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에서 가장 인기 있는 종목인 축구는 수많은 변화를 거쳐 현재에 이르렀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스포츠니어스ㅣ남윤성 기자] 축구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인기 있는 스포츠다. 수천 년 전 그리스와 이집트에서 사람들이 공을 손이 아닌 발로 차는 놀이를 시작했다는 주장과 기원전 2~3세기 사이 중국 ‘한 왕족’의 군대가 휴식시간을 이용해 발로 공을 바구니에 집어넣는 운동을 시작했다는 등 셀 수 없이 많은 기록만큼 그 기원에 대해서도 의견은 분분하다. 역사적으로 공을 발로 차는 이 스포츠를 ‘축구’라 부르기 시작한 것은 1863년 영국에서 럭비협회와 축구협회가 완전히 분리되면서부터였다. 이후 100년이 훨씬 넘는 시간동안 사람들은 다양한 규칙과 제도를 만들어냈다. 축구가 국제대회의 정식종목으로 채택된 이후에도 계속해서 개정이 이뤄진 끝에 축구는 현대의 모형을 갖추게 됐다.

적어도 일주일에 세 번을 취미로 축구를 즐기고 있는 나는 어느 날 갑자기 뜬금없는 생각을 하게 됐다. 축구는 왜 11명이서 하는 걸까? 경기는 왜 90분이지? 부심은 언제부터 터치라인에 서있기 시작했을까? 궁금한 게 생기면 직접 찾아봐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이라, 이후 며칠 밤을 꼬박 새운 끝에 질문에 대한 답들을 찾아낼 수 있었다. 이해하기 쉽게 정리한 이 자료들이 축구를 사랑하고 즐기는 여러분들의 궁금증과 욕구를 조금이라도 충족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1. 축구는 왜 한 팀이 11명일까?

과거 하나의 팀은 각각 골키퍼 5명을 포함한 27명의 선수로 경기에 나섰다. 중세시대에는 그 수가 15~21명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축구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끊임없이 변화시켜왔는데 경기에 참가하는 선수들의 수는 명확한 기준이 생겨나기 전까지 대부분 양 팀의 합의로 결정됐다. 영국에서 축구 이전에 대중적인 인기를 얻은 크리켓과 필드하키의 인원이 11명이었다는 것에서 비롯됐다는 추측도 있지만 가장 유력한 설은 19세기 케임브리지, 셰필드 스쿨, 어핑검 스쿨 등으로 구성된 영국 사립학교들의 축구대항전이다.

축구의 규칙과 형태는 영국에서 완성됐다. 영국축구협회가 설립된 1863년 첫 공식경기에서 11명이 경기를 치른 이후 축구는 11명이 경기를 하게 됐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당시 영국 사립학교의 기숙사는 평균적으로 한 방에 10명의 학생들을 수용하고 있었다. 그리고 각 방에는 학생을 관리하는 사감이 한 명씩 있었다. 그렇게 한 방을 이루는 11명이 한 팀이 되어 경기를 시작하면서 참가 인원이 11명으로 굳어졌다. 이후 1863년 출범한 영국축구협회가 그해 12월 19일 런던의 배터시 공원에서 펼쳐진 반스FC와 리치먼드FC의 첫 공식경기에서 경기의 인원을 11명으로 치르게 하면서 선수의 수는 11명으로 확정됐다.

2. 경기시간은 왜 하필 90분일까?

영국인들은 스포츠 경기에서 대부분 한 쿼터를 15분으로 플레이했다. 이것을 축구에 도입했을 때 2쿼터는 시간이 너무 짧았고 4쿼터는 경기가 지루해졌다. 때문에 3쿼터를 기준으로 45분씩 경기를 시작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또한 심리학자들의 인간의 집중력과 생산성을 가장 극대화시킬 수 있는 ‘45-15 법칙’에서 경기시간이 비롯됐다는 설도 있다. 이처럼 축구의 플레이타임이 왜 90분인가에 대해서는 다양한 추측들이 난무하고 있지만 이 역시 영국의 사립학교 축구대회를 통해 결정됐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 1860년대 셰필드대학교는 자체회의를 통해 경기시간에 대해 다음의 규칙을 정한 바 있다. “경기의 시간은 전·후반 각각 1시간씩 총 2시간동안 실시한다”

축구의 규칙과 형태는 영국에서 완성됐다. 영국축구협회가 설립된 1863년 첫 공식경기에서 11명이 경기를 치른 이후 축구는 11명이 경기를 하게 됐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이처럼 초기의 경기시간은 전·후반 각각 1시간씩이었다. 하지만 경기의 과열양상과 선수들의 잦은 부상, 경기력 유지 등의 문제들이 나타나면서 이내 조정의 필요성이 제기됐다. 그러던 1866년 런던과 셰필드의 경기에서 양 팀이 경기시간을 사전에 90분으로 협의함으로써 역사상 첫 90분 경기가 펼쳐지게 됐다. 이후 영국 내에서는 협회의 주도하에 모든 경기를 90분으로 치렀고 근처의 다른 유럽 국가들도 이 규칙을 따르면서 경기시간이 90분으로 확정되었다.

3. 경기장 구성의 기준은 어떻게 결정됐을까?

