기에 대한 욕심을 내지는 않았다. 다시 축구를 할 수 있다는 게 중요했기 때문이다. K3리그에서도 주전으로 뛰지 못하는 선수였지만 박완선은 마지막으로 도전할 수 있다는 사실에 만족했다. 항상 훈련을 하러 나가기 전에는 이런 생각을 했다. ‘나는 여기에서 안 되면 축구는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 오늘 운동이 마지막이다.’ 그만큼 그는 간절했다.

춘천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며 아르바이트로 근근이 버텼다. 춘천시민축구단 정선우 감독은 후평중학교에 그를 소개했다. 오전에 훈련을 한 뒤 오후에 중학교에 가 학생들 지도하는 아르바이트를 하도록 한 것이다. 한 번 아르바이트를 하러 가서 받는 돈은 5만 원이었다. 이마저도 일주일에 두 번이상은 어려웠다. 춘천시민축구단 훈련 일정과 경기 일정 등이 겹쳤기 때문이다. 일주일에 정말 많이 가면 세 번이었다. 그리고 저녁에는 또 개인 운동을 했다. 이게 불과 석 달 전까지 박완선의 모습이었다. 그런데 지난 7월 한 통의 전화가 왔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늘 그를 응원하고 후원하던 에이전트 이경호 씨로부터였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 때도 박완선에게 축구화를 사주며 조언을 아끼지 않던 이였다. 에이전트 계약을 따로 맺은 것도 아니지만 그는 박완선을 살뜰히 챙겼다. 박완선은 그를 선생님이라고 불렀다.

박완선이 울산현대미포조선에서 뛰던 당시의 모습. ⓒ박완선 제공

꿈에 그리던 울산경기장에 선 골키퍼

“어디에서 운동하고 있어?” 이경호 에이전트의 연락에 박완선은 자신의 상황을 설명했다. 그러자 이경호 에이전트는 이렇게 말했다. “몸은 좀 어때?” 박완선은 자신 있었다. 제대 후 오늘이 늘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운동에만 전념했기 때문에 몸 상태 만큼은 좋았다. “춘천에서 열심히 운동했습니다. 몸은 전보다 좋습니다.” 그러자 이경호 에이전트가 목포시청을 추천했다. “그래도 돈 벌면서 축구해야지. 내가 추천해 줄 테니 목포시청에 한 번 가봐.” 축구를 아예 놓을 뻔했던 박완선은 제대 후 5개월 만에 다시 내셔널리그에 도전할 수 있게 됐다. 남 모르게 땀 흘리고 도전했기 때문이었다. 목포시청에 입단한 그는 누구보다도 간절했다. “예전에는 잘하자는 생각 뿐이었는데 이제는 ‘오늘이 마지막일지 모르니 이렇게 하루 하루 발전하면서 버텨보자’는 생각으로 운동했어요.”

지난 7월 내셔널리그 후반기 선수 등록 마감에 맞춰 목포시청에 입단한 그는 기존 주전 골키퍼인 정의도와 번갈아 경기에 나서기 시작했다. 그가 입단했을 때는 목포시청이 이미 FA컵에서 돌풍을 일으켜 8강에까지 오른 상황이었다. FA컵 8강 성남FC와의 경기에는 당연히 이전까지 FA컵에 줄곧 나섰던 정의도가 출장할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경기 당일 경기장에 도착하니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김정혁 감독이 박완선을 선발로 과감히 발탁한 것이었다. 박완선은 이 경기를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절실하게 임했고 결국 K리그 챌린지 쟁쟁한 공격수들의 슈팅을 무실점으로 막아내며 4강 진출을 이끌었다. 목포시청의 3-0 승리는 충격적인 결과였고 올해 FA컵 역사상 가장 큰 이변이었다. 그리고 지난 27일 목포시청의 FA컵 4강 상대는 하필이면 울산현대였다. 박완선이 그렇게 가고 싶었던 울산현대를 상대팀으로 마주하게 된 것이다.

