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일을 만나 중국 생활과 부천에서의 각오에 대해 들어봤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김형일이 돌아왔다. 국가대표로 태극마크까지 달았던 파이터형 수비수 김형일은 중국 슈퍼리그 광저우 에버그란데와 6개월 단기 계약을 맺었지만 결국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한 채 K리그로 복귀했다. 그런데 그의 행선지는 뜻밖이다. 포항스틸러스와 전북현대 등 K리그 빅클럽에서 뛰었던 김형일이 K리그 챌린지 부천FC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과연 그에게는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부천으로 달려가 김형일을 직접 만나 물었다.

반갑다. 중국에 6개월밖에 있지 않았지만 굉장한 부호 느낌이 난다.

머리를 길러서 그런 것 같다. 지난 해 말부터 기르기 시작했는데 이렇게까지 기를 줄은 몰랐다. 중국에 갔는데 중국 애들이 헤어스타일을 잘 못 만진다고 해 그냥 6개월 동안 더 길러봤다. 이제는 아까워서 못 자르겠다. 머리가 기니 중국 부호 느낌이 좀 나나.

아시아 최고 부자 구단 광저우 에버그란데에서 뛰었으니 이제 진짜 부호가 된 거 아닌가.

에이, 그런 거 아니다. 나는 거기 선수 중에 가장 거지였다.

지금 진짜 거지 앞에서 무슨 그런 말을 하나.

광저우 다른 선수들에 비하면 내가 가장 초라했다. 걔네들 장난 아니다. 주차장에 가면 슈퍼카가 즐비했고 씀씀이도 놀라웠다. 돈을 잘 버니까 쓰는 것도 다르더라. 그 친구들 슈퍼카 끌고 다닐 때 나는 도요타 타고 다녔다. 내가 제일 초라했다.

구단에서 좋은 차를 제공해주지 않나.

구단과 도요타가 계약이 돼 있었다. 외국인 선수들은 그냥 구단에서 제공해주는 도요타 차를 타고 다니고 중국 자국 선수들은 자기 돈으로 슈퍼카를 사서 끌고 다닌다. 광저우에서 뛸 정도면 중국에서 가장 성공한 선수들 아닌가. 중국 애들 스케일이 어마어마하더라. 나는 그냥 잠깐 그걸 체험하고 온 거다.

광저우 에버그란데에 김형일은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영입이었다. ⓒ광저우 에버그란데

요즘 몸 상태는 어떤가.

좋아지고 있다. 중국에서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해 나도 몸 상태가 걱정이 되기는 했다. 그런데 다행히 복귀전에서 무실점으로 이겨 부담감을 덜었다.

당신이 부천을 택한 건 의외의 선택이다.

광저우에서 이적을 알아보며 K리그 클래식 구단들과도 이야기를 나눴는데 이런 저런 상황이 있었고 그런 상태에서 부천에서 좋은 제안이 왔다. 제안을 받고 부천에 대해 알아보니 만만한 팀이 아니더라. 가능성도 충분히 있고 목표도 확실한 팀이었다. 여기에서 나이 많은 선수가 해야 할 역할을 하면서 어린 선수들과 같이 땀을 흘리면 올 겨울에 이 팀과 함께 K리그 클래식에 갈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하며 부천을 택하게 됐다.

K리그 클래식으로의 이적은 원소속팀인 전북에 보상금이 발생한다고 알고 있다. 그래서 K리그 챌린지로 갈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들었다. 맞나.

그건 맞다. 하지만 전북과의 관계도 있고 하니 그 부분에 대해서는 자세히 말하기가 조금 곤란하다.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당신은 내가 말하면 그냥 다 기사로 쓸 것 같다.

나 그런 사람 아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당신 입장이 있으니 넘어가겠다. 하지만 K리그 클래식에서 뛰다 K리그 챌린지로 내려오는 건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일 수도 있을 것 같다.

