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 중국 베이징 쿵구(2부)의 체이크 티오테가 훈련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 뉴캐슬 유나이티드 공식 홈페이지

[스포츠니어스ㅣ남윤성 기자] 지난 5일 중국 베이징에서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과거 프리미어리그 뉴캐슬에서 활약하고 월드컵에도 2회 출전했던 미드필더 체이크 티오테(31·코트디부아르)가 훈련 도중 심장마비로 사망한 것이다. 갑작스런 그의 사망 소식에 동료들을 비롯한 수많은 팬들이 SNS를 통해 떠나는 그를 추모했다.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쓰러진 사례는 우리나라에서도 적지 않게 발생했다. 제주 유나이티드 소속의 신영록은 지난 2011년 경기종료를 앞두고 심장마비로 그라운드에 쓰러졌고 2013년에는 FC서울의 몰리나가 부산 아이파크 수비수 김응진과의 충돌로 의식을 잃기도 했다. <스포츠니어스>는 이번 사고를 통해 축구계가 반드시 되돌아보고 반성해야할 과거의 사건·사고들을 소개해보고자 한다.

심장질환, 경기 중 사망의 주원인

심장 발작, 심근 경색, 심부전증, 협심증 등 심장질환은 축구를 비롯한 대부분의 스포츠에서 경기 중 사망의 주원인이 되고 있다. 선수들의 심장은 무덥고 추운 날씨 속에서 치러지는 경기와 과열되는 경기 양상에서 템포를 갑자기 올리거나 낮추는 도중 무리를 받게 된다. 이 같은 사례를 방지하기 위해 협회와 구단은 시즌 전후로 선수들의 몸 상태를 체크하고 전문 의료팀을 두어 훈련과 경기 중에도 수시로 맥박을 체크하고 있다. 하지만 검진과 예방으로도 잡아내지 못하는 부분이 있어 안타까운 사례들은 계속해서 발생하고 있다.

못다 핀 꽃 한 송이, 숭실대학교 김도연

대한민국 국민들에게 월드컵 4강 신화를 달성한 2002년은 영원히 잊을 수 없는 해이다. 하지만 누군가에게는 다른 의미로 영원히 잊지 못할 해가 되고 말았다. 우리 모두가 목청 높여 대한민국을 외치고 열광할 때 다른 누군가는 목 놓아 울고 있었다. 대한민국이 월드컵의 함성으로 뒤덮이기 전인 4월, 강원도 속초시에서 제38회 전국대학춘계연맹전이 펼쳐졌다.

당시 경기장은 대부분 해안가 근처에 위치하고 있어 날씨는 4월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몹시 추웠다. 이로 인해 선수들이 힘차게 누벼야 할 그라운드는 시멘트 바닥과 같이 딱딱했다. 또한 황사를 동반한 강풍까지 몰아쳐 선수들은 제대로 공을 찰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대학축구연맹은 장소와 일정의 변경 없이 대회를 강행했다. 이미 타이트한 일정에 부담을 느끼고 있었던 선수들은 신체적인 피로감이 이중으로 겹쳐오는 상황에서 경기를 치러야했다.

우려는 결국 현실이 됐다. 4월 17일 오후 4시15분 엑스포의 A구장에서 펼쳐진 조선대학교와 숭실대학교의 경기에서 후반 23분 숭실대의 김도연이 교체되어 그라운드를 밟았다. 당시 2학년에 재학 중이던 그는 감독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투입 직후 누구보다 열심히 경기장 이곳저곳을 누볐다. 하지만 가혹하게도 그에게 주어졌던 시간은 고작 3분이 전부였다. 후반 26분 어지럼증을 호소하던 김도연이 갑자기 의식을 잃고 그라운드위에 쓰러졌다. 심폐소생술을 비롯한 심장충격기의 응급조치가 필요했다. 하지만 그를 살려낼 구조대와 엠뷸런스가 보이지 않았다. 경기 전 빈혈을 일으킨 간호사를 병원으로 이송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야속한 시간만 흘러갔다. 결국 속초소방서 구급대가 출동하고 나서야 심장마사지 등의 응급조치가 이뤄졌다. 하지만 호흡과 맥박은 이미 멈춘 상태였다. 졸지에 제자와 동료를 잃은 신연호 당시 숭실대 감독과 선수들은 모두 망연자실했다. 조치가 신속하게 이뤄지기만 했어도 최악의 상황은 발생하지 않을 수 있었기에 사고의 여파는 더욱 컸다. 결국 춘계대학연맹전은 중도 취소됐고 유병진 당시 대학축구연맹 회장도 자진사퇴했다. 대한축구협회는 사고 이후 구급차가 운동장에 대기하고 있지 않으면 경기를 진행하지 않는다는 지침을 내렸다. 또한 더운 여름에는 주심의 재량에 따라 경기 중 ‘워터타임’ 제도가 도입됐다. 하지만 그 어떠한 조치도 사망한 김도연과 유가족을 위한 근본적인 대책이 되지는 못했다.

