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명의 대학 축구선수에게 엄청난 일이 일어났다. ⓒ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지난 주말 K리그에서는 많은 이슈가 터져 나왔다. 인천은 적지에서 울산을 잡는 이변을 연출했고 이근호는 두 골이나 넣으면서 팀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수원의 희망’ 유주안은 데뷔전에서 1골 1도움을 기록하며 화려하게 등장했다. 상주는 6.25 전쟁이 일어난 날 ‘수사불패’의 정신을 보여줬고 황의조는 팬들에게 멋진 골을 선물하며 작별했다. 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고 있는 사실이 하나 있다. 오늘은 지난 주말 많은 이슈에 가려 우리가 주목하지 못한 한 선수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 한다. 갈 수 있는 대학이 없어 고민해야 했던 한 무명 선수가 아름다운 데뷔골을 기록했기 때문이다. 제주유나이티드 이은범에 관한 이야기다.

그가 갈 수 있는 학교는 단 한 곳 뿐

1996년생인 이은범은 초등학교 5학년 때 축구를 처음 시작해 중학교를 거칠 때만 하더라도 그럭저럭 좋은 평가를 받는 선수였다. 하지만 숭실고등학교에 입학한 뒤 좌절을 겪었다. 또래 선수들은 실력이 일취월장하는 시기였지만 이은범은 그렇지 못했다. 미드필더였던 그는 좀처럼 경기에 나서지 못하며 실력을 키울 수 있는 이 기회를 놓쳤다. 고등학교 3학년이면 주전으로 경기에 출장해야 대학교의 스카우트 제안을 받을 수 있지만 이 시기 이은범은 벤치만 지켰다. 한 살 나이 차이가 상당한 기량 차이로 나타나는 시기에 이은범은 자신보다 어린 후배에게까지도 주전 자리를 내줘야 했다. 이은범은 이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저보다 저학년 애들이 뛰는 걸 벤치에서 지켜볼 때는 정말 서러웠죠.”

이은범은 당시를 떠올리면서 이렇게 잘라 말했다. “실력이 많이 부족했으니 경기에 나설 수가 없었죠. 저보다 어린 친구들이 선발로 나가고 제가 가끔 교체로 나가는 게 전부였습니다.” 이은범은 이 시기 축구를 계속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했다. 하지만 축구가 너무 좋았고 축구가 아니면 다른 흥미도 없었다. 물론 고등학교 무대에서 아무 것도 보여주지 못한 이은범을 원하는 대학교는 없었다. 또래의 잘 나가는 선수, 혹은 배경이 좋은 선수들이 서울의 축구 명문 대학교의 스카우트를 받을 때 이은범을 숭실고 최진규 감독이 불렀다. “전라북도 남원에 서남대라고 있어. 거기 김기남 감독하고 이야기를 해봤는데 거기에선 널 받아주겠대. 서남대 말고는 딱히 다른 학교에 가기는 어려울 것 같아.” 이은범에게는 선택지가 없었다.

서남대는 대학 축구에서 약체 중의 약체였다. 2002년 창단했지만 이렇다 할 성적도 내지 못했고 이렇다 할 프로 선수도 배출하지 못했다. 대전시티즌에 잠시 입단했다가 내셔널리그 울산미포조선으로 이적한 정서운이 그나마 잘 풀린 케이스였다. 대학 축구계에서 서남대를 주목하는 이들은 없었다. 하지만 이은범에게는 서남대의 제안도 감사한 일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내내 제대로 된 경기도 보여주지 못했는데 그래도 대학교에 가서 축구를 계속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비록 명문 대학교는 아니지만 저를 불러주셨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했죠. 그리고 저희 고등학교 선배 한 명도 서남대에 가 잘하고 있어서 저도 학교가 어디건 열심히만 하면 된다는 생각을 햇어요.” 이은범은 그렇게 2014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서남대에 입학했다.