“처음에 울산미포에 입단했을 때는 울산현대 경기장에 한 번 꼭 서보고 싶었거든요. 경기도 자주 보러 갔었어요. ‘아 이런 곳에서 한 번 뛰어보면 소원이 없겠다’고 늘 생각했죠. 그런데 제가 울산현대 소속은 아니지만 목포시청 소속으로 이 경기장에 서게 되다니 이 자체로도 꿈은 어느 정도 이룬 것 같아요.” 박완선은 그렇게 울산문수경기장에 섰다. 이날도 박완선은 또 다시 마지막이라는 생각으로 경기에 나섰다. 성남전과는 다르게 이미 경기 전부터 선발 출장 통보를 받은 그는 유독 긴장을 많이 했다. 그런데 경기 도중 후배가 박완선에게 호통을 쳤다. “형, 떨지 말고 똑바로 해.” 박완선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제가 울산전에 나간 우리 선수 11명 중에 나이가 가장 많았거든요. 원래 나이 많은 선수가 경기 도중 후배들을 이끌어야 하는데 후배한테 그런 말을 들으니까 ‘이건 아니다’ 싶은 거에요. 그래서 정신을 번쩍 차렸죠.”

박완선이 울산현대미포조선에서 뛰던 당시의 모습. ⓒ박완선 제공

“나에겐 매일이 축구 인생 마지막”

특히 이날 박완선은 후반 울산현대의 맹공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두세 번의 완벽한 골 장면에서 믿기지 않는 선방쇼를 펼쳤다. 후반전은 박완선을 위한 무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는 겸손했다. “운도 많이 따랐죠. 제가 맨 뒤에서 지켜보는데 앞에서 우리 선수들이 온몸을 던져 태클로 막아주면서 투혼을 보여주니까 저도 덩달아 집중하게 되더라고요.” 박완선은 눈물 겨운 선방을 펼쳤고 동료들 역시 온몸을 던져가며 울산현대와 맞섰지만 후반 33분 김인성에게 통한의 결승골을 허용하고 말았다. 아쉬운 패배였다. 하지만 목포시청 선수들의 투혼을 지켜본 이들은 이걸 ‘목포의 기적’이라고 했고 박완선에게는 부폰에 빗댄 ‘목폰’이라는 별명을 지어줬다. 제대로 된 이력 한 줄 없는 박완선이 축구팬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 것이었다. 경기가 끝난 뒤 휴대폰을 열어보니 지인으로부터 무려 500여개의 카카오톡 메시지가 와 있었다. 경기에는 졌지만 “축하한다”는 말이 가장 많았다. 다시 경기장에 돌아온 박완선을 향한 응원이었다.

불과 몇 달 전까지만 하더라도 인생을 고민하던 은퇴한 골키퍼가 다시 그라운드에서 박수를 받는 거짓말 같은 일이 벌어졌으니 이런 드라마가 또 있을까. 누군가는 박완선이 하루아침에 깜짝 등장한 선수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는 숱한 좌절을 이겨내고 마지막 기회를 잡았다. 벼랑 끝에 섰던 박완선은 매일을 마지막이라고 생각하고 도전했다. 하지만 박완선은 지금 들뜨지 않았다. 그는 이런 깜짝 스타가 금방 잊혀질 것이라는 걸 누구보다도 잘 안다. 그래서 박완선은 흔들리지 않고 묵묵히 가던 길을 가기로 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제 목표는 초심을 잃지 않는 것이에요. 초심을 잃는 순간 또 경기에 나가지 못하던 그 시절로 돌아갈까봐 최대한 긴장하고 운동할 생각입니다. 지금처럼 항상 절실한 마음으로 운동에 임하면 제 축구인생의 마지막 소원인 K리그 무대로 한 번 밟아볼 수 있지 않을까요.”

footballavenue@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