사실 K리그 챌린지 팀으로 이적하면 내가 다시 K리그 클래식으로 올라갈 수 있을까 걱정이 되는 것도 맞다. 아무래도 다른 선수들 역시 마찬가지일 것이다. 부천의 영입 제안을 받고 집에서 아내와 시간 단위로 계속 생각이 바뀌었다. 그런데 결론은 내가 가서 잘하면 팀과 함께 K리그 클래식에 갈 수 있고 그게 가장 좋은 그림이라고 판단했다. 걱정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인데 그렇게 마음을 정한 뒤에는 오히려 더 편해졌다.

광저우 에버그란데에 김형일은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영입이었다. ⓒ광저우 에버그란데

K리그로 돌아온 걸 환영한다. 광저우 이적 당시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달라.

지난해 12월 시즌이 끝나고 휴가를 받아 서울에 올라와 있는데 에이전트한테 연락이 왔다. “광저우에서 나를 원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생각할 시간은 딱 하루였다. “오늘 밤 안에 결정을 해주면 내일 당장 광저우에서 와 계약을 하겠다. 아니면 다른 선수를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김)영권이가 부상을 당해 그 자리를 아시아 쿼터 수비수로 6개월만 채우겠다는 내용이었는데 하루 만에 결정하기에는 너무 큰 일 아닌가. 당시 전북에서 최강희 감독님도 “몇 년 더 같이 하자”고 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돈도 돈이지만 지금이 아니면 해외에 나가서 축구를 해볼 기회가 현실적으로 없었다. 나이도 많은데 이런 기회가 또 올 것 같지 않았다. 그래서 바로 “가겠다”고 결정해서 에이전트한테 전달했다.

무슨 이적을 번갯불에 콩 볶아 먹듯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바로 광저우에서 부단장이 서울로 와 바로 계약서에 사인을 했고 그 다음날 내가 중국으로 가 메디컬 테스트를 받았다. 이틀 만에 급하게 이뤄진 결정이었다. 사실 광저우에 가면서 내가 엄청난 연봉을 받은 줄 아는 이들도 있다. 실제로 K리그에 비해 몇 배 더 많은 돈을 받은 선수들도 있는데 나는 그렇게 K리그 연봉의 몇 배 이상을 받은 건 아니다.

아무래도 광저우에서 당신의 지난 시즌 AFC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상하이 상강과의 경기 투혼을 감동적으로 본 게 아닐까. 그 당시 상대의 발을 머리로 막은 뒤 관중 호응을 유도하는 모습은 남자인 내가 봐도 정말 멋있었다.

뭐 그 경기를 보고 광저우에서 날 선택한 건지는 잘 모르겠다. 당시 경기를 앞두고 미팅을 하는데 최강희 감독님께서 “오늘은 너만 잘하면 이긴다”고 하셨고 무조건 이기고 싶었다. 골문이 빈 상황에서 내가 그걸 몸을 던져 막아냈는데 나는 그때만 하더라도 내 머리가 상대 머리와 충돌한 줄 알았다. 그런데 나중에 경기를 끝내고 영상을 보니 그게 상대 머리가 아니라 발이었더라. 나도 정신이 없었고 오로지 막겠다는 생각 뿐이었다. 그리고 팀을 위해 분위기를 끌어 올리고 싶어서 관중에게 더 큰 호응을 유도했다.

너무 멋있어서 나는 그 장면을 여러 번 돌려봤다.

멋있었나. 나도 사실 그 장면을 나도 여러 번 돌려봤다.

광저우에 갈 때는 어떤 각오였나. 워낙 쟁쟁한 선수들도 많았고 외국인 선수 수준이 대단한 팀 아닌가.

6개월 단기 계약이었고 일단은 그래도 그 기간 동안 한 5경기 정도는 뛰어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가능성을 보여주고 또 다른 중국 팀으로 이적하면 더 많은 경기에 나설 수 있다고 각오를 다졌다. 바로 광저우 클럽하우스로 간 건 아니고 곧바로 전지훈련지인 포르투갈에 합류했는데 그래도 중국에서 국가대표를 하는 선수들이다보니 눈빛에 자신감이 차 있더라. 우승도 많이 경험한 팀이어서 그런지 자부심이 느껴졌다. 비싼 호텔에서도 1인 1실을 썼고 훈련장도 포르투갈 대표팀 훈련장을 이용했다. ‘돈값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광저우 에버그란데에 김형일은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영입이었다. ⓒ광저우 에버그란데

직업훈련원을 숙소로 개조해서 쓰던 대전시티즌에서 뛸 때 당신을 처음 만났다. 그런데 아시아에서 가장 부자 구단까지 경험했다는 건 그 사이 엄청난 변화다. 나는 그때나 지금이나 궁핍한 건 그대로인데.