무명의 대학생에게 온 단 한 번의 기회

포항스틸러스와 부천SK에서 뛰며 선수 시절 빡빡머리로 유명했던 서남대 김기남 감독은 이은범을 가만히 지켜보고는 이렇게 말했다. “너 공격 한 번 해볼래?” 이전까지 미드필더였던 이은범의 빠른 스피드를 눈여겨 본 김기남 감독은 그에게 포지션 변경을 권유했다. “뒷 공간을 파고 드는 공격수가 되면 좋을 것 같아.” 성실한 이은범은 김기남 감독의 말만 따랐다. “항상 저는 감독님이 지시하는 대로 성실하게 하려고 해요. 원래 제가 스피드는 있는데 첫 볼 터치가 좋지 않은 편이었거든요. 공을 받아서 전개하는 것보다는 뒷 공간을 파고드는 공격이 더 편하더라고요.” 서남대에 진학한 이은범은 오른쪽 윙과 공격수를 번갈아 가며 소화했고 기량 발전을 이루기 시작했다. 서남대 김기남 감독은 “주목할 만한 선수를 꼽아달라”는 말에 늘 “(이)은범이는 뭔가 될 것 같다”고 기대했다.

이은범이 입학하고 활약하면서 서남대도 이변을 연출했다. 지방 무명 대학의 설움을 날리고 2015년 의외의 결과를 낸 것이다. 서남대는 전국체전 남자대학부에서 동메달을 따냈고 같은 해 32강이 치르는 U리그 왕중왕전에도 진출했다. 이은범은 당시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이름값에서는 우리가 부족했지만 소위 말하는 축구 명문 대학교하고 붙을 때도 우리가 진다는 생각을 한 적은 없어요. 그때 자신감이 많이 생긴 것 같아요. 대학 진학 후 힘도 많이 붙어서 스피드도 더 생겼어요.”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그전까지 약체였던 서남대가 이룬 의외의 성적이었을 뿐 여전히 다른 축구 명문 대학에 비하면 초라한 것이었다. 이은범은 기량이 성장하긴 했지만 대학 시절 내내 개인 타이틀 한 번 수상해 본 적도 없다. 대학 무대에서 이은범을 주목하는 이는 여전히 없었다.

그런데 지난해 10월 깜짝 놀랄 만한 제안이 왔다. 대학교 3학년이던 지난해 가을 한 스카우트로부터 연락을 받은 것이다. “대학 대회에서 널 많이 봐 왔어. 우리 팀 입단 테스트 한 번 받아보지 않을래?” 그런데 이 스카우트가 입단 테스트에 초청한 팀은 K리그에서도 보통 팀이 아니었다. 엄청난 몸값을 자랑하는 선수들을 보유한 제주유나이티드였기 때문이다. 대학 무대에서도 이름 한 번 제대로 날리지 못한 이은범으로서는 제주의 입단 테스트 초대 사실에 어안이 벙벙했다. “그냥 당황스러웠죠. 저한테 이런 기회가 와도 되나 싶었어요.” 이은범은 지난해 10월 제주 입단 테스트장에 합류했다. 물론 그에게 큰 긴장감은 없었다. “편했어요. 어차피 안 될 가능성이 더 크다고 생각하고 후회 없이 하자고 생각하니 긴장이 덜 되더라고요. 대신 내 장점을 살려 많이 움직이고 공간으로 침투하는 플레이만 잘하자고 생각했죠.”

이은범(맨 왼쪽)은 올 시즌을 앞두고 제주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 그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제주유나이티드

이은범, 제주 유니폼을 입기까지

제주는 기존 선수 중 경기에 자주 나서지 못하는 이들과 입단 테스트 초청자를 나눠 연습경기를 진행했다. 대학교에서 3년 동안 공격수로 활약했던 이은범은 이 연습경기에서 최선을 다했다. 그날따라 경기가 잘 풀렸다. 오히려 부담 없이 플레이를 했던 게 잘 먹혔다. 그리고 제주 측에서는 “곧 합격 여부를 통보해주겠다”고 했지만 두 달 가까운 시간 동안 제주에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이은범은 ‘어차피 후회 없이 플레이했으니 미련을 두지 말자’고 웃었다. 하지만 지난해 12월 이은범에게 믿기지 않는 전화가 걸려왔다. “이은범 선수, 전지훈련을 떠나는데 선수단에 합류할 수 있나요?” 제주에서 걸려온 전화였다. 이은범은 곧바로 학교 측에 양해를 구한 뒤 짐을 싸 제주의 동계전지훈련지인 일본으로 합류했다. 대학 축구 무대에서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무명의 선수가 ‘스타 군단’ 제주 선수들과 함께 뛰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주에서는 일본 현지에서 이은범에게 곧바로 계약서를 제시하지 않았다. 이은범은 초조해졌다. ‘혹시 이러다 계약이 불발되는 건 아닐까. 훈련장에서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면 계약을 못하는 건 아닐까.’ 처음에는 입단 테스트에 부담 없이 임했지만 눈앞에 K리그가 보이니 조바심이 나기 시작했다. 하지만 제주는 일본 전지훈련 기간 동안 이은범과 함께 하면서도 계약서를 제시하지 않았다. 그런데 전지훈련이 끝나고 한국으로 돌아오자 구단 측에서 다시 연락이 왔다. “이은범 선수, 우리와 계약하시죠.” 전지훈련지에서도 성실하고 묵묵하게 플레이하는 이은범을 계속 지켜보고는 제주에서 합격점을 내린 것이었다. 이은범은 그렇게 지난해 12월 K리그 제주유나이티드 선수가 됐다. 하지만 물론 그 누구도 ‘서남대 출신’ 이은범을 주목하지는 않았다.

