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회] ‘노장’ 이동국, 황선홍의 마지막처럼 웃길

이동국은 대표팀에서 다시 한 번 기회를 얻게 됐다. ⓒ 전북현대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황선홍은 시기를 잘 태어난 공격수라고 생각한다. 그를 비하하려는 게 아니라 진심이다. 일단 한 축구 원로의 말을 빌려보자. “1988년 대표팀에서 이회택 감독이 의도적으로 나이 많은 최순호 대신 대학생 황선홍에게 기회를 꽤 많이 줬지. 생각해 봐. 당대 최고의 선수 최순호를 대신해 대학교 2학년 학생이 국가대표팀 공격수로 경기에 나간다고.” 황선홍은 1988년 대학교 2학년 신분으로 아시안컵에 주전 공격수로 나섰다. 물론 이 기회를 잘 잡아서 이후 대표팀 주전 공격수가 된 건 온전히 황선홍의 능력이었다. 황선홍은 한국 축구사에서 가장 위대한 공격수 중 한 명이다. 하지만 세대교체 시기에 절묘하게 등장한 건 행운임에 틀림없다.

만약 1994년에 인터넷이 있었더라면?
그런데 내가 황선홍이 시기를 잘 태어난 공격수라고 생각하는 건 다른 이유에서다. 만약 그가 현재 대표팀 공격수였더라면 아마 그 어떤 선수보다도 많은 비난에 시달려야 했을 것이다. 국민학교 시절 대표팀 경기가 끝난 다음 날 애들이 모여 축구를 하다 완벽한 기회를 놓치면 가장 먼저 이런 말부터 했다. “야, 이 황선홍 같은 XX야.” 황선홍을 상징하는 단어는 ‘개발’이나 ‘똥볼’이었다. 그 당시 인터넷이 없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 만약 지금처럼 인터넷이 잘 보급됐고 댓글이 넘쳐났더라면 황선홍은 가루가 될 때까지 까였을 것이다. 생각만 해도 내가 다 아찔하다.

1990년대 초반 황선홍은 최전방에서 홈런(?)을 주로 때리는 선수였다. 어른들은 경기를 볼 때마다 황선홍의 슈팅이 뜨면 온갖 육두문자를 남발했다. 그 절정은 1994년 미국월드컵 볼리비아전이었다. 어린 나이에 지켜본 황선홍의 ‘보스턴 대폭발슛’은 왜 어른들이 황선홍을 욕하는지 이해가 될 정도였다. 아마도 황선홍이 그때 여러 번의 슈팅 중 하나만 골문 안으로 넣었더라면 한국 월드컵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다. 1994년에 월드컵 첫 승을 달성했을 테고 와일드카드로 첫 16강 진출에 성공했을 것이다. 그랬다면 이탈리아는 한국에 밀려 16강에 올라가지 못했고 로베르토 바조의 결승전 승부차기 실축이라는 역사도 없었을 것이다.

결과론적인 이야기지만 1994년 미국월드컵 볼리비아전 황선홍의 슈팅으로 한국 축구는 물론 전세계 축구 역사가 달라졌다. 아마도 지금과 같은 시대였더라면 경기 종료 후 황선홍을 비난하는 기사와 그에 동조하는 어마어마한 댓글, 그리고 황선홍의 SNS 테러 등이 넘쳐나지 않았을까. <SNL>에서도 황선홍을 비꽜을 테고 <100분 토론>에서도 황선홍을 질근질근 씹었을 것이다. 실제로 황선홍 감독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미국월드컵이 끝나고 밖을 나가지 못했다. 사람들이 두려웠다. 그래도 당시엔 인터넷이 없어서 다행이었다.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정말 견디지 못했을 거다.” 인터넷의 위력은 무시무시하고 그 의견은 여론이 돼 역사에 남는다. 내가 황선홍이 시기를 잘 태어난 공격수라고 생각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황선홍 감독
황선홍 감독은 “선수 시절 인터넷이 없어 다행이었다:고 한 적이 있다. ⓒ포항스틸러스

황선홍의 완벽했던 마지막
이대로 황선홍이 대표팀에서 만회할 기회를 얻지 못했더라면 그도 그저 비운한, 혹은 아시아용 선수라는 별명으로 축구사에 남았을 것이다. 1998년 프랑스월드컵 출국 전날 부상을 당해 본선 무대는 밟지도 못한 황선홍에게 더 이상의 기회는 없을 것처럼 보였다. 대표팀에서의 아쉬운 활약과는 별개로 J리그를 평정했던 그는 2000년 들어 프로리그에서도 다소 주춤한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2000년 수원삼성으로 이적한 뒤 부상과 불화 등으로 단 한 경기 출장에 그쳤고 이후 다시 가시와 레이솔로 건너가서도 전성기 시절의 활약 만큼은 보여주질 못했다. 1999년 까지는 그래도 대표팀에 중용됐던 황선홍은 2000년 북중미 골드컵 이후에는 대표팀에서도 아예 배제됐다. 나이도 있으니 하락세가 분명하긴 했다.

