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츠니어스 | 태백=명재영 기자] 축구에서 보통 5골 차 이상의 패배를 당하면 대패, 참사 등 참혹한 표현으로 그 경기를 설명한다. 그런데 경기를 치렀다 하면 평균 10골에 가까운 실점을 하고도 당당한 이들이 있다. 친구들끼리 하는 동네축구에서도 이런 경기를 겪으면 온갖 미사여구가 튀어나오기 마련인데 이런 일이 가능할까. 그런 일이 실제로 우리의 곁에서 벌어지고 있다. 소개한다. ‘포기를 모르는 청춘들’ 한국교원대학교 축구부다.

30년 역사 동안 승리 ‘0’

1987년 창단한 한국교원대 축구부는 30년의 역사 동안 공식 대회에서 승리의 기억이 없다. K리그 챌린지 모 구단의 전 구단주 같았으면 진즉에 해체 명령이 떨어졌을 성적이다. 하지만 이런 패배의 역사에는 이해가 갈만한 결정적인 원인이 있다. 선수단 전원이 순수 아마추어 선수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우리가 아는 대학 축구부의 대부분은 엘리트 선수 출신으로 구성되어 프로 양성 기관의 성격을 가진다. 초등학생 시절부터 축구에만 매달린 선수들이 마지막으로 경험하는 학창 시절인 셈이다.

한국교원대 축구부는 이러한 팀들과는 근본부터 다르다. 쉽게 설명하면 ‘대학 축구팀’이라기보다는 ‘대학 동아리’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실제로 그들의 환경은 매우 열악하다. 학교를 대표해서 각종 공식 대회에 매번 참가하고는 있지만, 체계적인 지원은 거의 없다. 지도자도 감독 한 명뿐이다. 의무트레이너나 코치는 사치를 넘어선 꿈의 존재다. 반반한 훈련 시설도 갖추지 못했다. 캠퍼스 내에 대운동장이 존재하긴 하지만 흙바닥이다. 그렇다고 학교 밖 외부시설을 이용한다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래서 이들은 학교 내 풋살장을 주 훈련장소로 사용한다. 기본적인 전술 훈련조차 힘들다. 대회 기간의 고생은 덤이다. 올해는 민박집에서 대회 내내 숙박했지만, 작년 추계연맹전에서는 경기 당일 청주와 태백을 버스로 오가며 3경기를 치렀다.

훈련 시간도 한정되어 있다. 선수단 전원은 교원을 지망하는 평범한 학부생이다. 다른 학생들과 비교를 할 것도 없이 과제와 시험에 쫓기는 흔한 대학생 그 자체다. 이들의 선수 생활은 밤이 되어서야 시작된다. 모든 수업이 끝난 저녁 시간에 모여 주 3회 발을 맞춘다. 이쯤 되면 대학마다 있는 흔한 축구 동아리와 다를 게 없다. 그렇다고 해서 공만 찼다 하면 관중석으로 홈런을 날리는 수준은 아니다. 선수단 대부분은 체육교육과 소속으로 일반 학생보다는 운동신경이 좋다.

1승이 아니라 1골이라도 좋다

이런 이들이 강원도 태백시에 열린 제48회 전국추계대학축구연맹전에 참가했다. 추계연맹전은 대학 선수들이 뛸 수 있는 최고의 무대 중 하나다. 2~3월에는 춘계대회가 열리고 7~8월에는 추계대회가 열린다. 한국교원대는 팀 사정상 모든 대회에 참가하지는 못하지만, 추계대회만큼은 매년 출석하고 있다. 올해는 20개 조 중 14조에 편성되어 울산대학교, 서울대학교, 고려대학교와 한 조가 됐다. 어느 팀과 붙어도 1승을 거둘 확률이 거의 없긴 하지만 유상철 감독이 이끄는 울산대와 ‘전통의 명가’ 고려대가 같은 조라는 것은 이들에게 죽음의 조를 넘어 ‘얼른 집에 가라’는 의미에 가깝다.