검은 사자의 죽음, 마르크 비비앙 푀 (Marc-Vivien Foé)

2003년 여름 유럽에 들이닥친 전례 없는 폭염은 3만5천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불행하게도 이 비극은 축구계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6월 26일 프랑스 리옹의 스타드 드 제를랑에서 카메룬과 콜롬비아의 컨페더레이션스컵 준결승전이 펼쳐졌다. 카메룬은 전반 9분 터진 피어스 은디에피의 선취골로 앞서갔지만 이후 콜롬비아의 거센 공세를 받았다. 사건은 후반 18분 발생했다. 센터서클 근처에서 카메룬의 미드필더 마르크 비비앙 푀가 갑자기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급히 의료진과 들것이 급히 투입됐지만 신속한 응급조치는 이뤄지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경기 중 응급사태에 대한 FIFA의 지침과 교육이 따로 실시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경기는 비비앙 푀가 응급실로 이송된 이후 재개됐다. 동료들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지만 응급실로 이송됐으니 최악의 사태는 발생하지 않을 거라 믿었다. 결국 경기는 1-0으로 끝났고 카메룬 선수들은 라커룸에서 춤을 추며 결승 진출의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그때 주장이던 리고베르 송이 울먹이며 들어왔다. “감독님 마르크가 결국 숨을 거뒀습니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치러진 경기로 마르크 비비앙 푀의 심장은 멈춰졌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믿을 수 없는 소식에 동료들은 좌절했다. 중원에서 왕성한 활동량과 투지 넘치는 플레이로 검은 사자로 불렸던 그의 갑작스런 죽음에 동료들을 비롯한 축구계 전체가 충격에 빠졌다. 같은 날 카메룬의 경기가 끝나고 열린 프랑스와 터키의 준결승전에서 프랑스 선수들은 선제골을 기록한 뒤 하늘을 향해 손가락을 치켜 올리며 그의 죽음을 추모했다. 비비앙 푀의 죽음 이후 FIFA는 대회전 각국에 심장검사 자료 제출을 의무화하기 시작했다. 또한 낮에 경기를 치르는 것을 지양했으며 심판진에 응급상황 발생 시 조치와 선수보호에 대한 추가 교육을 실시했다.

그라운드에서 영원히 잠든 세비야의 아들 푸에르타 (Antonio Puerta)

안토니오 푸에르타는 세비야 유스 출신으로 안토니오 레예스와 헤수스 나바스, 세르히오 라모스 등과 함께 향후 클럽의 미래를 책임질 재능으로 주목받으며 성장했다. 03/04시즌 1군 데뷔 후 왼쪽 풀백으로 자리 잡은 푸에르타는 뛰어난 활약으로 레알 마드리드를 비롯한 빅클럽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았지만 고향 세비야에 뼈를 묻겠다며 잔류를 선언했다. 또한 세비야가 UEFA 유로파리그 2연패 달성할 당시 팀의 주축으로 활약하며 팬들 사이에서 ‘세비야와 안달루시아의 아들’이라 불렸다.

