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FIFA 공식 홈페이지

[스포츠니어스ㅣ남윤성 기자] 스페인어로 농장을 뜻하는 ‘라 마시아’는 FC바르셀로나 유소년 시스템의 산실이다. 전설 요한 크루이프가 직접 자신의 축구 철학을 바탕으로 초석을 다져 완성시킨 라 마시아는 이후 리오넬 메시와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사비 에르난데스, 카를레스 푸욜, 헤라르드 피케 등 수많은 축구 스타들을 양성해내며 세계 최고의 유소년 시스템으로 성장했다. 그러자 전 세계의 관심이 라마시아 재능들에게로 향하기 시작했다. 바르셀로나의 어린 재능들은 포지션에 따라 제2의 ○○라 불리며 주목 받았다. 특히 공격 포지션에서 활약하는 어린 선수들은 모두 ‘제2의 메시’라 불렸다. 하지만 십 년, 아니 백 년에 한번 나오기도 힘든 메시와 같은 재능을 갖추기란 애초에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결국 이들 중 대부분은 그 부담감을 극복해내지 못했고 1군에서 자리 잡는데 실패하며 이적을 선택해야 했다. ‘제2의 메시’라 평가받던 바르셀로나의 재능들, 이들은 과연 지금 어디에서 뭐하고 있을까.

2007년 처음으로 등장한 ‘제2의 메시’

지오반니 도스 산토스와 보얀 크르키치는 ‘제2의 메시’의 조상격인 선수들이다. 지난 2004년 리오넬 메시가 1군에서 성공적으로 안착하자 왼발을 자유자재로 사용했던 도스 산토스와 1999년 합류한 이후 모든 경기에서 도합 900골 이상을 기록하고 있었던 보얀을 향한 구단의 기대감은 한없이 높아져만 갔다. 이들의 콤비는 마치 수학의 공식과도 같았다. 우선 도스 산토스가 측면에서 공을 잡는다. 이후 좁은 공간에서 화려한 드리블로 수비수 2-3명 사이를 거뜬히 뚫어낸 뒤 보얀에게 정확한 패스를 연결한다. 공을 잡은 보얀은 또다시 수비수 2-3명을 제쳐내고 득점으로 마무리했다.

이 중 먼저 두각을 드러낸 건 도스 산토스였다. 도스 산토스는 페루에서 열린 2005 FIFA U-17 월드컵에서 뛰어난 활약을 펼치며 멕시코의 대회 우승을 이끌었다. 화려한 드리블과 홀로 경기의 흐름을 뒤바꾸는 능력, 뒤로 곱게 묶은 머리까지. 사람들은 호나우지뉴의 재림이라 표현하며 그에게 열광했다. 대회가 끝나자 프리미어리그의 첼시를 비롯한 수많은 클럽들이 그의 영입을 시도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는 1군과 훈련 기회를 제공하며 클럽의 미래를 지켜내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 UEFA 공식 홈페이지

보얀은 2007년 우리나라에서 열린 FIFA U-17 월드컵에서 스페인 대표로 출전해 5골을 기록하며 팀의 준우승을 이끌었고 대회 브론즈볼을 수상했다. 바르셀로나 입장에서는 그의 데뷔를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해 만 17세 19일 나이로 1군에 데뷔하며 메시가 보유하고 있었던 바르셀로나 최연소 데뷔기록을 깼다. 또한 데뷔시즌 리그에서만 두 자릿수 득점을 기록하며 라이벌 레알 마드리드의 전설 라울 곤잘레스가 보유하고 있던 라 리가 데뷔시즌 최다골 기록마저 경신했다. 언론과 팬들은 그를 적어도 메시만큼 성장할 것이라는 의미에서 ‘최소 메시’로 표현하기 시작했다.

07/08시즌 나란히 데뷔에 성공한 도스 산토스와 보얀은 구단에서의 밝은 미래를 함께 꿈꿔나갔다. 하지만 호나우지뉴와 사무엘 에투 그리고 티에리 앙리는 도저히 넘을 수 없는 장벽이었다. 또한 메시는 이미 클럽의 미래로 확고하게 자리 잡은 상태였다. 비집고 들어갈 틈이 도저히 보이지 않았다. 그러던 와중에 도스 산토스가 주급인상을 요구하며 구단을 협박하기 시작했다. 안 그래도 잦은 부상과 기대에 못 미치는 성장세로 실망감을 느끼고 있었던 바르셀로나는 미련 없이 그를 이적료 600만 파운드(한화 약 95억 원)에 토트넘으로 팔아버렸다. 도스 산토스는 이후 끝없는 추락을 경험했다. 토트넘에서의 네 시즌동안 출전 수는 고작 33경기에 그쳤고 뚜렷한 활약 없이 임대로 여러 팀을 전전했다. 그러던 지난 13/14시즌 라 리가의 비야레알에서 두 자릿수 득점에 성공하며 부활의 조짐을 보였지만 이듬해 또다시 미미한 활약을 펼치며 팀을 떠나야 했다. 도스 산토스는 현재 미국의 LA갤럭시에서 활약하고 있다.