절망적인 조 추첨 결과에 이들은 오히려 신이 났다. 이유는 정말 순수했다. “이런 선수들과 언제 같은 그라운드에서 뛰어보겠냐”는 것이다. 그리고 서울대와의 맞대결도 선수들에겐 특별한 의미로 다가왔다. 많이 알려져 있다시피 서울대 또한 프로 지망생들로 구성된 팀이 아니다. 한국교원대와 마찬가지로 일반 학생들로 구성되어 있다. 매번 선수와 일반인의 대결 구도만 겪어 온 한국교원대에는 역사에 남을 1승의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그들에게 만만한 경기는 한 경기도 없었다 ⓒ 한국교원대 축구부 페이스북

‘감독 부재’ 파란만장했던 조별리그

지난 18일에 열린 한국교원대의 첫 경기 상대는 바로 그 서울대였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발생했다. 팀의 유일한 지도자인 유용준 감독이 첫 경기에 모습을 보이지 않은 것이다. 경기 당일 급한 개인 사정이 있어 팀을 지휘할 수 없게 됐다. 온 우주의 기운을 모아 올인을 해도 모자를 판에 한국교원대는 학과의 지도교수가 대리 지도자를 맡은 채 경기를 치렀다. 결과는 참혹했다. 1승은커녕 1골도 넣지 못한 채 0-10 대패를 당했다.

욕심이 화근이었다. 한국교원대 선수들의 마음속에는 은연중 저들도 우리와 별다를 게 없는 학생들이라는 생각이 커졌다. 그런데 함정이 있었다. 같은 일반 학생인 것은 틀린 소리가 아니지만, 고등학생 시절까지 선수 생활을 했던 이들이 상당수 포진해있었던 것이다. 반면 한국교원대의 대회 출전 명단에서 선수 출신은 단 2명이었다. 그나마도 1명은 중학생 단계에서 선수 생활을 멈췄다. 아프리카의 숨겨진 강호 알제리를 손쉬운 1승 제물로 생각했다가 망신을 당한 2014년 브라질 월드컵의 한국 국가대표팀과 같았던 셈이다.

서울대와의 경기를 치른 뒤 이틀 후 한국교원대는 두 번째 경기를 치렀다. 상대는 울산대였다. 유용준 감독이 팀에 돌아왔지만, 상대는 유상철 감독이었다. 울산대는 올해 U리그 11권역(대구ㆍ울산ㆍ부산ㆍ경남)에서 11개 팀 중 1위를 기록하고 있는 강호다. 강호도 그냥 강호가 아니라 지금까지 치른 10경기에서 26득점 4실점이라는 무시무시한 기록으로 전승을 기록한 괴물에 가까운 팀이었다.

이러한 상대 앞에서 한국교원대는 이렇다 할 수도 쓰지 못한 채 0-13이라는 스코어로 경기를 마쳤다. 상대와의 전력 차를 고려하면 13점 차도 열심히 노력한 결과였다. 그 시점에서 한국교원대는 2경기 2패 0득점 23실점이라는 기록으로 조별리그 탈락을 확정 지었다. 해마다 반복되어 당연한 일로 느껴질 수도 있었지만, 선수들은 속상함을 감출 수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들을 응원하러 먼 태백까지 온 부모님과 팬들이 마음에 걸렸다. 위기를 느낀 선수들은 마지막 경기인 22일 고려대전을 하루 앞둔 밤 스스로 단체 미팅을 진행했다.

미팅의 분위기는 숙연했다. “우리 이렇게 끝내야 해?”라는 말이 나왔다. 아무리 순수 아마추어 선수라지만 아무것도 못 한 채 대회를 끝내는 것은 인간으로서 자존심에 상처가 나는 일이었다. 그렇게 한참 대화가 오고 갔고 선수들은 마지막 각오를 다졌다. “마지막 경기에 모든 걸 쏟아붓자”

0-5. 투혼이 기적을 만들다

대망의 22일 서울대에 0-10 대패를 당한 강원관광대구장에서 한국교원대는 고려대를 상대로 대회의 마무리에 나섰다. 2015년 같은 대회에서 우승을 차지했던 고려대는 조별리그 통과가 거의 확실시되는 상황에서 비주전 위주로 선발 라인업을 꾸렸다. 물론 비주전이라고 해서 고등학생 시절까지 전부 전국적으로 이름을 날리던 선수였던 것은 변함이 없다. 서울대와 울산대에 10골 이상을 실점했으니 이번 경기 또한 엄청난 점수가 나올 것으로 예상되는 순간이었다.