그리고 찾아온 07/08시즌, 세비야는 홈구장인 산체스 피스 후안에서 헤타페 CF와 리그 첫 경기를 치른다. 하지만 전반이 채 끝나기도 전인 전반 35분 푸에르타가 그라운드에서 쓰러졌다. 다행히 의료진의 발 빠른 대처로 의식을 되찾은 그는 홈팬들의 뜨거운 박수를 받으며 그라운드를 걸어 나왔다. 하지만 그것이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푸에르타는 드레싱 룸에서 또다시 쓰러졌고 병원으로 급히 이송됐지만 결국 의식을 되찾지 못하고 3일 뒤인 8월 28일 23살 젊은 나이에 팬들 곁을 떠나고 말았다.

원정팀 11명의 목숨을 앗아간 천재지변

1998년 10월 28일 콩고 민주 공화국의 수도 킨샤사에서는 번개로 인해 원정팀 베나 티샤디의 선수 11명이 전원 사망하고 다른 30명은 화상을 입는 비극적인 사고가 발생했다. 반면 홈팀 바산가의 선수들은 부상 없이 멀쩡했다. 이로 인해 누군가 사고 직전 동점골을 기록한 원정팀에 사악한 주술을 사주했다는 음모론이 나돌기도 했다.

이와 비슷한 사건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이미 발생했었다. 사고발생 3일 전인 지난 25일, 조모 코스모스와 모로카 스왈로스와의 리그 경기에서 후반 24분 번개가 내리쳤고 그 자리에서 7명의 선수가 쓰러졌다. 이중 몇몇은 온몸을 비틀며 고통을 호소했고 모든 스태프와 의료진 심지어 관중들도 급히 그라운드로 뛰어들었다. 다행히 사망자는 발생하지 않았고 정밀검사를 위해 이송된 2명도 며칠간 안정을 취한 뒤 소속팀으로 복귀했다.

 

죽음을 부른 세리머니

위기의 순간 팀의 승리를 확정짓는 골의 기쁨은 어떤 방법으로도 표현하기 힘들 때가 있다. 선수들은 때로 흥분을 주체하지 못해 광고판을 뛰어넘거나 코너 플래그를 걷어차는 등 다소 과격한 세리머니를 펼치기도 한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펜스에 끼어 손가락이 절단되고 광고판을 걷어차다가 발가락이 부러지는 등 뜻하지 않은 부상을 입는 경우도 있다. 국내에서는 과거 고종수가 트레이드마크인 덤블링 세리머니를 펼치다 발목인대가 끊어지며 2002년의 영광을 놓쳐야 했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치러진 경기로 마르크 비비앙 푀의 심장은 멈춰졌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2014년 10월 19일 인도의 3부리그에선 덤블링 세리머니를 펼치다 선수가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베슬레헴 벵슬랑의 피터 비악산그주알라는 찬마리 웨스트와의 경기에서 0-1로 뒤지던 후반 17분 동점골을 터뜨렸다. 그는 평소와 같이 트레이드마크인 덤블링 세리머니를 시도했다. 하지만 불행하게도 발이 아닌 머리로 착지하고 말았다. 그 순간 뭔가 잘못됐다는 것을 깨달은 동료들은 두 손을 들어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비악산그주알라는 즉시 병원으로 이송됐지만 검사결과 척추에 심각한 손상을 입으며 영영 깨어나지 못했다.

