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협을 부산아이파크 클럽하우스에서 만났다. ⓒ스포츠니어스

[스포츠니어스 | 김현회 기자] 사람들은 부산아이파크 이정협을 ‘신데렐라’라고 한다. 무명의 선수를 울리 슈틸리케 감독이 발굴해 냈다고 말한다. 국가대표 경험이 일천한 K리그 챌린지 상주상무 소속 선수를 파격 발탁했다는 점은 신선했다. 하지만 그가 하루 아침에 ‘신데렐라’가 됐다는 말에는 동의할 수 없다. 지금의 국가대표 이정협이 있기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K리그 챌린지 소속 선수임에도 왜 그가 국가대표 주전 공격수로 발탁됐는지 이해가 쉬울 것이다. 부산 클럽하우스에서 이정협을 직접 만나 유쾌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반갑다. 요새 컨디션은 어떤가.

컨디션은 괜찮다. 아픈 데도 없다. K리그 챌린지에서 2위에 올라 있어 팀 분위기도 나쁘지 않다. 경고누적으로 경남과의 중요한 경기에 뛰지 못했고 그날 진 건 아쉽지만 팀 분위기가 좋아 앞으로도 충분히 1위를 탈환할 기회가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그날 경기장에서 경남전을 지켜봤는데 뛰고 싶어 몸이 근질거렸다.

올 시즌 무려 7경기 연속골을 뽑아내기도 했다. 엄청난 기록이다.

우리 선수들이 도와줘 그런 기록을 달성할 수 있었다. 매 경기 마음 편하게 공격할 수 있도록 도와준 수비수들부터 모든 선수들이 도와준 덕분이다. 내 능력으로 만든 골은 7경기 중 서울이랜드와의 경기에서 넣은 골 뿐이다. 그 득점 말고는 다 동료들이 만들어 준 골인 것 같다. 동료들에게 고맙다.

부담감도 상당했을 것 같다.

의식을 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주변에서는 ‘마음 편하게 먹으면 찬스가 온다’고 크게 부담을 주진 않았지만 내 스스로 이 기록에 대해 의식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난 안양전에서 8경기 연속골에 실패한 뒤로는 오히려 홀가분하다. 이전까지는 골을 넣으면 동료들하고만 기뻐했는데 그날은 골을 넣게 되면 팬들을 위한 세리머니를 한 번 하고 싶었다. 그걸 못해서 아쉽지만 그날 경기에서 1-0으로 이겨 기뻤다.

이정협은 부산아이파크 유소년 출신으로 부산에서 프로 데뷔에까지 성공했다. ⓒ프로축구연맹

현재에 대한 이야기는 잠시 후에 하도록 하자. 부모님 두 분 모두 육상선수 출신이라고 들었다. 재능을 타고 난 것 같다.

부모님이 둘 다 육상선수 출신인 건 맞다. 그런데 어머니는 형편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육상을 일찍 그만두셨다. 내가 처음 축구를 하고 싶다고 했을 때도 운동하면 돈이 많이 든다는 걸 아셨기 때문에 반대했다. 집안 형편이 그렇게 넉넉하지 않았다. 원래 축구를 굉장히 좋아했는데 “나가서 축구하지 말고 이거 가지고 놀아”라면서 컴퓨터를 사주시기도 했다. 운동하면 돈도 많이 들고 다치기도 많이 다치니까 반대하신 거다.

원래 컴퓨터를 하고 있으면 “제발 밖에 좀 나가라”고 하시는 게 부모님들 아닌가. 오히려 반대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였다. 집에 갔는데 컴퓨터가 있는 거다. 넉넉하지 못한 형편에 컴퓨터는 상상도 못했는데 어머니가 무려 270만 원을 들여 컴퓨터를 사 놓으셨다. “이제 나가지 말고 집에서 이 컴퓨터로 게임이나 하라”고 하셨다. 공부는 안 해도 좋으니 집에라도 붙어 있으라는 거다. 처음에는 신기해서 몇 번 해봤는데 별로 컴퓨터나 게임에는 관심이 없었다. 뭘 어떻게 깔고 뭘 어떻게 접속해서 하는 지도 잘 몰라 컴퓨터에 깔려 있는 지뢰찾기와 카드게임이나 좀 하다가 집어 치웠다. 그리고는 다시 축구하러 나갔다. 밖에 나가서 뛰어노는 게 더 재미있었다.

