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삼성 제공

[스포츠니어스 | 명재영 기자] 지난 일요일에 열린 마이클 캐릭의 자선 경기가 화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2008년 올스타와 캐릭 올스타팀이 맞붙은 이 경기는 2006년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한 캐릭의 노고를 기념하기 위해 성사됐다. 풋볼 매니저(Football Manager) 게임의 유저라면 쉽게 이해할 것이다. 이 게임에서는 10년 이상 팀에서 활약한 선수를 위해 프리시즌 기간에 기념 경기를 열 수 있다. 캐릭은 분명 수준급의 선수지만 크리스티아누 호날두, 웨인 루니 등 세계적으로 유명한 선수에 비하면 조명을 덜 받았다. 그런데도 구단과 팬은 캐릭을 위해 특별한 이벤트를 준비했다. 이 경기를 본 많은 K리그 팬들이 ‘부럽다’고 표현했다. 자선 경기와 같은 이벤트가 없었을 뿐 우리에게도 캐릭과 같은 인물은 분명 존재했다. <스포츠니어스>가 이들을 조명한다.

공오균 (1997~2008, 대전-경남)

많은 이들이 대전시티즌의 전설로 최은성, 이관우, 김은중 세 선수를 꼽지만, 대전 팬들은 공오균을 절대 빠트리지 않는다. 관동대학교 재학 시절 1996 애틀랜타 올림픽대표팀 상비군에 이름을 올린 만큼 촉망받는 유망주였던 공오균은 대전의 창단멤버로 프로 무대에 데뷔했다. 공오균은 열악한 팀 상황에 맞춰 윙어부터 최전방 공격수까지 다양한 포지션을 소화하는 멀티 플레이어로 활약했다. 화끈한 폭발력은 없었지만, 공오균은 대전에서 10년 동안 K리그 통산 291경기에 출전해 팀이 위기에 처할 때마다 중요한 공격 포인트를 올려 대전 팬들의 많은 사랑을 받았다.

공오균은 2002년 12월 3일에 열린 FA컵 16강전 한국철도와의 경기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며 팀 역사상 첫 번째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로도 이름을 남겼다. 대전 소속으로 해트트릭을 기록한 선수는 공오균을 포함해 총 4명인데 나머지 선수는 데닐손, 케빈, 아드리아노로 모두 외국인이었다. 국내 선수로는 유일하게 해트트릭을 맛본 대전 선수인 셈이다. 대전의 ‘원클럽맨’으로 프로 생활을 마칠 줄 알았던 공오균은 2006시즌이 끝난 뒤 팀과의 재계약 협상에 실패하며 자주색 유니폼을 벗어야 했다. 같은 해 여름, ‘시리우스’ 이관우를 숙적 수원삼성에 내주는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던 대전 팬들은 공오균과의 재계약 포기에 대해 구단에 강력히 반발했으나 결정을 뒤바꿀 수는 없었다.

대전 팬들에게 공오균은 아자르보다 소중한 존재다 ⓒ 프로축구연맹 제공

공오균은 훗날 인터뷰에서 “2006년 중반부터 은퇴 권유를 계속 받았다”며 “계속 뛰고 싶은 내 의사에 상관없이 억울하게 그라운드를 떠나는 것 같아 받아들일 수 없었다”고 정든 대전을 떠났을 당시를 회상했다. 겨우내 33살의 노장 공격수를 받아줄 K리그 팀은 나타나지 않았고 공오균은 그렇게 잊히는 듯했다. 그러나 공오균은 프로 생활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았고 모교였던 관동대에서 개인훈련에 매진했다. 이 모습을 눈여겨본 경남FC 박항서 감독이 그에게 손을 내밀었고 공오균은 2007시즌 중반 경남에 합류하며 K리그 생활을 이어갈 수 있었다. 공오균은 경남에서 2시즌을 보낸 뒤 2009년 호주의 선샤인 코스트FC에서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은퇴 후 호주에 남아 유소년 지도자로 변신한 공오균은 중국을 거쳐 2016년 대한축구협회 전임 지도자로 발탁되며 고국 무대로 복귀했다. 현재 국내에서 열리고 있는 FIFA U-20 월드컵 코리아 2017 대회에서 대한민국 대표팀의 코치로 활약한 공오균은 해외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소년 발굴과 육성에 온 힘을 기울일 계획이다. 대전 구단은 올 초 창단 20주년을 기념하여 공오균을 ‘대전시티즌 레전드 베스트 11’에 선정했다.