지금은 대전도 클럽하우스가 생기고 많이 좋아졌지만 내가 대전에 있을 때는 바닥에 이불을 깔고 자고 빨래하는데 세탁기가 고장 나서 최윤겸 감독님이 빨아주시고 그랬다. 그때에 비하면 환경이 좋은 곳에서 축구를 하게 된 건 사실이다. 내가 겪어본 광저우는 K리그 구단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한 구단이다. 유럽 빅클럽과 견줘야 할 정도다. 그런데 또 웃긴 건 클럽하우스하고 운동장은 별로 안 좋다는 거다. 선수들한테는 돈을 그렇게 많이 쓰면서 시설에는 많이 투자하지 않은 것 같다는 생각은 들더라. 클럽하우스만 놓고 보면 전북이나 포항이 더 낫다. 그런데 선수들에게 승리 수당을 두둑이 챙겨주니 불평불만은 별로 없는 거 같았다.

그곳에서의 생활은 어땠나.

6개월 단기 계약이라 따로 집을 구하지는 않았고 호텔에서 지냈다. 가족들은 한국과 중국을 오갔다. 그런데 날씨가 너무 더워 운동을 저녁 7시에 했고 일러야 오후 5시 훈련이다. 낮에는 밖이 너무 더워 호텔 밖으로 나갈 일이 별로 없었다.

직접 느낀 광저우 선수들의 수준은 어땠나.

수준은 높은 편이다. 중국에서도 가장 잘하는 선수들이 모인 팀 아닌가. 그리고 광저우가 다른 팀과 경기를 하면 딱 봐도 상대 선수들이 주눅이 든 게 보일 정도였다. 광저우는 11명 중 외국인 선수 세 명을 빼고는 8명이 다 자국 국가대표에 뽑히는 멤버인데 상대팀이 당연히 주눅이 들 수밖에 없다. K리그는 외국인 선수 싸움이 큰데 중국 슈퍼리그는 워낙 팀마다 외국인 선수 수준은 갖춰져 있고 비슷해서 자국 선수 싸움이 크다. 그런데 거기에서 광저우는 이미 다른 팀보다 먹고 들어간다.

하지만 결국 당신은 광저우에서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다.

중국 슈퍼리그는 내가 광저우에 입단할 때까지만 해도 세 명의 외국인 선수와 한 명의 아시아쿼터 선수를 경기에 투입할 수 있었는데 갑자기 규정이 바뀌었다. 내가 이적하고 채 한 달도 되지 않아 아시아 쿼터가 없어졌다. 굉장히 당황스러웠다. 아마 이 규정이 진작 발표됐으면 광저우에 가지 않았을 거다. 딱 규정이 발표되는 순간 ‘이거 한 경기도 못 나가겠다’는 생각이 딱 들었다. 동계훈련을 하면서 친해진 동료들도 “빨리 다른 팀을 알아보라”고 걱정해 주더라. 스콜라리 감독과 브라질 선수들은 1~2년 함께 한 사이가 아니라 믿음이 너무나도 두터운데 그중 한 명을 빼고 나를 투입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이야기였다. 나도 그 순간 가능성이 없음을 깨닫고 바로 다른 팀을 알아보기 시작했다.

중국 선수들이 당신의 일을 걱정해주는 것 보니 금방 친해진 모양이다.