ⓒ UEFA 공식 홈페이지

도스 산토스에 비해 성공적인 데뷔시즌을 보낸 보얀은 바르셀로나에 남아 경쟁을 이어나갔다. 2년차 징크스도 나름 잘 극복해냈다. 하지만 말이 너무 많았다. 선발명단에 이름을 올리지 못하는 날에는 인터뷰를 통해 온갖 불평불만을 쏟아냈다. 펩 과르디올라는 이례적으로 그런 그를 어르고 달래가며 경기에 출전시켰지만 인내심에도 한계가 있었다. 또한 보얀의 성장세도 메시와 비교했을 때 한계가 분명했다. 결국 1,200만 유로(한화 약 190억 원)의 이적료에 2011년 AS로마로 떠나보냈다. 이후 그는 매년 임대로 팀을 옮겨 다니며 도스 산토스와 비슷한 행보를 보였다. 14/15시즌을 앞두고 프리미어리그의 스토크 시티에 합류한 보얀은 초반에는 괜찮게 활약했다. 사람들은 그가 득점을 기록할 때마다 혹시나 하는 기대감을 품었다. 하지만 보얀은 결국 ‘제2의 메시’라 불리던 과거의 모습을 보여주는데 실패하며 마인츠 임대를 끝마치고 원소속팀 스토크로 복귀했다.

이스라엘 메시, 가이 애슐린

과거 축구계 변방국에 불과했던 이스라엘에서 메시가 탄생할 뻔한 적이 있었다. 그 주인공은 바로 가이 애슐린이었다. 이스라엘의 하포엘에서 축구를 시작한 애슐린은 12살이던 지난 2003년 코치의 제안으로 바르셀로나 입단 테스트를 보게 된다. 또래에 비해 체격은 왜소했지만 기술적으로 굉장히 훌륭했던 애슐린은 테스트에 합격하며 라마시아에 발을 내딛었다. 4년간 아카데미에서 기량을 갈고닦은 그는 2007년 바르셀로나B에 합류하며 프로계약을 맺게 된다. 훌륭한 개인능력 말고도 드리블 동작, 달리기 스텝, 정갈하게 기른 단발머리까지 메시를 똑 닮았던 애슐린은 이후 ‘이스라엘 메시’라 불리며 구단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 UEFA 공식 홈페이지

하지만 결국 그 역시 메시로 성장하는 데에는 실패하고 말았다. 무엇보다 애슐린이 활약하던 당시 바르셀로나가 너무 잘나갔다. 공격진에는 메시 외에도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 티에리 앙리, 페드로, 보얀 등 세계적인 선수들이 즐비하고 있었다. 애슐린은 2011년 자국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리오넬 메시 같이 되기란 불가능하다고 생각해요. 메시는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선수입니다. 바르셀로나에서 저는 그저 제대로 축구하는 방법을 배운 어린 아이에 불과했죠”라고 말하며 ‘제2의 메시’로서 받았던 부담감을 토로하기도 했다. 결국 코파델레이 1경기 출전을 끝으로 바르셀로나 생활을 정리한 그는 맨체스터 시티와 라싱 산탄데르, 그라나다 등을 거쳐 현재는 스페인 세군다B 디비시온(3부)의 사바델에서 활약하고 있다.

또 다른 라마시아 듀오, 이삭 쿠엔카 & 크리스티안 테요

카탈루냐 지역의 소도시 사바델에서 축구를 시작한 크리스티안 테요는 2002년 라마시아에 합류한 이후 2007년까지 줄곧 중앙공격수로 활약했다. 그는 한 시즌에 64골을 기록하기도 했다. 하지만 바르셀로나의 코치진은 그의 성장세가 더디다고 판단했고 결국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그를 방출했다. 성장한 클럽으로부터 버림받은 테요는 연고지 라이벌인 에스파뇰에 입단하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하지만 일찍이 그의 재능을 눈여겨 본 이가 있었으니 바로 루이스 엔리케(당시 바르셀로나B 감독)였다. 엔리케는 직접 유소년 경기장을 찾아가는 노력 끝에 테요의 마음을 되돌리는데 성공했고 이후 바르셀로나B로 그를 데려올 수 있었다.