김진우 (1996~2007, 수원)

안효연-이상호-반도-마르셀-디에고-조동건-이상호-조나탄. 2008년부터 지난 10시즌 동안 수원삼성의 7번 유니폼을 입은 선수들이다. 모두 공격진들이다. 주포 조나탄이 이상호의 번호를 물려받으면서 수원의 7번은 어느덧 공격수들의 번호로 자리 잡게 됐다. 하지만 수원 팬들은 '7번'하면 김진우를 가장 먼저 떠올린다. 김진우는 프로 생활 동안 오로지 수원에서만 활약한 K리그에 몇 안 되는 진정한 원클럽맨이다.

1993년 FIFA U-20 월드컵 본선 무대에 참가한 김진우는 대구대학교에서 프로 무대로 직행하지 않고 실업팀인 주택은행으로 입단하며 의아함을 자아냈다. 결과적으로 이 행동은 수원의 전설로 거듭나기 위한 ‘큰 그림’이었다. 김호 감독의 부름을 받아 수원의 창단 멤버로 합류한 김진우는 첫 시즌이었던 1996년부터 주전 미드필더로 활약하며 팀의 살림꾼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수비형 미드필더라는 포지션 특징과 고종수, 박건하, 데니스 등 개성 있는 스타들에 가려져 큰 인기를 끌지는 못했지만 축구인들은 ‘김진우가 없다면 수원의 영광 또한 없다’며 김진우의 진가를 인정했다. 이는 기록으로도 증명된다. 김진우는 선수 생활 동안 795개의 반칙을 범해 김상식, 김한윤에 이어 K리그 파울 역대 3위에 올라있지만 퇴장은 단 한 차례도 없었다. 터프하면서도 지능적인 수비를 펼쳤다는 의미다.

대전 팬들에게 공오균은 아자르보다 소중한 존재다 ⓒ 프로축구연맹 제공

김진우는 전형적인 수비형 미드필더였다. 수원에서 K리그 통산 309경기에 출전하는 동안 공격 포인트는 2골 18도움이 전부다. 2000년과 2001년 한 골씩을 기록했는데 공교롭게도 두 골의 상대가 모두 포항스틸러스였다. K리그 최고의 인기를 자랑하는 수원이지만 레전드 김진우의 득점 장면을 경기장에서 직접 본 팬은 27,856명에 불과하다. 포항은 김진우가 득점한 두 경기에서 나란히 1-2로 패배하며 쓴 맛을 제대로 봐야 했다.

화려한 공격진을 뒤에서 바치며 묵묵히 팀을 지킨 김진우는 수원의 황금기를 함께 하며 나름대로 탄탄한 선수 생활을 이어나갔다. 수원이 전관왕을 달성했던 1999년 41경기에 출전하며 커리어 최다 출장 기록을 세운 김진우는 2000년 1월 허정무호에 승선해 뉴질랜드와의 친선경기 2연전에 출전하며 A매치에 데뷔한다. 2004년에는 포항과의 K리그 챔피언결정전 2차전 승부차기에서 실축하며 우승 실패의 원인(?)이 될 뻔했으나 이운재가 포항의 마지막 키커이자 라이벌인 김병지의 슈팅을 막고 우승을 확정 지으며 가슴을 쓰려 내렸다. 이후 황혼기를 맞은 김진우는 2007년 9월 2일 제주유나이티드전 출전을 마지막으로 선수 생활을 마치게 된다. 은퇴 후에도 수원의 지도자로 남은 김진우는 2013년 경남 코치로 이동하면서 수원과 이별하게 된다. 2016년에는 1년 동안 부산외국어대학교 감독으로 U리그에 참가했다.

