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C서울의 연고이전을 연고복귀라고 주장하는 이들도 있다. ⓒ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축구를 좋아하는 이들이라면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라는 말을 한 번쯤은 들어봤을 것이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프로축구연맹에서 서울 연고를 공동화하기 위해 서울을 연고로 하는 LG와 유공, 일화를 내쫓았다는 것이다. 이는 특히 안양LG의 서울 연고 이전에 당위성을 부여하는 주장이다. 온갖 부당한 대우를 받아 서울에서 안양으로 쫓겨난 팀이 다시 당당하게 2004년 서울에 복귀했다는 눈물 나는 스토리가 바로 이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에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건 다 왜곡이고 날조다. 애초부터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즉 서울을 비우기 위해 이름 붙여진 정책 따위는 없었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라는 존재하지도 않던 정책이 사실처럼 굳어지는데 지금 침묵하면 이 왜곡된 역사가 진실로 남을 것 같아 그 진실을 바로 잡으려 한다.

서울 연고 세 팀? 사실상 무연고 팀

1980년대 프로축구는 연고 개념이 부족했다. 전국을 돌며 투어 경기를 할 정도로 연고지 정착이 되지 않았다. 그러다 포항제철이 대구와 경북에서 홈 경기를 주로 치르고 대우로얄즈 역시 부산에서 경기를 많이 소화하기 시작했다. 연고 개념을 처음 선보인 것도 포철과 대우라고 보는 편이 맞을 것이다. 그러다 프로축구연맹은 연고 개념을 도입하기 위해 1990년 시즌을 앞두고 시도별 연고에서 시별 연고로 연고지를 정리했다. 이때 포철은 대구, 경북에서 포항으로 연고를 축소했고 부산, 경남을 통틀던 대우도 부산으로 연고지를 좁혔다. 그런데 이때까지 연고 개념이 부족하던 다른 팀들이 고민이었다. 결국 이들은 구단 내부에서 회의를 하고 연맹과 협의를 거친 끝에 연고지를 정하게 됐다.

현대가 강원에서 울산으로, 럭키금성은 충청에서 서울로 옮겼다. 일화 역시 서울을 연고지로 선정했고 유공은 수원을 연고로 하지만 안양과 인천, 성남, 평택 등 각시에서 대회 개최 요구가 많아 경기도내 주요도시를 돌며 경기를 펼치기로 했다. 연고 개념의 시작이었지만 연고지가 확실한 곳은 포철과 현대, 대우 뿐이었다. 나머지 팀들은 “너 여기로 가” 또는 “저 여기 갈게요”라며 인위적으로 연고를 정해야 했다. 1년 뒤 결국 경기도를 떠돌던 유공도 서울로 연고지를 정했다. 동대문운동장을 홈으로 쓰는 팀만 셋이 됐고 영남권에도 포철과 현대, 대우가 있었다. 대단히 극심한 지역적 불균형이었고 영남권 세 팀이 그나마 연고지에 자리 잡은 것과 달리 동대문운동장을 홈으로 쓰는 세 팀은 연고 개념이 희미했다.

당시 한 연맹 관계자는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서울 지역 세 개 팀은 사실상 지역 연고가 없는 무연고팀이나 마찬가지다.” 연맹 입장에서는 확실한 서울 연고팀을 원했다. 포철은 이름을 포항아톰즈으로 바꾸고 완전히 지역에 정착했고 1994년 2월 전북버팔로와 12월 전남드래곤즈가 창단하면서 호남 연고로 정착될 수 있는 단계였다. 그런데 LG로 이름을 바꾼 럭키금성과 유공, 일화는 사실상 무연고나 다름없는 상황이었다. 동대문운동장에서 경기를 하니 경기장을 찾아 관심 있게 지켜보는 이들도 있었지만 서울 연고 팀이라고 하기에는 확실히 무리가 있었다. 1994년 5월 정몽준 회장은 실제로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서울시민 어느 누구에게 물어봐도 프로축구의 서울 연고팀을 아는 사람은 적을 것이다.”