주심의 휘슬이 울린 뒤 시간이 흐를수록 “무언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 정도의 상황이 펼쳐졌다. 고려대의 득점포가 터지지 않는 것이었다. 10골이면 평균적으로 10분에 1골 이상은 넣어야 하는데 10분, 20분이 지나도 경기장의 점수판은 0에서 멈추어져 있었다. 고려대의 부진이라기보다는 한국교원대 선수들의 플레이에 눈길이 갔다. 고려대 선수가 공을 잡으면 기본적으로 세 명 이상이 압박하고 고려대의 슈팅을 필드 플레이어가 몸으로 막아내는 상황이 반복되고 있었다.

투혼(鬪魂). 그 두 글자 외에는 다른 생각이 떠오르지 않았다. 경기 후 알게 된 사실이지만 사실 이 날 한국교원대 선수들은 선발 라인업 11명을 꾸미기가 힘들 정도로 거의 모든 선수가 부상을 안고 있었다. 물집은 기본이며 탈진, 외상 등 다양한 부상이 선수단에 퍼져있었다. 이날 한국교원대는 등록선수 19명 중 선발 11명을 제외하고 단 3명만 후보 명단에 이름을 올려 제출했다. 나머지 5명은 아예 빠졌다.

그렇게 “어” 소리만 나오던 전반 35분 마침내 고려대가 선제골로 앞서가기 시작했다. 보통 이런 경기에서는 약팀이 버티다가 한 번의 실점을 겪고 나면 스스로 무너져 대량 실점을 하는 사례가 많다. 한국교원대 또한 지난 두 경기에서 그랬다. 하지만 이날 경기는 달랐다. 점수를 잃었지만, 한국교원대 선수들은 어느 누구 할 것 없이 먼저 “괜찮아”를 외치며 서로를 다독였다. 그렇게 전반전의 남은 시간을 버틴 한국교원대는 0-1로 45분을 마쳤다. 경기가 끝나지 않았지만 이미 기적적인 결과였다.

그들에게 만만한 경기는 한 경기도 없었다 ⓒ 한국교원대 축구부 페이스북

유용준 감독은 하프타임 동안 특별한 주문을 하지 않았다. 누구보다도 선수들의 상태를 잘 알았기 때문이다. 대신 선수들의 이름을 일일이 부르며 “잘했어”, “괜찮아”라고 칭찬을 날렸다. “어때? 할 만하지? 잘하면 후반전에 좋은 기회가 올 수도 있을 것 같아”라고 따뜻하게 말하는 유 감독의 표정은 누구보다도 진지했다. 그렇게 후반을 맞이한 선수들은 이미 체력적으로 바닥이 난 상태였다. 하지만 교체할 선수가 없었다. 유일하게 고등학교까지 선수 생활을 경험했던 미드필더 이인호는 교체 명단에 이름을 올렸지만 출전하기에는 부담스러운 몸 상태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선수들의 움직임이 둔해졌다. 절뚝이는 선수도 있었지만 절대 교체 사인을 먼저 하지 않았다. 쓰러지더라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였다. 교체는 후보 선수 3명 중 1명만 이뤄졌고 결국 후반에 4골을 추가로 실점해 경기를 0-5로 마쳤다. 분명 큰 점수 차지만 인간승리에 가까운 결과를 만들어낸 것이다. 정확한 기록은 집계되지 않았지만 80%-20% 이상의 점유율과 수십 개의 슈팅 등 고려대의 폭격을 이들은 단 5골로 막아냈다.