이은범과 함께 경쟁해야 할 상대들은 엄청났다. 쟁쟁한 선수들이 많은 제주에서, 그것도 공격수로 경쟁하는 건 상당히 버거운 일이었다. 제주에는 마르셀로와 멘디는 물론 안현범, 황일수, 진성욱, 배일환, 이준혁 등 훌륭한 공격수들이 즐비했다. 이제 이은범에게 K리그는 꿈이 아니라 현실이었다. ‘여기에서 잘해서 경기에는 한 번이라도 나갈 수 있을까. 1년 후에 방출당하는 건 아닐까.’ 하지만 이은범은 부딪혀 보기로 했다. 연습경기나 R리그(2군리그)에 출장하면 어떻게든 공격 포인트를 기록해 어필하려고 노력했다. 스물한 살의 어린 선수가 열심히 하니 하늘 같은 선배들도 이은범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형들은 그의 출신 학교를 듣고는 깜짝 놀랐다. 형들은 이은범에게 장난 삼아 ‘흙수저’라고 부르면서 “너같은 ‘흙수저’가 성공해야 더 많은 후배들이 희망을 얻는다”고 응원했다. 대학 시절 한 가닥씩 하며 대학 무대를 주름 잡았던 형들에게 이은범은 ‘흙수저’가 분명했다.

이은범(맨 왼쪽)은 올 시즌을 앞두고 제주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 그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제주유나이티드

믿을 수 없는 그의 K리그 데뷔

의외의 행운이 찾아오는 것 같았다. K리그 개막전 강원과의 경기 직전 엔트리에 들었던 진성욱이 갑자기 감기 몸살로 컨디션 난조에 빠진 것이었다. 제주 조성환 감독은 과감하게 무명의 이은범을 진성욱 대신 후보 명단에 포함시켰다. 평소 훈련장에서 성실하고 열심히하는 이은범을 조성환 감독이 좋게 본 것이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은범은 벤치 멤버였다. 공격 자원 중에는 제3, 제4 옵션이었다. 이날 이은범은 출장하지 못했고 그렇게 석 달 가까운 시간 동안 1군 무대에서 기회를 잡지 못했다. 그는 지난 6일 벌어진 FA컵 16강 수원삼성과의 경기에서도 백업 멤버로 이름을 올렸지만 출장 기회는 없었다. 무명의 선수가 제주에서 두 번이나 엔트리에 들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놀라운 일이었다.

지난 18일 강원 원정을 치른 제주는 나흘 뒤 울산으로 가 또 리그 경기를 치르는 강행군을 펼쳐야 했다. 그런데 깜짝 놀랄 일이 벌어졌다. 제주 조성환 감독은 경기 당일 경기장에서 선발 명단을 발표하는데 울산전이 열리기 직전 선수들을 다 모아 놓고는 이런 말을 했다. “오늘 깜짝 놀랄 일이 있어. 이은범이 선발로 나간다.” 파격적인 선택이었다. 이제 갓 스물한 살의 무명 선수가 제주의 전방에 서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은범은 이 사실을 믿을 수 없었다. “갑자기 등에서 땀이 나고 손이 벌벌 떨리더라고요. 형들이 ‘긴장하지 말고 잘하라’고 격려해 주는데 그 말도 안 들렸어요.” 불과 3년 반 전만 하더라도 갈 대학이 없어 걱정하고 무명 대학에 가 이렇다 할 주목 한 번 받지 못한 선수의 기가 막힌 반전이었다. 이은범은 이날 울산과의 원정경기에 선발 출장해 멘디, 마그노, 마르셀로 등과 발을 맞추고 후반 18분 진성욱과 교체됐다.