포항스틸러스는 1990년 스틸야드를 지은 뒤 연고지에 완벽히 뿌리내렸다. ⓒ포항스틸러스

반만 자리 잡은 K리그의 연고제도

반쪽짜리 연고제도였다. 포항과 전남은 홈에 당시 우리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던 전용 경기장을 지으며 연고지에 정착하고 있는데 동대문운동장에서 버티는 세 팀은 큰 투자나 노력 없이 구단을 운영하고 있었다. 또한 명색이 프로리그인데 한 경기장에서 연이어 경기가 벌어지는 일도 잦았다. 동대문운동장에서 한 경기 티켓을 끊으면 이어 벌어지는 프로축구 경기까지도 관람하는 프로리그답지 못한 일을 막을 수도 없었다. 이 세 팀의 연고 개념은 엉망이었다. 다른 연고 팀들은 다 연고지에서 경기를 하는 와중에도 이 세 팀은 전국을 떠돌아다녔다.

이전 자료는 그렇다 치고 연고 개념을 도입해 다른 팀들이 연고지에 자리 잡은 1993년부터 3년간의 자료를 살펴볼까. 당시 포항(포항스틸야드)과 울산(울산종합), 대우(부산구덕) 등은 이미 연고지의 홈 경기장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1993년 LG는 17번의 홈 경기 중 13경기를 서울(잠실 한 경기 포함)에서 치렀지만 나머지 네 경기는 구미와 창원, 청주, 공주 등을 떠돌았다. 유공은 이해 15번의 홈 경기 중 13번을 서울에서 치렀고 나머지 두 번은 대전과 순천에서 했다. 일화는 19번의 홈 경기 중 16번을 서울에서 치르고 나머지 세 경기는 여수와 마산, 춘천을 떠돌았다. 연맹이 지역 연고 정착을 시작하던 때였지만 서울을 연고로 한다면서 사실상 무연고에 가까운 세 팀은 전국 각지를 돌며 순회 경기를 펼쳤다.

1994년도 마찬가지였다. LG는 18번의 홈 경기 중 무려 6차례의 경기를 서울을 벗어나 치렀다. 창원과 평택, 구미, 공주, 여수, 제천, 수원 등을 돌았다. 유공 또한 17차례의 홈 경기 가운데 5경기나 지방에서 소화했다. 순천에서만 세 번을 했고 목포와 여수에서도 유공의 홈 경기가 열렸다. 일화 역시 19번의 홈 경기 가운데 세 번을 마산(2연전)과 평택에서 펼쳤다. 동대문을 떠나 목동에서 치른 네 경기도 홈 경기로 간주한 통계다. 그 열악한 전북버팔로도 전주종합운동장을 홈으로 쓰면서 가끔 이리종합운동장을 홈으로 썼지만 골칫덩어리 세 팀은 전국 팔도를 유랑했다. 심지어 동대문운동장에서 이 팀들이 연이어 두 경기를 펼치는 날이면 평일임에도 오후 5시 경기를 치르기도 했다. 무연고 세 팀은 프로축구의 정착과는 거리가 먼 구단이었다.

51경기 중 19경기를 지방에서 한 서울팀?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이 세 팀이 서울에 연고 정착을 하거나 아니면 현대처럼 지방으로 내려가 연고에 뿌리를 내릴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유랑 생활은 더 심해졌다. 1995년 LG는 16번의 홈 경기 중 무려 9번을 서울 바깥에서 치렀다. 수원(2번)을 비롯해 구미와 창원, 원주, 안동, 문경, 공주, 영주 등을 떠돌았다. 일화는 17차례 홈 경기 중 동해와 평택, 춘천, 청주 등을 돌며 네 경기를 치렀고 유공은 16번의 홈 경기 중 서울을 떠나 세 경기를 펼쳤다. 제주와 목포, 평택 등에서 유공의 홈 경기가 열렸다. 종합해 보면 이 3년 동안만 해도 LG는 51경기 중 무려 19경기를 다른 지역에서 치렀고 유공은 48경기 중 10경기, 일화도 55경기 중 10경기를 서울 밖에서 소화했다. 연맹은 연고 정착을 부르짖는데 서울을 연고로 한다면서 지방을 떠도는 이 세 팀을 사실상의 무연고 팀으로 규정한 건 당연한 일이었다.

