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원삼성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자신이 직접 해결하지 않고 누군가에게 결과물을 전달한다는 건 헌신이 있어야 가능한 일이다. 주연으로 빛날 수 있음에도 묵묵히 누군가를 위해 자신을 낮춘다는 건 쉽지 않은 일이다. 오늘은 패스의 달인으로 통하는 이 시대의 진정한 패스 마스터 5명을 꼽아봤다. 이들의 패스 하나로 세상은 달라졌다.

안드레스 이니에스타

그라운드에 현존하는 최고의 패스 마스터다. 바르셀로나에서 가장 빛나는 건 리오넬 메시지만 양현석, 아니 이니에스타가 없었더라면 메시도 그만큼 빛나지 못했을 것이다. 이니에스타는 상대 밀집 수비를 허무는 결정적인 패스로 메시를 돕는다. 공식적인 어시스트로 기록되지 않더라도 이니에스타가 그라운드에서 미치는 영향은 절대적이다. 2010년 남아공월드컵 당시에는 월드컵 베스트11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고 이를 전후해 UEFA 올해의 팀과 세계 베스트11에도 단골손님이 됐다. 호나우지뉴는 처음 이니에스타를 보고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바르셀로나에 입단하고 첫 훈련을 할 때 한 선수만 눈에 들어왔다.” 그게 바로 이니에스타였다. 아마도 축구를 하지 않았으면 택배 기사를 했을 것이다.

기성용

한국 최고의 패스 마스터는 단연 기성용이다. 2007년 캐나다 U-20 월드컵에서 중앙 수비수로 나선 기성용은 수비 능력보다도 패싱 능력으로 더 많은 인정을 받았다. 수비에서 따낸 공을 전방으로 길게 이어주는 모습을 보며 사람들은 이런 말을 자주했다. “오, 대지를 가르는 패스.” 기성용은 이후 미드필더로 경기에 나서며 더 날카로운 패스 마스터로서의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에게 공이 가면 수비수들은 기성용만이 아니라 다른 선수들의 움직임까지도 신경써야 한다. 나는 평소 패스 성공률을 그리 신뢰하는 편은 아니지만 기성용이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90~97%에 이르는 패스 성공률을 꾸준히 기록하고 있다는 건 인상적인 대목이다. 대표팀에서도 기성용은 없어선 안 될 선수다. 답답하면 니들이 뛰는 게 아니라 그래도 기성용이 뛰면서 패스로 경기를 풀어줘야 한다.

기성용은 한국 대표팀의 패스 마스터다. ⓒJS파운데이션

조성룡 기자

급하게 기사를 써야할 일이 있으면 <스포츠니어스> 조성룡 기자에게 ‘카톡’을 보낸다. “이거 오늘까지 써서 올려.” 그러면 늘 조성룡 기자는 나에게 이렇게 답했다. “얍ㅋㅋㅋㅋ” 하지만 몇 시간 뒤 <스포츠니어스> 사이트에 들어가 보면 그 기사는 조성룡 기자가 아닌 다른 기자 이름으로 올라와 있다. 잔머리를 쓰는 조성룡 기자가 “대표님이 시켰다”며 내가 시킨 일을 다른 기자에게 ‘하청’주는 것이었다. 이렇게 기사를 다른 기자에게 아주 자연스럽게 넘기는 조성룡 기자를 ‘기사 패스 마스터’로 인정한다. 내가 어시스트해 조성룡 기자에게 골을 넣으라고 한 건데 나는 그냥 공격의 시발점이었고 어시스트는 늘 지가 기록한다.

사비 에르난데스

사비는 이니에스타와 함께 바르셀로나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미드필더다. 유로2008과 2010년 남아공월드컵, 유로2012 등 스페인의 전무후무한 메이저 대회 3연패를 이끈 주역이자 바르셀로나의 2008/2009 트레블 및 2010/2011 더블, 2014/2015 트레블 등 바르셀로나의 영광을 함께 한 위대한 선수다. 점유율을 높이거나 공격을 전개할 때 이 모든 패스의 시발점은 사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패스 성공률이 통상적으로 95%에 이르고 2012/2013 UEFA 챔피언스리그 8강 2차전 파리 생제르맹과의 경기에서는 무려 100%의 패스 성공률을 기록했다. 패스를 몇 번 해 다 성공한 게 아니라 무려 96번의 패스를 모두 성공시켰다. 사비는 할머니도 골대 앞에만 서 있으면 골을 넣게 해준다고 할 정도다.

기성용은 한국 대표팀의 패스 마스터다. ⓒJS파운데이션

우리 엄마

학창시절부터 내 소식을 아버지께 전하는 패스 마스터였다. 내가 고등학교 시절 친구들과 놀다 밤 12시에 집에 몰래 들어오면 어머니가 늘 주무시지 않고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는 다음 날 아침 아버지께 꼭 이렇게 말씀하셨다. “현회, 어제 반 12시에 들어왔어요.” 아버지 귀에 착착 꽂히도록 까랑까랑한 목소리로 이렇게 ‘팩트’를 전달했다. 이 ‘팩트’를 발밑으로 전달받은 아버지는 늘 스트라이커다운 능력을 과시했다. 우리 어머니는 1990년대 최고의 패스 마스터였지만 이제는 아들의 독립으로 은퇴하셨다. 패스 마스터의 레전드다.