많이 친해졌다. 그 친구들도 거의 다 중국 현역 대표선수들이고 실력도 있지만 그 친구들은 아직 월드컵을 나가보지 못했다는 것에 대해 아쉬워한다. 내가 2010년 남아공월드컵에 다녀온 걸 알고는 나한테 월드컵 본선 무대에 대해 많이 물어봤다. “월드컵 나가면 어떠냐”고 하더라. 그런데 내가 뭘 아나. 나는 월드컵 본선에서 한 경기도 못 뛰었는데. 그래도 그 친구들이 나는 월드컵 나갔다 온 선수라고 대우를 해주더라. 형으로서도 잘 모셔줘 금방 친해졌다.

중국 내 다른 팀으로의 이적도 생각했나.

물론이다. 중국 2부리그에서도 이적 제안이 왔는데 일단 내가 광저우에서 한 경기도 나가질 못했으니 실력을 입증할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계약이라는 게 사인까지 다 해야 완성되는 거다. 마지막에 몇 번이 틀어졌다. 결론적으로 나는 중국에서 실패했다. 중국에서도 여러 팀과 이적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결국 내가 계약서에 사인을 한 건 부천이다. 사인은 할 때까지 모르는 거다.

그래도 당신의 실력이 부족해서라기보다는 규정 변화를 탓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도 난 한 경기도 못 뛰지 않았나. 그건 규정에 문제가 있어도 결국 내 문제다. 내가 실력을 보여주고 감독님께 인정받았으면 한 경기라도 나갔을 것이다. 한 경기도 뛰지 못했으니 실패가 맞다.

규정 변화로 이적 후 한 달이 채 안 돼 경기 출장 가능성이 ‘0’에 가까워졌는데 조바심은 없었나. 뭔가 막 속은 것 같고 그런 느낌 말이다.

조바심은 없었다. 내가 팀 분위기를 흐리지 말고 내 운동만 열심히 하자고 생각했다. 다만 6개월 뒤 미래에 대한 걱정만 있었다.

나 같으면 6개월 단기 계약은 이미 맺었고 월급은 잘 들어오니 거의 ‘에라 모르겠다’식으로 나태해질 수도 있을 것 같다.

그래도 돈을 주고 나를 고용한 건데 나태해질 수는 없더라. (김)영권이가 잘해왔던 팀이고 또 돌아올 텐데 선배가 개판을 쳐놓고 가면 되겠나. 통역하는 친구도 나 때문에 고생이 많았다. 내가 경기에 나가야 그 친구도 수당을 받는 계약이었는데 내가 엔트리에도 못 드니 통역도 일이 없었다. 그런데 내가 또 처음 광저우에 와 이것저것 부탁할 것도 많았다. 미안한 마음이 커서 운동을 할 때는 나태해진 모습을 보여줄 수는 없었다.

광저우 에버그란데에 김형일은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영입이었다. ⓒ광저우 에버그란데

결국 당신은 6개월 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다. 부천이라는 팀과 함께 해보니 어떤가.

선수들이 다들 굉장히 열심히 한다. 모난 친구들도 없고 불평불만을 가진 친구도 아직까지는 못 봤다. 다들 열심히 하는데 그게 또 안쓰럽기도 하다. 이 친구들이 조금 더 좋은 환경에서 꿈을 키웠으면 하는데 아직은 구단 상황이 풍족하지는 않다. 그래서 내가 해야 할 역할이 뭔지 더 잘 알고 있다. 나는 항상 형들의 도움을 받고 여기까지 왔다. 경험이라는 건 그 누구도 처음부터 가질 수 있는 게 아니다. 옆에서 도와줄 수 있는 형들이 있어야 자기 경험을 쌓을 수 있다. 이건 나도 형들의 도움을 통해 성장한 경험이 있어서 하는 말이다. 이 친구들에게 내가 그런 형이 되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옆에서 많이 알려주고 도와주고 싶다.

어떤 부분이 가장 아쉽나.