대단하다. 나는 학창시절 시켜만 준다면 2박 3일 동안 컴퓨터 앞에 앉아 게임만 할 수도 있었다. 축구가 그렇게 재미있었나.

물론이다. 중학교 시절에는 감독님께서 “몸싸움을 피한다”며 경기 도중 나를 교체 시키셨다. 몸이 왜소했고 몸싸움도 피했다. 그래서 혼자 길을 걸으며 ‘나는 왜 몸싸움을 싫어할까’라고 고민하다가 그냥 벽에다 몸이 들이받았다. 골목길로 접어들 때마다 혼자 벽에다 몸을 부딪히며 몸싸움 연습을 했다. 지나가다가 벽만 보면 그 짓을 했다. 그러면서 몸싸움에 대한 공포심을 없앴다. 벽에도 들이받는데 상대팀 선수라고 들이받지 못할 이유는 없지 않은가.

이거 무슨 폭포 밑에서 슈팅을 연습하는 만화에나 나올 법한 훈련법이다.

뭐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훈련이긴 한데 그만큼 축구가 절실했다는 것 정도로만 이해해 줬으면 좋겠다. 내가 생각해도 황당한 훈련법이긴 하다.

알겠다. 어린 시절부터 축구에 대한 애정이 대단했던 것 같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각 프로 유소년 팀끼리 펼치는 챌린지 리그라고 있었다. 나는 부산 유스팀인 동래고에 다니고 있었는데 그때 광양제철고 멤버가 엄청났다. 지동원, 윤석영 등 쟁쟁한 선수들이 포진해 있었다. 우리는 그 대회에서 0-3, 0-4로 무참히 깨지고 다닐 때였고 광양제철고와의 경기에서는 0-5로 크게 졌다. 광양에서 버스를 타고 올라오면서 혼자 자책을 엄청 했다. ‘왜 항상 이러게 크게 질까. 왜 난 골을 넣지 못할까.’ 지동원과 윤석영을 보면서 저런 엄청난 선수들도 있는데 도저히 그들을 따라잡을 자신도 없었다. 너무 분했다. 내 능력으로는 따라잡을 만한 선수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숙소에 도착한 뒤 감독님을 찾아가서 “축구를 그만두겠다”고 말씀드렸다. 생각만큼 축구가 잘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정협은 부산아이파크 유소년 출신으로 부산에서 프로 데뷔에까지 성공했다. ⓒ프로축구연맹

그 심정 뭔지 잘 안다. 누군가를 뛰어넘고 싶은데 한계를 느끼면 분한 마음에 모든 걸 포기하고 싶어지는 게 뭔지 알 것 같다.

그런데 감독님께 혼났다. “너 고등학교 때까지만 축구하고 그만둘 거야? 길게 봐”라면서 질책해 주셨다. 그날 감독님께서 잡지 않으셨다면 내 인생은 어떻게 달라졌을지 모르는 거다. 팀 훈련 도중 자체 연습경기를 할 때도 같은 편이 된 애들한테 막 뭐라고 할 정도로 지기 싫어하는 성격인데 감독님께서 이런 승부욕을 잘 자극시켜주신 것 같다.

그런데 그 시절 지동원은 정말 엄청나지 않았나.

우리 앞 경기에 광양제철고가 시합을 하고 있으면 그냥 넋 놓고 지동원만 바라볼 정도였다. 나하고는 동갑인데 확실히 어린 시절부터 기량이 대단했던 선수였다.

동갑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 지동원은 어린 시절 대표팀에 뽑혀서 그런지, 외모 때문에 그런지 만25세라는 걸 믿을 수 없다.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같이 있으면 항상 형 같다. 외모도 그렇지만 행동도 늘 어른스럽다. 동원이 고향이 추자도인데 우리 아버지도 추자도 출신이다. 알고 봤더니 동원이 아버지하고 우리 아버지가 먼 친척이시더라.

고등학교 졸업 후 당신은 숭실대에 갔다. 특별히 숭실대를 택한 이유가 있었나.

중학교 3학년 때 숭실대와 동래고의 연습경기를 보러 갔는데 그때 숭실대 윤성효 감독님이 처음으로 말을 걸어주셨다. “마, 잘하고 있으래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동래고에 진학한 뒤에도 숭실대와 연습경기를 많이 했었다. 그때 윤성효 감독님이 좋게 봐 주신 것 같다. 그 당시 숭실대는 선수라면 누구나 가고 싶어하는 훌륭한 대학팀이었고 훈련이 힘들기로도 유명했지만 다 버텨낼 자신이 있었다. 학교도 마음에 들었고 감독님도 좋았다. 그래서 2010년 숭실대를 택했는데 그때 멤버도 훌륭했다. 박주호, 고무열, 박기동, 김원일 등이 같이 뛰었다.