오승범(1999~, 성남(천안)-광주상무-성남-포항-제주-충주-강원)

전형적인 이름 없는 영웅(Unsung Hero) 중 한 명이다. 1981년생으로 제주 오현고등학교 졸업 뒤 천안일화에 연습생으로 입단한 오승범은 많은 신인이 그렇듯이 프로 무대의 벽에 막혀 기나긴 터널의 세월을 보냈다. 3년 동안 2군 무대를 벗어나지 못하며 1군 데뷔전조차 갖지 못한 오승범은 2002년 광주상무에 입단하게 된다. 쟁쟁한 선배들이 즐비했던 소속팀에서 잠시 이별하는 이 선택은 오승범의 축구 인생을 바꿔놓게 된다. 2003년 K리그에 참가한 광주의 시즌 첫 경기에 선발로 출전해 프로 데뷔전을 치른 오승범은 같은 해 무려 40경기에 출전하며 명실상부한 주전으로 거듭나게 된다.

2004시즌을 앞두고 성남에 복귀한 오승범은 시즌 14경기를 소화한다. 소속팀에서는 많이 출장한 편이 아니지만, 오승범은 올림픽대표팀에 승선하며 이름을 알리게 된다. 아테네 올림픽 최종예선을 포함해 대표팀에서 15경기에 나선 오승범은 와일드카드로 인해 정작 본선 무대는 밟지 못하는 불운을 겪는다. 아테네엔 가지 못했지만 2005년 포항에 새로 부임한 파리아스 감독의 스카우트 망에 포착되어 스틸야드로 보금자리를 옮긴다.

대전 팬들에게 공오균은 아자르보다 소중한 존재다 ⓒ 프로축구연맹 제공

많은 활동량과 탁월한 수비 능력으로 공격형 미드필더의 뒤를 바치는 수비형 미드필더로서 능력을 제대로 인정받은 오승범은 파리아스 체제에서 주전 자리를 잡는다. 포항에서 3년 동안 98경기에 출장하며 2007년에는 팀의 기적 같은 리그 우승에 함께 했다. 리그 트로피를 들어 올린 오승범은 2008년 고향인 제주로 이적하며 제2의 전성기를 뽐낸다. 2010년 박경훈 감독과 함께 K리그 준우승의 성과를 거둔 오승범은 2013년 팀의 주장으로 시즌을 보내기도 했다. 2014년 K리그 15경기 출장으로 2004년 성남 시절 이후 최저 출장을 기록한 오승범은 2015년 제주에서의 7년 생활을 정리하고 K리그 챌린지의 충주험멜로 이적한다.

35살의 나이에 K리그 챌린지로 무대를 옮긴 그를 보고 혹자는 ‘곧 은퇴할 것’이라는 평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오승범은 오뚝이 같은 사나이였다. K리그 챌린지로 내려온 노장이라는 시선에도 오승범은 특유의 성실함으로 충주의 주축이 되었다. 비록 한 시즌이지만 주장으로 젊은 선수단을 이끈 오승범은 2016년 강원FC 최윤겸 감독의 제의에 주황색 유니폼으로 옷을 바꿔 입는다. 바로 주전 자리를 꿰찬 오승범은 리그 38경기에 나서며 팀의 플레이오프행에 큰 힘을 보탠다. 성남FC와의 승강 플레이오프 2경기에도 풀타임을 소화한 오승범은 2017년 팀의 승격과 함께 3년 만에 K리그 클래식 무대로 복귀한다.

