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주시민운동장은 잔디가 이 상황이라 결국 K리그 경기가 취소되기도 했다. ⓒ프로축구연맹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고등학교 시절 공부를 죽어라 하지 않다가 한 번 딱 마음 먹고 공부를 해본 적이 있다. 처음부터 공부를 할 생각은 아니었는데 주변 친구들이 하나둘씩 마음을 먹고 공부를 시작하는 바람에 같이 놀 사람이 없어서 나도 공부를 시작해 봤다. 그때 아마 전교 등수가 100등은 올라간 것 같다. 워낙 공부를 안 했으니 올라갈 곳이 많았던 이유도 있다. 그런데 담임 선생님이 나를 불러 오히려 더 혼을 냈다. “지금까지 공부를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네. 이렇게 할 수 있으면서 지금까지 뭐한 거야?” 물론 나는 이후 다시 공부를 하지 않는 친구들을 사귀면서 책을 손에서 놓게 됐다.

U-20 월드컵, 정말 우리나라 경기장 맞아?

지난 20일 개막한 U-20 월드컵을 보며 깜짝 놀랐다. 선수들의 멋진 경기력에도 눈이 갔지만 가장 놀라운 건 잔디 상태였다. 정말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대회가 맞나 싶을 정도였다. 한국과 기니의 경기가 열린 전주월드컵경기장은 물론 대전월드컵경기장과 제주월드컵경기장, 수원월드컵경기장 모두 마치 카펫을 깔아 놓은 것처럼 가지런한 잔디가 눈에 가장 먼저 들어왔다. 마치 유럽 경기장 어딘가에 와 있는 것 같았다. 이런 잔디에서라면 엄살이 심한 나도 몸을 날려 오버헤드킥을 할 수 있을 것 같고 골을 넣고 무릎으로 미끄러지며 세리머니도 할 수 있을 것만 같다. 우리는 전세계인이 지켜보는 이 축구 축제를 너무 멋지게 준비했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화가 나기도 한다. 이 경기장은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내가 직접 취재를 다니던 경기장인데 그때의 잔디 상태는 형편없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불과 얼마의 시간이 지나지 않았는데 이 경기장의 잔디는 감탄이 나올 만큼 좋아졌다. 지금껏 K리그 경기가 열릴 때마다 좋지 않은 잔디로 논란이 많았고 그럴 때마다 우리의 잔디 관리 능력이 높은 수준에 닿지 못했다는 점을 안타까워했었다. 그런데 U-20 월드컵에서 선보이는 수준을 보니 딱 그런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 잔디 관리를 못한 게 아니라 안 한 거였네.’ 이 정도 수준으로 잔디를 관리할 수 있었음에도 지금까지 손을 놓고 있었던 점에 화가 나고 또 전세계인이 지켜본다고 하니 부랴부랴 신경 써서 최고의 잔디로 바꿔 놓은 점도 얄밉다.

강원 알펜시아 리조트의 잔디 상태는 그나마 나아진 게 이 정도다. ⓒ중계 방송 화면 캡처

고통 받던 K리그 경기장의 잔디

2013년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는 가수 조용필 콘서트가 열렸다. 그런데 이 콘서트가 끝난 뒤 경기장을 찾은 관중은 경악했다. 하프라인 한 가운데 이동식 무대가 오간 자국이 그대로 남은 것이었다. 대형 무대가 설치됐던 본부석 근처 잔디들도 망가져 있었다. 그런데 경기장을 관리하는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은 이후 황당한 대책을 내놓았다. 그라운드의 패인 잔디 위에 녹색 알갱이를 뿌려 임시방편으로 땜질(?)을 한 것이었다. 이후 수원 구단에서 “물이라도 뿌려 잔디 관리에 힘써달라”고 했지만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은 이렇게 답했다. “물을 뿌리면 잔디가 더 상해서 안 된다.” 결국 ‘축구수도’라는 수원은 이렇게 흉물스러운 잔디에서 계속 경기를 해야 했다.