그런 그는 1년 3월이 지난 뒤에야 다시 대표팀에 들어올 수 있었다. 2001년 5월 컨페더레이션스컵을 앞두고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은 것이다. 황선홍이라는 선수를 언급할 때 1994년 미국월드컵의 부진과 1998년 프랑스월드컵 당시 부상, 2002년 한일월드컵의 부활로 간단히 정리되는 경우가 많은데 사실 1998년부터 2002년까지의 우여곡절만으로도 책 한 권이 나올 만큼 그의 이 시기는 꽤나 복잡했다. 기량은 정점에서 떨어지는 시기였고 프로 무대에서도 조금씩 기회는 줄어들어가고 있었다. 대표팀에는 이미 안정환, 설기현 등 젊은 공격수들이 자리를 차지한 상태였다. 그리고 황선홍은 2002년 34세가 됐다. 이대로 선수 경력이 끝나도 이상할 게 없을 정도였다.

하지만 황선홍은 모두가 아는 것처럼 2002년 한일월드컵에서 마지막 불꽃을 태웠다. 히딩크 감독은 그에게 풀타임 소화를 바라지도 않았다. 그는 정신적인 지주였고 선수들을 이끄는 베테랑 역할로도 충분한 존재였는데 여기에 폴란드전 첫 골까지 기록하며 완벽하게 그 동안의 월드컵 악연을 끊어냈다. 만약 황선홍에게 2002년 한일월드컵이 없었더라면 그는 지금까지도 월드컵만 나가면 ‘똥볼’을 날리는 아시아용 선수라는 오명 속에 살아야 했을 것이다. 이런 단 한 줄의 평가는 역사로 굳어지고 이제 막 축구를 접하게 된 어린 친구들도 ‘황선홍=아시아용 공격수’라는 평가를 그대로 받아들였을 것이다. 황선홍은 선수 생활 마지막 시기에 보여준 대활약으로 그 동안의 부진을 완벽히 털어냈다.

홍명보 황선홍
현역 시절 황선홍과 홍명보의 모습. ⓒ가시와 레이솔

아직도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 사는 사람들
마지막이 이래서 중요하다. 대표팀에서 죽어라 욕을 먹어도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느냐에 따라 훗날 평가가 엇갈린다. 유상철은 요새 어떻게 기억되는가. 골키퍼만 빼고 모든 포지션이 가능한 전천후 선수라는 굉장히 후한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그가 2002년 한일월드컵 직전만 하더라도 ‘홈런왕’ 소리를 들었고 심지어 그를 조롱하는 ‘홈런왕 유상철’ 게임이 있었다는 걸 잊고 사는 이들이 많을 것이다. 선수 생활의 마지막을 어떻게 장식하느냐에 따라 이렇듯 그동안의 비난은 완전히 수그러들 수 있다. 1994년 미국월드컵이 끝난 뒤 “황선홍 같은 XX”는 국민학교 운동장에서 가장 심한 욕이었지만 지금 “황선홍 같은 선수”는 공 없을 때의 움직임도 좋고 침착한 선수를 상징하는 칭찬이 됐다.

나는 이동국에게 한 번의 기회가 더 올 것이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우루과이전 슈팅 이후 그가 대표팀에서의 명성을 회복할 기회는 더 없을 것만 같았다. 뭐 이후에도 대표팀 경기에 꾸준히 나서 활약했지만 워낙 우루과이전 임팩트가 강렬했고 37세의 공격수에게 다시 대표팀에서 뛸 기회가 오는 일도 흔치 않기 때문이다. 청소년 대표팀 시절부터 태극마크를 달고 혹사 당했던 이동국이 그 만큼의 평가를 받지 못하는 게 아쉬웠지만 한편으로는 4년에 한 번씩 축구를 보는 이들에게 K리그 최고의 선수가 욕을 먹는 일이 없었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그냥 즐겁고 편하게 전북현대에서 축구를 하는 것만으로도 이동국은 가치가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그렇게 한국을 위해 뛰었으니 이제는 좀 그만 부려 먹어도 된다고도 생각했다. 응원하는 선수가 대표팀에 뽑히지 않길 바란 건 비단 나 뿐은 아니었을 것이다.