결국 연맹은 칼을 빼들었다. 무연고처럼 전국을 떠돌아다니면서 말로만 서울 연고를 고집하는 세 팀에 최후통첩을 날린 것이다. “서울에 전용구장을 확보하지 않을 팀들은 서울을 나가라.” 서울 연고 팀이라는 좋은 타이틀을 달고서도 연고 정착에 전혀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 이 세 팀을 향한 강력한 조치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서울에 뿌리내릴 생각이 없다면 떠나라. 성의를 보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이 세 팀은 요지부동이었다. 유공은 목동운동장으로는 옮길 수 있어도 서울에선 나가지 않겠다고 했고 일화와 LG도 동대문운동장을 고수했다. 무연고로 떠돌아다니면서도 기업 입장에서는 그래도 서울을 연고로 두고 있는 게 모기업 홍보에는 훨씬 더 이득이었다. 그런데 또 전용구장 건립 등의 투자는 하기 싫었다.

세 구단은 합심해 버텼다. 유공은 서울을 벗어나게 하면 축구단 운영을 포기할 수도 있다고 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연고제를 정착하려는 의지가 확고했던 연맹은 “서울에 전용구장을 세워 정착하지 않고도 계속 이렇게 버티면 내년 리그 참여를 금지시키겠다”고 강하게 나왔다. 결국 LG는 창원과 대전, 안양을 놓고 고민하다가 안양으로 떠났고 유공은 부천을 연고로 정했지만 경기장이 마땅치 않아 당분간 목동을 쓰기로 했다. 일화는 천안으로 떠났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주장하는 이들은 마치 이 세 팀이 서울에서 지역 연고를 확립하고 있는데 연맹이 쫓아낸 것처럼 왜곡하지만 사실은 앞서 밝힌 대로다. 3년간 51경기 중 무려 19경기를 다른 곳에서, 심지어 훗날 라이벌 지역이라는 수원에서까지 치른 팀은 서울 연고 팀보다는 무연고 팀에 훨씬 더 가까웠다.

포항스틸러스는 1990년 스틸야드를 지은 뒤 연고지에 완벽히 뿌리내렸다. ⓒ포항스틸러스

뒤늦게 등장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이 세 팀은 서울 연고지 정착에 의지가 없었고 결국 서울을 떠났다. 서울에 뿌리 내릴 의지가 있는 팀은 언제든 자신들이 선택할 수 있었지만 유랑 구단들은 이걸 거부했다. 연맹이 하루아침에 서울에서 내쫓은 게 아니라 3년이라는 시간을 줬지만 이 세 팀은 아무런 개선도 하지 않았다. 연맹은 무연고팀이 이렇게 계속 서울에 머물면 안 된다고 판단한 것이지 서울을 비워 공동화하기 위해 연고지를 재배치한 게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연맹이 이상하게 꼬인 연고지를 제대로 교통정리한 것이었다. 지방에서는 이제 전용구장도 짓고 홈을 벗어난 곳에서 경기를 하지도 않으며 자리 잡아 가고 있는데 서울을 연고랍시고 전국을 떠도는 위쪽 세 팀은 연맹의 방향과는 아예 반대로 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세 팀이 연맹의 황당한 결정과 일방적인 지시에 의해 억울하게 서울에서 쫓겨났다고 주장하는 건 왜곡이다.