숙소 생활이다. 부천은 4층짜리 건물을 따로 얻어서 선수들이 숙소와 식당으로 쓰고 있는데 1층은 식당이고 2,3층은 유소년들이 쓴다. 4층을 성인 선수들이 쓰는데 2층 침대를 놓고 선수들이 생활한다. 비좁기도 해서 선수들이 사비를 들여 나가 사는 경우가 많은데 어린 친구들이라 나가 살면 해결해야 할 게 많다. 음식 문제도 있고 돈을 많이 받는 것도 아닌데 지출도 생긴다. 조금 더 축구에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이 되면 좋겠다. 그런데 단장님과 이야기를 나눠보니 이 분이 사나이 중에 사나이다. 지를 땐 지르는 배포가 있으신 분이다. 우리가 성적을 내면 단장님이 충분히 해줄 거라고 믿는다. 우리는 단장님을 믿고 있다고 인터뷰에 꼭 써 달라.

알겠다. 그러면 부담감을 팍팍 느끼게 실명도 거론하자.

김종구 단장님이다.

김종구 단장님이 부천 선수들의 노력에 충분한 보상을 해줄 거라 믿는다.

나도 김종구 단장님을 믿는다.

김종구 단장님이 이끄는 부천은 특히나 어린 선수들이 많다.

나는 대전에 있을 때도 (최)은성이 형한테 많이 혼도 나고 좋은 이야기도 들으면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다. 포항에서는 (황)재원이 형한테 많은 가르침을 받았고 전북에서도 (조)성환이 형과 (이)동국이 형한테 많은 이야기를 들으며 고민이 있을 때마다 그 고비를 넘겼다. 이 친구들한테도 그런 선배가 있으면 축구선수로 더 성장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실력도 충분하고 열심히 하고 싸가지도 있다. 내가 더 가르쳐주고 더 같이하고 싶고 그렇다.

그런데 김신은 많이 자유분방해 보인다.

자유분방하긴 한데 애가 나쁜 애는 아니다. 운동장에서 자기 분을 못 이겨서 욱할 때도 있는데 지기 싫어서 그런 건 운동선수로서 어찌 보면 가지고 있어야 할 성격이다. 정말 나쁜 애 아니고 착하다.

당신이 ‘천방지축’ 바그닝요의 인성을 좀 잡아달라는 부탁을 누군가 나에게 하기도 했다.

운동장에서 감독님이 한마디를 하니까 바그닝요가 ‘꼬장’ 아닌 ‘꼬장’을 좀 부리더라. (김)신이도 마찬가지고 공격 선수들은 그런 것도 필요하긴 하다. 수비수들은 자기 혼자 하기보다 호흡을 맞춰 하는 게 강한데 공격수들은 조금 더 개성이 넘쳐야 한다. 충분히 그럴 수 있다. 바그닝요가 ‘천방지축’이긴 하지만 부천과 함께 K리그 클래식으로 승격하고 싶은 마음이 대단히 크다. 그래서 “그런 마음가짐으로 계속 하고 경고만 조심하자”고 했는데 지난 대전전에서 바로 경고를 받더라. 내 말을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린 모양이다.

부천이 어느덧 K리그 챌린지 3위까지 치고 올라왔다. 분위기는 어떤가.

분위기가 딱 좋을 때 내가 팀에 왔다. 그 전에는 좋을 때도 있고 좋지 않을 때도 있었다고 하는데 나는 딱 분위기가 좋을 때 들어와서 원래 팀 분위기가 이렇게 좋았던 걸로만 느껴진다. “형, 원래 우리 분위기 별로 안 좋았어요”라고 한 후배가 이야기를 해줬는데 나는 부천의 좋은 분위기만 겪어봐 잘 모르겠다.

그런데 하필이면 복귀전이 당신이 데뷔한 대전이었다.

경기 전에 대전 이영익 감독님과 만나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눴다. 대전에도 같이 있었고 내가 상주상무에 있을 때도 함께한 분이다. 그런데 요즘 많이 힘들어하시더라. 그 부분이 안타까웠다. 그리고 내가 대전에 있을 때는 관중이 그렇게 적지도 않았고 성적도 나쁘지 않았는데 분위기가 많이 가라앉은 것 같아 아쉬웠다. 개인적으로도 대전월드컵경기장에서 뛴 건 한 5~6년 만인 거 같다. 대전 팬들이 이름도 불러주시고 해 감사한 마음이었다.

경기 내용은 만족스러웠나.