이제는 흔치 않은 20세기 데뷔에 적지 않은 이적 경력으로 일반 대중에게는 활약상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았지만, 그가 거쳐 간 팀들의 팬들은 오승범이라는 이름 석 자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운다. 37살의 나이지만 오승범은 이번 시즌에도 9경기에 출전하며 열정과 투지를 불태우고 있다. K리그 통산 433경기에 출전한 오승범은 K리그 최다출장 분야에서 8위에 이름을 올리고 있다. 필드 플레이어로는 6번째이며 현역 선수로는 이동국에 이어 2번째다. 그의 아름다운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황지수 (2004~, 포항-양주-포항)

이탈리아의 젠나로 가투소와 같은 끈기와 투지를 보여 ‘황투소’로도 불리는 황지수는 수비형 미드필더로 포항스틸러스의 원클럽맨이자 전설 중 한 명이다. 상무와 경찰청 입대에 실패하고 2009년 말 공익근무요원으로 입대한 뒤 2010년부터 2년 동안 챌린저스 리그의 양주시민축구단에 머문 시절을 제외하면 황지수는 검정빨강 유니폼 밖에 모르는 진정한 영일만의 사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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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언급한 김진우, 오승범과 마찬가지로 포지션의 특성으로 인해 능력만큼의 인지도를 얻지 못했다. 그러나 스틸야드의 홈팬들은 다 안다. 황지수가 있었기에 2000년대 후반 아시아를 호령했던 스틸러스표 패스 축구가 가능했다는 것을. 그만큼 황지수는 포항의 전술에서 핵심 자원이었다. 사람들은 화려한 테크닉을 자랑했던 황진성의 플레이를 먼저 떠올리지만 황진성도 황지수가 없었다면 상대의 중원을 쉽게 뚫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뒤에서 상대를 강력히 압박해주는 황지수가 있었기에 포항의 공격진들이 마음 놓고 플레이를 펼칠 수 있었다.

대전 팬들에게 공오균은 아자르보다 소중한 존재다 ⓒ 프로축구연맹 제공

2008년 1월 30일 칠레와의 A매치 친선경기에 출전해 28살의 늦깎이 나이에 태극마크를 처음으로 단 황지수는 같은 해 2월에 열린 동아시안컵 최종 명단에 이름을 올렸고 북한과의 2차전에 교체로 두 번째 A매치를 가졌다. 이후 대표팀과의 인연은 없었지만 황지수는 언제나 그랬듯이 포항에서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2012년 8월부터 포항의 주장을 맡은 황지수는 지금까지 주장 완장을 달고 있다. 명문 구단 포항에서 여섯 시즌 연속 주장이라는 점 하나만으로 그의 능력은 입증된 셈이다. 비록 화려한 스포트라이트를 받지는 못했지만 2012년에는 FA컵 우승의 큰 공헌을 인정받아 대회 MVP를 수상하기도 했다. 구단 역대 최다 출장 기록을 가지고 있는 황지수는 지난해 11월 K리그 통산 300경기 출장을 기록했다. 기록, 실력, 인성 어느 하나 부족한 것이 없는 황지수의 포항 사랑은 오늘도 계속된다.

노장에 대한 인식 바뀐 K리그

‘노장에 대해 인색하다’는 평가를 받는 K리그지만 최근 분위기는 분명 바뀌었다. 30대만 들어서면 노장 딱지와 함께 강제 은퇴가 흔했던 시절이 불과 10년 전이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선수 동의 없이 다른 구단으로 보내버렸던, 프로라지만 너무 싸늘했던 시간이 20년이 넘게 이어졌다. 전환점은 통신의 발달과 유럽 빅 리그의 본격적인 국내 중계였다. 팬들의 눈높이가 높아지면서 예전처럼 팀에 헌신했던 선수를 내쳤다가는 SNS로 폭격을 맞는 세상이 된 것이다.

나이보다 실력이 중요한 시대가 찾아오면서 황혼기에 접어든 선수들도 점차 안정감을 되찾고 있는 추세다. 이동국을 선두로 해 적지 않은 선수들이 그라운드에서 실력을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왼발의 사나이’ 염기훈의 2015년 3년 반 재계약도 예전 같았으면 쉽게 상상하지 못했을 일이다. 아쉬운 것은 지나간 선수들이다. 공오균, 김진우는 은퇴식은커녕 팬들에게 제대로 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축구화를 벗어야 했다. 이 두 선수 외에도 아쉽게 은퇴한 선수들이 수두룩하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지만 이들에 대한 배려도 함께 이루어지면 어떨까 흐뭇한 상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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