비로소 이런 복잡한 과정 끝에 프로축구는 연고지 교통정리를 끝낼 수 있었다. LG도 안양에 뿌리를 내리며 “안양LG는 안양시민을 위한 팀”이라고 홍보했고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하지만 안양으로 떠났던 LG는 2004년 연고 이전을 선언하고 서울로 이전해 FC서울이 됐다. 안양LG 팬 뿐 아니라 K리그의 다른 구단 팬들 역시 연고이전에 반발하며 시위까지 펼쳤지만 결국 LG는 서울로 떠났다. 당시 FC서울은 지탄의 대상이었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운운하며 원래 서울 팀이 서울로 복귀했다고 주장하는 이는 단 한 명도 없었다. 연고제 정착 이후 이 팀은 안양을 위한 팀이었기 때문이다. 안양 팬들을 배신하고 서울로 떠난 이들은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했다. 그저 서울에서도 K리그가 열리니 한 번쯤 경기장에 가보려는 일반팬들 정도가 관심 갖던 팀이었다.

그런데 FC서울은 1,000만 명이 거주하는 도시에서 이후 활발한 마케팅과 선수 영입으로 팬층을 늘려 나갔고 어느 순간 꽤 많은 팬을 자랑하는 팀이 됐다. 그리고 2013년경 지금껏 들어본 적 없는 요상한 단어가 등장했다. 그게 바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다. 처음엔 일부 FC서울 팬들이 연고이전을 합리화하기 위해 왜곡과 날조로 만들어낸 이 허구를 믿는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FC서울 팬들이 많아지고 이 허구의 주장에 점점 살이 붙더니 어느 순간 있지도 않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은 사실로 굳어져 가고 있었다. 네티즌이 만드는 백과사전인 ‘위키피디아’에는 하루 하루가 다르게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라는 항목에 살이 붙고 있었다. 여기저기 조각조각 보도된 과거 뉴스들을 조합해 마치 LG가 대단한 핍박을 받아 서울에서 쫓겨난 것처럼, 연맹이 서울을 공동 연고를 위해 비워둔 것처럼 왜곡하기 시작했다.

포항스틸러스는 1990년 스틸야드를 지은 뒤 연고지에 완벽히 뿌리내렸다. ⓒ포항스틸러스

이제는 왜곡이 사실이 돼 가고 있다

그리고 무지한 언론은 이때부터 이걸 받아쓰기 시작했다. 연맹이 서울 연고에 대해 강경한 방침을 내리자 LG와 유공, 일화가 서울에서 떠나던 1996년에도, 안양LG가 연고이전을 해 서울로 입성하던 2004년에도 쓰이지 않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라는 말이 처음 쓰인 게 2013년경이었다. 그런 정책은 당시에 있지도 않았고 처음에는 몇몇 왜곡된 팬들의 주장이라고 무시했던 말이 점점 사실로 굳어진 것이다. 축구 역사에는 별로 관심이 없고 그저 현안을 가볍게만 파고드는 언론에서는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라는 단어를 아무 생각 없이 그대로 받아썼다. 1996년 당시 언론과 연맹은 “지역 연고 정착을 위해 서울 팀을 이전시킨다”고 했을 뿐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위해 서울 팀을 내보낸다”고 한 적은 없다.

그런데 왜곡이 이제 사실이 돼 가고 있다. 무지한 언론은 이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인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을 주장하는 이들은 2013년에 프로축구연맹이 발간한 ‘한국프로축구 30년사’에서도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라는 단어가 나오는 걸 보고 왜곡을 진실이라고 주장한다. 하지만 이 역시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받아들여 ‘드래그’한 수준이다. 당시에는 있지도 않던 정책을 훗날 집필을 맡은 축구 기자들이 인터넷을 보고 왜곡된 사실을 책에 담은 것이다. 연맹이 펴낸 책에도 이렇게 나와 있으니 이제 더 왜곡이 심해질 것이고 왜곡된 주장을 하던 이들이 더 힘을 받을 것이다. 이렇게 하나하나 조각된 왜곡을 조합해 사실처럼 주장하고 이걸 믿고 싶어하는 이들이 동조하고 거기에 역사 의식 없는 언론까지 이걸 필터링 없이 받아들이니 이게 마치 사실처럼 전해지고 있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같은 건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연고이전 역사를 부정하고 싶은 일부에서 지어낸 허구의 정책일 뿐이다. 대단한 억압을 당했던 팀이 그 난관을 헤치고 다시 빗발치는 총탄을 피해 적진을 뚫고 서울로 입성한 것처럼 꾸미고 싶을 뿐이다. 심지어 이 왜곡된 역사를 주장하는 이들은 연맹의 무능력함을 어필하기 위해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일본의 ‘도쿄 연고지 공동화 정책’에서 따왔다고 주장한다. 일본을 따라 정책을 시행했다가 실패했다고 해야 연맹이 더 무능력해 보이고 그 비난의 화살이 서울에 입성한 FC서울이 아니라 연맹으로 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J리그 역시 애초에 ‘도쿄 연고 공동화 정책’ 같은 건 없었다. 도쿄에 입성할 자격을 갖춘 팀이 없어 도쿄에서 중립 경기를 했을 뿐이고 연맹이 그걸 따라한 적도 없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무능력한 K리그는 어설프게 J리그 정책을 따라하다가 바보처럼 서울 연고의 세 팀을 다른 지역으로 쫓아낸 것처럼 왜곡돼 있다.

