촛불을 들고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나갔다. 나는 이곳에서 "국민의 뜻"이라던 그들을 기다렸다. 하지만 아무도 오지 않았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한국 축구를 위해 히딩크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분들이 인터넷에 아주 많다. 이들은 신태용 감독에게 지지의사를 표명한 축구 전문가들에게 불철주야 ‘기레기’라는 칭호를 하사했고 대한축구협회를 적폐로 규정했다. 축구계 원로는 이 인터넷 세상 속 전문가들에게 적폐의 부역자가 됐다. 신태용 감독을 내치고 세계적인 명장 거스 히딩크 감독을 대표팀 사령탑으로 선임해 2018 러시아월드컵에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이들은 마치 인터넷상에서 ‘전사’처럼 말하고 행동한다. 그들에게 협회와 신태용 감독, 그리고 그들을 지지하는 모든 이들은 척결대상이다.

“9월 9일을 역사적인 날로 만들자”

이 ‘전사’들이 더 적극적인 행동에 나섰다. 청와대 홈페이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 ‘히딩크 감독님이 한국을 원합니다! 월드컵 대표팀을 맡아주십시오’라는 제목의 청원이 올라왔고 1,700명이 넘는 이들이 동의했다. 하지만 이러다 큰일 난다. 국제축구연맹(FIFA)은 정부가 축구에 개입하는 걸 철저하게 금지하고 있다. 정부가 청원을 받아들여 대표팀 감독 교체에 입김을 넣는 순간 우리는 징계를 받아 아예 국제무대에 나갈 수도 없다. 이 ‘전사’들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눈물 겨운 노력을 했지만 오히려 이 행동 때문에 이러다 아예 한국이 월드컵 진출 티켓 자체를 놓칠 수도 있다. 4년에 한 번 찾아오는 이 축제만을 기다렸던 이들에게는 끔찍한 일이다.

히딩크 감독 선임을 적극적으로 지지하는 이들은 또 다른 행동에도 나섰다. 광화문에 모여 촛불을 들고 히딩크 감독 복귀 지지 목소리를 내겠다는 것이었다. “2018 월드컵에 꼭 히딩크호를 보내야 한다. 중요 경기는 망친 신태용 감독은 자진사퇴해야 한다. 이 글을 널리 퍼트려 주시고 9월 9일을 역사적인 날로 만들자.” 단순히 한두 명의 의견이 아니었다. 협회가 “신태용 감독과 함께 가겠다”는 기사 댓글에는 무려 7,500여 명이 이 촛불 집회 댓글에 추천을 눌렀다. “반드시 참석하겠다” “한국 축구를 위해 가겠다” “휴가 내서라도 간다” 등 눈물 겨울 정도로 한국 축구를 걱정하는 이들의 의견이 뒤따랐다. 여러 매체에서 이 촛불 집회 예정 소식을 전하기도 했고 촛불 집회에 참석하겠다는 이들은 이 댓글을 퍼다 날랐다. 장소와 일정도 정해졌다. 9월 9일 저녁 7시 서울 광화문 광장이었다.

그런데 이거 이상했다. 정확히 9월 9일 저녁 7시에 전국 각지에서 일제히 K리그 경기가 열리는데 한국 축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걱정하는 이들이 자국리그도 외면한 채 촛불 집회를 한다는 건 앞뒤가 안 맞기 때문이다. 둘 중 하나였다. 한국 축구의 근간인 자국리그를 제쳐두고라도 광장으로 뛰쳐나와야 할 만큼 절박했거나 자국리그에는 관심도 없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나는 이게 후자일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그만큼 자국리그를 제쳐둘 정도로 절박했을 것이다. 나는 9일 저녁 7시 안산와~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안산그리너스와 부산아이파크의 K리그 챌린지 취재 일정을 포기하면서까지 촛불 집회에 참석하는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한국 축구를 너무나도 사랑해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온다는 ‘그들’의 눈물겹고도 간절한 이야기를 전하고 싶었다.

9월 9일 저녁 7시 촛불을 들고 나오겠다던 이들이 인터넷엔 넘쳐났다.