권순형

권순형은 요새 K리그에서 가장 핫한 패스 장인이다. 2009년 프로에 입문한 권순형은 지난 시즌 만개했다. 지난 시즌 권순형은 37경기에 출장해 5골 8도움의 기록을 올렸고 올 시즌에도 10경기에 나서 2골 2도움을 기록 중이다. 최근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이끄는 대표팀 명단에 권순형의 이름이 없자 이에 문제를 재기하는 이들이 있을 정도로 권순형의 최근 기세는 좋다. 권순형은 “스페인의 사비를 보면서 많이 배웠다”면서 “개인적으로 지향하는 스타일이고 사비와 같이 경기 흐름을 읽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이는 기록으로도 증명된다. 권순형은 지난 시즌 패스 2,526회를 시도해 2,144회를 성공시켜 패스 성공률 84.9%를 기록했다. FC서울 미드필더 오스마르(85.2%)에 이어 2위이자 국내 선수 중에는 1위다. 패스 성공 횟수가 2,000회가 넘은 선수는 권순형과 오스마르 밖에 없다.

기성용은 한국 대표팀의 패스 마스터다. ⓒJS파운데이션

안드레아 피를로

피를로는 긴 패스와 짧은 패스는 물론이고 <위닝일레븐>에서나 가능한 로빙 스루 패스도 능수능란하게 구사한다. 동료 선수들의 움직임을 미리 예측해 패스 한 번으로 기회를 만들어내는 능력은 역대 최고라는 찬사를 받기에 충분하다. 전성기가 지난 뒤 활동량이 줄었음에도 패스 만큼은 여전히 날카로운 능력을 선보였다. 과거 폴란드를 이끌었던 전설적인 공격수 즈비그니에프 보니엑은 이런 말을 하기도 했다. “피를로에게 패스한다는 것은 공을 금고에 넣어두는 것과 같다.” 요한 크루이프도 피를로를 극찬했다. “믿지 못할 만큼 엄청난 시야를 지니고 있는 그는 원하는 어떤 곳으로든 공을 보낼 수 있다.” 인상만 보면 되게 피곤해 보이는 노숙자 같지만 그라운드에만 나서면 축구 도사 느낌이 확 난다.

내 친구 김동혁

20년지기 내 친구 김동혁은 늘 절묘한 패스 마스터로 활약했다. 나는 분명히 김동혁에게 30만 원을 빌려줬는데 받기로 약속한 날짜에 김동혁에게 이런 메시지가 온다. “나 승우한테 30만 원 받을 거 있거든. 그냥 네가 승우한테 그 돈 받으면 돼.” 이렇게 김동혁은 채무를 절묘하게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기가 막힌 패스 마스터다. 내가 왜 나에게 돈을 빌리지도 않은 승우한테 빚 독촉을 해야 하나. 늘 뭔가 속은 기분이지만 김동혁의 패싱 능력 하나 만큼은 인정한다. 김동혁이 축구선수였더라면 페이크 동작 하나 만큼은 월드 클래스였을 것이다.

염기훈

득점왕보다 어려운 게 도움왕이다. 득점은 내가 잘하면 그래도 어느 정도 가능할 수도 있지만 도움왕은 내가 밀어준 공을 누군가 확실히 해결해줘야 가능한 일이다. 그런데 K리그에서 염기훈은 이 어렵다는 도움왕을 2년 연속으로 했다. 그가 두 시즌 동안 기록한 도움만 해도 무려 32개다. 코너킥과 프리킥 상황에서도 왼발로 아주 착착 공격수들에게 공을 연결해준다. 그는 K리그에서 현재 90개의 도움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K리그 역사상 최다 도움이기도 하다. 그가 결정적인 패스를 한 번씩 할 때마다 K리그의 역사가 바뀐다. 그가 공을 잡으면 그 공을 받아야 할 사람들이 분주하게 움직인다. 인생에서 누군가에게 도움을 별로 주고 살아보지 않은 나로서는 이렇게 남을 돕는 염기훈을 볼 때마다 ‘기부 천사’라는 생각이 든다. 심지어 염기훈은 항상 내 인스타그램에 ‘좋아요’를 눌러주는 선행도 한다. 남을 돕는 착한 패스 마스터다.

기성용은 한국 대표팀의 패스 마스터다. ⓒJS파운데이션

김무성

‘더킹갓제너럴마제스티지니어스왕판타스틱엠퍼러 패스마스터’ 되시겠다. 위에 언급한 이들은 그래도 상대를 살피고 패스를 찔러주지만 이 분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노 룩 패스’로 모든 걸 해결한다. 패스를 하면서도 자신의 걸음걸이는 그대로 유지하는 능력까지도 탁월하다는 점은 역시 그가 왜 ‘더킹갓제너럴마제스티지니어스왕판타스틱엠퍼러 패스마스터’인지 보여주는 대목이었다. 그는 패스 마스터라는 찬사에도 겸손하다. 패스의 비결을 묻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다. “그걸 내가 왜 해명해야 하나. 할 일이 그렇게 없나. 나는 그런 거 관심이 없고 일이라 해라. 바쁜 시간에 쓸데없는 일 가지고…”라며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지었다. 역시 진정한 패스 마스터는 다르다.

패스에도 예의가 있어야 한다. 받을 사람은 준비가 되지도 않았는데 그걸 패스랍시고 전달하는 건 패스가 아니라 떠넘기는 거다. ‘노 룩 패스’여도 공을 받는 상대와의 약속과 신뢰는 필요하다. 그라운드는 물론 이 사회 전체가 상대를 배려하는 패스 마스터로 넘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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