이은범은 이날의 플레이가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긴장도 많이 해 소심하게 한 것 같아요. 전방 깊숙이 침투하지 못하고 하프라인 쪽에서 형들한테 공만 준 것 같아 아쉬웠죠.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어요.” 파격적인 이은범의 기용은 제주가 나흘 간격으로 경기를 치르고 부상자도 많아 한 번 정도 새로운 카드를 쓴 것처럼 보였다. 그런데 울산전이 끝나고 또 나흘 뒤인 지난 24일 포항전을 바로 앞두고 선수들을 모은 조성환 감독은 다시 한 번 깜짝 놀랄 만한 선발 명단을 선보였다. 선발 명단에는 또 이은범의 이름이 선명하게 적혀있었다. 두 경기 연속 선발 출장이었다. 그것도 쟁쟁한 공격수들이 포진한 제주에서 일어난 믿기지 않는 일이었다. 이은범은 데뷔전에서의 소심한 플레이를 떨쳐내기 위해 공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자고 다짐했다.

이은범(맨 왼쪽)은 올 시즌을 앞두고 제주유나이티드에 입단했다. 그에게는 기적 같은 일이었다. ⓒ제주유나이티드

무명의 ‘흙수저’가 K리그에서 골을 넣었다

포항과의 두 번째 경기는 데뷔전보다 훨씬 수월했다. 팀도 전반 27분 만에 멘디가 첫 골을 기록했고 후반 7분에도 한 골을 더 뽑아내며 경기를 잘 풀어나갔다. 그런데 후반 12분 믿기지 않는 일이 벌어졌다. 마르셀로의 패스를 이어받은 이은범이 침투하며 왼발로 툭 차 넣은 공이 그대로 포항 골문으로 빨려 들어갔기 때문이다. 이은범이 K리그 데뷔골을 기록하는 순간이었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던 이 무명의 선수가 K리그에 족적을 남기는 역사적인 순간이었다. 이은범을 이 순간 눈물을 꾹 참았다. “너무 행복했어요. 눈물이 나려고 했습니다.” 이날 제주는 멘디의 두 골과 이은범의 데뷔골까지 보태 포항에 3-0 완승을 거뒀다. 경기가 끝난 뒤 형들은 “흙수저가 해냈다”면서 자신의 일처럼 기뻐했다. 부끄러움이 많아 잘 표현하지 못하는 이은범보다도 오히려 “이런 선수도 프로에 와서 보란 듯이 골을 넣을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면서 동료들이 더 좋아했다.

이은범의 목표는 가장 원대하면서도 소박하다. 그리고 때 묻었으면서도 가장 순수하다. “돈을 많이 벌어서 행복하게 살고 싶다”는 게 이은범의 목표다. “왜 돈을 많이 벌고 싶느냐”고 묻자 또 순수한 대답이 돌아온다. “돈이 많으면 행복하지 않을까요. 돈 많이 벌어서 부모님 호강시켜드려야죠.” 지난 주말 K리그에서는 더 화려한 소식이 많아 이은범의 데뷔골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성공 스토리는 반드시 많이 알려져야 한다. 그게 또 다른 ‘흙수저’들에게 희망이 되는 일이기 때문이다. 이은범은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형들이 저를 보고 ‘흙수저’라고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보면 제가 ‘흙수저’죠.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때까지 빛나본 적도 없고 누구의 힘을 빌려본 적도 없거든요. 그런데 포기하지 않고 버티니 이렇게 좋은 기회가 오네요. 이 땅에서 ‘흙수저’라는 소리를 듣는 많은 분들이 포기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이런 인터뷰는 처음이라 제가 말주변이 없어요. 죄송해요.” 하지만 괜찮다. 이은범은 수천 마디 말보다 더 의미 있는 골을 보여주지 않았는가.

footballavenue@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