유니폼 입고 네덜란드 국기를 둘렀다

촛불 집회가 열린다는 어제(9일) 옷장에 고이 보관돼 있는 국가대표 유니폼을 꺼내 입었다. 혹여 특정 선수의 유니폼을 입어 오해할지도 모를 이들이 있어 말하자면 이 유니폼은 선물 받은 것이었다. 이동국의 이름이 박혀 있었다. 나는 이 유니폼을 입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인터넷에서 한국 축구 걱정에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댓글을 달며 적폐 세력 청산을 외쳤던 이들과 만나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고 생각하니 설렜다. 한국 축구의 정의를 세우는 분들과 만난다는 생각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어떤 분들일까 궁금했다. 협회를 적폐로 규정하고 축구 원로들을 부역자로 칭하는 이유도 분명히 있을 것이었다. 근거 없이 그런 이야기를 막 퍼트리고 다니는 건 큰 잘못인데 한국 축구를 위해 촛불 집회까지 한다는 이들이 근거 없이 그런 이야기를 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그들’을 위한 성의를 보이고 싶었다. 인터넷에 협회와 대표팀을 적폐로 규정하고 위기의 순간 지도자 인생 전부를 걸고 한국을 월드컵 9회 연속 본전 진출로 이끌었던 신태용 감독과의 예의, 약속을 모두 무시할 정도로 히딩크 감독 복귀를 간절히 염원한 촛불 집회 참석자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그들과 하나가 되고 싶었다. 나는 고민 끝에 서울 종로로 향했다. 아주 작은 골목 여기저기를 헤매다 찾은 낡은 건물 주변에는 어르신들이 화단에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그리고 이 낡은 건물 2층으로 올라가 한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문을 살짝 열자 이 가게의 사장님이 작은 태극기를 손질하며 나를 바라봤다. 내가 말했다. “네덜란드 국기 하나 주세요. 어깨에 두르고 다니게 큰 걸로 부탁합니다.”

이 사장님은 작은 가게 안에 가득한 각국 국기의 위치를 모두 기억하고 있는 듯했다. “네덜란드? 잠깐만 있어봐.” 덴마크, 스웨덴 국기 몇 개 사이에 있던 네덜란드 국기를 꺼내 나에게 건넸다. 쫙 펼쳐 보니 빨간색과 하얀색, 파란색이 조화를 이룬 네덜란드 국기가 맞았다. 그래도 혹시 잘못 챙겨갈까 싶어 사장님께 물었다. “이거 혹시 룩셈부르크 국기 아니죠?” 그러자 사장님이 무심하게 말했다. “내가 이 장사만 30년을 했어. 국기가 나라별, 사이즈별로 1천개가 넘는데 나는 그걸 다 알아. 룩셈부르크는 색깔이 더 옅어.” 국기 전문가였다. 수단과 남수단 국기가 나란히 있기에 “두 나라는 어떻게 달라요?”라고 묻자 갑자기 이 사장님은 두 나라의 역사적인 배경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9월 9일 저녁 7시 촛불을 들고 나오겠다던 이들이 인터넷엔 넘쳐났다.

“집회 신고 없었어요” 경찰도 적폐?

사장님께 다른 질문을 했다. 이 가게는 어르신들이 많이 모인 종로 한 골목에 있었고 유독 태극기가 많았다. “태극기 집회 이후 장사가 더 잘 되겠네요.” 웃으며 말하자 사장님이 한숨을 쉬었다. “아휴, 거기 나가는 태극기는 다 중국산이야. 오히려 태극기 이미지가 안 좋아져서 덜 팔려. 아이들이 엄마 손 잡고 왔다가 ‘태극기 사달라’고 하면 엄마가 ‘나중에 사줄게’라고 하더라고. 태극기 이미지가 그렇게 됐지 뭐야.” 안타까운 표정의 사장님에게 분위기를 전환할 겸 다른 질문을 던졌다. 한쪽 가득 채운 녹색 깃발을 보며 ‘축덕’ 본능이 발휘됐다. ‘브라질이 축구 강국이라 저렇게 수요가 많구나’라고 생각해 물었다. “브라질 국기는 정말 많네요.” 그러자 사장님이 답답하다는 듯 말했다. “저건 다 새마을 운동 깃발이야.”