당신과 윤성효 감독은 엄청난 운명인 것 같다. 대학 무대에서 함께 하더니 2013년에는 부산에서 또 함께하게 됐다.

나한테는 은인 같은 분이다. 내 축구 인생에서는 절대 빼놓을 수 없는 영향을 많이 끼치신 분이다.

무슨 영향을 그렇게 받았다는 건가.

2013년 7월, 그러니까 이제 막 프로 물을 먹은 지 몇 달 되지도 않았는데 아침 식사 후에 부산 백기홍 코치님이 나를 부르는 거다. “혹시 군대 갈 생각 있느냐”고 물으셨다. 그래서 “지금은 전혀 생각 없다”고 말씀드렸다. 다른 선수들이 대부분 그런 것처럼 프로 생활도 경험하고 최대한 천천히 갈 생각이었다. 그랬더니 “점심 먹을 때까지 한 번 생각해 보라”고 하시더라. 아니 무슨 군대를 두 시간 만에 결정하나. 어머니께 전화를 드렸는데 어머니도 “1년차인데 너무 빠르지 않느냐”고 하셨다. 그래서 점심 먹고 백기홍 코치님께 “지금은 절대 안 갑니다”라고 말씀드렸는데 그 말을 한 뒤로 감독실로 불려갔다.

거기에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알고 봤더니 윤성효 감독님께서 코치님께 시키신 거였다. 감독님이 나를 군대에 보내려고 생각하신 거다. 감독실에 불려가서 들은 첫 이야기가 그거였다. “마, 가라 빨리.” 거의 강제징집 수준이었다. 감독님이 너무 어려워 그 자리에서는 도저히 거절할 수가 없었다. 나는 당장 군대에 갈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군대에 가야할 운명이었다. “네가 상무 지원 서류를 넣어도 갈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데 일단 서류 넣고 불러주면 바로 가라. 마.” 이 이야기를 듣고는 바로 “알겠다”고 했다. 나중에 프로 연차가 쌓일수록 연봉이 높아질 수 있는데 그때 가서 군대에 가면 내 손해라는 거였다. 나이 먹고 가면 고생도 많이 하니까 아무 것도 모를 때 빨리 갔다 오라는 거였다. 이제 막 프로 물 먹고 조금 자유로워졌는데 다시 구속된 세계로 가라고 하니 너무 싫었다. 그렇게 처음 군대 이야기가 나온지 두 시간 만에 내 의견과는 상관 없이 입대를 결정했다. 억지로 군대에 갔다.

지금 생각해 보면 그때 일찍 군대에 간 걸 후회하나.

무슨 소린가. 절대 후회하지 않는다. 내 인생에서 가장 잘한 일이 일찍 군대를 다녀온 것이었다. 훈련소에 갔다가 나와서 바로 느꼈다. 군대 동기들이 다 나이 많은 형들이었는데 그때 고생하는 것보다는 어릴 때 고생하는 게 훨씬 나았다. 윤성효 감독님이 거의 강제징집 수준으로 군대에 보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너무나도 감사한 일이다. 신의 한 수였다.

맞다. 군대는 일찍 다녀오는 게 최고다.

지금도 우리 팀에 있는 선수들 중에 군대에 가야 해 걱정하는 선수들한테 늘 “군대가 뭐냐. 나는 이제 그런 거 모르겠다”고 한다. 울산에 같이 있다가 상무에 간 (김)태환이 형은 이제 일병이다. 가끔 연락하면 “일병이 뭐야? 그 작대기 네 개가 일병이었나?”라고 놀린다. 윤성효 감독님께는 평생 감사하게 생각할 것이다.

이정협은 부산아이파크 유소년 출신으로 부산에서 프로 데뷔에까지 성공했다. ⓒ프로축구연맹

당신은 군대에 간 뒤 생애 처음 대표팀에 뽑히기도 했다. 정말 군 입대가 신의 한 수였다.

상무에서 처음 국가대표가 된 뒤 윤성효 감독님께 감사 전화를 드렸다. 그랬더니 윤성효 감독 특유의 시크한 말투로 “마, 내 말이 맞제? 니 내 말 안 들었으면 지금쯤 아무 것도 안 됐다” 하시더라. 얼마 전에는 처음으로 윤성효 감독님께서 먼저 연락을 주셨다. 원래 제자들한테 절대 먼저 연락하는 스타일이 아닌데 감독님 번호가 뜬 걸 보고는 잘못 거신 줄 알았다.