ⓒ UEFA 공식 홈페이지

구단으로부터 버림받은 선수를 재영입하는 엔리케의 노력은 테요에서 그치지 않았다. 이삭 쿠엔카는 갈리시아 지방의 라코루냐 주에 위치한 작은 도시 로이스에서 축구를 시작했다. 유소년 시절 쿠엔카를 지도했던 코치는 그가 공을 떨어뜨리지 않고 수 마일을 이동할 수 있다고 이야기하기도 했다. 그만큼 선천적으로 기술적이고 타고난 재능을 갖췄던 쿠엔카는 결국 스카우터의 눈에 띄어 라마시아에 입성한다. 하지만 ‘이스라엘 메시’ 가이 애슐린에 밀리며 제대로 활약하지 못했고 결국 고향 로이스로 돌아와야 했다. 고향에서 편안함을 되찾은 쿠엔카는 이내 재능을 맘껏 드러내기 시작했고 엔리케의 부름을 받아 바르셀로나에 재입성하게 된다. 이후 사바델 임대를 통해 성인 무대에 완벽하게 적응한 쿠엔카는 11/12시즌을 앞둔 프리시즌 테요와 함께 1군에 합류, 꿈에 그리던 바르셀로나 1군 데뷔에 성공했다.

ⓒ UEFA 공식 홈페이지

라마시아에서 함께 호흡을 맞추며 성장한 쿠엔카와 테요는 11/12시즌 공격진의 장기 부상과 잇따른 부진으로 기회를 잡아 나갔다. 이들은 데뷔와 동시에 알토란같은 활약을 펼쳤고 카를레스 푸욜과 빅토르 발데스를 비롯한 노장들은 인터뷰를 통해 그들의 성실함과 팀에 대한 기여를 극찬했다. 하지만 언론과 팬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이들은 보다 화려하고 보다 뛰어난 선수의 영입을 희망했다. 결국 쿠엔카와 테요는 주변의 이러한 압박을 이겨내지 못하며 부진의 늪에 빠져들었다. 이들은 14/15시즌 나란히 바르셀로나를 떠나 새로운 도전을 시작했다. 현재 쿠엔카는 라 리가의 그라나다에 테요는 세리에A의 피오렌티나에서 활약하고 있다.

진정한 재능의 자격을 갖춘 데울로페우

될성부른 떡잎이 올곧게 성장해 친정팀으로 돌아오려 하고 있다. 헤라르드 데울로페우는 라마시아의 역대급 재능이었다. 그는 9살 나이에 라마시아에 입단한 이후 월반에 월반을 거듭하며 성장했다. 16살이던 지난 2011년에는 바르셀로나B에서 데뷔하며 경쟁력을 입증했다. 2012년에는 UEFA U-19 챔피언십에 참가, 스페인의 우승을 이끌며 대회 최우수 선수상을 수상했다. 작은 체구와 영리한 두뇌, 폭발적인 스피드와 화려한 드리블 기술로 상대 수비진을 헤집는 그의 모습에 팬들은 이제는 너무나 당연히 ‘제2의 메시’란 별명을 붙였으며 언론은 레알 마드리드의 헤세 로드리게스, 리버풀의 수소, 발렌시아의 파코 알카세르와 함께 데울로페우를 ‘다음시즌 1군 무대에 데뷔할 특급재능’으로 소개했다.

ⓒ UEFA 공식 홈페이지

과거 ‘제2의 메시’로 평가받던 재능들이 부담감을 떨쳐내지 못하고 몰락하는 일을 수차례 경험했었기에, 당시 구단의 스포르팅 디렉터였던 안도니 수비사레타는 “데울로페우는 제2의 메시가 절대 아니다. 선수의 성장을 위해서 언론은 특정 선수를 메시와 비교하는 것을 삼가야한다”고 밝히며 데울로페우를 적극 보호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구단의 배려로 데울로페우는 상대적으로 부담감을 덜 느끼며 성장을 계속했고 에버튼과 세비야 임대를 통해 프로무대에 성공적으로 적응해나갔다. 15/16시즌을 앞두고 친정팀으로 돌아온 그는 회장과의 면담을 통해 주전으로 활약하는 것에 대한 욕심을 밝혔고 바이백 조항을 포함하는 조건으로 에버튼으로 완전 이적했다. 비록 시즌 초 주전경쟁에서 밀리며 임대를 떠나야 했지만 AC밀란에서 완벽하게 부활에 성공, 지난 3월에는 대표팀에 오랜만에 복귀하기도 했다. 그의 눈부신 활약에 친정팀 바르셀로나는 이번 여름 이적시장을 통해 바이백 조항을 발동시키려는 조짐을 보이고 있다. 과연 데올로페우는 MSN 사이에서도 진정한 재능임을 증명할 수 있을까. 여름 이적시장이 더욱 기대되는 이유다.