포항스틸러스는 1990년 스틸야드를 지은 뒤 연고지에 완벽히 뿌리내렸다. ⓒ포항스틸러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은 처음부터 없었다

역사 왜곡이 이렇게 무섭다. 처음에는 연고이전을 감싸려는 일부 팬들의 헛소리 정도로 인식했는데 이제는 마치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실제 있었던 것처럼 여겨지는 시대가 됐다. 처음에는 ‘패륜’팀이라며 지탄받던 FC서울도 충성도 높은 팬들이 점점 늘어났고 그중 일부가 왜곡하던 역사는 이제 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면서 사실이 돼 가고 있다. 사실을 마음껏 재단해 입맛에 맞게 역사를 바꾸는 모습을 과연 그대로 보고 있어야만 하는가. 이대로 뒀다가는 100년 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 실제 있었던 것처럼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런 건 있지도 않았다고 주장하다가 지탄받고 헛소리로 받아들여지는 시대가 올 것이다. 연맹도 자신들의 역사를 몰라 프로축구 역사를 정리한 책에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쓰는 시대인데 뭐 왜곡이 사실로 굳어지는 데는 시간이 얼마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처음에는 무시했던 터무니없는 주장이 어느덧 힘을 받아 마치 사실처럼 굳어지는 현상을 지켜보고 있자니 무섭기도 하고 이걸 그대로 받아써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라는 있지도 않던 정책을 진실로 받아들이는 언론을 보면 화가 나기도 한다. 이제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이라는 있지도 않은 정책을 만들어낸 이들은 내 칼럼을 보고 더 교묘하게 역사를 편집할 것이다. 그래야 FC서울의 연고이전이 연고복귀가 되기 때문이다. 여기저기 조각된 역사를 입맛에 맞게 편집해 내 주장을 반박할 테고 그게 안 되면 칼럼을 쓴 나를 공격할 것이다. 역사는 바로잡는 사람보다 왜곡하는 사람이 훨씬 유리하다는 걸 한국과 일본을 보면 잘 알지 않은가. 왜곡해 놓으면 그걸 바로잡는 데는 이처럼 긴 글이 필요하다. 그리고 어차피 힘 있는 놈, 목소리 큰 놈이 이긴다. 그런데 이제는 어느덧 FC서울 팬들이 목소리 큰 집단이 됐다.

하지만 축구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하는 언론으로서 아닌 건 아니라고 해야 한다. 성공한 쿠데타는 혁명이 되고 성공한 연고이전은 연고복귀가 된다. 연고이전한 FC서울 팬들이 엄청 많아져 이제는 씨알도 안 먹힐 소릴 수 있어도 할 말은 해야겠다. ‘서울 연고 공동화 정책’ 같은 건 처음부터 있지도 않았다. 불편한 이야기를 쓴 나를 향한 공격이 엄청날지라도 이 칼럼이 부디 10년, 20년 뒤에도 인터넷에 대대로 남아있길 바란다. 그래야 역사는 왜곡되지 않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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