더 어색해져 가게를 빠져 나왔다. 오랜 만에 광화문에 와 지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광화문 부근에서 열리는 집회 때마다 안전을 통제하는 담당 경찰이었다. 이 담당자는 축구팬들의 대한축구협회 앞 시위 및 집회 때도 늘 안전을 통제했고 그러면서 나와도 친분을 쌓게 됐다. 축구팬들의 집회에 굉장히 협조적인 경찰이다. “오늘 축구팬들의 히딩크 촛불 집회 통제는 잘 준비되고 있죠?” 그러자 이 담당 경찰이 의아한 듯 물었다. “무슨 소리에요? 축구팬들이 광화문에서 뭐해요? 우린 그런 거 들은 적도 없고 신고서를 받은 적도 없는데.” 그럴 리가 없었다. 인터넷 댓글을 보면 마치 당장이라도 붉은 티셔츠를 입고 촛불을 들고 광화문으로 가 “신태용 아웃. 돌아와요 히딩크”를 외칠 것만 같은 이들이 셀 수도 없이 많았는데 그들이 집회 신고도 하지 않았을 리는 없었다. 아무래도 이 담당 경찰이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하지만 담당 경찰은 확고했다. “집회 48시간 전에는 신고를 해야 하는데 우리는 그런 거 받은 적이 없어요.” 그렇게 전화를 끊은 뒤 5분 만에 다시 담당 경찰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확인해 봤는데 히딩크 뭐시기 그런 집회 신고 받은 적 없대요.” 그래서 물었다. “신고 안 된 집회가 열리면 어떻게 되나요?” 그러자 담당 경찰이 당연하다는 듯 답했다. “뭘 어떻게 돼요. 사법처리지.” 그럴 리가 없다. 한국 축구의 정의를 위해 적폐 세력 청산을 외치고 우리의 영웅 히딩크 감독의 복귀를 바라는 이들이 집회의 기본인 집회 신고도 하지 않아 사법처리가 되는 가슴 아픈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 아마 이 담당 경찰도 적폐인 듯했다. 히딩크 감독 선임 지지 촛불 집회를 방해하려는 세력일 것이다.

9월 9일 저녁 7시 촛불을 들고 나오겠다던 이들이 인터넷엔 넘쳐났다.

9월 9일 저녁 7시 촛불을 들고 나오겠다던 이들이 인터넷엔 넘쳐났다.

9월 9일 저녁 7시 촛불을 들고 나오겠다던 이들이 인터넷엔 넘쳐났다.

재즈 선율 울려 퍼지는 평온한 광장

나는 적폐의 말을 믿기보다는 인터넷 댓글을 믿기로 했다. 국가대표 붉은 유니폼을 입고 히딩크 감독의 조국 네덜란드 국기를 어깨에 둘러매고 편의점에 가 촛불까지 샀다. 그리고는 당당히 서울시청 앞 광장으로 향했다. 한국 축구를 위해 댓글을 다는 ‘전사’들도 아마 나와 같은 복장을 하고 있으리라고 생각하고 눈을 크게 떴다. 역시나 서울시청 앞 광장에 도착하니 경찰 200여 명이 쫙 깔려 있었다. ‘히딩크 감독의 복귀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은 온라인에만 있는 게 아니었구나. 이렇게 대규모 집회를 할 정도로 많은 분들이 모일 예정이구나.’ 나는 더욱 비장한 각오로 양초와 네덜란드 국기를 꽉 부여 잡았다. 경찰은 물론 행인 역시 나를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아직 여론을 잘 모르는 분들이시네. 나 같은 이들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는 얼마나 많을 텐데.’

저녁 7시에 히딩크 감독 복귀 지지 촛불 집회가 열릴 예정이었지만 나는 오후 5시 반쯤 일찌감치 현장에 도착해 분위기를 살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인터넷 댓글 분위기만 보면 서울시청 앞 광장 앞에는 네덜란드 국기가 넘실대야 정상인데 내 눈에 확 보이는 건 성조기였다. 수백 명의 어르신들이 성조기를 흔들며 행진했고 대형 성조기를 펼친 채 구호를 외치는 이들도 있었다. 아무래도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미국을 16강에 진출시킨 뒤 LA갤럭시 감독을 거쳐 최근 다시 미국 국가대표팀을 맡게 된 브루스 어리나 감독을 지지하는 이들 같았다. 이들은 성조기를 흔들며 히딩크 감독보다는 어리나 감독이 한국 대표팀 감독으로 부임하길 간절히 기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렇지 않고서야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성조기를 흔들 이유는 별로 없지 않은가. 그들은 서울시청 앞 광장 건너편에서 출발해 어딘가로 떠났다.