경기장 내 건축물과의 충돌로 사망한 선수들

NK 자다르의 흘보예 수스티치는 17살 어린나이에 프로무대에 데뷔했을 만큼 크로아티아 내에서 굉장히 촉망받는 유망주였다. 그는 각 연령별 대표팀에 꾸준히 이름을 올렸고 U-21세 대표팀 시절에는 레알 마드리드의 루카 모드리치와 함께 중원에서 호흡을 맞추기도 했었다. 그의 성장은 결국 자국리그 빅클럽들의 뜨거운 관심으로 이어졌다. NK 자그레브로 이적해 두 시즌동안 활약한 수스티치는 07/08시즌을 앞두고 친정팀 자다르로 돌아왔다. 한층 더 성장해 돌아온 수스티치는 중원에서 안정적인 플레이로 팀을 이끌었고 이에 슬라벤 빌리치 당시 크로아티아 대표팀 감독은 인터뷰를 통해 그의 대표팀 합류를 시사했다. 유로 2008을 얼마 안 앞둔 시점에서 수스티치의 각오는 더욱 불타올랐다. 하지만 시즌이 막바지로 치닫던 3월말 도저히 믿을 수 없는 비극이 발생하고 말았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치러진 경기로 마르크 비비앙 푀의 심장은 멈춰졌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홈에서 펼쳐진 NK 시바리아와의 경기에서 전반 4분 공을 잡은 수스티치는 자신에게 달려드는 상대를 피해 영리하게 공을 빼내고 전진을 시도했다. 하지만 상대수비수는 달려드는 속도를 줄이지 못했고 이내 수스티치와 강하게 충돌했다. 이 과정에서 2m 가량을 날아간 수스티치는 터치라인 바로 옆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부딪쳤다. 부딪친 소리만으로도 사건의 심각성을 깨달은 심판과 동료들은 즉시 그에게 달려들었고 엠뷸런스도 급히 투입됐다. 의식을 잃은 채 응급실로 향한 그는 정밀검사를 받은 뒤 신속하게 수술을 받았다. 갑작스런 비보를 접한 동료들도 그가 입원한 병원을 찾으며 수스티치를 응원했다. 하지만 상황은 계속해서 나빠져만 갔고 사건 발생 닷새 뒤인 4월 3일 뇌사판정을 받아 세상을 떠났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치러진 경기로 마르크 비비앙 푀의 심장은 멈춰졌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2015년 5월 4일 아르헨티나 프리메라C(5부) 산 마틴 데 브루자코에서 활약하던 엠마누엘 오르테가는 몸싸움 이후 넘어지는 과정에서 터치라인 바로 옆에 위치한 콘크리트 벽에 머리를 크게 부딪쳤다. 오르테가는 이로 인해 두개골이 이중으로 골절됐고 충돌 후 즉시 병원으로 이송돼 응급 수술을 받았으나 열흘 뒤 끝내 숨을 거두고 말았다. 당시 산 마틴의 감독이었던 크리스티안 페르라우토는 인터뷰를 통해 “경기장 바로 옆에 그런 콘크리트 벽이 있다는 것 자체가 미친 일이다. 팬들로부터 선수를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콘크리트 벽이 결국 선수의 목숨을 앗아갔다. 이는 말도 안 되는 사건이며 불명예스러운 일”이라 밝히며 떠나간 제자의 죽음을 애도했다.

의학술이 발달하지 않았던 과거

축구 경기 중 선수가 사망한 최초의 사례는 1889년 영국에서 발생했다. 1880년대 초반 더비셔의 유명한 크리켓 선수였던 윌리엄 크로퍼는 축구실력도 매우 뛰어났다. 당시까지만 해도 크리켓에서 축구로의 종목전환 사례는 상당히 잦았고 26살에 크리켓에서 이룰 것을 모두 이룬 크로퍼는 스테이블리FC에 입단하며 축구선수의 꿈을 키워나갔다. 당시 아마추어 리그에 속했던 스테이블리는 1888년 8월 프로등록에 지원하며 다가오는 시즌 프로 리그 진입을 준비했고 이 소식을 크로퍼는 누구보다도 기뻐했다. 하지만 프로 축구선수가 되겠다는 그의 꿈은 이듬해인 1889년 1월 13일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치러진 경기로 마르크 비비앙 푀의 심장은 멈춰졌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크로퍼는 그림스비 타운과의 리그경기에서 오른쪽 윙어로 선발 출장했다. 그리고 그를 마크한 수비수는 스코틀랜드의 슈퍼스타 다니엘 도일이었다. 도일은 과격한 태클을 즐겨하는 선수로 유명했는데 이로 인해 그는 ‘히어로’인 동시에 ‘살인마’로 불렸다. 당시 서로를 그저 하나의 고깃덩어리에 불과하다고 생각했던 선수들은 매우 거친 플레이를 펼쳤고 이날 경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던 후반 10분 크로퍼와 도일이 공중볼 경합을 위해 뛰어올랐다. 이 과정에서 도일은 무릎으로 크로퍼의 복부를 강하게 가격했고 크로퍼는 비명을 지르며 그라운드에 나뒹굴었다, 교체되어 그라운드를 떠난 그는 인근의 병원을 찾았다. 하지만 통증은 줄어들지 않았고 다음날 아침 숨을 거두고 말았다. 부검 결과 사인은 장파열로 인한 과다출혈로 밝혀졌다.