선수들의 수와 경기시간이 정해지자 협회는 경기장 구성의 기준을 결정해야했다. 페널티 박스의 크기와 페널티 스폿의 거리, 프리킥 시 수비벽의 거리 등은 미터(m)로 환산했을 때 대부분 소수점이하인 경우가 많다. 그 이유는 최초로 축구 규정을 만든 영국의 도량형 단위가 주로 미터가 아닌 야드(yd)인 것에 있다. 영국은 경기장 구성의 기준을 성인 남성의 평균 보폭으로 삼았는데, 그게 바로 1야드(91.44cm)였다. 이로 인해 페널티 스폿과 수비벽의 거리는 여러 시행착오를 거친 끝에 10야드(9.15m)로 최종 결정됐다.

축구의 규칙과 형태는 영국에서 완성됐다. 영국축구협회가 설립된 1863년 첫 공식경기에서 11명이 경기를 치른 이후 축구는 11명이 경기를 하게 됐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골대의 크기는 당시 골키퍼들의 평균 신장에 의해 결정됐다. 다른 포지션의 선수들에 비해 키가 컸던 골키퍼들은 평균적으로 신장이 6피트(183cm)에 달했다. 이러한 신장의 골키퍼가 손을 뻗을 경우 닿을락 말락했던 높이가 바로 8피트(2.44m)였다. 골대의 폭이 8야드로 결정된 이유도 마찬가지였다. 6피트의 골키퍼가 좌우로 다이빙할 경우 7야드는 너무 좁았고 9야드는 대량 실점의 가능성이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골대의 좌우 폭은 7.32m인 8야드로 결정됐다.

4. 심판은 언제부터 휘슬을 사용했을까?

과거 축구에서 한 명의 심판은 터치라인에 서서 경기시간을 알려주는 조언자에 불과했다. 쉽게 요즘의 대기심이라고 생각하면 되는데 특이했던 부분은 이들에게 휘슬이 따로 없었다는 것이었다. 앞서 말했듯 축구의 규칙은 영국의 사립학교에서 최초로 탄생했다. 스스로를 굉장한 신사로 여긴 영국인들은 “신사는 고의로 파울을 범하지 않는다”는 자세로 경기에 임했기 때문에 심판의 역할이 크지 않았으며 휘슬도 필요가 없었다.

축구의 규칙과 형태는 영국에서 완성됐다. 영국축구협회가 설립된 1863년 첫 공식경기에서 11명이 경기를 치른 이후 축구는 11명이 경기를 하게 됐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이따금 선언되는 심판의 판정에 항의할 수 있었던 사람은 주장뿐이었다. 하지만 관중들 사이에 도박문화가 형성되고 축구 또한 다른 스포츠와 마찬가지로 경쟁이 심화되면서 각 팀은 판정에 항의하는 2명의 전문가들을 고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은 판정에 대한 지나친 항의로 플레이의 지연을 자주 초래했다. 이러한 이유로 1878년에 이르러 심판은 휘슬을 사용하기 시작했다. 또한 협회와 구단이 규칙도입의 필요성을 제기하면서 1891년 스코틀랜드에서 규칙개정안이 처음으로 등장했다.

5. 페널티킥은 언제부터 생겨났을까?

1891년 스코틀랜드 규칙개정안을 통해 축구는 현대와 비슷한 모양새를 갖추게 됐다. 당시 회의를 통해 탄생한 주요 규칙들은 다음과 같았다. 각 팀에서 고용하는 판정항의 전문가들을 없애고 두 명의 ‘라인-맨’을 배치한다. 기존의 골포스트만 있던 골대에 크로스바를 연결하고 골대에 반드시 그물을 설치한다. 일명 ‘죽음의 킥’ 제도를 도입한다. 신설된 ‘죽음의 킥’ 제도와 프리킥의 선언, 선수의 퇴장 등 경기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상황을 판정하고 각 팀의 항의를 무시할 수 있는 1명의 절대자를 배치한다.

축구의 규칙과 형태는 영국에서 완성됐다. 영국축구협회가 설립된 1863년 첫 공식경기에서 11명이 경기를 치른 이후 축구는 11명이 경기를 하게 됐다. ⓒ FIFA 공식 홈페이지

1891년 새로 도입된 개정안은 이후 1902년 추가적으로 수정됐는데 여기에서 골라인으로부터 12야드 떨어진 어디서나 찰 수 있었던 죽음의 킥은 ‘가로 44야드, 세로 18야드’ 내의 지역에서 파울이 일어나는 경우에만 선언되는 것으로 수정됐다. 이를 통해 유추할 수 있듯 두 명의 ‘라인-맨’과 1명의 절대자는 현대축구에서 각각 부심과 주심으로 자리 잡았고 ‘가로 44야드, 세로 18야드’의 지역은 페널티 박스가 되었으며 죽음의 킥은 페널티킥이 되었다.

엉뚱하고 단순한 호기심으로 시작한 이번 취재를 마감하면서 많은 의미를 깨닫게 됐다. 그냥 아무 이유 없이 11명이 그라운드에 서게 된 것도 아니고 골대도 “적당히 이만하게 하자”면서 만들어진 것도 아니다. 만약 영국 사립학교 기숙사가 한 방에 15명씩 수용했더라면 지금의 축구는 아예 달라졌을 것이고 당시 골키퍼의 평균 신장이 조금만 작았어도 우리는 훨씬 더 작은 골대에서 축구를 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렇게 축구의 틀이 갖춰진 건 다 그만한 역사적 사실과 이유가 있었다. 축구에 관한 아주 기초적이고 단순한 물음은 이렇게 엄청난 답이 되어 돌아왔다. 이제 축구를 볼 때 더 눈을 크게 뜨고 즐겨보자. 그 안에는 우리가 잘 모르는 역사가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skadbstjdsla@sports-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