수원월드컵경기장 잔디가 이렇게 망가지고 형편없이 관리된 건 왜일까. 관리 주체인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이 돌아가는 꼴을 보면 알 수 있다. 2011년에는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 사무총장이 골프장에서 부인과 라운딩을 한 뒤 업무추진비로 식비를 결제하는 등 돈을 부상하게 쓰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담당 직원이 “문제가 있다”고 하자 “사무총장이 사용한 비용을 업무추진비로 집행할 수 없다면 해당 자리에 있을 필요가 없다”는 협박성 지시를 하기도 했다. 또한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은 잔디 관리를 위해 무기계약직을 채용하면서 공개채용이 아닌 특별채용 형식으로 적합하지 않은 직원을 뽑아 문제가 되기도 했다. 이뿐 아니다. 무려 14년 동안 저가의 잔디로 바꿔치기 했으면서도 1년에 1억 원이 넘는 잔디 관리 비용을 쓴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85% 비율로 조성돼야 할 켄터키블루그래스 품종이 고작 30%만 깔려 있었다. 횡령 의혹을 받은 담당자는 이후 무혐의 처리됐지만 누군가는 잔디 품종을 바꿔치기 했는데 그게 누군지는 모르는 이상한 상황이었다. 이렇게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이 엉망진창으로 운영되는 동안 조용필 콘서트의 흔적은 무려 3년 넘게 남아 있었다. 자국이 흐려지기는 했지만 지난 해까지만 하더라도 수원월드컵경기장 하프라인에는 여전히 조용필 콘서트의 흔적이 새겨져 있었다. 그런데 더 깜짝 놀랄 만한 일은 지난해 9월 일어났다.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에서 잔디를 전면 교체했기 때문이다. 이유는 딱 하나였다. 수원월드컵경기장에서 U-20 월드컵을 치르기로 했기 때문이다. 수원월드컵경기장관리재단은 시약부터 시비, 예지 배토 등을 국제축구연맹(FIFA) 기준에 맞췄다. 매월 관리현황을 FIFA에 보고해야 했기 때문이다. 수원삼성은 잔디가 뿌리내리는 한 달 동안 홈 경기도 하지 못했다.

강원 알펜시아 리조트의 잔디 상태는 그나마 나아진 게 이 정도다. ⓒ중계 방송 화면 캡처

U-20 월드컵 개최, 잔디가 달라졌다

결국 조용필 콘서트의 흔적은 이렇게 FIFA가 나선 뒤에야 지워질 수 있었다. 무려 3년 넘게 하프라인에 마치 상처를 낸 듯 남아있던 자국이 겨우 사라질 수 있었다. “관리를 좀 해달라”는 요구에도 불구하고 전혀 개선되지 않던 잔디가 FIFA가 나서니 부랴부랴 최고급 잔디로 바뀌어 있었다. 수원뿐 아니다. K리그 대부분의 경기장은 잔디 문제로 수년 전부터 논란을 일으켰다. 지난해 9월에는 잔디 때문에 K리그 경기가 취소되기도 했다. 상주상무와 인천유나이티드의 경기를 앞두고 상주시민운동장의 잔디 보수가 완료되지 않아 도저히 경기를 치를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지난 3월 한국과 시리아의 2018 러시아월드컵 아시아지역 최종 예선 경기가 끝난 뒤에는 기성용이 “서울월드컵경기장은 대표팀 경기를 할 수 없는 경기장이다. 이런 곳에서 경기를 한다는 게 이해할 수 없다”고 작심 발언을 하기도 했다.

잔디 논란은 올 시즌에도 이어졌다. 강원FC 홈 경기장인 알펜시아 리조트는 논두렁을 연상시키는 잔디 상태는 물론 악취까지 진동해 관중을 당황시키기도 했다. 이후 녹색을 유지하게 위해 경기장에 스프레이를 뿌렸지만 잔디가 듬성듬성 있어 그냥 맨땅에 스프레이를 덧칠한 곳도 있었다. 최근 서울월드컵경기장에서 치러진 FA컵 16강 FC서울과 부산아이파크의 승부차기 경기에서는 결정적인 순간 페널티 스폿 잔디가 움푹 패여 선수들의 신경이 온통 잔디에 쏠리기도 했다. K리그 경기에서 잔디는 늘 이렇게 변수 이상의 영향을 끼쳤다. 한일전을 앞두고 누런 잔디에 녹색 페인트를 뿌렸던 1998년과 비교해 나아진 게 하나도 없다. 현행법상 경기장 잔디 관리는 해당 구단이 아니라 해당 경기장관리재단이 맡고 있다. K리그 구단은 늘 경기장 잔디 관리 상태에 불만이 있지만 그렇다고 직접 나서서 잔디 관리에 힘을 쓸 수가 없다.