‘죽여야만 그를 막을 수 있었다’, 검은 메시 아다마 트라오레

라마시아에 입단한 8살 때부터 특급 재능으로 손꼽혔던 아다마 트라오레가 바르셀로나를 떠나야 했던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그의 플레이스타일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바르셀로나의 축구철학과 맞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아프리카의 말리 이민자 부모 사이에서 태어난 트라오레는 라마시아에 합류하자마자 탁월한 재능을 드러냈다. 그는 훌륭한 신체 밸런스와 스피드를 앞세워 동나이대 수비수들을 말 그대로 산산조각 냈다. 라마시아에서 트라오레를 3년간 지도했던 안드레스 카라소 코치는 그를 이렇게 표현했다. "트라오레는 내가 본 선수들 중 가장 빨랐으며 측면의 진정한 지배자였다. 14~15살이었을 때 그를 막을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은 죽이는 것 말고는 없었다“

일찍이 유소년 수준을 초월했던 트라오레는 17살에 바르셀로나B에서 데뷔했고 같은 해 라 리가와 UEFA 챔피언스리그에서도 데뷔하며 앞으로의 활약을 예고했다. 하지만 이듬해 루이스 엔리케가 바르셀로나 지휘봉을 잡으면서 이상 기류가 흐르기 시작했다. 엔리케는 그의 부족한 전술 이해능력과 단순한 스타일을 이유로 삼으며 경기출장을 보장해줄 수 없다는 뜻을 밝혔다. 친정팀으로부터 사실상 방출 통보 소식을 접한 트라오레는 출전시간을 보장받으며 동시에 높은 주급을 받을 수 있는 팀을 찾기에 나섰다. 바르셀로나 특급을 손에 쥘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소식에 유럽 빅리그 클럽들이 그에게 접근을 시도했다.

ⓒ UEFA 공식 홈페이지

선택은 결국 프리미어리그의 아스톤빌라였다. 팀 셔우드 감독은 그에게 정기적인 출장을 약속함과 동시에 주급 40,000파운드(한화 약 6,600만원)를 제시했다. 하지만 입단 첫해 강등을 경험하면서 이번 시즌을 앞두고 미들즈브러로 유니폼을 입었다. 미들즈브러에서는 보다 정기적으로 출전기회를 받기 시작했고 모든 대회에 나서 28경기에 출전했다. 출전횟수가 많아지자 자신감도 회복했다. 직선적이고 과감한 플레이는 더욱 빛을 발했고 기술적인 부분에서의 잔실수는 줄었다. 앞에서부터 적극적으로 수비하는 방법도 깨달았다. 하지만 또다시 강등이었다. 새로운 시즌을 앞둔 현재 영국 언론은 리그 우승팀 첼시와 리버풀, 에버튼을 비롯한 수많은 프리미어리그 클럽들이 그의 영입전에 가세했다고 보도했다. 바르셀로나를 떠난 트라올레의 선택은 빠르진 않지만 꾸준한 성장이었다. 다가오는 시즌 과연 그는 월드클래스 자질을 갖췄음을 증명해낼 수 있을 것인가.

라 마시아는 지난 2010년 백승호와 이듬해 이승우, 장결희가 연달아 합류하며 국내 축구팬들에게 더욱 익숙해졌다. 이들은 ‘바르셀로나 트리오’로 불리며 한국 축구의 미래로 급부상했다. 특히 이승우는 스페인 현지 언론으로부터 ‘제2의 메시’로 평가받으며 전 세계가 주목하는 재능으로 손꼽혔다. 하지만 뜻하지 않은 위기가 찾아왔다. 지난 2013년 바르셀로나가 유소년 영입규정을 위반하며 FIFA로부터 3년간 공식경기 출전정지 징계를 받은 것이다. 그로부터 4년이 흐른 지난 5월, 이들의 재능을 확인할 수 있었던 2017 FIFA U-20 월드컵이 우리나라에서 펼쳐졌다. 비록 백승호와 이승우만이 태극마크를 달고 그라운드를 누볐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재능을 맘껏 드러냈다. 하지만 분명 한계가 있었다. 이들도 인터뷰에서 1군 데뷔의 중요성을 여실히 깨달았다고 밝혔다.

이후 끊임없이 이적설이 제기되고 있다. 대상은 ‘코리안 메시’ 이승우다. 독일과 스페인 언론은 “분데스리가의 도르트문트와 샬케를 비롯한 유럽의 수많은 클럽들이 그의 영입을 희망하고 있다”고 보도했고 이에 이승우도 “이적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고 밝혔다. 2007년부터 계속된 그리고 앞으로도 이어질 ‘제2의 메시’ 논란, 좋았고 나빴던 경우들을 본보기로 삼아 이승우가 얼른 그라운드 위에서 자신의 능력을 선보이는 날이 다가왔으면 좋겠다.

skadbstjdsla@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