전화를 해서 무슨 말을 하던가. 혹시 꾸지뽕 농사를 홍보하기 위한 전화는 아니었나.

그건 아니었고 “요새 잘하고 있느냐”고 물으셨다. 별 말 아니지만 원래 되게 어렵고 상남자 같은 감독님 스타일을 잘 알기 때문에 감동받고 감사한 마음이었다.

정말 잘못 건 걸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을 거라고도 생각해 봤다. 내가 전화를 받으니 감독님께서 살짝 당황하신 것 같기도 하다. 물론 그런 건 아니라고 믿고 싶다.

상주상무 시절 이야기를 해보자. 당신이 조금씩 이름을 알리던 시기였다.

부산에서 1년차 때는 27경기에 나섰지만 대부분이 후반 막판 5분 정도의 기회였다. 그런데 상주에 가 보니 멤버가 진짜 좋았다. (이)근호 형, (이)상호 형, (하)태균이 형등 쟁쟁한 공격수가 정말 많았다. 당장 경기에 나서기 보다는 이 형들한테 배워야겠다고 생각했는데 박항서 감독님이 조금씩 기회를 주셨다. 워낙 잘 하는 형들 사이에서 그 형들의 여유나 몸 관리 등도 배울 수 있었다. 그때 근호 형이 병장이었는데 월드컵에서 골도 넣고 그러지 않았나. 당시 우리 상주가 통영 전지훈련을 가 식당에서 밥을 먹으며 경기를 봤는데 근호 형이 골을 넣는 모습을 보고는 내가 알던 그 선배가 맞나 싶을 정도로 신기했다. 나는 언제 저런 무대에 서서 세리머니를 해보나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당신도 상주 시절 생애 최초로 대표팀에 뽑혔다.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나.

2014년 FA컵 4강전 서울과의 경기에서 슈틸리케 감독님이 (박)주영이 형과 (차)두리 형을 보러 오셨었다. 그때 내가 교체로 나왔는데 나를 처음 보셨다더라. 슈틸리케 감독이 내 이야기를 하고 갔다는 말을 나중에 들었는데 나는 아무 생각이 없었다. 사실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다고 생각해 슈틸리케 감독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했다. 그런데 리그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상주 관계자가 “오늘 신태용 코치님이 널 보러 오셨다”고 하더라. 그냥 마지막 경기니까 잘하라는 뜻으로 장난 치는 건 줄 알았다. 그런데 그 경기에서 운 좋게 두 골을 넣었고 대표팀 전지훈련 명단에 이름을 올리게 됐다. 나로서는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생각도 안 해봤던 국가대표 선수가 된 것이다.

그래도 탄탄한 기업 구단 유소년 출신에 우선지명도 당했고 좋은 대학을 거쳐 부산에서 장기 계약까지 한 나름대로의 엘리트 선수 아닌가. 나는 당신이 ‘무명의 신데렐라’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가 조금 관심이 덜 했을 뿐 당신만큼 엘리트 코스를 밟은 선수도 몇 없다고 생각한다.

나도 뭐 지금껏 열심히 해왔다고 자부한다. 당신이 말한 것처럼 좋은 구단에서 어린 시절부터 뛸 수 있었던 건 내가 지금까지 노력했던 결과물이라고 생각하고 싶다. 남들은 다들 무명의 내가 운이 좋아서 대표팀에 갔다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스스로는 많이 힘들기도 했고 노력도 많이 했다.

슈틸리케 감독이 당신의 어떤 모습을 좋게 봤다고 생각하나.

최전방에서 활발하게 움직이는 모습을 좋게 봐 주신 것 같다. 대표팀에 가면 수비 부담이 덜하고 옆에 있는 훌륭한 능력을 가진 형들이 많이 도와줘 열심히 뛰며 내 역할만 하면 찬스는 언제든지 온다. 그렇게 내 역할을 다했는데 그 점을 슈틸리케 감독이 좋게 평가한 것 같다.

이정협은 부산아이파크 유소년 출신으로 부산에서 프로 데뷔에까지 성공했다. ⓒ프로축구연맹

개명한 뒤 잘 풀릴 케이스로도 유명하다. 군대에 가 이름을 바꾸고 아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다.