그런데 시와 해당 경기장 관리재단들은 U-20 월드컵을 앞두고 얄미울 정도로 갑자기 경기장 잔디에 투자하고 관리하기 시작했다. 축구 실력에 비해 수준이 한참 낮았던 전주월드컵경기장 잔디도 감탄이 나올 정도로 변했다. 전주월드컵경기장은 조명과 음향, 잔디 등을 바꾸는데 무려 120억 원을 투자했다. 그래도 K리그에서는 그나마 잔디 상태가 괜찮았던 대전월드컵경기장 또한 전광판 및 보조경기장 잔디교체 등에 무려 92억 원을 썼다. 대전은 보조경기장의 한국형 잔디를 양잔디로 교체했고 월드컵경기장 잔디는 가장 경기력이 좋다는 2.3cm를 유지하기 위해 아낌없이 투자했다. 수원월드컵경기장도 잔디 교체와 보조경기장 시설 개선 등에 무려 120억 원을 투입했다. 지금까지 형편없었던 잔디는 예산을 투입하고 신경 써서 관리했더니 불과 몇 달 만에 예술적인 시설로 탈바꿈했다. 과연 이게 정말 K리그를 치렀던 경기장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강원 알펜시아 리조트의 잔디 상태는 그나마 나아진 게 이 정도다. ⓒ중계 방송 화면 캡처

못한 게 아니라 안한 거다

못한 게 아니라 안했던 거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다. FIFA는 철저하게 U-20 월드컵이 열릴 잔디를 살폈다. 2015년부터 꾸준히 실사단을 파견해 잔디를 비롯한 숙박과 안전, 의전, 홍보 등을 살폈다. 지난 3월에는 잔디에 대해서도 따로 정밀 실사를 했다. 당연히 자기 지자체에서 경기를 유치해야 하는 입장에서는 최선을 다해 잔디를 관리했고 홈 경기장으로 쓰던 K리그 구단을 쓰러져 가는 경기장으로 내보내기도 했다. 그렇게까지 하면서도 잔디에 신경을 썼다. 잔디도 형편없고 그에 따른 경기력도 부족했던 이 경기장에서 U-20 월드컵이 열리자 해외 어린 선수들이 멋진 잔디를 밟으며 신나게 뛰는 모습을 보니 주객전도도 이런 주객전도가 없다. 잔디 하나 바뀌니까 축구가 고급스러워 보인다. 여기에 결정적인 찬스 상황에서 감독을 줌인하는 중계 기술이 아니라 감각 있는 중계 기술까지 더해지니 이게 정녕 K리그 경기장의 모습이었는지 믿을 수가 없다. 우리도 할 수 있었는데 지금까지 하지 않고 있었던 거다.

이렇게 금방 좋아질 수 있는 잔디 상태를 지금껏 우리는 방치해 왔다. 그래놓고 전세계인의 축제가 열린다니 망신을 당하기 싫어서 최고의 상태로 바꿔 놓았다. 차라리 이 정도 기술이 아예 없었다면 화가 나지도 않을 텐데 할 수 있었으면서도 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더욱 힘이 빠진다. 2002년 한일월드컵을 위해 지어진 월드컵경기장은 15년이 지난 지금도 여전히 멋지다. 아마 이런 경기장을 이렇게나 많이 보유한 나라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이 멋진 경기장의 잔디 상태는 지금껏 늘 형편없었다. 비싼 명품백을 검정색 비닐 봉지에 넣고 다닌 꼴 아닌가. 평소에 이렇게 명품 경기장에서 명품 잔디를 볼 순 없었던 걸까. 성적이 좋지 않다가 잘 나오니 고등학교 시절 날 교무실로 불러놓고 칭찬이 아니라 꾸지람을 하던 선생님의 말씀이 기억난다. “이렇게 할 수 있는데도 지금까지 왜 그렇게 개판을 친 거야?” K리그 경기장의 잔디가 U-20 월드컵이 끝나면 내 성적이 다시 바닥을 쳤던 것처럼 또 개판이 되진 않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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