1902년 맨체스터 시티와 웨일스에서 풀백으로 활약하던 데이비드 디 존스는 프리시즌 훈련에서 그라운드에 떨어져있던 유리조각에 베이며 깊은 상처를 입었다. 결국 이 상처로 파상풍에 감염된 디 존스는 며칠 후 사망했다. 그의 사망소식이 전해지자 대중들은 소속팀 맨시티를 맹렬히 비난했다. 하지만 맨시티도 반론에 나섰다. 구단은 그를 치료하려 했지만 디 존스가 별거 아니라는 듯 이를 거부했다는 것이다. 이 사건이후 영국 축구계 사이에선 ‘경기장 내 의료진 배치’가 화두로 떠올랐다.

지금은 너무나 당연하지만 골키퍼를 보호해야 한다는 주장과 규칙들은 1936년 잉글랜드의 한 골키퍼가 사망하고 난 뒤에야 탄생했다. 1930년대 잉글랜드의 선더랜드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그 중심에는 골키퍼 지미 소프가 있었다. 22살에 선더랜드 주전으로 도약한 지미는 매우 유망한 골키퍼였다. 그는 영리한 두뇌와 큰 덩치를 활용해 상대의 슈팅을 막아냈고 팀을 이끄는 카리스마와 훌륭한 인품으로 동료들 사이에서 두터운 신망을 받았다. 지미의 이러한 활약에 힘입어 선더랜드는 35/36시즌 리그 1위를 달성했다. 하지만 지미는 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리는 순간을 동료들과 함께할 수 없었다.

무더운 날씨 속에서 치러진 경기로 마르크 비비앙 푀의 심장은 멈춰졌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1936년 2월 1일 펼쳐진 첼시와의 리그경기에서 동료의 백패스를 손으로 잡으려던 지미는 자신을 향해 전속력으로 달려온 첼시의 조 밤브릭에 머리와 가슴을 부딪쳤다. 이 과정에서 그가 받은 충격은 갈비뼈 세 개가 부러지고 머리에 심하게 멍이 들 정도로 컸지만 지미는 끝까지 경기를 소화한 뒤에야 병원으로 향했다. 지미는 병원에 도착 직후 의식을 잃으며 쓰러졌다. 그리고 나흘 뒤 사망했다. 사인은 심장마비였다. 그의 비극적인 사망은 골키퍼 보호를 위한 규칙의 변화로 이어졌다. 이후 영국축구협회는 필드플레이어는 골키퍼가 잡은 공을 발로 건드릴 수 없다는 규칙을 신설했다.

모든 판단이 주심 단 한 명의 재량으로 이뤄지는 축구는 매우 위험한 스포츠다. 선수들이 스스로를 위해 착용하는 장비라곤 정강이 보호대가 전부다. 때로 몇몇 선수들이 헤드기어와 얼굴에 마스크를 착용하기도 하지만 어디까지나 부상당한 부위를 임시적으로 보호하기 위해 선택하는 수단일 뿐 필수 장비는 아니다. 또한 국제축구연맹(FIFA)의 페어플레이 선언 아래 선수들 간의 위험을 동반한 거친 플레이는 줄어들었지만 그렇다고 축구가 완전히 안전해진 것은 아니다. 과거 사례로 확인했듯 덥거나 추운 날씨, 딱딱한 그라운드, 체력적인 부담이 느껴지는 타이트한 일정 등 열악한 환경은 지금도 곳곳에서 선수들의 안전과 생명을 위협하고 있다. 선수들이 치르는 경기는 안전한 환경에서 철저한 예방책아래 치러져야한다. 누군가의 부주의와 안일함으로 선수가 그라운드에서 목숨을 잃는 사고는 두 번 다시 발생해서는 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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