사실 복귀전이어서 친정팀 상황까지 신경 쓸 여력은 많지 않았다. 일단 내 코가 석자 아닌가. 부담감도 있었고 선수들도 나를 따르는 느낌을 받아 책임감도 있었다. 공식 경기 출장은 지난 시즌 AFC 챔피언스리그 결승전이 마지막이었으니 7개월 만에 경기에 나선 거다. 오랜 만에 뛰는데 옆에 (임)동혁이, (고)명석이, 앞에 닐손주니어 이렇게 딱 보호막을 쳐놓고 “너희를 믿으니 많이 도와달라”고 했다. 경기 하는 내용을 보고 ‘오늘 이기겠다’ 싶었다. 팀도 자신감이 많이 쌓인 상황이고 나도 한두 경기만 더하면 더 자신감을 찾을 수 있을 것 같다.

광저우 에버그란데에 김형일은 크리스마스 선물 같은 영입이었다. ⓒ광저우 에버그란데

아직 경남FC, 부산아이파크와 승점 차이는 조금 벌어져 있지만 이제 부천도 추격의 발판을 마련한 것 같다.

지금 중위권에 위치한 팀들은 다 전력이 엇비슷하다. 위에만 보고 가면 힘들다. 경기가 끝나면 순위표 위쪽을 쳐다보며 “아직도 2위네. 3위네”하면 힘이 빠진다. 끝까지 지키고 플레이오프 커트라인 안에 들어 상승세를 타면 승격도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밑에 있는 팀들을 더 신경 써야 한다.

그렇다면 올 시즌 목표는 무엇인가. 승격을 한 번 이루고 싶은 열망이 강렬한 것 같다.

무조건 승격이다. 객관적으로 냉정하게 평가하자면 1위를 해 곧바로 승격하는 건 쉬운 일은 아닌 것 같다. 하지만 플레이오프를 통해 단판 승부를 거치면 충분히 승산이 있다고 본다. 개인적인 목표는 없다. 팀이 승격하면 그걸로 된다. 이 부천 선수들이 더 좋은 환경에서 대우를 받는 모습을 보고 싶다. 나는 처음에 대전에서 프로 생활을 시작했는데 처음 시작이었으니 환경이 얼마나 열악한지도 모르고 시작했다. 그러다 포항으로 이적했더니 환경이 너무나도 좋았고 또 전북엘 가보디 전북은 또 다른 수준이었다. 환경이 좋아지는 걸 계속 느끼면서 운동을 했다. 이 친구들도 그렇게 좋은 환경에서 축구에 집중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승격하면 그 목표를 더 이룰 수 있을 테니 올 시즌에는 꼭 승격을 하고 싶다.

김종구 단장도 아마 같은 마음일 거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1984년생인 당신은 어느덧 노장 축에 속하는 선수가 됐다. 앞으로 선수 생활의 마무리를 어떻게 하고 싶은가.

선수 생활을 더 오래하고 싶다. 딱히 몇 년을 정해놓고 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이)동국이 형이나 (염)기훈이 형처럼 잘나가면서 유명한 선수로 오래하고 싶다기보다는 그냥 축구 자체를 더 즐기고 싶은 마음이 크다. 중국에 있으면서 혼자 생각할 시간이 많았는데 한 번 실패를 경험하니 이제는 진짜 잇몸에서 피가 날 정도로 어금니를 꽉 깨물고 악착 같이 올라가겠다는 생각이 없어졌다. 그냥 재미있게 축구를 오래하고 싶다.

‘악으로 깡으로’ 뛰던 김형일은 이제 더 성숙해졌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여유와 배려가 느껴졌다. 비록 중국에서는 단 한 경기도 나서지 못했지만 그는 이 6개월의 시간 동안 많은 걸 배우고 돌아왔다. 그는 이 6개월을 실패라고 하지만 그의 축구 인생에 있어 이 시간은 무척이나 귀한 공부를 한 시간이었다. 이제는 후배들을 먼저 걱정하는 이 베테랑 수비수가 부천에서 ‘정신적인 지주’ 역할을 충분히 해내길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러면 아마 김종구 단장도 무언가 선수들을 위해 큰 보답을 해주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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