군대에 갈 때 다시 시작해 보자는 마음으로 부모님께서 권유해 개명을 하게 됐다. 원래 이름은 이정기였는데 작명소에서 받아온 이름은 이정협과 이성내였다. 둘 다 별로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원래 이름이 ‘정기’였으니 한 글자만 바꾸고 싶어서 ‘정협’으로 했다. ‘성내’가 될 뻔했는데 지금 나를 처음 알게 된 분들은 이정기보다 이정협이라는 이름이 훨씬 더 잘 어울린다고 해주신다.

내가 생각해도 성내 보다는 정협이가 낫다.

24년 동안 정기로 살았는데 갑자기 정협이가 되니까 어색하긴 하더라. 누가 나를 처음 부를 때도 나인 줄 몰랐다. 사실은 군대 가기 전에 개명을 했는데 훈련소 때도 이정기로 등록이 돼 있어 상무 초기에도 이정기로 알려져 있었다. 그래서 상무 측에도 이정기가 아니라 이정협으로 정정 신청을 하기도 했다. 이제는 오히려 정기라고 부르는 게 더 어색하다.

개명하는 데 얼마 드나. 나도 일만 잘 풀린다면 어떤 이름이라도 좋다. ‘정은’이만 빼면 말이다.

30만 원이면 바꿀 수 있다. 그런데 처음에는 이름을 바꾸고 발목도 다치고 더 안 풀렸다. 그래서 괜히 이름을 바꿨나 했는데 다시 원래 이름으로 무르는 건 없더라. 법원에 가서 법적으로 이름을 바꾼 뒤 은행이니 보험회사니 다 돌아다니면서 이름을 싹 고쳤는데 이 복잡한 걸 다시 무르는 건 못 할 짓이다. 당신도 잘 생각해 보라.

알겠다. 그냥 ‘현회’로 살겠다. 당신은 2015년 시즌 막판 경남과의 경기에서 큰 부상을 당했다. 안면 복합골절이라는 부상이었다.

아직도 기억난다. 그때 후반전 시작 5분 만에 다쳤다. 공이 길게 날아와 나가면서 헤딩으로 옆에 있는 (임)상협이 형한테 돌려 놓으려고 했는데 갑자기 뭐가 확 튀어 나와 부딪혔다. 처음에는 그냥 아픈 정도였는데 쓰러져서 얼굴을 만져보니 오른쪽 광대가 푹 파여서 굴곡이 없더라. 뭔가 크게 다쳤구나 싶었고 형들도 깜짝 놀랐다. 뼈가 다 산산조각이 나 이걸 패널 같은 걸 대고 조각조각 다 맞췄다.

말년에는 떨어지는 낙엽도 조심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 낙엽에 내가 맞은 거다.

지금은 괜찮나. 수술 이후 더 잘 생겨진 것 같기도 하다.

지금은 뼈도 붙고 괜찮다. 그런데 당시에는 많이 힘들었다. 그전까지 계속 대표팀에도 뽑히고 몸도 좋았는데 한 번에 큰 부상을 당하면서 몸상태와 컨디션도 한꺼번에 떨어졌다. 당시 부상을 입혔던 선수를 원망하기보다는 최대한 빨리 재활하고 복귀해서 그라운드에 돌아가고 싶다는 생각밖에 없었다.

당신은 그 큰 부상을 당하고 전역을 앞둔 상황에서 세계군인체육대회에 마스크를 쓰고 나갔다. 말년 병장 때 유격 훈련을 나가지 않겠다고 버티던 나는 고개가 숙여지는 대목이다.

내 기수에서 나만 나갔다. 뭐 사실 상무 측의 압박이 전혀 없었던 건 아니다. 국가대표까지 하는 선수가 마지막까지 큰 대회에서 해주길 바라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도 마지막까지 하고 나오면 마음이 편할 것 같았다. 세계군인체육대회가 상무에 입단한다고 해 아무나 나갈 수 있는 대회도 아니다. 월드컵처럼 4년에 한 번 열리는 대회였고 이번에는 우리나라에서 열리는 대회였다. 의미가 있다고 생각해 마스크를 쓰고 나갔다.

이정협은 부산아이파크 유소년 출신으로 부산에서 프로 데뷔에까지 성공했다. ⓒ프로축구연맹

하지만 부산으로 돌아온 뒤에는 팀 상황이 좋지 않았다. K리그 챌린지 상주에서 뛰다가 제대했더니 상주는 K리그 클래식으로 가고 당신은 다시 K리그 챌린지로 내려온 부산에 복귀해야 했다.