그들이 떠난 서울시청 앞 광장은 평온해졌다. tbs에서 주최하는 <북페스티벌>이 서울시청 앞 광장에서 열리고 있었다. 시민들은 잔디밭에 앉거나 편히 누워 콘서트를 즐겼다. 재즈 선율이 한가로운 토요일 오후 서울시청 앞 광장에 울려 퍼졌다. 바로 옆에서는 이동식 도서관이 열렸다. 나는 우리의 동지들을 기다리며 재즈를 감상한 뒤 책도 한 권 읽었다. 서울시내에서 이렇게 분주하면서도 평온한 곳이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그런데 이 평온한 광장에서 붉은 티셔츠를 입고 네덜란드 국기를 두르고 촛불을 들고 있는 이는 나밖에 없었다. ‘인터넷 전사’들이 약속했던 저녁 7시가 다 될 때까지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혼자 촛불을 켜고 기다렸다. 사람들이 지나가면서 나를 이상하게 쳐다봤다. 생소한 네덜란드 국기를 뚫어지게 쳐다보는 이들도 있었다.

9월 9일 저녁 7시 촛불을 들고 나오겠다던 이들이 인터넷엔 넘쳐났다.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이들은 우매했다. 인터넷에서는 지금 “국민의 뜻”이라며 ‘신태용 아웃’과 ‘딩크형 돌아와요’ 같은 구호가 넘쳐나는데 평온한 서울시청 앞 광장에 모인 시민들은 “국민의 뜻”이 뭔지도 모르는 것 같았다. 단 한 명도 나에게 “힘내시라”거나 박수를 보내지도 않았다. 점점 초조해졌다. ‘인터넷 전사’들 중 그 누구도 붉은 티셔츠를 입고 네덜란드 국기와 촛불을 들고 나타나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다. 서울시청 앞 광장 맞은편 시계가 저녁 7시를 가리켰을 때도 나는 혼자였다. 마치 금방이라도 축구계를 뒤집어 놓을 것만 같았던 성난 국민의 뜻은 온라인에서나 일어나는 일인 모양이었다. 나는 혼자 네덜란드 국기를 펴고 촛불을 켠 채 성난 민심을 전달했다. 참고로 1인 집회는 사전 신고 없이도 가능하다. 나는 비장한 각오로 성난 민심을 전하는데 애들은 막 잔디밭에서 뛰고 난리였다.

혹시 서울시청 앞 광장이 아니라 광화문 광장에 이들이 모여 있는 건 아닌지 직접 걸어가 확인해 봤지만 그곳에는 세월호 사고를 추모하는 이들과 분수대에서 물장난을 즐기는 이들 뿐이었다. 세월호 사고를 추모하는 공간에서 장난스럽게 인증샷을 남기는 건 예의가 아닌 것 같아 이 곳에서의 인증은 따로 하지 않겠다. 나는 어제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아주 거세게 댓글을 달던 이들과 함께 촛불 집회하러 갔다가 덕분에 재즈 연주를 들으며 귀를 정화했다. 책도 한 권 읽으면서 양식도 쌓았다. 난 데 아닌 힐링을 하고 왔다. 본의 아니게 이런 힐링을 선사한 ‘인터넷 전사’들에게 고마움을 전하고 싶다. 덕분에 K리그 취재도 하루 쉬고 푸른 잔디에서 광합성을 하며 한 나절을 보냈다. 나에겐 평생 펴 볼 일 없을 것 같은 네덜란드 국기도 생겼다.

그런데 한 편으로는 과연 절차까지도 무시하고 히딩크 감독이 대표팀에 오길 바라며 촛불 집회에 참석하겠다고 진지하게 말하던 이들이 약속한 이 시간에 어디에 있었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이들은 한국 축구 발전을 위해 이 시간에 열리던 K리그 경기장을 찾아 응원을 보내고 있었을까. 아니면 배설에 가까운 댓글을 써대며 이게 민심이고 국민의 뜻이고 여론이라고 주장한 채 또 다른 어딘가에서 키보드를 두드리고 있는 건 아닐까. 후자는 아닐 것이라고 믿지만 혹시나 후자라면 이런 배설에 가까운 댓글은 한국 축구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되고 오히려 악영향을 준다는 사실을 많은 이들이 알았으면 한다. 성난 민심, 국민의 뜻은 그냥 온라인에나 있는 것 같다. 오프라인 세상은 참 평온하더라. 이 촛불 집회는 그렇게 나 혼자 참석해 주최측 추산 1명, 경찰측 추산 1명의 전설적인 촛불 집회로 남게 됐다. 얼어 죽을 국민의 뜻은 무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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