축구의 의미를 다시 생각하다

그렇게 경기가 끝난 뒤 유용준 감독의 얼굴에는 미소가 살며시 번졌다. “사실 어제 AFC U-23 챔피언십 한국과 동티모르 경기가 비기는 걸 보면서 남다른 느낌을 받았어요. 우리도 일을 낼 수 있지 않을까라는. 결국 졌지만 선수들이 굉장히 열심히 해줬어요. 지난 경기와 비교하면 나쁘지 않은 결과에요. 지더라도 아름답게 져보자고 선수들에게 얘기를 했었는데 오늘은 정말 그 말대로 됐어요. 사실 우리 선수들 대부분이 정상적으로 경기를 뛸 수 없는 상황인데도 이를 악물고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거든요. 정말 축구가 좋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뭉친 팀인데 대회를 치르는 동안 선수들을 보면서 저도 많이 배웠어요. 저도 프로 생활까지 하며 축구를 나름 오래 했는데 축구라는 게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본 것 같아요. 우리 선수들에게 정말 고맙고 오늘 저희를 상대로 최선을 다해준 고려대 선수들과 서동원 감독님에게도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을 전하고 싶어요”

이날 경기에서 한국교원대의 최전방은 1993년생 신입생 이창수가 홀로 맡았다. 나이가 많아도 1995년생인 대회에서 25살의 신입생이라는 신분은 분명 특별했다. 이러한 상황 역시 학교의 특성 덕분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창수는 “일반 4년제 대학을 다니다가 제대 후 수능을 다시 치른 뒤 올해 한국교원대에 입학했다”며 “지난 두 경기에서는 아쉬운 결과가 나왔지만, 오늘은 모두가 최선을 다해서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은 것 같다”고 말했다.

남들보다 가진 것은 없지만 한국교원대에는 든든한 지원군이 있다. 바로 팀 매니저다. 같은 학교 여학생 3명이 팀 매니저를 자청하며 선수들의 경기와 훈련을 옆에서 챙기고 행정 업무 또한 도맡아서 한다. 경기 당일에는 서포터로 변신해 목청 높여 “한국교원대 파이팅”을 외친다. 고려대와의 경기에서도 이들의 활약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감독 외에 지도자가 없기 때문에 응원을 하다가도 교체 상황이 발생하면 이들이 벤치로 내려가 관련 업무를 도왔다. 다음 대회를 위한 분석용 영상 촬영도 이들의 몫이다. 축구부 공식 SNS 또한 여학생 매니저들의 재능기부만으로 운영되지만, 프로팀 계정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꾸며져 있었다.

그들에게 만만한 경기는 한 경기도 없었다 ⓒ 한국교원대 축구부 페이스북

어머니와 아버지도 빠질 수 없는 서포터였다. 이날 풀타임을 소화한 박형근의 어머니 이인수 씨는 “엘리트 선수들을 상대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모습에 울컥했다”며 “우리 아들뿐만 아니라 모든 선수가 애틋하고 자식 같이 느껴지는데 다친 상황에서도 괜찮다고 뛰는 모습이 안쓰러웠다”고 애잔한 마음을 표현했다. 이 씨는 이어 “아들이 집으로 돌아오면 맛있는 식사를 차려줘야겠다”며 아들에 대한 사랑을 나타냈다.

슈퍼매치, A매치 등 수 많은 경기를 접했지만 내 인생의 잊을 수 없는 경기를 손으로 꼽는다면 단연 한국교원대와 고려대의 경기를 얘기할 것 같다. 우리가 승리만을 바라보며 축구를 대하는 동안 한국교원대 선수들은 정말 순수한 열정으로 축구를 즐기고 있었다. 승리와 패배, 그런 것은 이차적인 것이었다. 그저 동료들과 함께 호흡하며 공을 찰 수 있다는 사실 하나로 그들은 이미 우승 이상의 행복을 누렸다. 이번 대회에서 한국교원대의 경기는 더 이상 볼 수 없지만, 그들이 기사를 본다면 박수와 함께 이 말을 꼭 전하고 싶다. 당신들은 단연 최고였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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