내가 부산에 복귀했을 당시에는 이미 승강 플레이오프로 내려가는 게 확정된 상태였고 내가 뭐라도 해 강등을 막아야 한다는 부담도 있었다. 그런데 경기 도중 발목 부상을 심하게 당해 아예 승강 플레이오프도 뛰지 못하고 부산이 강등되는 걸 지켜볼 수밖에 없어 굉장히 미안했다. 부산이라는 팀이 K리그 챌린지로 간다는 건 상상도 못했던 일이어서 많은 분들이 충격을 받으셨을 것이다. 나 역시 내가 뛰면서 그런 일을 막지 못했다면 후회가 없을 텐데 뛰지도 못하고 강등을 지켜봐야 해 팬들께 많이 죄송했다.

울산으로 임대를 간 뒤에는 부진이 꽤 깊기도 했다.

(김)신욱이 형하고 투톱을 해보면 재미있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갑자기 신욱이 형이 전북으로 이적했다. 내가 신욱이 형만큼 뭔가 울산에서 보여주고 싶었다. 스스로 뭘 해야한다는 게 컸다. 심리적으로도 완벽하지 못했고 몸상태도 별로였다. 그리고 윤정환 감독님께서는 공격수도 일단 수비를 강조하신다. 최전방에서부터 수비적인 걸 많이 요구하셨는데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수비 부담도 생겨났다. 그런데 이것저것 다 핑계고 찬스에서도 못 넣은 내가 부족한 게 가장 컸다. 신욱이 형이 워낙 울산에서 이뤄 놓은 게 많아 비교하며 욕하는 분들도 계셨지만 그분들께도 죄송한 마음이었다. 내가 보여준 게 없지 않은가.

그리고 당신은 다시 부산으로 복귀했다. 어떤가.

집처럼 편하다. 집 나가면 고생이라는데 그 말이 딱 맞는 것 같다.

내 생각에도 당신에게 가장 어울리는 집은 부산인 것 같다. 부산에 조진호 감독이 새로 부임해 처음 만나게 됐다. 조진호 감독은 어떤가.

처음에는 되게 무서운 분인 줄 알았다. 그런데 굉장히 친한 동네 형처럼 대해 주신다. 처음에 바로 마음의 문을 열었다. 뭐든 다 ‘OK’ 해주시는 스타일이다. 윤성효 감독님은 말없이 선수들을 카리스마로 휘어잡는 분이신데 조진호 감독님은 선수들한테 먼저 스스럼없이 다가오는 스타일이다. 가끔 허당의 매력을 발휘하기도 한다. 지하철을 반대로 타고 와서 훈련장에 늦었다는 이상한 농담도 하신다.

이정협은 부산아이파크 유소년 출신으로 부산에서 프로 데뷔에까지 성공했다. ⓒ프로축구연맹

그게 농담이 아니라 진짜일 수도 있다. 올 시즌 목표는 무엇인가.

일단은 당연히 부산의 승격이 가장 먼저다. 그리고 개인적인 목표는 올 시즌 15골 이상을 넣는 거다. 지금까지 7골을 넣었는데 15골 이상을 넣으면서 팀 승격에 도움이 됐으면 좋겠다. 연속골 등 개인 기록도 좋지만 일단은 팀 승격이 가장 우선이다.

그렇다면 마지막 질문이다. 대표팀에서의 활약에 대한 각오도 부탁한다.

대표팀은 누구에게나 꿈만 같은 곳이다. 지난 번 대표팀에 뽑혔을 때는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고 질타도 많이 받았다. 아직 대표팀 소집 전까지 많은 시간이 남은 만큼 내가 선택을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일단 지금은 나를 일으켜 세워준 부산을 위해 헌신하고 싶다.

대화를 나눠본 이정협은 하루 아침에 떠오른 ‘신데렐라’가 아니었다. 지기 싫어하고 때론 무모할 정도로 도전했고 거기에 훌륭한 지도자를 만나 차근차근 지금의 자리까지 올라온 선수였다. 이제 만으로 25살에 불과한 이정협은 보여줄 게 아직도 더 많다. 심지어 군대에도 다녀왔으니 이제 거칠 게 없다. 대표팀 공격수는 누가 하건 늘 욕을 먹는 자리인데 이 무게를 온몸으로 받치고 있는 이 어린 선수에게 진심으로 응원의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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