이동국은 1999년부터 혹사 당하기 시작했다. 청소년 대표로 나이지리아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 참가했고 2000년 시드니올림픽 대표팀에도 발탁돼 국제 초청대회를 비롯한 숱한 전지훈련에도 참가하며 지쳐가고 있었다. 여기에 소속팀 포항에서도 경기에 나섰고 1999년 시즌이 끝나자 또다시 올림픽 대표팀에 차출돼 휴식도 없이 강행군을 펼쳤다. 그리고 2000년 2월에는 성인 대표팀에 뽑혀 골드컵이 열리는 캐나다로 향했다. 당시 이동국은 오른쪽 무릎 부상으로 붕대를 감은 채 경기에 나서야 했다. 그런데 그는 이 대회에서 만신창이가 된 몸을 이끌고 A매치 데뷔골을 뽑아내는 투혼을 발휘했다. 이 정도만 해도 이동국은 한국을 위해 할 만큼 다했다. 하지만 황선홍이 대표팀 최전방에 섰던 시기와는 달랐다. 인터넷이 발달해도 너무 발달했기 때문이다.

이동국 세레머니
이동국은 과연 대표팀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 ⓒ전북현대

이동국, ‘말년의 황선홍’이 될 기회 왔다
이동국은 늘 욕을 먹는 공격수였다. 아마 이동국이 아니라 판 니스텔루이가 한국 대표팀 공격수여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황선홍도 부진한 시절이 있었고 이동국도 대표팀에서 기대에 미치지 못했던 적이 있지만 이동국의 시대는 한 번 실수로 전국민에게 욕을 먹을 수 있는 인터넷이 아주 훌륭하게 깔려 있었다. 골을 못 넣으면 못 넣었다고, 넣으면 주워 먹었다고, 멋지게 넣으면 약팀을 상대로 넣었다고, 강팀을 상대로 멋지게 넣으면 운이 좋았다고 하는 게 이동국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였다. K리그에서 아무리 대단한 모습을 보여줘도 4년에 한 번 축구를 보는 이들에게 이동국은 늘 2010년 남아공월드컵 우루과이전 슈팅을 때리던 모습으로만 남아있다. 이동국뿐 아니라 모든 K리그의 전설을 존경하는 입장에서는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런데 이동국에게 진짜 마지막일 기회가 왔다. 이미 전성기를 지나 이제는 전북현대에서도 김신욱이나 에두를 대신해 이따금씩 출장하는 상황이고 폭발력도 예전 같지는 않다. 하지만 2002년 황선홍이 그랬던 것처럼 이동국에게 90분 동안 쉴 새 없이 뛰어다니며 그라운드를 휘저어 달라고 바라는 이들은 없다. 후배들을 잘 독려하고 아주 중요한 순간에 딱 하나만 해주면 그걸로 이 드라마는 해피엔딩이 된다. 사실 딱 한 번의 해결이 아니더라도 후배들을 위해 희생하는 걸로도 충분하긴 하다. 그런데 황선홍이 그랬던 것처럼 이동국도 이 기회를 통해 명예회복을 하길 바라는 마음이 크다. 한국 대표팀은 9회 연속 월드컵 본선 진출이라는 대기록이 깨질지도 모를 절체절명의 위기에 내몰렸지만 영웅은 이럴 때 빛을 발하는 법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당시 황선홍이 했던 것처럼 이제 노장이 영웅으로 등장할 판은 깔렸다. 드라마로 써도 좋을 법한 상황 설정도 끝났다.

이동국에게는 다시 찾아오지 않을 것 같던 명예회복의 기회가 왔다. 이제 이 작품은 온전히 이동국의 발에 달렸다. 사실 이 기회에서 이동국이 부진하다고 해 그가 지금껏 K리그와 대표팀에서 보여준 활약과 헌신이 사라지는 건 아니다. 하지만 그간 지긋지긋했던 비난이라는 대표팀 공격수의 숙명은 이 기회를 통해 완전히 떨쳐낼 수 있다. 한국을 위기에서 구할 딱 한 방이면 그간의 비난과 부진을 날릴 수 있다. 지금 이 장면을 위해 신이 이동국에게 온갖 시련을 주면서 큰 그림을 그렸던 건 아닐까. 기회가 주어졌으니 이제 모든 걸 이동국에게 맡겨본다. 이제 이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은 이동국이 모든 비난을 날릴 딱 한 방을 보여주는 것이다. 2002년 한일월드컵 때 34세의 노장 황선홍이 보여줬던 것처럼 말이다. 이동국은 투혼을 발휘했던 ‘노장 황선홍’이 될 수 있는 기회 앞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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